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가 철벽을 쳐요 w. 채셔
17. 우리 아저씨가 달라졌어요
"아저씨."
"뭐, 왜. 뭐, 뭐가. 왜."
뒷머리를 긁는 정국이를 어색하게 보내고, 곧장 침실로 들어갔다. 괜히 배를 긁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게 귀여워서 웃어버렸더니 아저씨는 눈을 딴 데로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쪽팔리니까 얘기하지 마. 쓸데없이 잔뜩 무게를 잡은 목소리에 입술을 앙 다물고 웃음을 참아보려고 했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우리 아저씨, 진짜 귀여워졌네. 아저씨에게 다가가며 말하자, 아저씨의 눈썹이 까딱 올라갔다. 아, 씨. 아저씨에게서 한 번 낮은 탄식이 흐르더니, 뒤늦게 찾아오는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었던지 아저씨는 뒤돌아 누워버렸다.
"아, 진짜 어떡하지."
"………."
"우리 아저씨 귀여워서 어떡해?"
정말 귀여워서 앓는 거다, 이건. 끙끙대며 침대 옆 바닥에 앉아 아저씨를 바라보자, 아저씨는 흘끔 나를 쳐다보았다. 이내 다시 고개를 돌리며 내뱉는 말은 '귀엽다는 말은 나 밖에 못 해. 알겠어?' 같은 말 뿐이다. 빙그레 웃으며 아저씨의 옆에 누웠다. 아저씨, 안아줘. 꼼지락대며 이불 속으로 들어가 아저씨를 바라보며 말하자, 아저씨의 몸이 살짝 움질거렸다. 빨리이. 한 번 더 보채자, 그제야 돌아누운 아저씨의 품에 안길 수 있었다. 품이 따스하다. 꼬맹이 너, 그 토깽이랑 계속 같이 있지 마. 아저씨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날을 얼마나 꿈꿔왔었지. 몇십 년을 반복해서 꿈꿔왔던 판타지라, 짐작할 수가 없다.
"아저씨."
"…또 놀릴 거지, 너."
"아니."
서서히 눈을 뜨는 아저씨를 올려다보았다. 이거 꿈 아니겠지? 아저씨는 느닷없는 말에 웃으며 내 코를 한 번 퉁 튕겼다. 꿈은 무슨,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 마. 아저씨는 다정한 -그렇지만 아직은 새침함이 조금 가미된- 말투로 내 머리칼을 쓸며 말해주었다. 이거, 장난 아니지? 노심초사로 물어본 말에 아저씨는 다시 한 번 내 머리에 퉁 꿀밤을 놓았다. 그런 소리 할 거면 그냥 말하지 마. 무기력한 말 뒤로 나를 꾹 끌어안는 아저씨의 손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아저씨의 가슴팍에 입술을 부비게 됐다. 으응, 하고 애기 소리를 내자 흐흐, 하고 아저씨의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내 성격 알잖아."
"……."
"내가 이런 걸로 장난 칠 것 같아?"
"……헤헤."
"좋아해, 진짜로."
아저씨의 다정한 말은 보너스. 괜히 귀가 빨개진다, 이런 말 하나에. 아저씨의 품으로 얼굴을 부비적거리며 파고들자, 아저씨는 내 등을 토닥였다. 얼굴을 묻는 사이로, 아저씨의 숨소리가 그대로 느껴졌다. 절대 들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이 일정한 간격의 숨결을, 듣고 있다. 느끼고 있다. 어느 때보다… 지금, 행복했다.
"아저씨."
"왜."
아저씨의 대답에, 뜸을 들이다 다시 물었다. 나 언제부터 좋아했어? 내 질문에 아저씨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오늘 왜 이렇게 질문이 많아?'하고 다시 되물었다. 그냥, 하고 어깨를 들어올리자 아저씨는 다시 나를 안고, 모르겠는데, 하고 심드렁한 대답을 내놓았다. 심심한 대답에 괜히 실망해서 입술을 삐죽이자, 아저씨는 전혀 다른 말로 내 귓가를 간지럽혔다.
"심장소리."
"……응?"
"꼬맹이 너 심장 되게 빨리 뛴다."
"……."
"좋다, 우리 꼬맹이 심장소리."
아저씨는 내 몸과 제 몸을 꽉 밀착시킨 채로 한참을 있었다. 노래로 만들까. 아저씨의 말들이 달다, 아까 정국이와 먹었던 초콜릿보다. 작곡가라는 말에 감정 불구 아저씨가 어떻게 음악을 만들어, 라고 생각했는데, 아저씨의 곡들은 어떤 곡들보다 멜로디가 예쁘고 힘찼다. 아저씨의 곡은 딱, 민윤기의 곡이었다. 민윤기가 어떤 수식어로도 표현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민윤기 같은' 민윤기로 정의되듯이. 아저씨의 곡도 그랬다. 민윤기만의 음악관으로 만드는 내 심장소리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음악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좋아했어."
"……아저씨."
"처음부터 좋아했던 거야."
아저씨의 자기 고백 같은 말에 나는 문득 울음이 올라올 것 같아서 입술을 깨물었다. 처음부터 좋아했다는 말이, 정말 처음부터 좋아했던 내게 얼마나 큰 말로 다가왔는지 아저씨는 모를 거다. 아저씨에게 고마워서, 또 그 말이 고마워서, 나는 울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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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처음부터, 그리고 끝이 될 때까지
'아저씨, 나 석호랑 사귄다?'
'석호? 걔가 누군데.'
이런 일이 있었다. 꼬맹이가 처음으로 나에게 제 연애를 고백했던 날. 그러니까, 중학교 때였을 거다. 제 남자친구 사진을 자랑스레 보여주는 손길에 괜히 헤어지라고 화를 냈었다. 그 남자친구라는 잘난 놈의 사진에 술이 있는 걸로 보아선, 일진 놈이었을 테니까. 내가 기른 꼬맹이를 그런 놈에게는 줄 수 없다는 마음이었겠지만, 사실은. 그 놈을 보고 웃는 꼬맹이의 얼굴이 더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나만 바라보던 애가 선택한 놈이 그딴 놈이라는 건, 더욱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저씨이!'
'응.'
'뽀뽀해줘.'
'싫어.'
'석진이 오빠는 해줬는데.'
더 어릴 때도 그랬다. 석진이 오빠가 해줬다는 말에,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 말랑한 볼에 뽀뽀 폭탄을 날렸었다. 그런 일들이 내게는 유난히 많았다. 아저씨라는 호칭을 얻게 된 것도 그런 일들의 연장선이었다. …그래, 사실은 질투한 거였다. 내 얄랑한 자존심이 그런 마음을 그냥 놔둘 리는 만무했고. 결국 알면서도 모른 척 한 거다. 20여 년을 그렇게 모른 척 해오다보니, 그 마음이 게눈 감추듯 숨어버린 거고. 바보 같은 나는 내 앞에서 눈치만 보고 있는 마음을, 진짜 마음이라고 착각한 거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꼬맹이를 좋아했던 거다. 답지 않게, 그걸 최근에서야 알아버렸다. 꼬맹이가 한국에 들어와 부쩍 늘어온 스킨십으로 나를 자극하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좋아했어.'
'……아저씨.'
'처음부터 좋아했던 거야.'
그래서 고마운 거다, 꼬맹이에게. 문득 답이 없기에 고개를 뒤로 빼 꼬맹이를 바라보았더니, 울고 있다. 돌아오게 만들어서 미안해. 또 바보 같이 못 알아채서 미안해. 나는 목젖까지 올라온 말을 다시 삼켜내고,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참는 꼬맹이를 안아 그대로 토닥여주었다. 울지 마, 내가 미안해. 나지막하게 말해주었지만, 사실 미안한 감정을 따지면 수도 없이 넘쳐나서 어떤 것만 미안하다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평소대로, 부끄러우면 부끄러운대로, 남자답고 싶으면 남자답고 싶은대로 할 수가 없다. 어떻게 됐든 지금은 다정함만 주고 싶어서. 한없이 기다려왔을 설탕 같은 상황들만 만들어주고 싶어서.
"뚝."
"……크응."
"예쁘다."
어릴 때, 꼬맹이의 울음을 멈추게 했던 꼬맹이의 아빠, 그러니까 아저씨의 마법 주문을 걸어보았다. …지금도 통하는구나. 방금까지도 울던 꼬맹이가 눈물을 뚝 멈췄다. 애기 같아서, 웃음이 났다. 아니, 사실 애기 같지 않을 때가 없지만 지금은 더 애 같아서. 아니, 그래, 솔직히 귀여워서. 예쁘다, 하고 쓰다듬어주기나 하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오물거리는 꼬맹이의 입술에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부딪혔다.
"다 울었어?"
고개를 끄덕이는 꼬맹이의 머리를 기분 좋게 털어주었다. 콧물을 제 소매에 닦고 꼬맹이는 침대에서 벗어났다. …엥. 갑작스러운 행동에 나는 꼬맹이의 팔을 잡고 다시 눕혔다. 놀라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에, 어디 가, 하고 물었다. 꼬맹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계속 아저씨 침대에서 자?'하고 되물었고. 무슨 대답을 할지 고민하는 내 표정 틈으로 꼬맹이는 다시 아무렇지 않게 일어섰다. 그리고 나는 반복해서 그대로 꼬맹이를 내 품으로 끌어 당겼다.
"어디 가, 자꾸."
"나 소파에서 자……."
"뭘 소파에서 자. 그냥 내 침대에서 자."
"아저씨는?"
"나도 침대에서 잘 거야."
괜히 대답이 부끄러워서 꼬맹이를 꼭 껴안자, 꼬맹이는 다시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니까 뭐, 그런 빨간 딱지나 붙을 저급한 생각 따위는 아니었고. 어떻게 꼬맹이를 키운 아저씨가 돼서, 벌써부터 꼬맹이를 잡아먹을 생각을 할 수 있겠어.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 어쨌든 히죽거리는 꼬맹이가 수상해서, 눈을 얇게 뜨고 꼬맹이를 노려보았다. 뭐야, 너. 입술을 한 번 훑고, 꼬맹이를 아니꼽게 바라보았다.
"너, 노렸지."
"…아저씨도 원하고 있었으면서어?"
아니. 아, 솔직히 맞는 말이라서 반박할 수가 없었다. 혀를 낼름 내밀고 메롱, 이라고 나를 놀리는 꼬맹이의 이마에 콩 딱밤을 놓았다. 진짜 이, 이 밀당쟁이를 어떻게 하지.
덧붙임
우와, 장장 다섯 시간을 붙잡고 있던 글을 다 썼네요.
그리고 정했습니다. 드디어!
요즘 글잡이 지민이 가뭄이라는 말을 듣고,
반존대 시즌2에 저울이 더 기울었어요.
그치만 걱정은 마세요, 정국이 글도 결국은 연재될 테니까요!
이제 이 글을 올리고, 내일 밤이면 19-20편으로 철벽이 완결될 예정입니다.
그리고 이 철벽글은 정말... 너무 마음 고생이 심했어서,
아껴준 분들만 메일링해드리려고 해요.
항상 예쁜 말만 해주시고, 끝까지 완결하게 해주신 댓글 남겨주신 분들.
그리고 암호닉 분들께 메일링 해드리려고 합니다.
이 얘기는 내일 올라올 메일링 글에서 더 자세히 얘기 드릴게요.
오늘도 만나서 반가웠어요, 정말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