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를 시작하는 감사한 표지입니다:)
아이됴님께서 주신 감사한 이름표입니다:) 사랑해요ㅠㅠㅠ
Ep 17. 널 그리다 by 찬열 + 백현
BGM) 널 그리다(The Things I Really...): 이루마
아침부터 영 일진이 사나운 날이었다.
잠을 잘못잔 듯 어깨가 뻐근해서 끙끙대며 방을 나오다가 맨발로 문지방을 걷어찼다.
어릴 때 어머니는 피 안나면 아픈 게 아니라고 하셨는데, 그건 아마 우는 찬열을 달래기 귀찮아서 그러신 것일지도 모른다.
피는 안났지만 정말 식은땀이 날만큼 너무 아파서 소리도 지를 수가 없었다.
방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어깨를 파들파들 떨고 있는 찬열을 보고도 집안 식구들은 관심 한 번 보여주지 않았다.
'...뭐하냐?' 떨떠름하게 한 마디 던지고 지나가는 누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찬열은 글썽이던 눈물을 처량하게 홀로 삼켰다.
정신을 차리고 집을 나설 때는 핸드폰을 놓고 나온 것이 떠올라 부랴부랴 돌아갔고
지하철역까지 다 와서야 교통카드와 모든 돈이 다 들어있는 지갑을 놓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학교에서는 깜빡 졸다가 교수님께 걸려 혼이 났고(교수님도 오늘 일진이 사나우신 듯,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아보이셨다.),
수업이 끝나고 나오는 길에 1학년 여자후배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커피를 사달라고 졸라 지갑을 털렸다.
요즘 어딘가 나사가 빠진 김종인 자식은 그러거나 말거나 넋이 나간 것처럼 혼자 터덜터덜 사라졌다.
몇몇 용감한 아이들이 종인을 붙잡았지만 표정없는 녀석의 포스에 눌려 몽땅 찬열에게 몰려드는 바람에 피해가 더 컸다.
찬열이 오면 늘 간식을 준비하는 백현의 수고를 덜어주겠다, 작정하고 아껴두었던 돈이라서 더 아까웠다.
원래 안되는 날은 뭘 해도 안되는 법이다.
그러니 오늘은 백현의 집에 가서 같이 과제를 좀 하고, 얼마 남지 않은 돈이나마 털어서 먹을 것도 사가고-
그렇게 좀 늦은 시간까지 있다가 집에 가서 바로 자버려야지, 생각했다.
백현의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는 애써 기분을 업시키려고 괜히 더 힘차게 걸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사람을 둘러싼 공기라던가 작은 소리의 변화 하나에도 민감해서 찬열이 어딘가 기분이 나빠보이면 금세 눈치를 채고 기분을 풀어주려 애썼다.
그런 모습이 귀엽고 좋으면서도, 어쩐지 스스로가 철딱서니 없는 어린애가 된 것 같아 후회하곤 했다.
오늘은 절대 감정에 휘둘리는 모습을 감추고 어른스러운 박찬열의 면모를 보여주리라.
그렇게 도착한 백현의 집이었는데, 들어서자마자 골목을 지나오며 열심히 가다듬었던 마음이 와르르 무너졌다.
벨을 누르고도 평소보다 한참을 지나 열린 대문 너머로 현관문이 열려있었다.
거실 너머에서 들려오는 시끌시끌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오랜만에 백현의 집을 찾은 준면과 평소보다 한 템포 더 신이 난 백현이라는 것을 깨닫자
안 그러려고 해도 기분이 급격한 속도로 가라앉았다.
뭐... 백현이 가지고 있는 감정은 둘째치고 어쨌든 둘은 친구니까.
둘이 정말 친한 친구고, 또 김준면 씨는 좋은 사람이니까.
쪼잔하고 속좁은 놈처럼 굴지 않으려고 했다.
게다가 찬열은 백현의 곁에 지금처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더 이상 욕심내지 않겠다, 이미 다짐하지 않았었나.
그보다 나이가 어리다는 것은 늘 이겨낼 수 없는 약점을 하나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좀 더 어른스러운 척, 담담한 척 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결국 자신은 이런 작은 일 하나만으로도 흔들리고 약해졌다.
다 자란 어른처럼, 그에게는 넓은 가슴만 보여주고 편안한 기억만 만들어주고 싶지만 현실의 박찬열은 아직 너무 초라했다.
"어, 찬열아 왔어?"
'...저기요-'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그래도 소리소문 없이 들어서기도 뭐해서 어딘가 어색하게 인기척을 내고 들어섰다.
평소같으면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마냥 보이지도 않는 꼬리를 흔들며 현관에서부터 반겼을 사람이, 오늘은 한 번 나와보지도 않는다.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를 쫓아 부엌으로 들어서니 백현이 준면과 나란히 서서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코 끝을 가득 메우는 고소한 향이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녁 시간이라 배가 고팠던 것도 잊혀졌다.
"찬열아, 준면이가 잡채 만들어준대!"
바쁘게 손을 움직이던 준면이 눈인사를 하며 '찬열씨 같이 먹어요, 넉넉하게 만들었어요' 하고 씩 웃었다.
가벼운 지갑을 털어 사온 햄버거 봉지가 어쩐지 초라해지는 것 같아 슬쩍 등 뒤로 감춘 찬열은 말없이 그냥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래도 우리 학교 앞에서는 나름 유명한 건데.
지난번에 맛있다고 해서 사왔는데...
옆에서 재잘재잘 떠드는 백현 때문에 준면이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얼른 거실 구석으로 봉지를 치웠다.
나중에 몰래 가져가야지.
소파 옆 그늘진 구석에 덩그라니 놓인 작은 봉지가 꼭 제 모습 같아 좀 서러워졌다.
셋이 함께 밥을 먹으며 백현을 당연한 듯 챙기는 준면의 모습에 기분은 점점 천방지축으로 말을 듣지 않기 시작했고,
배가 불러 숨을 못 쉬겠다며 소파에 앉은 준면의 무릎에 발라당 드러눕는 백현의 모습에 최악을 향해 달렸다.
...내 껀데.
저 자리는, 내 껀 줄 알았는데.
거실 한켠에서 차갑게 식어가고 있을 종이봉지마냥 찬열의 마음도 그렇게 식어가는 것 같았다.
역시, 아직 어른은 되지 못할 것 같다.
설거지까지 마친 준면이 일이 있다며 돌아가고 난 후, 거실에 자리를 펴고 앉은 찬열은 부루퉁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나름 애를 썼다.
몇 번이고 배가 부르다며 바닥을 뒹굴던 백현은 볼 책을 가져온다며 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볼멘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쓴 노력이 먹혀들어간 것인지, 아니면 눈치를 채지 못한건지- 평소와 다름 없이 그저 마냥 해맑고 즐거워보였다.
백현이 다른 사람 기분에 민감하다느니 하는 건 다 취소다.
세상에 둔해도 저렇게 둔한 사람이 없다.
"찬열아-"
...저 한 마디였다.
찬열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든 것은.
...비참하리만치 빠져들게 만든 마법 같은 한 마디가 21년을 아무렇지 않게 들어온 제 이름일 줄 누가 알았을까.
누가 불러도 똑같던 자신의 이름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올 때만은 특별해진다.
책을 펴고 있어도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로다- 싶게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찬열이 다시 한 번 '찬열아-!' 하고 애타게 부르는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방 안에서 백현이 찬열을 부르고 있었다.
....그래, 삐졌다.
이러니 저러니 복잡하게 말해도 결국 한 마디로 말해서 찬열은 삐져있었다.
그리고 삐졌든, 서운하든, 기분이 나쁘든- 그가 부르면 자신은 쫓아갈 수 밖에 없다.
"왜 그래요?"
문을 열고 들어서니- 백현은 하얀 벽에 딱 달라붙어서는 눈을 동글동글 뜨고 있었다.
누가 보면 어디 천장이라도 무너졌나 싶게 바싹 긴장한 모습에 찬열이 어리둥절해 방 안을 살폈다.
...아무 것도 없는데?
"...모기... 모기가 있어!!"
귓가에서 자꾸 왱왱거리는 소리가 난다고 울상을 지으며 속삭이는 모습에- 결국 또 진다.
먼저 좋아한 쪽이 진다고 했던가.
진짜, 그거 하나만으로 애 많이 쓴다.
상대방은 모르게, 제 마음과 맺은 약속이지만 솔직히 이건 너무 불평등한 계약 아닌가.
...그래도 좋은 걸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매의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다보니 흰 벽지라 천장에 붙어있던 모기 한 마리가 금새 눈에 들어왔다.
큰 키를 이용해 펄쩍 뛰었다가 한 번 놓치고, 백현 쪽으로 휙 날아가는 바람에 '으아악!'하고 주저앉는 그의 모습에 피식 한 번 웃고,
비웃는 거냐고 입을 꼭 다문 채 제법 엄한 표정을 짓는 것에 또 한 번 가슴이 뛰고...
그렇게 몇 번 사투를 벌여 모기를 잡았다.
그새 물었는지 손바닥에 피가 번졌다.
'어디 물렸어요?'하고 물으니 '몰라-'하면서 팔을 뽀득뽀득 긁는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다가 그 안에서도 한 마리를 발견해 또 하나 잡았다.
아까 그렇게 현관문을 열어두더라니- 그새 몇 마리가 집 안으로 들어온 듯 싶었다.
찬열이 온 집안을 뒤지고 다니며 눈에 보이는 모기를 잡는 사이 백현은 창고 구석에서 뒹굴던 모기향을 꺼내왔다.
"그 동안은 모기 있으면 어떻게 했어요?"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혈전을 벌이다가 찬열도 지쳐버렸다.
그래도 이제는 어지간한 놈들은 다 잡은 것 같았다.
어느새 송글송글 땀까지 맺힌 얼굴을 찬물로 씻고 나오다가 문뜩 궁금해졌다.
그리고,
"모기향 피우고, 준면이가 잡아줬어."
백현의 대답에 모기와 싸우느라 잠깐 잊혀있었던 기분 나쁜 감정이 다시 스물스물 올라왔다.
결국 자괴감이고 열등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감정이 제 맘대로 됐으면 고민할 일도 없었다.
"...그 사람 얘기 좀 그만할 수 없어요?"
말을 꺼내놓고도 아차 싶었지만, 오늘은 지난 번 어느 날처럼 감추지 못하고 불쑥 흘려보낸 제 감정을 가려줄 거센 소나기도 없었다.
그래도 속에서 투닥투닥 싸우고 있던 마음을 이렇게 꺼내어놓으니 조금은 후련하기도... 한가?
숨이 조금은 트이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어?"
"..."
불퉁하게 내뱉은 말에 조금 놀란 듯하던 백현이 금새 또 장난기 어린 미소를 방글방글 지어온다.
그는 늘 이렇다.
조금이라도 찬열이 기분이 나쁠라치면 이렇게 먼저 헤실헤실 웃으며 풀어주려 애쓴다.
"에이- 왜 그래~ 너 삐졌어? 우리 애기 삐졌어요~?"
...이렇게, 어린애 달래듯.
서너살난 애기한테 울음 그치라는 듯.
...나.
당신한테 어른으로 보이려고, 당신이랑 나란히 서고 싶어서,
얼마나 노력하는 줄 알아요?
탁-
"...?"
"...나 애 아니예요."
밀어붙여진 벽에 선 채 말똥말똥 뜬 눈이 놀란 듯 했지만, 그보다는 쌕쌕 숨을 내쉬는 발간 입술이 왜 더 먼저 시야에 들어왔을까.
그 와중에 떠오른 말이 이따위 투정같은 것밖에 없다는 사실은 좌절이었지만, 그 말에 이내 또 베시시 올라가는 그 발그레한 입매에 결국 폭발해버렸다.
나는, 당신한테 세상에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은 다 보여주고 싶어요.
당신이 앞을 볼 수 없다면, 대신 내가 다 설명해주고 만지게 해주고 느끼게 해주고 싶다구요.
재밌는 걸 봐도, 맛있는 걸 먹어도, 즐거운 일이 있어도 다 당신이랑 나누고 싶어요.
비가 온 다음 날 아침 햇볕이 너무 맑으면 당신 생각이 나요.
넓은 초원 너머로 불어오는 기분 좋은 바람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요.
막 따온 싱싱한 사과를 보면 제일 잘 익고 맛있는 걸로 당신한테 주고 싶어요.
웃게 해주고 싶어요.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요.
내가 아직 어려서 그런 것들 다 해주지 못하는 게 억울하지만-
그래도 그런 게 좋아하는 거라면-
그런 게.. 사랑이라면-
나, 당신을 사랑한다구요.
"찬ㅇ..."
감히 생각조차 해보지 못한, 꿈조차 꾼 적 없는 첫 입맞춤에 떠오른 생각이 '망했다...' 따위라면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서운한 마음에 눈물이라도 날 것 같을 때 돌아섰어야 하는데-
결국 붙잡지 못하고 튀어나간 감정이 맞닿은 입술을 타고 흘렀다.
그 와중에도 그 보드라운 감촉에 가슴이 설레고, 그 설렘이 비참해서 슬펐다.
너무 놀라 얼어붙은 듯 굳은 백현의 얼굴에 찬열의 심장도 함께 식어갔다.
더 이상, 그는 삐지고 투정부리는 듯한 찬열을 달래기 위해 베시시 웃어주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소원 성취인가.
씁쓸하고 미안하고 서럽고... 복잡한 심정 어느 곳에도 좋은 감정은 없다.
쓰기만 한 마음을 애써 삼키며 찬열은 그대로 백현의 집을 빠져나왔다.
그 와중에 거실 구석에 버려져있던 햄버거 봉지는 챙겨들고 나왔다.
남겨진 초라한 흔적은 들키고 싶지 않았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데 걷고 있어도 걷는 것 같지 않았다.
아침부터 되는 일이 없더라니.
이런 날은 그냥 바로 집에 가서 이불 뒤집어쓰고 잠이나 잤어야 하는데.
기운없이 어둠이 내리는 골목을 걷는 찬열의 발걸음이 길게 이어졌다.
이제, 끝이다.
어차피 이렇게 망칠 거라면 그에게 뻥 차이는 한이 있어도 어른스럽게 고백이라도 해볼 것을 그랬다.
난 어른이라고, 애 취급 하지 말라고 해놓고 결국은 애들도 안하는 사고를 쳐서 그에게 상처를 준 것이다.
어른인 척, 멋있는 척 하지 말고 아예 제 감정에 솔직하게 막 들이댔다면 마음도 이렇게 엇나가지 않았을텐데.
멍하니 길을 걸으며 식어버린 햄버거를 꺼내 한 입 한 입 베어물었다.
체한 것처럼 가슴이 꽉 막혀와도 차라리 이게 마음이 편했다.
뭐라도 스스로를 괴롭게 하지 않으면 참을 수 없는 사람처럼, 자꾸만 꾸역꾸역-
그렇게 둘이 먹으려던 걸 억지로 다 먹어버리니 이내 구토감까지 몰려왔다.
그래도 꾹 참고 걸었다.
그래야 울지 않을 것 같았다.
여기서 꼴사납게 울어버리기까지 하면, 오늘은 정말 달력에서 뜯어버리고 싶을만큼 최악의 최악이 될 것이다.
아니...
이미, 최악인 날이었다.
.
.
.
"오늘은 맑은가보다-..."
현관 앞에 쪼그리고 앉은 백현이 내리쬐는 햇볕을 기분 좋게 느끼며 손바닥을 하늘을 향해 쫙 펼쳤다.
손바닥 구석구석, 따사롭게 번지는 햇볕의 느낌이 좋다.
이렇게 맑은 날은 공기에서도 바삭바삭 잘 마른 볕냄새가 난다.
한껏 숨을 들이키자 마음 깊은 곳까지 따스해지는 것 같았다.
"...오늘도 안오나..."
찬열에게서도 이런 느낌이 난다.
잘 마른 면에 얼굴을 파묻으면 풋풋하게 스며든 태양 같은 느낌이다.
아주 오래 전에 보았던, 기억 속에 자리잡은 넓은 초원을 지나 불어오는 바람과 같다.
막 열매가 맺히기 시작한 과수원 가득 은은하게 풍기던 사과향 같이 싱그럽고 달달하다.
한번쯤은, 손 끝이 아니라 제 눈으로 녀석을 보고 싶을만큼- 그렇게 좋은 느낌만 가득한 사람.
잊고 살겠다 다짐했던 빛에 대한 아쉬움을 다시금 느끼게 하는 녀석.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기분 좋은 아쉬움을 알게 하는- 이런 감정은 뭐라고 정의해야 할까.
얼마 전, 잔뜩 상처받은 목소리로 화를 내다 불연듯 입을 맞춘 채 그렇게 나가버리고-
그 후로 찬열은 백현의 집에 찾아오지 않았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몇 번 모른 척 문자도 보내봤는데 답장도 오지 않았다.
'그 사람 얘기 좀 그만할 수 없어요?'
'나 애 아니예요.'
뭐가 그렇게 화가 났는지, 뭐가 그렇게 억울했는지 말도 하지 않고 가버렸지만 억눌린 목소리로 내뱉은 두 마디만으로도 대충
녀석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것 같아 백현은 처음에 조금 웃었다.
그 날은 오랜만에 준면이 온다고 하길래, 예전에 흘리듯 찬열이 좋아한다고 했던 음식을 해달라 졸랐었다.
잡채는 아무래도 손이 많이 가고 혼자 사는 남자가 하기엔 어려워서-
그 동안의 과일이며 과자 같은 간식들 대신 이번에는 녀석이 좋아한다는 걸 먹이고 싶어 준면에게 도움을 청한 참이었다.
준면의 요리솜씨야 이미 알아주니 녀석이 맛있게 먹으며 좋아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는데 그 마음이 또 그렇게 받아들여졌나.
하여튼, 몸집만 다 큰 어른이지 결국 어린 그 모습이 귀여워 죽겠다.
그러면서도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이 담긴 채 꾹 눌러오던 그 따스한 입술의 감촉이 떠오르면 어느새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잠깐 동안, 동의도 없이 제맘대로 부딪혀온 입술이었지만-
소리 없이 전해진 녀석의 감정은 마냥 풋풋하고 벅찰만큼 애틋해서 미워할 수가 없었다.
...아니다.
그 어리숙하면서도 상냥한 녀석에게 전해받은 설레는 두근거림이 이렇게나 사랑스러운데, 어떻게 미워할 수 있을까.
어느 순간부터 제 집을 심심찮게 찾아오는 녀석을 자신이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서야 알았다.
처음엔 분명 한여름밤을 지새우게 만들었던 첫사랑의 상실감만으로 가득했던 심장이 새롭게 뛰기 시작했다.
준면이 늘 그 자리에 있었기에 익숙한 공기 같았다면, 찬열은 백현에게 매일의 기다림을 알게 한 바람 같았다.
누군가에 대한 좋은 감정이 명확하게 나뉘어지고 부등호로 구별된다면 자로 잰 듯 깔끔하게는 살 수 있었겠지만
이런 깨달음의 설렘 따위는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화가 났을까봐 오지 않을까? 아니면, 내가 놀리는 것 같아서 화났나...?
제 감정조차 빗 속에 몰래 숨기는 조심스러운 녀석이니, 어쩌면 제가 더 놀라 도망쳐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애 아니라더니- 누가 봐도 그냥 애잖아.
그러면서도 그런 서툰 모습이 마냥 좋은 것을 보면 백현 자신도 아직 이런 풋풋한 감정에 가슴 떨릴 수 있는 소년이 된 기분이다.
...그래도, 문자를 씹냐... 바쁘다고 뻥이라도 치지.
그... 질투-겠지만, 그런 거 아닌데 해명할 기회도 안 주고. 쪼잔한 놈.
...너 쫌 싫어지려고 한다, 나.
이렇게 생각하니 또 좀 서운하다.
날 대체 어떻게 보고.
망할 자식.
쪼그리고 앉은 채 백현은 무릎 위에 올려둔 책과 노트를 마치 찬열인 양 쿡쿡 쥐어박았다.
찬열이 그렇게 가버리고 난 후 거실 테이블에는 녀석이 두고 간 도톰한 책 한 권과 노트 한 권만 남았다.
조심스럽게 펼쳐본 책에서는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났고, 노트 앞 몇 장에는 꾹꾹 눌러쓴 글씨의 흔적이 새겨져있었다.
가만히 손 끝으로 따라가면서 '이 녀석, 꽤나 악필이네'하고 쿡쿡 웃었다.
공부하는 학생이라는 녀석이, 책이랑 노트를 이렇게 두고 가서는 찾으러 오지도 않는다.
매일 녀석을 기다리며 이렇게 보물처럼 껴안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괘씸하다.
삐걱-
잠그지 않은 대문이 슬쩍 열리는 소리에 백현이 벌떡 몸을 세웠다.
'찬열이야?!' 하고 반가운 마음에 불렀는데, '찬열이 기다려?'하고 웃는 목소리의 주인은 준면이었다.
순간 기운이 빠진 백현이 한숨을 폭 쉬며 다시 무릎을 끌어당겨 앉았다.
그 와중에 바닥에 흩어진 찬열의 책과 노트는 더듬어 잘 모아두었다.
...이런 걸 보고 열녀났다고 하나.
...이건 좀 경우가 아닌가?
"아이고, 다리가 쑤신다- 오늘 날씨 좋네-"
왜 이러고 있냐는 물음 하나 없이 백현의 옆에 털썩 앉은 준면이 영감 같은 소리를 해서 피식 웃음이 났다.
요즘은 안 바쁘냐니까, 결혼은 두 번 할 일은 못된다- 뭐 이렇게 복잡한지, 도망나왔다- 하며 죽는 소리를 흘렸다.
그게 또 못내 우습다.
"...준면아."
"응?"
"...찬열이가 안 와."
앞뒤 사정도 얘기하지 않고 불쑥 꺼낸 말에도 준면은 당황한 것 같지도, 놀란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그 녀석 너한테 무슨 짓 했냐?'하고 무덤덤하게 물어와서 되려 백현이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우물쭈물하는 백현의 모습에 말이 없던 준면이 이내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 부드러운 손길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백현아."
"응."
"난 너한테 늘 네 편인 사람이 되고 싶다."
"...나도 그래."
준면은, 지금도 좋다.
사람에 대한 기분 좋은 감정이 꼭 두근거리고 설레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서, 준면이 좋다.
어쩌면 빛을 완전히 잃었던 그 날 이 녀석을 만났던 것은 정해진 운명이었을지 모른다.
감히 비교할 수는 없지만 하나를 잃은 순간 나타난 준면은 오랜 기간 백현의 전부가 되어주었다.
사랑이 아니라고 해서, 그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잘은 모르겠지만, 늘 행복하고 즐겁기만 한 건 아니더라.
가끔은 서운하기도 하고, 밉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고...
그런 게 좋아하는 거더라구."
"...넌 지은씨가 불편하고 미울 때도 있어?"
"어. 가끔은."
"...그래도 좋아?"
"...응."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수줍고도 확신에 찬 감정이 곧게 전해져서 백현도 웃고 말았다.
"그래서 너한테만은 그냥 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넌 항상 그런 사람이야, 임마"
평소 투닥거리고 장난만 치던 둘 사이에 오고가는 대화치고는 조금은 낯간지럽기도 하지만,
오랜 친구로 지나온 시간 동안 쌓인 말없는 배려를 확인하자 가슴이 벅찼다.
이렇게 나란히 앉아 둘이 담담하게 서로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때가 올 것이라고, 왜 상상하지 못했을까.
어쩌면 너는 나에게 전부였기에- 우리 사이에는 영원히 변화가 오지도, 시간이 흐르지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니까- 마음껏 사랑해. 난 항상 네 편만 들어줄테니까."
"...누굴?"
"...지금 널 서운하게도 만들고, 미안하게도 만드는 사람."
모른 척 되묻는 말에 백현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며 준면은 그렇게 대답했다.
그 말에 떠오르는 것은 단 한 사람 밖에 없다.
"...종인이가 그 자식이랑 같은 학교랬지?"
"응."
"종인이네 학교가 어디야?"
"...넌 여태 걔 학교가 어딘지도 몰랐냐."
...그러고보니, 몰랐다.
그 동안 그렇게나 재잘재잘 했던 이야기들 사이사이 녀석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지,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
함께 나눈 것들에 대해서는 조금씩 알아왔지만 아직도 이렇게나 모르는 게 많다.
서로에 대해 모르는 사실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은, 함께 나눠야 할 시간도 많다는 것을 의미하겠지.
평소같으면 똥강아지 취급한다고 버럭했을 준면의 손길이 오늘은 움츠러들었던 백현의 마음을 다정하게 위로해주는 것 같아, 그 온기에 용기가 났다.
'...찾아가야겠어, 내가.' 하고 중얼거리는 백현의 말에 푸하하 웃음을 터뜨린 준면이 같이 가줄까? 하고 물었지만 다부지게 고개를 저었다.
준면이 자신의 사랑을 찾아 한걸음씩 나아가는 것처럼, 자신도 스스로 나아갈 것이다.
언젠가, 나는 우리가 서로를 불편해하게 될까 미리 걱정하고 널 밀어내려고 했다.
너는 나를 부담스러워하고, 나는 그 변화에 아파할까 겁을 냈다.
그래도 니가 늘 함께 있어줬으니까.
늘 지켜봐줬으니까.
나에게 말해줬으니까.
좋아한다고.
그러니까- 이번엔 내가 먼저 갈게.
.
.
.
사랑은 같이 있어주는 것.
언제나 따뜻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그를 믿어주는 것.
사랑하는 그 이유 말고 다른 이유가 없는 것.
아무리 주어도 아깝지 않은 것.
그를 지켜봐주는 것.
-혜민스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中
+주저리주저리
저... 얼마만에 온건가요?;;; 6일인가요?;;; 16화를 언제 올렸더라...;;
어째 점점 사과드릴 일만 많아지는 것 같아 이거 참.. 어쩌면 좋나요ㅠㅠㅠ
막상 개강을 하고 하루하루가 바빠지니 확실히 방학 때와는 다르군요...ㅠㅠㅠ
당장 바빠 죽겠는데 감성 따위 가뭄의 논바닥처럼 쩍쩍..ㅠㅠ
그래도 방학 때는 글이 안써지면 엠피쓰리 하나 들고 이어폰 꽂고 산책도 나가고 운동도 가고 영화도 보고 했건만
요즘은 급작스럽게 제 삶의 질은 어디로 어디로... 후후훗...
너무 늦게 찾아뵜습니다- 심지어 저 16화 답글도 하나도 못 달아드렸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야 이런 괘씸한 인간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앞으로도 주말이 아니면 찾아뵙기 힘들 것 같으니, 방학 때 마구 서둘러서 결말을 봤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ㅠㅠ
8월 중에 사과를 완결낸다! 가 목표였건만 이렇게 게으르게 늦춰지네요..ㅠㅠ
그래도 또 맨날 지렁이 기어가듯 진도가 나가던 녀석들이 너무 서둘러 급발진을 하면 사..사고가 나지 않을까요ㅠㅠ
양해해주신다면 조금 느리고 답답하더라도 사과는 천천히라도 지금의 페이스 그대로 이어질 듯 합니다..ㅠㅠ
이번 편은 특히나 와우-ㅁ-... 나, 찬백이들 버려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글이 손에 안 잡혀서 애를 먹었네요;;
뭐.. 하루이틀이겠습니까마는.. 이젠 뭐 맨날 쓰는 핑계라 말하기도 입 아프고 듣기도 귀아프시죠?ㅠㅠㅠ
그 동안도 자주자주 찾아뵌 것은 아니었지만, 너무 오랜만에 오니 뭔가... 그 동안 쌓인 회포를 막 풀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제 사랑을 받아주신다면... 흑흑흑 다들 뵙고 싶었어요-ㅠㅠㅠㅠㅠㅠㅠ 그리웠어요ㅠㅠㅠㅠㅠㅠㅠ
어렵게 쓴 글은 쓰면서도 '아.. 늘어진다 늘어져...' 이런 느낌이 듭니다;;;ㅎㅎ 그래도 두 녀석의 감정을 제 나름대로 최대한 따라가보고 싶어서
주저리주저리 쓰다보니 어떻게 또 한 편이 만들어지네요- 아아... 어렵습니다, 어려워..ㅠㅠ
결국, 곁에 있기만 해달라던 찬열이의 어른흉내 대작전은 지난 한 편으로 끝나나요;;ㅎㅎㅎ
예전에, 제가 아는 연세 지긋하신 어느 분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이제 환갑을 넘으신 분이시지만 늘 낭만적이시고 로맨틱하게 사시는 분이시거든요.
당신께서 연애하시던 시절, '내가 정말 지금 죽어도 좋다.' 라는 생각이 들만큼 행복한, 그런 순간이 있으셨다구요.
지금 그 분과 결혼하셔서 30년 넘게 살아오시면서 힘든 일도 있으시고 투닥투닥하실 때도 있으시지만
그래도 두 분이 늘 소년소녀처럼 참 예쁘게 사십니다.
사과 속 네 녀석은, 그리고 엑소 열 두 녀석 모두- 만일 사랑을 하게 된다면 그런 사랑을 하게 되면 좋겠네요.
...독방의 징어님들이 요런 연애사에 굉장히 예민한 거 잘 알면서 제가 무심한 발언을 했나요?;;ㅎㅎㅎ
요즘은 인티도 거의 못 들어와봐서 시시각각 변하는 독방의 트렌드도 잘 모르겠습...흑...ㅠㅠㅠ
여러모로 마음 복잡한 일도 많고, 고민도 많고, 뉴스에 흉흉한 얘기도 많고, 할 일도 많고-
뭐가 이렇게 많은지 가끔 감당이 안되기도 하는 시기입니다...
그래도 우리, 하루하루 힘내요:)
남들이 들으면 웃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가끔 엑소 열 두 녀석이 나오는 무대영상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이 녀석들-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는데 나도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해야지. 질 수 없다- ...뭐 이런 느낌이랄까요.
혼자 쓸데없이 막 의욕을 불태우고 또 사그라들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냥 매일 그렇게 지내는 것 같습니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 보면, 막 기운도 나고 갑자기 정신도 번쩍 들고 하는데- 전 왜 팬심이 그런 쪽으로 흘러가나요?-ㅁ-;;;
일찍 오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씀은 백 번을 드려도 항상 부족하겠죠..ㅠㅠ
그래도 가능한 다음편은 서둘러, 속도도 질도 떨어지더라도 변함없는(발전없는?;;;;) 모습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지난 화 댓글은... 부끄러우니까 제일 많이들 안 계실 때, 몰래 쓸거예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흑흐긓긓ㄱ.... 오늘따라 유독 지루했던 것 같은 17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되세요!!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