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코상, 한국에 돌아간다고 했지?
그럼 언제 가는거야?"
"아마 다음 주 내로 갈걸.. 아직 몰라."
흐응.
뭔가 맘에 안 든다는 듯 숨을 뱉는 유구 앞에서 지호는 괜히 움츠러 들었다.
"나는 지코 상이 한국에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유구는 계단 아래 늘어뜨린 다리를 위 아래로 흔들다가 빙긋이 웃으며 지호를 바라보았다.
"영원히 나랑 일본에, 있다면 좋을텐데. 그렇지?"
지호는 고개를 숙인 채로 몇 번 주억거릴 뿐이었다.
"아아- 지코상 가면 유구는 누구랑 놀아야 하나.
분명히 쓸쓸할거야-"
슬쩍 지호의 눈치를 보던 유구는 난데없이 그대로 드러누워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아이같은 유구의 모습에 지호는 웃음이 나왔다.
"있지, 지코상. 편지 쓸거지?
유구가 지코를 잊어버리지 않게."
"절대로 쓸게. 절대로.
내가 유구를 잊어버리지 않게."
그 순간 눈을 가린 유구의 팔 아래로 환한 미소가 번졌다.
"다행이다아-"
그리고서는 장난스럽게 또 와락, 앉아있던 지호의 허리를 끌어당겨 그대로 눕혀 버렸다.
한참을 나란히 누워 하늘을 바라보다가 먼저 입을 연 것은 유구였다.
"너무너무 보고 싶을텐데, 지코상이.."
"...나도."
일본에 처음 왔을 때 적응에 어려움을 겪던 지호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던 건 유구였다.
은근한 반 아이들의 이지메에도 불구하고 유구는 지호를 감싸주었고 '지코'라는 별명까지 만들어 지겹도록 불러대었다.
"지코상- 도시락 같이 먹자!"
"지코상- 숙제 해왔어? 나 보여줘!"
"지코상-" "지코상-"
처음에는 슬슬 피하던 지호도 차츰 유구의 상냥함과 자상함에 마음을 열게 되었고,
마음을 터놓고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되었다.
버티기 힘들었던 새로운 환경에서 빛이 되어준 것은 유구였다.
그런 둘에게 청천벽력처럼 지호의 귀국이라는 운명의 장난이 일어난 것이다.
지호는 물론이고 유구도 남동생처럼 아껴오던 지호가 떠난다니 울기도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그럴때마다 지호는 아무렇지 않은척 담담히 등을 두드려주었지만 속이 답답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지코상, 한국 가면 나보다도 더 좋은 친구 많이 생기겠지?"
"......"
"유구는 잊어버릴거야?"
"무슨 소리야. 절대 안 그래."
애써 까칠하게 말을 내뱉는 모습에 유구는 슬프게 웃어보였다.
"지코상은 항상 의젓하네. 유구는 울보에다 어리광만 부릴 뿐인데.."
"..."
"지코상이 꼭 유구같이 지코를 좋아해주는 소중한 친구를 만났으면 좋겠어."
"....."
"물론 나보다 예쁘게 웃는 사람은 한국에 없겠지.
그 어디에도! "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기 위해 과장된 목소리로 농담을 던지는 유구였다.
유구 말대로 유구의 미소는 참 예뻤다.
반 아이들은 그런 유구를 '햇살'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지호가 유구에게 더욱 기댈 수 있었던 것도, 지호의 냉소적인 마음을 감싸줄 수 있는 유구의 따뜻한 미소 덕이었는지도 모른다.
네 말이 맞아.
지구 상 어디에도 너 같은 미소를 지닌 사람은 없겠지.
마음과는 달리 지호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코상, 잘 지내야 해.
힘들어도 항상 힘내기. 약속이야!"
그리고 내민 손가락.
지호는 자꾸만 떨려오려는 마음을 억누르고 손가락을 내밀었다.
"잘 지낼 수 있다니까 왜 자꾸 걱정이야.
바보 유구.."
그리고는 또 다시 환하게 웃는 유구.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지호.
둘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
귀국 후, 월요일부터 학교를 다니기로 했다.
평범한 고등학교. 단순히 가까워서였다.
첫 날은 죽을 정도로 유구가 보고 싶었다.
둘째 날도 마찬가지.
일주일이 거의 지나가자 조금씩 조금씩 눈물이 마르기 시작했다.
물론 마음이 아픈 건 별개의 문제.
매일 편지하겠다던 유구에게는 아직까지 단 한통의 편지도 오지 않았다.
지호는 유구가 미우면서도 한 편으로 안쓰러웠다.
유구도 나만큼 아플까.
자연히 학교에 기대하는 마음도 없을 수 밖에.
머릿속에 온통 유구 생각 뿐인데 글씨고 뭐고 눈에 들어오겠는가.
첫 등교 길.
지호는 익숙한 노래를 틀어 귀에 꽂아넣고 버스 정류장 옆 인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 순간 막 도착한 버스에서 튕겨져 나오듯 뛰어내리는 한 사람이 보였다.
"감사합니다 기사님!! 안녕히 가세요!!"
곧이어 세찬 바람을 일으키며 뛰어가는 그 소년의 뒷모습을 지호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같은 교복이네.
키도 크고, 달리기도 빠르고.
그런데 교복은 좀 엉망이었다.
질 나쁜 앤가?
지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데 그 질 나쁜 애가 우리 반이라니.
담임 선생님을 따라 들어간 교실을 천천히 훑고난 뒤에 눈에 걸리는 것은 아침에 본 소년이었다.
모두가 자신을 향해 추파를 던져대는 와중에도 아무 관심 없다는 듯이 창밖을 바라보는 소년.
지호는 왠지 모르게 약이 올랐다.
재수없게 짝도 그 애의 친구였다.
초면에 들이대는 것도 불편하지만, 유구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손이 몸에 닿는 것은 더욱 싫었다.
친한 척 어깨에 손을 올리는 박경의 손을 무작정 밀쳐내버렸다.
그리고 느껴지는 주변의 차가운 시선.
그래, 여기는 일본이 아니다.
나의 지붕이자 기둥이었던 유구는 이제 없다.
갑자기 또 권태감이 밀려들어온다.
지호는 지금 당장 사라져버렸으면 좋겠어, 라고 생각했다.
바보같은 사내놈들은 이쁘장하게 생긴 거엔 사족을 못 쓴다.
지호 자신도 그들이 왜 자신에게 접근하는지는 알고있는 바였다.
절대 상대해 줄 생각은 없었다.
유구에게 편지 한 통도 오지 않고 있는 마당에,
이 놈들 앞에서 웃어줄 이유는 더욱 없어.
그런데 얼마 전부터는 그 녀석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뒤로는 교복도 단정하게 입는 모양이지만,
왠지 느낌이 싫었다.
지호를 바라보며 환하게 미소짓는 것도,
나긋나긋한 목소리도,
찢어진 눈과 긴 다리까지-
유구를 생각나게 만드는 그 소년이 지호는 싫었다.
"꺼져."
미술실을 찾다가 처음 나눈 대화 아닌 대화.
지호는 실수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과할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햇살보다 환하게 웃던 그의 얼굴이 차갑게 굳는 것을 보니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꼭 유구 같아서.
나를 보며 정색하는 네가 꼭 유구인 것 같아서.
뒷걸음질치듯 멀어지면서도 지호의 머릿속에는 유구 뿐이었다.
나쁜 놈. 유구 나쁜 놈.
편지 쓴댔으면서. 지금 몇 주가 지났는데.
다음 날에 보니 다행히 유권은 지호를 용서한 듯 했다.
단순하고 뒤끝 없는 성격까지도 유구를 똑 닮았다.
어제 울면서 집에 들어가니 어머니가 대뜸 유구에게 연락 받았냐고 물으셨다.
고개를 저었더니, 방금 전에 전화가 왔었다고 말하셨다.
하루에 한 통씩 꼬박꼬박 편지를 썼다고.
주소가 잘못되는 바람에 모두 돌아와 버렸다고.
내일부터 제대로 보낼테니 조금만 기다려줘- 라는, 시덥잖은 말.
지호는 직접 전화를 받지 못한 것이 너무나도 아쉬웠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였다.
유구가 날 잊지 않았구나.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 뒤로 지호는 한결 편한 마음으로 학교에 다닐 수 있었지만, 문제는 또 학교에서 일어났다.
평소에 자신들을 상대하지 않던 지호에게 앙심을 품은 사내놈들이었다.
집요한 박경의 노력 덕에 그나마 친하게 지내고 있던 것이 어느새 불순한 소문이 되어 전교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박경도 이를 알고 있었지만, 쉬쉬하는 분위기였기에 지호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 때 가장 힘이 되었던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유권이었다.
무식하게 사내놈들을 때려눕히고 대신 욕을 들으며까지 자신을 감싸는 유권을 지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여전히 반짝반짝, 빛나는 햇살일텐데.
왜 유권은 저렇게도 나를 위해 힘쓸까.
의문은 고마움이 되어, 고마움은 믿음이 되었다.
지호는 유권을 기다리느라 바로 앞에 있는 집에도 가지 않고 버스 정류장에서 유권을 기다리기도 했고,
눈만 내놓고 교실안을 들여다보는 유권을 애써 못 보는 척 하며 웃음을 참기도 했다.
미술실에서 한창 소리를 느끼며 붓질을 하고 있을 때에도 갑자기 몰려오는 이명감에 쓰러진 지호를 도와준 것도 유권이었다.
유권의 등은 넓고, 따뜻했다.
여태껏 색청 증상에 대해 털어놓았던 사람은 유구 뿐이었다.
그러나 왠지 유권에게는 말해도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유권은 자신을 믿어주었다.
어느 순간부터 미술실에 가는 시간이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서로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 둘.
지호는 애써 안 보이는 척 더욱 세심하게 붓을 놀렸고 유권은 복도에서 숨죽이고 서있었다.
문을 사이에 두고 같은 흐름을 따라 숨쉬는 둘.
처음에는 오해했지만, 지호는 점점 유권이 좋았다.
이제는 띄엄띄엄 편지를 주고 받는 유구보다도 유권이 머릿속을 훨씬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느 날 밤, 지호는 확신했다.
난, 김유권을 좋아한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우리 모두가 아는 이야기.
그러나 이야기는 끝나지 않고 계속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