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 상승 한 번 해볼 테냐 /채셔
2. 잊지 못할 이름으로
태형은 이마를 짚고, 일러주었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 애썼으나 김 가라는 것 밖에는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어제 진작에 물었어야 할 것을. 결국은 빈궁이 들이닥쳐 나인에게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흘러보내야 했다. 빈궁은 왜 하필 그 때에. 들이닥쳐 하는 말이, 제 동생이 이제 곧 과거를 치니 한 자리를 내어달라는 쓸데없는 말이었다. 그리 하여 한 차례 혼을 내고 돌려보냈더랬지. 어릴 때에 만나 정략적으로 혼인한 빈궁은, 태형의 마음에 들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노력은 하는 것 같다만, 늘 태형에게 한참 미치지 못하는 지략들일 뿐.
"여 봐라, 게 누구 있느냐."
"예, 저하."
내시가 고개를 숙인 채 들어섰다. 동궁 나인 중에… 김 가의 여식이 있느냐. 내시는 생각지 못한 질문이었던지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아, 그, 그것이… 동궁 나인들이 하도 많기에… 찾아는 보겠사온데. 내시의 시원치 못한 답에 태형은 하, 하고 무기력하게 나가라는 손짓을 하였다. 어찌 이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 태형이 알고 싶은 것은 그저 이름 하나였다. 그렇다 하여 태형이 내시 말마따나 그렇게나 많은 나인들 하나하나를 탐색해볼 노릇도 아니었고, 정국에게 물어보는 것은 더더욱 원하지 않았기에. 무려 조선의 세자 태형이 나인 하나의 이름을 알지 못해 쩔쩔매는 것을 짖궂게 놀려댈 정국은, 상상만 해도 부아가 치밀어 뒷목을 잡게 되었다. 그리 해 태형은, 이 동궁에서 우연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작은 희망 하나, 얻을 수만 있기를.
"나가지 않고 무엇 하는 게냐."
"저하, 이제 조회를 나가셔야 할 시간이옵니다."
"………아."
태형은 뒤늦게 아, 하고 탄성을 터뜨렸다. 늘 조회만큼은 꼭 늦지 않게 준비해 미리 갔던 태형이었는데, 오늘 조회 시간이 거의 다 되었는데도 움직이지 않았던 것은 내시도, 태형 자신도 의아한 일이었다. 어찌 됐든 환복하고 얼른 조회를 참석해야 하니, 태형은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몇 시간을 앉아 서책도 보지 않고 고민한 결과는 모르겠다는 답이었다. 늘 답은 내고야 마는 태형이었기에, 짜증이 덜컥 제 마음을 치고 올라오는 것을 간신히 참아내야 했다.
태형이 조회에 나간 시간이었다. 할 것이 뭐 이리 많은지. 여주는 마침내 제게 내려진 일들을 끝내고, 힘이 빠져 마루 위에 걸터앉았다. 이제 저를 어미라고 생각하는 건지, 마루에 앉자마자 쫄래쫄래 다가온 강아지가 제 발을 툭툭 쳤다. 여주는 강아지를 올려 제 무릎에 앉혔다. 강아지가 제 품을 파고들었다. 괜히 기분이 좋아져 여주는 강아지를 꼭 안아주었다. 자그마치 태형이 내려준 강아지였다. 어젯밤 나인들이 제게 소근대던 말들이 자꾸 귀에 맴돌았다. 얘, 너 저하 눈에 든 것 아니니? 저하는 원래 나인들은 거들떠도 안 본다구 소문이 자자하단 말이야. 솔직히 당연한 일 아니겠니, 대비 마마께서 그 모진 삶을 살아오셨는데. 어찌 나인에게 정이 가겠어. ……. 그런 저하께서 어찌 제게 이렇듯 온정을 내비쳐주시었는지는, 제가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풀어보아도 알 수 없는 답이었다.
"맞다, 강아지 너… 이름을 안 지어줬구나."
"……."
"네 이름은……."
여주는 한참을 고민했다. 그리고 몇 번 중얼거리던 여주는 제게 애교를 부리며 올려다보는 강아지를 한 번 더 안아주며 일러주었다. 네 이름은, 지민이야. 지민의 이름을 따서 지었으니…, 너는 그리 가지 말고 오래동안 내 옆에 있어줘야 해. 강아지의 하얀 털을 쓸어주다 지민의 이름을 꺼낸 여주는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여주에게는 결코 잊지 못할 이름이었다. 어찌 잊으랴, 목숨을 걸고 저를 지켜준 이름인데.
'아씨, 얼른 가십시오.'
'너는 어찌 하고 가라고 하는 것이냐.'
'아씨 곁에 살아 돌아와야지요, 저를 믿으십시오. 보은아, 얼른 아씨 뫼시거라.'
'안 된다. 네가………, 지민아!'
아씨를 지키겠다고 해놓곤 바로 칼에 제 허벅지를 베이던 것이 제가 본 지민의 마지막 모습이었기에, 여주는 여전히 그 이름을 잊을 수 없었다. 궁에서의 3년 동안 이제 겨우 지민을 다 잊었으나, 문득 이렇게 가슴이 시려올 때가 있었다. 여주는 입술을 꾹 깨물고 제 품을 파고드는 지민을 꼭 안아준 뒤 놓아주었다. 꼬리를 흔들며 제 뒤를 쫑쫑 따라오는 지민을, 차마 다 보지 못하고 여주는 처소에서 벗어났다. 반드시 제 곁에 살아 돌아오겠다고 했던 지민은, 3년째 그 행방이 묘연했다. 죽었다 하였으나, 사실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있다 믿는 것은…, 여주의 마음이자 바람이었기 때문이다.
여주가 처소를 떠나 터덜터덜 동궁으로 들어섰을 때, 막 태형이 조회를 끝내고 돌아왔을 참이었다. 태형은 오늘, 신하들의 싸움을 겨우 말려냈다. 저하의 앞이니 언성을 높이지 말자고 하면서도 싸움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의견 차에 서로를 삿대질하더니, 심지어 좌의정이 뒷목을 잡고 쓰러지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왕의 자리를 새삼 실감하는 바였다. 태형은 뻐근한 뒷목을 한 번 돌렸다가 침전으로 들었다. 피곤하여 모두들 물리고 무거운 머리를 뉘인 틈에, 따박거리던 나인이 다시금 떠올랐다.
'상궁마마께옵서 침수에 들기 전에는 꼭 함수와 세안을 하시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병아리를 어떻게 찾을꼬. 태형은 미간을 찌푸리며 금침을 꽉 쥐었다. 분명히 꽃구경 때에 그 이름 석자를 알려주었건만. 별 신경을 쓰지 못해 흘려 보냈다. 그것이 너무 안타까워 태형은 이불을 뻥 차냈다. 궁 생활이 팍팍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나인의 이름 하나에 이렇게 피 말려 하는 것을 보니. 태형은 제가 한심해져 다시 앉아 서책을 폈다. 허나 서책의 글은 제 눈에 들어차지 않고, 그저 흩어질 뿐이었다. 내 이 병아리를 찾으면 크게 혼쭐을 내고 말 것이야. 태형은 괜히 나인이 괘씸해져 입술을 깨물었다. 가만히 어제의 일을 생각하고 있자… 제가 무심코 놀렸던 말이 떠올랐다.
'네가 앞으로 침수에 들 때마다 내 함수와 세안을 챙기어야 한다.'
이런, 호재로구나. 태형은 순간 환하게 웃으며 밖의 누군가를 불러내었다. 어제 내 세안을 맡았던 나인이 있으니, 그 나인을 불러오거라. 지금 침수에 들 것이다. 내시가 고개를 숙이며 명을 받들었다. 괜히 기분이 좋아져 태형은 서책을 소리 나게 탁 접고 문만을 바라보았다. 얼마 되지 않아, '저하, 나인 드옵니다.'하고 내시가 크게 외쳤다. 간만에 태형의 심장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들라. 태형의 말에 나인 하나가 고개를 숙이며 들어왔다. 병아리였다.
"저하, 부르셨습니까."
"얼굴 보기 참으로 힘들구나, 나인 주제에."
"……예?"
여주의 얼굴이 태형의 시야에 들어오자, 태형은 그것이 반갑고도 얄미워 툴툴거렸다. 여주의 얼굴이 의문으로 가득 찼다가, 제가 내릴 수 있는 답은 아니었던지 '송구하옵니다.'하고 말을 얼버무렸다. 쌩하고 태형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여주는 총총 다가와 태형의 앞에 앉았다. 이번에도 낑낑거림은 같았다. 그리고 그 낑낑거림에 태형의 반응 또한. 금방 제 앞의 상이 치워졌다. 조용히 수건을 적셔 태형의 얼굴을 닦는 여주에게, 태형은 넌지시 그 이름을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지? 태형의 낮고 차분한 말에 여주는 다시금 의아해하며 '소인, 김여주라고 하옵니다.'라고 제 이름을 일러주었다. 태형은 꿈에서도 궁금했던 그 이름을 마음 속으로 몇 번이고 외웠다. 세안과 함수를 맡기었으니, 이제 하루에 한 번은 꼬박 볼 수 있는 얼굴이었다. 허나 태형은 괜히 조급증이 났다.
"내일 잠행을 나갈 것이다."
"………예."
"네가 따라 나서거라."
"예?"
"왜, 싫으냐."
놀라 뒤로 제 엉덩이를 쿵 찧은 여주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태형을 바라보자, 태형은 고개를 쳐들고 여주를 노려보듯 바라보았다. 어허, 명령 불복종은 중죄이거늘. 태형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여주가 '소, 송구하옵니다.'하고 고개를 숙이며 치맛자락을 꼭 잡았다. 당황스러운 표정이 궁의 누구보다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태형은, 오늘도 여주를 골려줄 생각이었다. 내가 싫은 게로구나. 태형이 매몰찬 척을 하며 고개를 돌리자, 여주는 그대로 바닥에 엎드리며 '소, 소인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송구하옵니다.'라고 다시 용서를 구했다.
"죽을 죄라……."
"………소, 소인이……."
"그래, 살려주마."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네가 죽으면 궁에는 더 이상 재밌을 것이 없지."
태형은 벌벌 떠는 머리통을 쓸었다. 제 손길 하나에 잔뜩 굳어버린 여주가 귀여워 태형은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아냈다. 고개를 든 여주의 눈에 눈물이 그득 올라와 있었다. 나인을 싫어한다는 소문이 있으니, 이제 제 목숨은 여기서 끝이구나 생각했던 터였음에 뭉컹 눈물이 터져나온 것이었다. 우는 게냐. 태형의 다정스러운 말에, 눈물은 그칠 생각을 않고 오히려 더 밀려 나왔다. 멈춰야 한다 생각했으나, 갑작스럽게 떠올랐던 지민의 생각에 한참을 우울해했던 제가 위로 받는 기분이었으니. 눈물을 쏟는 여주를 멍하니 바라보던 태형은 조심스레 여주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나 때문이냐."
"…아니옵니다."
"너는 어찌………."
킁킁거리며 코를 훌쩍이는 여주를 바라보던 태형은 고개를 돌렸다. 어찌 우는 것도 이리 병아리 같으냐. 차마 닿지 못한 태형의 읊조림에 여주는 다시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태형의 귀가 빨개져 있었다.
덧붙임
암호닉은 프롤로그 편에서 받구 있습니다!
곧 확정암호닉 올릴테니 확인해주세요.
별다를 것 없는 제 글 좋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싸라해오♥
내일은 야누스 / 철벽으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