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야할 것을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 악문 이 사이로 새어나오는 울음소리를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이렇게 심장이 뛰다가는 내 몸 안에서 터져 버릴 거야, 같은 이상한 생각을 하며 나는 부들부들 떨었다. 터져 나오려는 감정과 억지로 밀어 넣으려는 이성이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왜 이렇게 나를 못 살게 굴어…. 멋대로 휘둘리는 내가 한심해 금세 눈가에 눈물이 번졌다. 어렸을 때와의 비스무리한 공포심이 서서히 내 척추를 타고 올라와, 몸을 마비시켜왔다. 보란듯이 로맨스의 윤리학을 짓이기는 민윤기를, 진작에 알아봤어야 했다. 망가지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이미 나는…, 망가질대로 망가져버렸는걸.
야누스 w. 채셔
세경이를 찾아야했다. 편지는 분명히 서연대학교 병원에서 온 편지였으니까, 그리고 세경이도 서연대학교 병원에 있다고 했던 것 같다. 가디건을 병원복 위에 입고, 침대 옆에 놓아둔 구겨진 편지와 핸드폰을 가디건 주머니에 넣었다. 이내 천천히, 바닥에 발을 내려놓고 실내화를 신으면서 나는 조금씩 몸을 덜덜 떨어야 했다. 모든 게 두려웠다. 세경이의 얼굴을 보는 것도, 세경이 얼굴을 보자마자 떠오를 그 수많은 상처들도.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몸을 스스로 부여안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다. 병실들을 느리게 지나 복도에 다다랐고, 프론트에 앉은 간호사에게 물었다. 남들의 눈에는 괜찮아 보일 거라 생각했던 목소리가 조금, 떨려 나왔다.
"환자 조회 좀 하려고 하는데요."
"네, 이름 말씀해주시겠어요?"
나는 세경이의 이름을 천천히 내뱉었다. 열네 살부터 뇌중에 단단히 각인되어 하루도 나를 아프게 하지 않은 적이 없는, 그 이름을. 간호사는 컴퓨터 자판을 몇 번 두들겨보다 이내 한참을 화면을 바라보더니 짧게 말해주었다. 정신과 607호 병실에 계시네요. ……정신과라면, 그 일 이후로 정신에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다. 나는 다시금 할아버지에게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숨어서 지켜만 보던 나에게도. 그러니까 이거, 벌 받는 거야. 간호사에게 정신과의 위치를 물었고, 간호사는 친절하게 하얀 쪽지에 약도를 그려주었다. 곧바로 나는 쪽지의 방향대로 몸을 움직였다. 의지로 걷고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모든 것이, 무의식 중의 본능과 가까운 행동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탄 뒤에 행선지인 6층을 눌렀다. 그리고…… '정국아, 먼저 집에 가. 내일 학교에서 보자.'라며 핸드폰으로 정국에게 문자를 보내주었고.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나를 기다렸을 정국이니까. …이어 '미안해, 정국아.' 하고 문자 하나를 더 보냈다.
곧 6층입니다, 하는 딱딱한 목소리가 울렸다. 문이 활짝 열리는 엘리베이터에서 금방 내렸고, 곧 '정신과' 라는 팻말을 찾아냈다. 나는 무엇에 이끌리듯 그곳으로 발을 내밀었다. 정신과 담당 선생님들의 방 옆으로 병실이 쭉 이어져있었다. 601호. 602호. 603호. 한 칸을 지나갈 때마다 내 몸은 점차 경직되어갔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 다소 거칠게 내뱉으며 607호의 문 앞에 다다랐다. 주먹을 꽉 쥐고 참아내려고 했지만 몸은 굳은 채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병실의 문에 달린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침대에 조용히 앉아 책을 보고 있는 긴 머리의 여자 아이가… 보였다. 세경이의 얼굴을 보자마자 숨이 턱 막혀서, 주저앉아 가슴 부근의 옷을 꽉 쥐었다. 곧 눈물이 고였다가 툭, 툭, 무릎으로 떨어졌다. 병실에는 세경이만 있는 게 아니었다.
세경이의 옆에 앉아 세경이의 얼굴을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는 민윤기가 있었다. 나는 곧 흐흑, 하고 흐느꼈다가, 빠르게 입을 막았다. 세경이에게 오빠가 있었다. 기억이 서서히 돌아왔고, 영상은 세세하게 내 머릿속에서 재생되기 시작했다. 민윤기는 처음부터 나를 알고 있었다. 내가 망가지길 바라고 있었어, 민윤기는…. 내 머릿속을 괴롭히는 영상에서는, 세경이가 할아버지의 아래에서 처참하게 울부짖고 있었다.
'윤기는… 세경이 오빠인데 네가 어떻게….'
'나쁜 년….'
어지럽게, 말들이 내 머릿속을 돌아다닌다. 할아버지의 말부터… 금방이라도 죽을 듯이 위태롭게 내뱉던 민윤기의 한 마디까지.
야누스
"어제, 어디 갔었어?"
"…그냥, 그냥, 정국아…."
"말 안해도 돼, 괜찮아."
나는 정신과에서 미친듯이 빠져나왔다. 감정을 추스릴 새도 없이, 도망쳐나왔다. 그 날처럼. 그리고 다음 날 아무렇지 않게 학교에 나와 자리에 앉았다. 아이들이 괜찮냐고 물어왔고, 나는 똑같은 무게로 아이들에게 웃어보였다. 정국은 이마에 밴드를 붙이고, 후시딘을 발라 번들거리는 입술을 하고는 나에게 물었다. 나는 정국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정국은 제 머리로 내 머리를 아프지 않게 콩 찧으며 괜찮다고 말해주었고.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아냈다. 이런 것 따위로는 울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정국의 목소리가 왠지 눈물이 나올 정도로 다정했다. 울지 마, 이 바보야. 정국은 그렇게 다시 말했다.
정국아, 나는 어떻게 해야 해….
정국은 내 손을 꼭 잡았다. 기사와 공주잖아, 우리. 내가 기사해줄게. 정국은 그렇게 속삭였다. 아이들의 시끌벅적한 목소리 속에 정국의 목소리만이 또렷이 들렸다. 기사. 정국의 어깨에 기대어 눈을 천천히 감았다. 으응, 정국아. 조용히 대답하는 내 머리를 정국은 한없이 따뜻한 손길로 쓸어주었다. 곧 아이들이 조용해지고, 문이 스륵 열리는 소리가 났다. 민윤기. 민윤기….
"반장, 인사 안 해?"
"선생님, 반장 아파요."
날카롭게 물어오는 민윤기의 화살을 정국이 막아주었다. 나는 눈을 뜨지 않았고, 민윤기 또한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곧 뚜벅뚜벅, 하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렸고, 나는 직감적으로 민윤기가 내 앞으로 다가왔음을 알아챘다. 반장 안 자는 거 다 알아. 민윤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반장 아프다니까요. 정국이 다시 한 번 말했다. 나는 정국이 잡고 있는 손에 꽉, 힘을 주었고, 정국은 다른 한 손으로 내 손을 덧잡아주었다. 그럼 끝나고 나한테 오라고 전해. 민윤기의 목소리가 조금은 낮게 울리며 들어왔다. 표정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다른 아이들에게 나눠주는 무게의 표정과는 다르게 조금 더 정적이고 무거운 표정. 곧 발자국 소리가 옅어졌고, 문이 스륵하고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야누스
잠시 있다 눈을 뜨고 정국의 어깨에서 머리를 들어올렸는데, 태형이 어물쩡하게 다가와 내 앞에 섰다. 나는 의미 없는 눈으로 태형을 바라보았다. 태형은 우물쭈물 말했다. 저기, 반장…. 나 너한테 할 말 있는데. 나는 무의식적으로 웃음을 지었다. 아무런 뜻도, 무게도 없는 그런 웃음. 태형은 교실 밖으로 나갔고, 나는 뒤따랐다. 정국의 시선이 느껴져서 뒤돌아보았는데, 정국은 아무런 시차 없이 그대로 예쁘게 웃었다. 하지만 그것이 억지 웃음이라는 것은 언뜻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렇게나 어색한 웃음을 짓곤. 다 알아, 바보야. 너 지금 질투하고 있는 거….
나는 정국의 머리를 쓸며 한번 더 웃어주고는 태형이 나간 곳을 따라갔다. 민윤기에게 휘둘리는 나를 구원해줄 사람은 오직 정국이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는 것도. 정국이, 그리고 민윤기. 내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선 정국이에게 가야했다. 그건 초등학생도 알 법한 투명한 사실이었다. ……그치만 세경이에게 큰 잘못을 했다는 것에 대한 벌로 내게 다가온 민윤기에게, 나는 잔인하게 휘둘려져야 했다. 그것이 세경이에게 속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므로. 아무것도 못 본 척, 아무것도 못 들은 척. 그렇게 원래 내가 당했던 것처럼 아파하고, 상처 입는 것.
"반장, 나는 사실…."
"……."
"네가 좋아."
태형은 나를 복도로 불러내 대뜸 고백을 해왔다. 어쩌면 그에게는 눈물겨운 고백의 말이었다. 나는 처음 너 봤을 때부터 좋아했어. 처음에는 그냥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갈수록 네가 좋아졌어. 서투른 소년의 고백에 나는 고개를 푹 숙일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지금 민윤기와 정국이만으로도 벅차서, 이 아이를 도저히 받아줄 수 없는걸. 아니, 민윤기와 정국이 없었어도 받아주지 않았을지도.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태형의 떨리는 고백은 계속 됐다.
"전정국 때린 것도…! 전부 다, 다, 너 좋아해서 그랬어."
눈에 다 보이는 행동들이었으니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태형의 마음을. 끈질기게 모른 척 한 나의 노력은 다시 물거품이 된다. 태형은 제가 뭘 말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긴장해있었다. 나는 솔직히 왜 네가 전정국이랑 붙어다니는 줄 모르겠어. 전정국 그 새끼는 너 지켜주지도 못하고, 힘도 더럽게 약하고, 운동도 안 하고…. 태형은 그렇게 말했다. 지끈하고 화가 올라오려는 것을 꾹꾹 눌러담았다.
"태형아."
"…응, 반장."
"미안해, 나 너 못 받아줘…."
태형의 떨리던 몸은 그대로 굳었다. 전정국… 떄문이야? 태형이 조용히 물어왔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대답을 기다리던 태형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입술 깨물지 마, 피나겠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태형의 볼을 쓰다듬어주었다. 아이같이 볼록 튀어나온 볼이 안쓰러워서였다. 따스한 손길에 태형은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곧 종이 울렸고, 나는 '가자.'하고 태형의 손을 잡고 교실로 이끌었다. 그러나 태형은 그대로 나를 돌려세워 거칠게 키스했다. 벽에 아플 정도로 세게 몸이 부딪혔고, 태형은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입술을 물어 뜯었지만, 떼어낼 생각 없이 그 키스를 받아주었다.
반항이라도 하기를 바랐는지 태형은 제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 나를 결국 떼어냈다. 태형의 얼굴에 눈물이 번져있었다. 선생님들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다시 태형의 입술에 묻은 타액을 손으로 지워주었다. 태형아, 미안해…. 그렇게 말하고는 혼자 남겨진 태형을 남겨두고 미련없이 뒤돌았다. 그리고 소매로 내 입술을 닦아냈다. 입술이 더러워진 기분이었다. 그게 너무 서글프고 엿같아서 울고 싶어졌다.
그땐 정말 몰랐다. 이 사건이 다시 화살이 되어 나에게 꽂혀올 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