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나날은 나에게 오히려 어울리지 않았던 걸까.
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며칠 밤을 새가며 설득해 남을 수 있었다.
눈에 눈물까지 글썽이며 떠날 수 없다는 내 모습에 적잖이 놀라셨겠지.
그 후로는 모든 게 무서우리만큼 순탄했다.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않았고,
두 눈 가득한 애정으로 바라봐주는 사람도 있었다.
가끔 경이까지 셋이 놀 때도 있었다.
그런 날은 여느 남고생 못지 않게 시끌벅적한 분위기였기에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물론 권이는 둘이 있을 때를 더 좋아했지만.
모든 건 완벽했다.
물론, 그 문자 빼고-
한참을 뒤척이던 새벽이었다.
이불을 걷어찼다가 뒤집어 썼다가 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진동했다.
바보같이 권이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일찍 자는 아이인데.
'OO고 게이 커플 1호-'
언젠가 결국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너무 빨라.
급하게 발신자를 확인해봤지만 모르는 번호였다.
그리고 곧이어 같은 번호에서 전화가 왔다.
'지이잉-'
"..여보세요?"
"화질 좋지? 어때, 잘 보여?"
"..누구신데.."
"아, 내 번호 없지?"
귀에 낯익은 목소리다.
기억해내야해-
"그러게 내가 번호 알려달랬을 때 알려줬으면 좋았잖아.
몰라볼 일도 없고."
애매한 추측이 점차 확신으로 바뀌어갔다.
그 놈이다.
유권에게 얻어맞고서도 몇 번씩이나 내게 껄쩍대던 그 놈.
"너 이 새x, 무슨 수작이야."
"아- 말 참 예쁘게 하네."
수화기 너머에서 킬킬대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내가 아무리 쎈 척을 하려고 노력해도, 지금 내 위치는 을이다.
"너 이거 또 누구한테 보냈어."
"아직 너한테밖에 안 보냈어."
예상치 못했던 대답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아직 방법은 있겠지.
"딜을 좀 하자고."
"하고 싶은 말이 뭔데."
"한번만 자자. 그럼 없던 일로 할게."
"미친 새x."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 뒤로 몇 차례 협박하는 문자가 왔지만 무시해버리면 그만이었다.
누구에게, 또 몇명에게 보낼까.
지금이라도 잘 구슬려볼까하는 마음이 드는 내 자신도 증오스러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권이를 위한 방법일까 싶었다.
아무 탈 없었던 권이의 일상을 송두리째 망쳐버리진 않을까?
나만 조용히 있으면, 그러면 모든 게 제자리로-
-하지만 권이의 행복을 위해 나를 더럽혀선 안돼.
내가 권이의 행복이니까.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서 나는 조금 울었다.
곧 있으면 아침이 오겠지.
-
옷을 갖춰 입으시고 식탁 의자에 앉아계시는 어머니를 보자 숨이 막혔다.
어머니께도 보냈구나. 미친 자식.
"일어났네, 아들."
".."
"엄마는 너 믿어. 그런데 선생님이 오라고 하시네."
다리 힘이 풀려 주저앉을것만 같았다.
간신히 벽에 손을 얹어 버텼다.
어머니는 놀란 표정으로 일어나 달려오시고는 나를 부축하셨다.
"많이 놀랐지? 괜찮아 우지호.
엄마는 네 편이야. 아빠도 그럴거고. 권이도 그래.
심호흡 크게 하고 옷 입어. 학교 가자."
어머니께서 하신 말은 감동받아 마땅한 말씀이었지만 내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권이가 내 편이라고?
내가 모든 걸 망쳐놨는데?
이게 팔 부분인지 목 부분인지도 모르게 교복을 끼워 넣으면서도 머리는 복잡했다.
여기서 그냥, 뿅하고 사라져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
교무실을 열고 들어갈 때부터 묘한 분위기가 감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호 어머니. 여기로 오시면 됩니다. 지호도 안녕."
입꼬리만 올려 억지로 웃는 선생님의 모습에 구역질이 날 것 같아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일단, 저도 그 문자 받았습니다."
역시.
사실 선생님께서 문자를 받았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떻게 대처하는지가 중요하지.
"물론 사실이라고 믿지는 않습니다만,
만약 사실이라면-"
그리고 몇 차례 헛기침.
어머니는 표정의 변화 하나 없이 선생님을 바라보고 계셨다.
"최초 유포자를 먼저 처벌한 뒤에,
김유권 학생과 지호의 신변을 보호해야 할 겁니다."
아이들이 워낙 짓궂어야죠, 하고 덧붙이신다.
"어머니께서 원하신다면 법적 처벌을 진행하셔도 되구요.
허위사실 유포죄에 성립하니-"
"네 선생님,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희가 한국에 오래 있을 수 없어요."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선생님은 물론 나까지도 얼어붙었다.
방금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신거지?
"어, 어머님. 방금 그 말씀은?"
"지호 아빠가 일본에 재발령받았어요.
조만간 저희는 일본으로 돌아가게 될 것 같아요."
"아.. 그러시군요."
나는 어머니의 표정을 살피려고 노력했지만 어머니는 내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으셨다.
무슨 생각이신걸까.
"유권이가 걱정이네요.
그냥 훌쩍 떠나버리는 것 같아서요.
고맙다는 인사도 저번에 한 번 집에 부른 게 다인데..
너무 염치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네? 어머니께서.. 집으로요?"
"어머, 모르셨어요?
사진보고 아무 말 없으시길래 유권이한테 들으신 줄 알았는데."
"아, 네.. 그렇죠.
사실 아직 권이가 학교에 안와서요."
순간 내가 너무 눈에 띄게 움찔하지 않았나라는 걱정이 들었다.
나는 선생님의 말에 반응했고, 어머니도 느끼셨다.
살며시 어머니의 손이 내 손을 잡으셨다.
"아시다시피 권이가 지호랑 많이 친하잖아요.
근데 그 동안 얼굴 한 번 제대로 못 본 것 같아서 제가 집으로 불렀어요.
지호가 낯도 가리고 해서 적응하기 어려워했는데 권이가 많이 도와줬다고 들어서요.
선생님도 알고 계시죠?"
선생님께서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주억거리셨다.
선생님의 눈은 나나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아셨겠지, 내가 우리 반에서 어떤 존재였는지도.
결국 모르는 척 하셨던 거다.
"그래서 고맙다는 인사도 할 겸 불렀어요.
이게 이렇게 터무니없는 상황이 될 줄은 몰랐네요."
"어머님.. 뭐라 드릴 말씀이.."
"증거는 전부 있으니 확실한 대응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저는 우리 지호랑 권이, 짓지도 않은 죄인 취급 당하는 꼴 절대 못 봅니다."
고개 숙인 선생님의 모습이 애처로울 정도였다.
그러나 역시 어머니는 눈길도 주지 않더니 나의 손을 더욱 꽉 잡으셨다.
"마지막을 이렇게 하고 가서 저희도 마음이 안 좋네요.
권이한테는 선생님께서 잘 말씀해주시리라 믿어요."
"네, 그럼요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믿음직스러운 목소리를 내려고 애쓰시는 모습이 마냥 우스꽝스러웠다.
조금만 기분이 괜찮았더라면 웃어버렸을지도 몰라,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서류는 애아빠 회사에서 조금 앞당겨야겠네요.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예 어머님. 들어가 보세요.
아 참.. 어머님!"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던 선생님께서 별안간 정색을 하시며 어머니를 부르셨다.
"권이.. 말인데요.
워낙 지금이 예민할 시기기도 하고 갑자기 지호가 떠난다니 마음이 뒤숭숭할거에요.
권이가 자리잡을 때까지는.. 지호의 소식을 모르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담임으로써의 생각입니다."
몸도 떨어져 있는 마당에, 뭐라고?
연락을 하지마?
나는 막판에 뒤통수를 얻어맏은 기분이 들어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네, 잘 알겠습니다. 늘 염두에 두겠습니다."
어머니는 지극히 사무적인 말투로 대답하셨다.
우리는 그대로 문을 열고 나왔다.
답답한 가슴이 툭 트이는 기분이었다.
나는 별안간 밀려오는 서러움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기 시작했다.
그저 묵묵히.
어머니와 나는 복도를 걸어갔다.
-
집에 돌아와 퉁퉁 부은 눈을 하고 식탁에 앉았더니 어머니께서 우스갯소리를 하셨다.
"우리 아들, 이럴 때 보면 참 못생겼어.
내 배로 나은 자식 맞나 싶어."
웃을 기분은 아니었지만 피식 웃어버렸다.
없어서 못 먹던 카레가 지금 내 눈 앞에 놓여 있었지만 입맛이 없었다.
휘휘 숟가락만 젓고 있는데 어머니의 눈길이 느껴졌다.
오늘 하루종일 마음에 걸렸던 게 있었다.
끝내 어머니께 숨길 수는 없어.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권이랑 저, 그냥 친한 친구 사이 아니에요."
잠시 동안의 정적이 흘렀다.
나쁘지 않네, 아직까지 얻어맞지도 않았고.
"..그럼?"
"저희 사귀어요. 두 달 정도 됐어요."
어머니는 배신감에 가득 찬 표정이셨다.
19년을 키운 아들이 이런 말을 하는데 기분이 좋으실 리는 없겠지.
"그럼 왜 이제 말해?"
"..어머니께서, 너무 놀라실 것 같았어요.."
"난 너무 배신감이 들어."
도저히 어머니를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아 고개를 숙인 채 애꿎은 카레만 휘저었다.
"애인 생기면 엄마한테 바로 말하기로 했잖아?"
잠깐.
이 반응은 내가 예상했던 반응은 아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뭐라구요?"
"엄마랑 중학교 때 분명히 약속했었지. 애인 생기면 바로 말해주기로.
근데 두 달이나 숨겨?"
기가 차서 웃음만 나왔다.
아무리 쿨한 엄마래도 그렇지, 아들이 남자친구가 생겼다는데 왜 말하지 않았냐며 성내는 엄마라니.
핀트가 완전히 어긋났잖아.
"왜 이렇게 권이 얘기를 많이 하나 했어.
그래, 눈치 못 챈 엄마가 둔한거지."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다가 곧 정신을 차렸다.
"아무렇지 않아요?"
"당연히 조금 놀라긴 했지. 그런데 말했잖아, 엄마는 항상 네 편이야."
"으, 뭐야. 완전 오글."
장난을 치자 어머니의 걱정도 조금 풀리신 것 같았다.
미소를 띄신 얼굴이 예뻐보였다.
"아들, 그것도 사랑이야.
다른 사람들은 아니라고 할 지 몰라.
그래도 엄마한테 달라지는 건 없어.
엄마한테 너는 우리 아들 우지호, 그게 다야.
물론 이제 권이한테 연락하면 안돼.
엄마는 그것도 지호가 사랑을 위해서 해야 되는 거라고 생각해.
우리는 떠나버리면 되지만 권이는 너와의 추억들이 남아있는 장소에서 혼자 얼마나 힘들겠어.
아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또 다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환하게 웃는 그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눈에 잔뜩 힘을 줬다.
"..응."
"그래, 우리 아들. 그동안 버텨줘서 고마워.
이제 엄마랑 같이 해 보자.
데워줄게. 마저 먹어."
표정이 한결 밝아지신 모습을 보니 내 마음도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핸드폰에는 계속 알람이 오고 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무음 모드로 바꾸어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