사과를 시작하는감사한 표지입니다:)
Ep 14. Perhaps Love by 경수 + 종인
BGM) Perhaps Love: 조규찬
결정하기까지의 오랜 고민이 무색할만큼 준비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그저 여기저기 시키는대로 서류를 준비하고 아버지를 쫓아다니다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아버지는 그 동안 지쳐보이셨던 것이 아주 옛날 일이었던 것처럼 펄펄 날아다니며 준비를 서두르셨다.
옮기게 되는 미국 회사 근처 사옥에서 차로 조금만 가면 큰 강이 있다고 했다.
함께 주말에 낚시 다니기 좋겠다고 몇 번이고 자랑처럼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잔뜩 들떠보였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열렬한 팬인 아버지는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경수와 플라잉 피싱을 즐길 환상에 벌써부터 빠져계신 듯 했다.
이미 마음은 바다 건너 먼 그 곳에 떠나있는 듯, 한껏 들뜬 아버지의 모습에 경수도 마주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학교는 방학할 때까지만 다니기로 했다.
이 곳에서 방학식까지 함께하고, 그 다음날 출국을 한다.
졸업식에는 참석할 수 없겠지만 어쨌든 한국에서의 고등학교 생활은 잘 마무리하고 떠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내린 결정이었다.
담임 선생님은 아쉬워하시면서도 그 동안 안쓰럽기만 하던 경수에게는 좋은 일이라며 축하해주셨다.
학교 친구들의 반응은 아쉬움 반, 부러움 반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수능을 앞두고 눈 밑에 축 늘어진 다크써클을 드리운 녀석들은 경수만 보면 '좋겠다.. 좋겠다..'는 소리를 버릇처럼 내뱉었다.
세훈도 그 중 하나이긴 했지만, 세훈은 아무래도 제 가장 친했던 친구가 먼 외국으로 떠난다는 말에 충격이 더 큰 것 같았다.
누구보다 경수네 집 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가장 먼저 축하해주었지만 그러면서도 마음은 복잡한 듯 보였다.
그래도 나름대로 티내지 않으려 노력하는지 변함없이 장난을 걸어오는 모습에 고맙기도 했다.
"너 그 형한테도 얘기했냐?"
"어?"
"그 형- 왜, 병원에 막 달려왔던 형 있잖아."
...아니.
아직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
차라리 그 날 착잡한 마음에 무작정 종인을 찾아 카페에 가지 않았다면 조금 더 편하게 떠날 준비를 할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제 마음 하나 다독였으면 됐을 것을.
진하게 남은 미련은 자꾸만 고요했던 경수의 세상에 돌을 던졌다.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는 것을 혼자 알아챈다는 것은 찰나의 황홀함만 남기고 아릿한 씁쓸함으로 이어졌다.
무엇을 선택해도 누군가는 아프게 만들, 잔인한 상황 앞에서 결국 경수는 아버지를 선택했다.
늘 자신에게 미안해하기만 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한 손을 놓아버렸다는 죄책감에 종인을 다시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보통은 경수가 먼저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조근조근 전하기 마련인데 그런 일이 줄어들자 몇 번 먼저 문자를 보내오던 종인에게서도 점차 연락이 뜸해졌다.
지난 번에 얘기를 들어보니 개강하고 나서 많이 바쁘기도 한 모양이었다.
이런 게 어른의 선택인걸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역시 영화 속에서 보던 것처럼 낭만적인 일도, 멋진 일도 아닌 것 같았다.
심지어 아직 덜 자란 경수에게 답이 없는 선택지를 고르는 것은 늦은 밤 잠을 자다말고 갑자기 눈물이 터질 정도로 힘겹고 어려웠다.
결국 그 날 조용히 빠져나온 카페에 제 마음도 두고 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제 자신이 원망스러울만큼 가슴이 아팠다.
아침에 일어나면 밤새 흘린 눈물 때문에 눈이 퉁퉁 부어있는 날이 늘어났다.
혹여나 아버지가 눈치채실까 찬 물로 한참을 씻어도 가라앉지 않아서-
그런 날은 아버지의 의아한 시선을 애써 피하고 도망치듯 집을 나왔다.
"그 형한테 얘기 안했어?"
"...응."
"야, 이 자식 진짜 매정하네-
그 때보니까 전화 받자마자 땀으로 아주 샤워를 하고 달려오셨던데.
너도 그 형 엄청 따르는 것 같더니만 너무하는 거 아니냐?
날 내쫓고까지 그 형이랑 있었으면서!"
결국 결론은 그 날 널 먼저 집에 보내서 좀 서운했다 이거냐.
'나 삐졌었어' 기운을 풀풀 풍기며 입이 댓발 나온 세훈의 모습에 결국 어이가 없어 웃어버렸다.
이렇게 웃는 것도 오랜만인 듯, 올라가는 입꼬리가 어색했다.
...그래. 얘기해야지.
뭐라고 말을 꺼내야할지 몰라서 미루고 미루던 일이었지만, 누구보다 먼저 그에게 얘기해야 한다는 것은 경수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둘 사이의 감정을 넘어서 그 동안 종인에게서 받은 수많은 격려와 위로에 대한 작은 예의였다.
뭐라고 처음 이야기를 꺼내야할지, 엄두조차 나지 않는 마음에 도망치고 있었지만 결국 그 끝이 막다른 곳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오늘은 꼭.
...그에게 작별을 고한다.
마지막 인사가 끝나는 순간, 그와 자신의 마음에 남은 애틋한 감정도 부디 거기서 멈추기를-
경수는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다.
.
.
.
딸랑-
변함없는 분위기의 카페 안에는 늦은 시간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손님들이 몇몇 있었다.
늘상 그러하듯 별 감흥 없는 얼굴로 주문받은 스무디를 만들던 종인의 손이 서서히 굳어졌다.
나즈막한 종소리와 함께 조심스럽게 가게로 들어선 작은 실루엣에, 매일 기다리고 그려왔던 만남인데도 그냥 정신이 멍했다.
마주친 시선을 타고 둘 사이에 소리없는 인사가 오고갔다.
안녕하세요.
...안녕.
...오랜만이야. 보고 싶었어. 왜 이제 왔어. 기다렸는데.
종인의 마음에서 흘러나온 말 중 하나라도 제대로 경수에게 전해지긴 했을까.
하지만 지금은 자신을 마주보고 말갛게 웃는 경수의 모습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계세요-"
"...네, 안녕히가세요."
테이크아웃 컵을 받아든 손님이 카페를 나서고 난 후에도 두 사람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변함없는 경수의 얼굴에는 늘 그렇듯 잔잔한 미소가 서려있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종인은 종인대로 그 동안 수도 없이 떠올라 자신을 괴롭히던 경수가 막상 눈앞에 나타나자
무슨 말부터 꺼내야할지,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어색하고 당황스러운 마음에 괜히 이것저것 정리하는 척 분주하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 시간에도 사람이 꽤 많네요."
잠시 그렇게 멈춰서있던 경수가 자연스럽게 카운터 반대편에 다가와 앉으며 말을 걸었다.
차마 그 모습을 쳐다보지도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병신머저리 같을지 뻔히 알고 있었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오랜만이네."
말을 꺼내놓고나니 어쩐지 울컥하는 심정이었다.
진짜, 오랜만이었다.
차마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스스로가 어이없고 한심해서 화가 날 정도로.
그래도 지금 녀석과 눈이 마주치면 어떤 표정으로 바라보게 될지 알 것만 같아서, 종인은 점점 빨라지는 호흡을 다스리는 데에만 집중해야 했다.
"그러니까요. ...오랜만인데, 형 많이 바빠요?"
그제서야 자세히 바라본 녀석은 여전히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카페 조명에 반사되어 반지르르 빛나는 까만 눈동자는 여전히 티 없이 맑았고 베시시 웃는 발간 입매는 변함없이 수줍었다.
...그래.
이런 널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일 그 날 널 처음 만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언제 어디에서 만났다고 한들 사랑했을 것이다.
사랑...
그랬다.
실체를 알기 전에는 그 느낌만으로도 나를 설레게 만들었고,
깨달은 후에는 차마 너를 더럽히는 것 같아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둔 채 꺼내지조차 못했던 그것은 사랑이었다.
너와 한 장소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날 감동시켰고, 헤어진 후에는 그 다음 날의 만남을 기대하게 만들었던 그것은 모두 사랑이었다.
제 마음에서 흘러나온 그 단어 하나가 간지럽게 온 몸을 타고 번져나갔다.
그 쑥스럽고도 달달한 말 하나만 쥐고 있어도 찬 바람 속을 버틸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소중한 감정.
이 감정을 어떻게든 버리려고 애를 썼으니 그 동안 그렇게 지치고 힘들었던 것이다.
실상은 벌써 이만큼이나 깊게 스며든 것을...
"...뭐, 마실래?"
"...형."
평생 너에게 죄를 짓는 심정으로 지내야 한다 해도 나는 결코 이 감정을 버리지 못할 것 같다.
널 떠올리면 마음이 아파서 어떻게든 잊으려고, 지우려고 했지만 할 수 없었어.
그 동안 고민에 시달렸던 수많은 낮과 밤은 카페에 들어선 경수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모두 무의미해졌다.
이렇게나 쉽게 깨닫게 되는 것을, 너무 오랜 시간 돌아왔다.
그동안의 나날들은 어쩌면 작은 부분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사실을 깨닫고 나니 가슴 깊이 숨겨두었던 커다란 감정들이 거대한 파도처럼 몰려왔다.
그 벅찬 기분은 녀석과 시선을 마주한 이 순간만으로도 종인을 뿌듯하게 만들었다.
이런 행복이라면 주고받지 못하더라도, 일방적인 감정일지라도- 한동안은 또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너에게 이렇게 넘치도록 주고 또 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일지 모른다.
이런 행복이라면, 아파도 좋다.
"밤이니까 주스 줄까?"
"형."
모든 것을 인정하고나니 마음이 편안해져서 저도 모르게 들떠있었을까.
서둘러 과일을 꺼내려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돌아본 경수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종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의 그 어른스러운 웃음을 띄운 채.
녀석은 어딘가 마음 아픈 일이 있을 때만 이렇게 웃는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종인은 알고 있다.
"응?"
"...같이 있어줘서, 고마웠어요."
"...어?"
"그 날... 저 버려두고 그냥 돌아서지 않아줘서 고마워요."
"..."
"...다행이였어요. 형 만날 수 있어서."
"...너..."
너 갑자기 왜 이래.
이제서야 차분하게 가라앉았던 가슴에 또다시 잔잔한 파동이 일었다.
불안한 마음은 늘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 법이다.
애써 마주한 시선이 그렇게 흔들리고 있었다.
"...저, 유학갈 것 같아요.
아빠가 해외로 회사를 옮기기로 해서... 같이 가기로 했어요.
아마, 이번 학기 끝나면..."
마지막 말을 흐린 채 파르르 떨리는 경수의 눈가에 어느새 물기가 서렸다.
힘겹게 웃는 입가에 맺힌 씁쓸한 미소가 가슴 깊은 곳을 찔러왔다.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만 경수의 동그란 머리꼭지가 안쓰러워 보듬어주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종인이 받은 충격이 너무 컸다.
...어딘가 신이 계신다면-
정말, 너무하시는 거 아닌가요?
유치하게 정말 이러실 거예요?
충격-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감정이었다.
그 동안의 오랜 고민 끝에 돌아온 이 상황이 허무하기도 하고 실망스럽기도 했다.
화가 나고, 울고 싶고, 답답하고, 서럽고, 원망스럽고...
이 모든 감정들이 휘몰아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만히 마주앉아 바닥만 바라보는 경수의 어깨가 기운없이 축 늘어져있었다.
저 작은 어깨에 짐을 더 얹어주고 싶지... 않다.
할 수만 있다면, 너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들만 모아주고 싶다.
가장 좋은 것들만, 가장 사랑스러운 것들만 보고 느끼게 해주고 싶다.
...하지만...
"...너네 집. 어디야?"
"...네?"
느닷없는 종인의 말에 고개를 든 경수의 눈은 역시나 그렁그렁한 눈물에 잠겨있었다.
그 모습이 종인의 결심을 더 굳게 만들었다.
앞치마를 벗어던지고 성큼성큼 카운터 밖으로 걸어나온 종인이 손목을 잡아끌자 당황한 경수가 앉아있던 의자에서 그대로 끌려내려왔다.
아직 손님들이 남아있는 카페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종인은 유리문을 밀치고 카페를 나섰다.
손이 잡힌 채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경수의 주춤거리는 발걸음도 무시했다.
주인 없는 카페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소리가 그렇게 밤이 내린 골목길의 정적 속으로 사라져갔다.
이 순간에도 제 손에 들어온 작은 체온에 가슴 설레는 자신이 못 견디게 가엾어서-
종인은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
.
.
예전에 비해 요즘 아버지의 새로운 모습을 많이 보았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모습은 또 처음이라고 경수는 생각했다.물론 이런 상황이었다면 누구라도 평상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지는 못했을거다.
병원에서 본 적이 있는 종인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던 아버지의 얼굴은 종인이 현관문 앞에 다짜고짜 무릎을 꿇는 순간 황당함과 놀라움에 가득찼고,
종인이 '경수 데려가지 말아주십시오!'하고 앞뒤 없는 말을 내뱉었을 때부터는 천천히 굳어졌다.
"경수, 데려가시면 안됩니다."
"...자네..."
"아버님 마음, 모르지 않습니다.
제가 아버님께 이런 말씀 드리는 것도 경우가 아니란 것 압니다.
아는데요, 아는데..."
...제 마음은요.
그 동안 아무리 노력해도 돌려지지 않은 제 마음은요.
많이도 아니고 딱 하루만-
딱 하루만 녀석에게 미안한 마음 없이 사랑하고 싶었던, 그것마저 욕심인 줄 알았던 제 마음도 가엾잖아요.
격해진 감정을 추스르며 입 안에서 삼킨 말들은 들리지 않았어도 전해진 것 같았다.
용기를 내어 올려다본 경수 아버지의 얼굴이 하얀 대리석처럼 굳어있었다.
옆에 선 경수의 얼굴은 차마 쳐다보지도 못했다.
마음 한 구석에서 낯익은 자신의 목소리가 '김종인 너 진짜 미쳤구나.' 라고 종인을 비난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리고 그만큼 간절했다.
스스로 해볼 수 있는 일은 다 해본 것 같았다.
당장 내일 죽을 사람처럼 몸을 혹사시켜도 보았고, 며칠은 수업도 제껴놓고 미친듯이 술만 퍼마셨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정신을 놓고 쓰러지면 녀석의 꿈을 꾸고 쓰린 속을 잡고 눈을 뜨면 녀석의 얼굴을 떠올렸다.
도저히 안되겠다는 생각에 중간에 나오긴 했지만 선배에게 부탁해 소개팅도 나갔었다.
그 일로 선배에게 다음 날 정강이를 까였고 아직도 볼 때마다 욕을 먹는다.
차라리 누군가 자신에게 그렇게 욕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남자애를, 그것도 자기보다 더 어린 애를 데리고 무슨 짓이냐고, 미친 게 아니냐고, 욕하고 두드려패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그러다 머리라도 한 대 세게 얻어맞으면, 그럼 좀 정신을 차릴까.
잊으려고 몸부림을 치고 또 쳐도 선명하게 다가오는 제 마음은 종인을 지칠대로 지치게 만들었다.
도망칠 수도 없게 생각나는 녀석의 모습은 눈으로 보지 못하게 되자 더욱 숨막히게 자신을 조여왔다.
하루 24시간 중 어느 한 순간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고 오늘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경수와 마주했을 때 깨달았다.
애시당초 빗 속에서 울고 있던 녀석의 손을 끌어당겼던 그 순간부터 자신은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도망칠 수 없는 운명에서 빠져나오려 발버둥쳤으니 끝없이 지쳤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제 마음 속에 자리한 녀석의 존재를 온전히 인정하는 순간 모든 갈등이 끝나는 듯 했다.
이젠, 그저 이런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숨을 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는, 그런 존재로 녀석을 평생 남겨두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그것마저 빼앗아가시면, 너무 잔인하지 않으세요.
절실한 마음 하나만으로 벌인 일이었지만 사실 너무 무모했다는 생각은 나중에서야 들었다.
굳은 표정으로 한참 동안 종인을 내려다보는 경수 아버지와 시선이 다시 한 번 마주치자, 그제서야 꾹 다물었던 입이 덜덜 떨려왔다.
처음으로 부려본 욕심 하나가 어쩌면 경수가 힘겹게 되찾은 가족을 잃게 하는 것이 아닐까.
그 얼어붙은 눈빛에 뒤늦게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 무슨 짓을 한거지.
처음 녀석에 대한 감정을 어렴풋이나마 눈치챘을 때는, 누군가 알게되면 자신을 미친 놈으로 볼 것이라는 두려움에 시달렸다.
그리고 깨달은 후에는 순진한 녀석에게 이런 마음을 품는다는 것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진 욕심은 결국 그 동안의 모든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는 절망감으로 이어졌다.
결국 너에 대한 내 감정은 시작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었을까.
옳지 못한 마음은 내 가슴이 문드러지는 한이 있어도 묻었어야 하는 것일까.
시계바늘이 천천히 돌아가는 소리만 울리는 고요한 집 안.
그 정적이 싸늘하게 온 몸을 감싸와 등골이 오싹해졌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굳어진 경수 아버지의 시선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서 누구보다 경수를 아끼고 사랑할 단 한 사람.
그 앞에서 벌거벗은 채 드러난 제 마음은 사실 숨기고 싶지 않았다.
비교할 수 없다고 할지언정, 스스로의 감정을 확신하기에 부끄럽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에서 당당할 수 없다는 것은 잔인한 현실이었다.
"...일단 늦었으니 집으로 돌아가라."
"저..."
"돌아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단호하게 등을 돌린 뒷모습은 차가운 기운만 남긴 채 방 안으로 사라졌다.
이제는, 둘만 남았다.
미련하게 꿇고 있던 무릎이 못 견딜만큼 싸늘하게 식어갔다.
옆에 말없이 선 경수 쪽은 차마 바라보지도 못한 종인이 그렇게 잠시 굳어있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레 피가 돈 다리가 저려왔지만, 그래도 절뚝이며 몸을 돌렸다.
경수 앞에 오롯이 드러난 제 마음이 뒤늦게야 부끄러웠고, 부끄러워야만 하는 현실이 서글펐다.
뒤늦게 생긴 후회는 작은 점처럼 시작되어서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뗄 때마다 커져갔다.
혹시나 아직 어리고 둔한 녀석이 왜 자신이 이렇게까지 막무가내로 행동했는지 눈치채지 못하는 건 아닐까.
그럼 다행인데.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알아주기를 바란다.
이런 모순적인 감정 따위...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건만 제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미안해."
계단을 내려와 현관을 나설 때까지, 말없이 제 뒤를 따르는 발걸음을 느끼고도 차마 돌아보지 못했다.
녀석이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지, 보게 되면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일을 저지른건지 진짜로 알게 될 것 같아서 겁이 났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제 다신 만날 수 없을지 모르는데 그나마도 보지 못하는 제 자신이 원망스럽고 서러웠다.
이러다 진짜 폼안나게 저 녀석 앞에서 울기라도 하는 건 아니겠지.
종인이 이를 악물며 자꾸만 시큰거리는 눈을 깜빡이던 그 때였다.
풋-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던 종인이 순간 희미하게 들린 웃음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분명 경수가 서 있는 자신의 뒤에서 들려온 작은 웃음.
미약한 바람처럼 스쳐지나갔지만 분명 놓치지 않았다.
조심스레 뒤를 돌아봤을 때, 경수는 마치 거짓말처럼 그렇게 웃고 있었다.
그 편안한 미소에 종인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형은 왜 맨날 나한테 미안해요?"
...그건...
뭐라고 할 말을 찾지 못한 종인이 몇 번이고 입을 뻥긋거리다 결국 고개를 젓고야 말았다.
내가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어느 쪽으로 발을 내딛든 너와 나에게 좋은 방향은 찾을 수가 없다.
그저...
그저 너한테는...
"...미안."
"나한테 못된 말 해서 미안하고-
나 쫓아내서 미안하고-
우리 아빠 마음 아프게 해서 미안하고-"
"...미안."
"...나 좋아해서 미안하고."
"..."
...그래.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지.
무슨 영화 주인공이라도 된 것마냥 비장하게 무릎까지 꿇었으니.
결국 시선을 떨구고 말았지만 차마 경수의 마지막 말에는 미안하단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진심으로 미안한 감정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억울한 마음도 있었다.
내가 널 좋아하는 일이 왜 이렇게 미안한 일이어야 하는걸까.
제대로 표현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널 보내야하는 이 순간에도 내가 너에게 미안해야 하는걸까.
결국, 내 손으로 모두 망쳐버렸지만 그 때까지 나도 쉽진 않았는데...
"...그럼."
"..."
어느새 가을의 기운이 물씬 묻어나는 밤공기를 타고 산들산들 바람이 불어왔다.
그렇게 서러운 종인의 마음을 쓰다듬고 지나가는 바람 너머, 작은 발소리가 가까워 올 때에는 차마 볼 수 없어 눈을 감았다.
인적 드문 아파트 단지 곳곳에 켜진 희미한 가로등 불빛을 가르고 풀벌레 소리만 잔잔하게 울리고 있었다.
그 고요한 순간에 오늘 하루 있었던 모든 일들도 사실은 꿈이었던 것처럼 아득해졌다.
"...나도 형한테 미안해야 하나...?"
온 세상이 멈춘 듯한 그 순간, 뺨에 와닿은 보드라운 촉감은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바람보다도 가벼웠지만 불꽃보다도 따뜻하게 스친 체온은 미처 알아차리지도 못한 순간 종인의 뺨에 그렇게 흔적을 남기고 멀어졌다.
코 끝에 남은 풋풋하고 익숙한 향만이 방금 제 뺨을 재빨리 훔치고 사라진 것이 경수의 입술이었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놀란 마음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종인은 눈만 꿈뻑이고 서있었다.
그 모습이 우습다는 듯 또 해맑게 웃음을 터뜨린 경수가 종인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고마워요, 형."
"..."
지금 제 표정은 아마 세상에 다시 없을만큼 바보 같을 것이다.
숨가쁘게 뛰기 시작한 심장이 어느새 온 몸 전체에서 거대하게 울려퍼졌다.
경수가 말하는 고마움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타는 듯한 한쪽 뺨에 남은 느낌만은 제 마음과 어긋나지 않고 있었다.
멍하게 멈춰버린 종인 앞에서 그렇게 웃고 있던 경수가 '...연락할게요.' 하고 쑥쓰러운 듯 돌아섰을 때-
그제서야 종인을 둘러싼 모든 것이 현실로 돌아왔다.
"경수야."
"...?"
밤의 정적을 가른 제 이름에 돌아선 녀석과 마주한 입술은-
꿈에서 느꼈던 것보다, 가끔 조심스럽게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따스했다.
가만히 맞댄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만큼 애틋하고 사랑스러워서 가슴이 뻐근하게 아려왔다.
놀란 듯 멈춰있던 경수가 천천히 팔을 들어 목을 감아왔을 때는 이 순간 정말 죽어도 좋다는 생각에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살짝 들리는 경수의 발뒤꿈치에 받쳐주듯 허리를 감싸안고, 점점 더 깊게 파고들어간 끝에 자리한 것은-
그렇게나 종인이 버리고 숨기려 애썼던 그 마음과 맞닿아있었다.
.
.
.
사랑하는 이여, 우리 둘 사이에는 이름 모를 신(神)이 존재합니다.
- 칼릴 지브란
+주저리주저리
이번 편은 나중에 '미안'이라는 단어가 몇 번쯤 나왔는지 한 번 세어봐야 하겠어요;;ㅋㅋㅋ
불쌍한 우리 김종인 군... 대체 이 한편에서만 몇 번을 미안해한건가요?^^;;
이건 며느리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비..밀이라고 하기엔 아마 다들 아시겠지만, 사과에서는 뭐가 다 이렇게 가만히 조심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ㅋㅋㅋㅋ
아니 이 이상의 단어를 도저히 못 찾겠는 걸 어째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이번 편에도 어김없이 내린 감정가뭄을 이기고자 이것저것 집에 쌓아둔 책들을 뒤지다가 혜민스님이 쓰신 책 '사랑의 장' 부분을 보니
첫 구절이 저 칼릴 지브란의 말이더군요. 진짜 얄궂은 신이죠- 그렇게 두 사람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게 또 사랑인가봅니다.
지난 편, 갑작스런 유학 드립으로 멘붕에 빠지셨던 여러분들께 조금은 위안이 되셨으려나요...?
이렇게 사과는 또 막장드라마를 향해 달려갑니다..;;;ㅎㅎㅎ
카디 둘을 딱 이어준 그 순간 바닥에 찰랑찰랑하게 차있던 감정샘이 똑 끊긴 기분입니다;;ㅋㅋㅋㅋㅋ
아아.. 두 녀석 이어주기 정말 힘드네요;;;ㅋㅋㅋㅋ 내가 진짜 너희 둘을 이어주느라 몇 번을 어울리지도 않게 빙의해댔더니 지친다, 지쳐...ㅠㅠㅠㅋㅋㅋㅋㅋ
...이제 남은 찬백이들은 어쩌니. 둘이 이어졌으니 너희가 대신 좀 써주련...? ...으헤헤;;;;
스엠콘 고화질 사진들이 하나하나 올라오더니 아마 대부분 피곤하셔서 주무시러 떠나신 것 같네요-
집에서 종일 14화를 주저리주저리 쓰고 지우고 하던 저는 그 사진들만으로도 감동이네요ㅠㅠ
특히 우리 됴꼬미 군.. 너를 어떻게 하면 좋니ㅠㅠㅠㅠㅠ 내가 진짜 니가 부르는 missing you 듣다가 이번 편 브금 바꿀 뻔했다ㅠㅠㅠ
사실 스엠콘 얘기를 들으며 잠시 음모론에 휩싸였던(*-ㅅ-*;;) 의심 많은 어른이었지만,
중요한 건 열두 녀석이 늘 즐겁고 행복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응원하는 마음이겠죠- 팬이란 그런 거잖아요. 헤헷..
(근데, 사장님 진짜 오늘의 스케일은 저를 순간 안드로메다로 보내셨어요, 소근소근;;;)
...그러면서 너희를 보고 이런 글이나 쓰고 있는 나를 한 번만 용서해다오...흑흑흑흑
......새벽을 지나 아침 해가 밝고 있다보니 멘붕이 오고 있나보네요. 서둘러 마무리해야겠습니다.
해가 뜨니 이제서야 코피가 터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으하하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마지막으로, 암호닉 남겨주신 감사한 분들 명단 다시 한 번 정리들어갑니다!
감동그자체,도경수 님, 공작새 님, 광수 님,
김첨지 님, 낑깡 님, 니포 님,
달자 님, 더덕 님, 도넛츠 님,
도됴 님, 도로시 님, 도블리 님,
동동 님, 됴덕후 님, 됴르르 님,
똑순이 님, 리카 님, 링세 님,
메이링 님, 멜론 님, 모모니 님,
방구 님, 버거킹 님, 봉봉 님,
비너스 님, 빙수 님, 사과꽃 님,
새우 님, 서랍 님, 수니 님,
쉬림프 님, 스티치 님, 시안 님,
썬크림 님, 아이됴 님, 아이엠벱 님,
아켁 님, 앵그리버드 님, 에이크 님,
엘딘 님, 오탁구 님, 이불익이니 님,
지나가던 행인 님, 찬사 님 캐슈 님,
코아 님, 코코볼 님, 키다리아저씨 님,
타루 님, 티슈 님, 피카츄 님,
헤헷 님, 호독자 님, 힝힝 님
저 빼놓은 분 없죠?ㅠㅠㅠㅠㅠㅠ 혹시나 있으시다면 제가 지금 밤을 새고 멘붕이 와서 그런거예요ㅠㅠㅠ 꼭 지적해주셔야해요!!ㅠㅠㅠ
정성스런 댓글 항상 남겨주시는 천사같은 분들, 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ㅠㅠ
소소한 이야기나마 하나하나 찾아와서 읽어주시는 분들께도 늘, 항상 감사드려요!
별 거 아닌 글쟁이 한 명일 뿐이지만 여러분이 얼마나 그 한 사람을 행복의 도가니로 몰아넣으시는지-
그 힘이 얼마나 큰지, 아마 실감하지 못하실겁니다:)
아아아.. 할 일이 많은데 진짜 점점 졸리네요;;ㅋㅋㅋㅋ 쫌만 자고 일어나서 해야지.. 흑흐긓ㄱ..ㅠㅠㅠ
보통 확인 버튼 누르기 전에는 엄청엄청 떨리는데 오늘은 잠이 와서 무슨 깡다구인지 덤덤합니다;;;ㅋㅋㅋ
...이래놓고 일어나서 또 몰래몰래 폭풍수정할지도...;;;;; 늘 그렇듯 혹시나 발견하신다면 모른 척 해주세요;;;ㅠㅠㅠㅎㅎㅎ
다음 편에서는, 버려져있는 우리 찬백이들을 데리고 돌아와야겠죠..?:) 그 때까지 제 감성가뭄이 멈추고 폭풍홍수가 일어나길 바라며..ㅠㅠ
다음 편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