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가 철벽을 쳐요 /채셔
15. 여기 있어, 꽃이 만개했는걸
"…아저씨?"
"…놓칠 뻔 했잖아. 어딜 가."
아무리 봐도 아저씨였다. 내가 제일 필요로 할 때 와주지 않은 게 아저씨였으니까, 정말 우리는 끝난 거구나 싶어서 짐까지 정리한 상태였는데. …마음까지 다 먹었는데 이렇게 오면 어떡해. 다시 나를 꽉 안아오는 아저씨의 넓은 품에서 나는 입술을 힘겹게 웅얼거렸다. 아저씨, 왜 이제 왔어. 아저씨는 내 말에 입술을 꾹 깨물며 연신 안타까운 손길로 내 머리를 쓸어줄 뿐이었다. 내가, 내가 다 잘못했어. 아저씨의 말에 이제껏 쌓여왔던 서러움이 폭발하는 것 같았다. 다… 알아주는 것 같아서.
"늦었어, 아저씨."
이제껏 다짐하고, 또 마음 먹었던 결심들이 한꺼번에 무너져내린다. 단 한 사람으로. 그래서 허무했다. 이제 끊어내야지, 이 사람을 알게 된 한국마저도 끊어내야지, 했던 마음이 몽땅 물거품이 됐다. 장장 20여 년의 나날들이 바람처럼 날아가버릴 결말을 기다리는 심정이 어떤 건지 아저씨는 하나도 모를 거다. 왠지 살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 눈을 감으면 세상이 끝나버릴 것 같은 허무맹랑한 생각들에 잠긴 채로 울음을 참아내던 지금이었으니까. 거짓말처럼 웃으면서 우리의 얘기를 추억으로 떠들어댈 날이 올 것만 같은 그 느낌이 얼마나 무섭고 징글맞은지 아저씨는 절대로 모른다.
"아저씨, 미안해."
"………김여주."
"늦었잖아, 너무."
아저씨의 품에서 벗어나서 아저씨를 한 번 올려다보고 몸을 돌렸다. 손을 꽉 쥐었다, 바람이 한 번 쌩 지나갔고 순간 허탈감이 손을 스쳤다. 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잠깐만."
"………."
"내가 너를 어떻게 만나겠어."
아저씨의 말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서 없어져주는 건데. 반항심에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아저씨를 보지 않았다. 사실 볼 자신이 없었다. 너무 잘 아는 사실이라. 날 거의 키우다시피 한 아저씨니 그런 감정이 생기는 것도 거의 기적같은 일이었을 거다. 아저씨를 한 번 길게 눈에 담았다가 다시 등을 돌렸다. 힘 없는 몸을 끌어 나가려는데 다시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너무나도 절박하고 간절하고, 또 아픈 목소리였다. 아저씨는 아마 세상에서 제일 미련한 바보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커보였던 아저씨의 몸집이 이제는 세상에서 제일 움츠러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근데 어떡하냐."
"………."
"어떻게 해서든 만나고 싶은데."
몇 번을 다시 생각했는데. 너 내 성격 알잖아, 이런 거 고민 많이 하는 거. 그렇게 나온 결론이 너랑 만나는 거면. …너랑 만나도 되는 거잖아. 내가 꼬맹이 너 없으면 힘들 것 같아서 그래. 네가 나 처음부터 좋아했던 것처럼, 나도 너 처음부터 좋아했어. 알잖아, 너도. 아저씨는 간간이 말을 끊어가면서 고백했고, 말을 내뱉을 때마다 목소리가 조금씩 떨렸다. 어찌 됐든 너무 늦어버린 고백이었다. 이미… 늦어버린 고백.
"너무 늦어서 미안해."
"………."
"꼬맹아, 나 좀 봐."
등을 돌렸지만 아저씨의 목소리가 덜덜 떨리는 것만으로도 아저씨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꽉 막힌 것처럼 아주 묵직한 슬픔이 내게 전해져 오는 것 같아서 숨을 천천히 내뱉었다.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리고 아저씨를 보는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울고 있었다, 아저씨가. 20여 년을 붙어지내면서도 아저씨가 이렇게 우는 건 본 적이 없었는데. 제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며 울음을 참아내고 있었지만, 아저씨는 분명히 울고 있었다.
"너무 늦었어, 아저씨."
"…꼬맹아."
"너무 늦었다, 진짜……."
지쳐서 메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우린 너무 늦었다. 아저씨가 주먹을 꽉 쥐었다. 이번에는 울음을 굳이 참지 않은 채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저씨답지 않았다. 이 서투른 고백도, 서투른 눈물도. 뭐든 능숙했던 아저씨에게는 처음의 모습이었다. 나는 다시 주먹을 말아쥐었다, 이번에도 바람이 선선하게 내 손을 스쳐 지나갔다. 분명히 있었다. 이제는 분명히 손에 쥔 것이 있었다.
"지각했어."
"………."
"그러니까 그만큼 벌 받아야 돼, 아저씨."
나는 서투르게 아저씨의 입술에 키스했다. 아저씨의 눈물이 입 속으로 흘러 들었다. 아저씨의 큰 손이 내 뒤통수를 꼭 감싸 쥐었다. 아저씨가 그렇듯이 나도 아저씨를 놓지 못하니까. 아저씨와 시작할 준비는 늘… 되어 있으니까. 키스를 하고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이 누구보다 달았다. 아저씨의 얼굴은 눈물 범벅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누구보다 행복해보였다. 아저씨의 손이 다시 내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짧게 몇 번이고 키스를 해주었다.
"또 아저씨 갖고 논 거지, 너."
"아니야, 아저씨. 마음 돌리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데."
"아저씨 들었다 놨다 하는 건 천성이구나, 진짜."
아저씨는 사랑스럽다는 듯이 내 얼굴을 잡고 다시 키스를 퍼부었다. 꿈을 꾸는 것만 같다. 아저씨의 한없이 단 눈길과 로맨틱한 손길과 촉촉한 입술. 언제나 꿈꿔왔던 몽글몽글한 순간들이 이제는 내 앞에 있었다. 나는 다시 주먹을 말아 쥐었다.
덧붙임
안녕하세요, 진짜 진짜 오랜만인 거 같아요 으으
아닌가아? 일주일도 더 된 것 같아요
뭔가 슬럼프를 극복하는 과정 중에 있어서, 글은 그렇게 예쁘지 않지만
노래빨로 오늘도... 흡
이제 다음 화부터는 핵 달아지겠네요 짝짝
찌통이 끝나서 다행이에요 원래 반존대보다 더 연재를 할 생각이었는데
지금 와서 보니 20화가 딱 적당한 길이인 것 같네요...
20화 완결까지 우리 설탕이 되어봅시다 (짝)
사랑해요 오늘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