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
w. 채셔
ㅡ 이연희.
ㅡ …네, 언니.
ㅡ 너, 어젯밤에 뭐했어?
나는 다짜고짜 연희의 방에 들어가 손에 잡히는 것들을 모두 던졌다. 집어던진 화장품은 고스란히 연희의 팔뚝을 강타했다. 보란듯이 벌개지는 팔을 가만히 응시했다가, 날이 선 눈으로 연희를 노려보았다. 내 시선에 연희는 고개를 푹 숙였고. 가만히 서서 제 역정을 다 받아주고 있는 꼴이 얄미워서 나는 언뜻 손에 걸린 향수를 한 번 더 던졌다. 향수는 연희의 배에 그대로 꽂혔다가 바닥으로 떨어졌고, 분홍 빛의 액체가 줄줄 새어나가 바닥을 적시기 시작했다. 곧 향기가 방안에 피어올랐다. 딱 봐도 정국의 취향인 걸 보니, 정국이 사준 것이 분명했다. … 연희의 것들이자, 나에게는 절대 사주지 않을 것들. 심술이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 연희의 목에 덩그러니 키스마크가 남겨져 있었다. 길게 자랐던 손톱이 기어이 살을 파고들었다.
ㅡ '연희 씨, 인사해요. 여긴 내 약혼녀.
ㅡ '전정국, 지금 뭐하는 거야?'
ㅡ '너도 인사하지 그래, 내가 좋아하는 여잔데.'
연희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쥐고 있던 정국의 손을 보고 그 날 얼마나 몸을 부들거리며 떨었는지 모른다. 연희 씨, 라고 불려진 여자는 한없이 무거운 표정을 하고 정국이 말하는 것들에 그저 웃으며 대꾸를 할 뿐이었다. 정국이 표정을 굳히는 여자에게 괜찮다며 미소를 짓는 것에 아주 익숙한 환멸감이 내 몸을 감쌌다. 지독하게 착해 빠진 여자. 정국이 데려온 여자는 그런 여자였다. 그 때부터 더 심해지기 시작했다, 이 지옥같은 의부증이. 이유 모를 불안감은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대놓고 연희를 챙기는 정국, 그리고 나날이 커지는 그들의 사랑, 그 하찮은 것에 위협받는 정국과 나의 결혼까지. 어쩌면 그들의 사랑에서 서브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대로 쫓겨나면… 불행하게도 나는 갈 데가 없었다. 7살부터 정국의 집에서 자라온 나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믿을 수가 없었다. 지민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나를 가족으로 취급해주지 않았다. '정국의 집안과 거래할 상품 따위'가 우리 집에서의 내 위치였다.
ㅡ 전정국이랑 있었던 거, 모를 줄 알아?
ㅡ 아니예요, 언니….
ㅡ 넌 내가 만만하구나.
분에 못 이겨 연희의 앞으로 다가가 뺨을 세게 쳤다. 손톱이 파고든 손에서는 피가 났고, 그 피가 고스란히 연희의 볼에 묻었다. 눈물을 그렁하게 매달고 바닥만 죽어라 쳐다보는 연희의 얼굴에 나는 또다시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대놓고 나를 나쁜 년으로 만들 작정인가. 다시 한 번 뺨을 치려는 내 행동을 누군가가 막아왔다. ……걸렸다. 지금이 아니어도 당연히 걸릴 것들이었지만 왠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쫙 편 손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렸고, 단단하게 붙잡힌 손목은 곧 빨개졌다. 엉망진창이네, 진짜.
ㅡ 씨발, 너 연희 씨 때리지 말라고 했지.
ㅡ 사장님, 그게 아니라 제가….
나는 정국을 노려보았고, 정국은 내 손목을 강하게 붙들곤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제압했다. 아, 그리고 연희는 정국의 허리를 붙잡고 냉기를 뿜어내는 정국을 저지했고. 정국의 눈이 쳐다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눈이었지만, 나는 엉뚱하게도 정국의 허리에 놓인 연희의 손을 끝없이 바라보았다. 아주 멍해졌다가, 곧 정국의 손을 세게뿌리쳤다. 정국은 내 반응에 한 쪽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이내 보호의 대상인 듯 연희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 집안의 주인은 정국과 연희고, 되려 내가 제 3의 인물이 된 것 같았다.
ㅡ 좀 나가줬으면 좋겠는데.
ㅡ …….
ㅡ 연희 씨랑 할 게 있거든.
정국은 웃으며 그대로 연희의 어깨 선에 입술을 가져다댔다. 나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고, 이내 정국은 내 등을 떠밀고 연희의 방에서 나를 내쫓았다. 황량한 집안에 혼자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문이 쾅 닫혔고, 문득 올라오는 눈물을 서둘러 꾹 눌러 담았다. 정국과 둘이서 동거하는 집은 아주 컸다. 불필요하게 넓어서, 외로워야 했고 고독해야 했다. 사랑 혹은 따스한 일체감이 아니면 미쳐버릴 수 밖에 없는 공간이었다. 나는 연희의 방 앞에 자리한, 정국과 내 방 -웃기지만 정국과 나는 예비 부부였으니-에 들어가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방문을 열고 있으면 어떤 소리가 들려올 지는 아주 뻔하니까. 나는 핸드폰을 부여잡고 익숙한 번호를 꾹꾹 눌렀다.
ㅡ 아가씨…?
ㅡ 박지민, 우리 집 좀 와…, 빨리.
방문이 닫혔음에도 정국과 연희의 희희낙락한 소리가 크게 울려 들어왔다. 나는 귀를 꼭 틀어막았다. 이럴 때 내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지민 밖에는 없다. 열여섯즈음 까지는 태형이었고, 태형의 이후는 단연 지민이었다. 다시 주먹을 꽉 말아 쥐는 바람에 피가 다시 새어나와 침대 시트를 적셨다. 연희를 더 때렸어야 했다. 그러면 이 답답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렸을지 모르는 일이다. …망가진 마음은 끝도 없이 망가진다. 이 집에서 제대로 된 사고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잡아먹을 듯이 나를 괴롭히는 시어머니와 내 마음을 알면서도 다른 여자들을 데려와 희롱하는 전정국. 권력과 명예가 빛나는 친정 집. 나는 미쳐가야 했고, 주위의 사람들에게 나는 '히스테리를 부리는 여자' 로 아주 쉽게 자리 잡았다.
그저 전정국을 사랑했을 뿐이었는데, 어느 날 돌아본 나는 미쳐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