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 상승 한 번 해볼 테냐 /채셔
1. 나비가 꽃에 내려앉듯
"빗줄기가 거칠지 않아 다행이구나."
"예, 봄비인 듯 하옵니다."
태형은 옆에서 저를 보위하던 정국에게 말을 건넸다. 조회를 치르는 정전에서 동궁까지 차근차근 걸은 태형은, 하늘을 한 번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비를 바라보는 것이 좋아, 비가 오는 날에는 마루에 앉아 하루종일 비가 내리는 것을 보곤 했는데. 이제는 그럴 틈이 없었다. 태형은 아쉬운 얼굴을 하고, 동궁으로 들어섰다. 헌데 들어서자마자 태형이 목격한 것은 비에 젖은 꽃도 아니었고, 흠뿍 패인 흙도 아니었으며, 넘칠 것 같이 넘실대는 연못도 아니었다. 그 시선은 오로지 태형만의 시선이 아니었다. 모두가 바라보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나인 하나였다.
"이리 온! 어디 가는 게야, 응?"
무엇을 찾아 그리 헤매는 것인지, 아니, 헤맨다면 저리 해맑은 웃음을 띌 수 있는 것인지. 태형은 고개를 까딱 기울여 나인을 바라보았다. 망아지 마냥 뛰는 것이, 조숙한 여인네스럽지는 않았다. 조금 지켜보다 보니, 나인이 그토록 뛰어다니며 잡으려 애쓰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자그만 아기강아지 하나였다. 겨우 아기 강아지 하나. 어찌 궐에 들어온 것인지 어미를 잃은 강아지 하나를 겨우 찾은 나인은, 곧바로 강아지를 제 품 안에 꼭 끌어안았다. 춥지도 않니. 고뿔에 걸려 이 세상 떠나고 싶은 것이지. 어미의 말투로 중얼거리며 강아지를 꼭 품은 나인은 이제서야 왕세자 무리를 발견하였다.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은 나인은, 왕세자를 보지 못한 제 시야를 탓하며 고개를 바닥에 찧었다. 갑작스레 고개를 푹 숙인 나인에 강아지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네 이년, 어찌 이리 방자하게 동궁을 휘젓고 다녔단 말이냐."
"소, 송구하옵니다. 상궁 마마."
"그리고 그 똥강아지는 무엇이냐."
"주, 죽을 죄를 지었사옵니다."
태형은 호되게 혼을 내는 상궁을 제지하였다. 어찌 되었든 좋은 일 아니냐. 이런 날씨에 굳이 화를 보고 싶지 않구나. 태형은 차분하게 상궁을 달래었다. 어려서부터 제 유모 노릇을 해온 노상궁이니 명령하기보다는 달래는 투로 말하는 것이 태형에게 더욱 편했다. 아이같이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니는 꼴이 퍽 귀여운 데가 있었으므로 태형은 발칙하게도 강아지 하나에 눈이 팔려 저를 무시한 나인의 행태를 눈 감아줄 생각이었다. 강아지는……. 네가 잘 보살핀 뒤에 쓸만해지면 네 사가로 데려가도 좋다. 그리고 강아지를 키워도 된다는 큰 보상까지 내려주었다. 적적한 나인 처소에 강아지 한 마리로 큰 기쁨이 될 것이니.
"일어서서, 몸부터 단정히 하거라."
"………예?"
"이 년, 얼른 일어서지 못할까!"
"……예…!"
벌써 더러워진 제 의복을 내려다보며 나인을 눈을 꼭 감았다. 이후에 상궁 마마에게 호되게 혼날 것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반응일 터였다. 나인을 묵묵히 바라보던 태형은 어찌 된 것인지 그 얼굴과 행동이 낯익다 여겼다. 어디서 보았던 얼굴과 행동인고. 태형은 떠올리려 애썼으나, 고뿔에 들까 염려하는 노상궁의 호들갑에 나인을 채 더 쳐다보지 못하고 침전으로 들어서야 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정국에게 부탁했던 일에 대해 보고를 받아야 했기에, 정국을 안으로 들였고.
"김 대감의 시체는 찾았습니다. 헌데… 어찌 된 것인지 그 딸만 증발해버렸습니다."
"………."
"저하."
"…아, 그래. 다시 말해보거라."
저하답지 않으십니다. 정국의 말에 태형은 흐음, 하고 뒷목을 긁적였다. 어찌 그 나인의 얼굴이 익숙한 것인지 태형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찌 고작 나인 하나가 제 머릿속에 들어찰 수 있었던지, 그리고 신분 차이로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날 나인 하나와 제가 어떠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지. 괜히 복잡해지는 머리에 태형은 또 정국의 말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나인 생각을 하시는 겝니까."
"……무어?"
"어쩐지 나인에게 대해주시는 처사가 저하답지 않다 하였습니다."
태형은 당황한다면 그것대로 놀려먹을 정국이 벌써부터 괘씸해, 앞에 놓여진 차를 한 번 들이마셨다. 그런 것 아니니 걱정 말아라. 그저 봄비가 좋아 한 호의였으니. 태형은 단조롭게 대답하였다. 그리고 피곤하니 다음에 보고를 받겠다는 말도. 정국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왕 노릇을 하느라 고민이 많을 태형을 제일 잘 아는 이가 바로 정국이었으므로.
"그럼 다음에 보고하겠습니다. 그때는 부디 제 말에 집중하시지요."
"네 이놈, 또 장난질이렷다."
"나가보겠습니다."
씨익 웃어보이던 정국은 그대로 침전을 나섰다. 태형은 최근 급격하게 옥체가 미령해져 정무를 보지 못하는 제 아비 대신 매일 빠지지 않고 조회를 나가야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환복한 이후에, 태형은 모든 힘이 제 육체에서 빠지는 기분이라 쓰러지듯 침상에 누웠다. 어찌 되었든 제 아비 덕분에 물갈이되어 이번에 입궐한 신하들은, 태형의 생각에도 꽤 흡족한 신하들이었다. 태형 또한 충직하고 현명한 신하들에 맞추어 꽤 잘해내고 있었다. 이론과 정무는 아예 다른 것이며 백성은 다뤄본 자만이 다룰 수 있다 하였는데, 오늘 태형은 지금 당장 용상에 올라도 무색할 정치를 말하였다. 오죽 하면, 신하들이 입 모아 태형을 제 아비와 다를 것 하나 없는 왕 팔자라고 하였을까.
"저하, 침수 드시기 전에 함수 하셔야지요."
지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누운 태형을 말리는 이가 있었다. 무엇이냐. 갈라지기 시작한 목소리로 태형은 물었다. 인상을 찌푸린 태형이 두려웠는지, 나인은 침을 꼴깍 삼켰다. 아, 상궁마마께옵서 저하가 침수에 들기 전에는 꼭 함수를 하시고 세안을 하시어야 한다고……. 나인의 입 근처에서 중얼거리다 채 태형에게 닿지 않는 말에, 태형은 귀찮은듯 나인에게 이리 오라 손짓하였다. 나인은, '예에?'하고 당황한 티를 내다, 태형의 무기력하나 성급한 손짓에 떨리는 발걸음을 괜히 재촉하였다.
"무어라 했지?"
"사, 상궁마마께옵서 침수 드시기 전에 함수와 세안을……."
"그만."
하나도 들리지 않는구나. 태형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앉으라 명했다. 나인은 눈동자를 또르륵 굴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저하의 그림자일 뿐이라고 배웠거늘, 그 그림자가 너무도 손쉽게 들켜버렸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으리오. 나인은 잠시 태형의 눈치를 보다, 살짝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저하의 용안을 똑바로 쳐다보아서는 절대 안 된다고 하였으니. 태형은 눈을 감은 채로, '다시 말해보아라.'하고 낮게 말하였다. 꼴에 입궐해 눈칫밥을 먹은지 3년은 되었기에, 태형의 용안을 살짝 흘려 본 결과, 화나신 것은 아님을 확인하였다. 나인은 두려움에 떨고 있던 속을 쓸어내렸다.
"상궁마마께옵서 침수에 들기 전에는 꼭 함수와 세안을 하시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쫑알쫑알대는 것이, 병아리 같구나."
어찌 되었든 천자가 될 이의 바로 앞에 있다는 상황 자체가 나인에게는 천지개벽보다 놀라운 사실이었으므로 성급하게 말을 건네고 말았다. 나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말해보라 하신다면, 이번에는 똑바로 말할 자신이 있는데……. 허나 태형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로 혀를 끌끌 찼다. 까딱하면 다시 다른 나인들의 허드렛일이나 하게 될까, 나인은 쉬지 않고 머리를 굴려야 했다.
"그래, 지금 함수와 세안할 터이니."
"……예."
"네가 앞으로 침수에 들 때마다 내 함수와 세안을 챙기어야 한다."
"………예?"
"알겠느냐."
태형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잡고 한 번 주무른 뒤, 일어섰다. 허나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나인은 한 번 후다닥 침전 밖으로 나섰다가 준비되어 있던 대야를 들고 들어섰다. 낑낑거리는 소리에 태형은 울려대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면서도 피식 웃고는 했다. 미온수에 수건을 한 번 적신 후에. 그 수건으로 태형의 용안을 닦는 손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열변을 토하느라 땀에 젖은 얼굴을 구석구석 닦는 손길이 예전 제 어미의 손길 같아 태형은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듯 했다. 빠진 데 없이 열심히 태형의 용안을 닦던 나인은, 태형이 웃는 틈에 재빨리 숨을 쉬었다. 어찌 이리 잘 나셨을꼬. 왕세자가 조선을 너머 명까지 빛을 발하는 용안을 가졌다 하더니, 실로 참이었다. 제가 본 사내들 중 제일이었다.
"어찌 이리 떠누."
덜덜 떨리는 손을 무심결에 잡은 태형은 손을 아래로 끌어내리며 눈을 떴다. 나인의 얼굴을 확인한 태형은 순간 아, 하고 탄성을 냈다. 그리고 이내 무심코 내비쳐버린 의미심장한 미소가 뒤따랐다. 드디어 그 얼굴이 떠올랐음에였다. 꽃구경을 할 때에 본 얼굴이었다.
"너였구나."
"………예?"
"어쩐지, 쫑알거리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단 하루의 마주침이었으나 지루하고 팍팍한 동궁에 봄비처럼 여겨졌던 이가, 그리 하여, 다시 마주친다면 한 번쯤 꼭 그 이름을 묻고 싶었던 이가 태형의 앞에 앉아 있었다.
덧붙임
안녕하세요, 채셔입니다!
다들 안녕하세요? 시험기간 넘나 피곤하고 고단하네요 흡...
제가 듣는 게 하나 빼고 다 전공이니 으으 넘나 부담스러워요
그래도 글 쪄서 왔쟈나요♡ 궁디 팡팡해주세요
이제 전 공부하러 총총...! 아닐 수도 있어요 허허허ㅓ
철벽은 내일 뵈는 걸루. 오늘도 사랑합니댜, 그리구 또 고마워요 뿨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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