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떠난 지도 벌써 3년이 흘렀다.
반신반의하며 태일이 형의 작업실에 들어간 게
엊그제 같은데,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생각보다 관대했던 부모님의 반응 덕분에 따로 나와 사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물론, 태일이 형이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것도 한 몫했겠지만.
그 뒤로 쭉 작업실과 학교를 전전하며 단순하기 그지 없는 삶을 살았다.
다행히 작업 스타일도 잘 맞아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형은 의외로 부지런하고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사실, 부지런할 수 밖에 없었다.
"지호야. 이번 주 자선행사 내놓을 그 그림 있잖아.
다 좋은데 전반적으로 너무 어두운 느낌이야.
형이 봐줄테니까 수정 한번 보자."
"네, 형."
배워가는 것도 많았고, 실력에 과분하게 주어지는 기회도 많았다.
나는 지금의 생활이 너무나도 좋았다.
물론, 권이가 한번도 생각난 적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태일씨! 잘 봤어요.
역시, 생각지도 못한 걸 내놓던데.
이쪽은 누구?"
"우지호라고, 제가 키우는 작업실 동생이에요.
옆에 풍경화 두 점은 이 친구 작품입니다."
"뭔가 느낌이 다르다 했어. 신선하던데?
앞으로도 기대할게요, 우지호 씨."
"아, 네, 감사합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건 생각보다 즐거운 일이었다.
전보다도 밝아져가는 내 모습을 보고 부모님도 좋아하셨다.
물론, 제 밥값은 스스로 하고 산다는 점을 가장 자랑스러워 하셨지만.
"어 지훈씨! 안 그래도 방금 전시 끝났어요!
아니 아직 못 먹었어요오..
온다구? 지금? 진짜루?
너무 좋다아항항항항~ "
태일이 함박웃음을 짓는 모습을 보며 지호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표지훈 씨 오신대요?"
"응! 방금 공항 도착했다고 저녁 같이 먹재!
너무 멋있지 않니? 항항항"
"형, 남은 건 제가 치울게요.
저 혼자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먼저 가 보세요."
"정말?"
전시 부스에는 태일과 딱 맞는 사이즈의 캔버스 몇 점과 이젤이 정신없이 널부러져 있었다.
태일은 잠시 고민하더니 또 다시 함박웃음을 띄며 지호에게 대답했다.
"그럼, 부탁해!"
"예 형, 좋은 시간 보내세요!"
태일이 부산스럽게 자신의 짐을 챙긴 뒤 쌩하니 떠나버리자 지호는 들고 있던 이젤을 내려놓고 벽에 기대 앉았다.
"힘들다.."
전시를 위해 몇날며칠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던 그였다.
작업에 열중하느라 끼니는 건너뛰기 일수.
태일에게 단 한번도 티를 낸 적이 없을 뿐 지호에게는 잠깐의 휴식이 절실했다.
'지잉-'
"누구지.. 형인가?"
갑자기 울리는 진동소리에 허둥지둥 바지 주머니를 더듬던 지호는 화면에 뜬 번호를 보고 얼어버렸다.
유구였다.
-
"지호."
".."
"..화났어?"
지호가 갑작스럽게 온 전화를 받자마자 유구는 대뜸 갤러리에 왔으니 문을 열어 달라고 했다.
덕분에 차로 15분 거리 전시회장에 있던 지호는 허둥지둥 물건을 챙겨 택시를 잡아 탔다.
근 4년 만이었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니었는데 둘 사이에는 어색한 기류만이 감돌았다.
"말, 안 할거야?"
".."
유구의 머리는 노란 물이 다 빠져버려 이제 거의 흰 색을 띄고 있었다.
흰 머리카락을 나풀대며 지호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어린 날의 유구와 다를 것이 없었다.
"지호.."
벌써 세 번째 지호를 보채듯 부르는 유구의 목소리를 지호는 애써 무시했다.
둘은 똑같은 커피를 들고 나란히 앉아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사이좋다고 할만한 풍경이었다.
"여긴 어떻게 알았어?"
시무룩해있던 유구의 표정이 지호의 입이 열리자마자 눈에 띄게 밝아졌다.
마치 말을 걸어줘서 너무 기쁘다는 표정같았다.
"어머니가 알려주셨는데."
그 순간 지호의 고개가 푹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 어머니.
"..갑자기 왔다고, 그렇게 연락하면 어떡해.
나도 내 일이 있어."
"..미아안..."
유구는 다시 시무룩한 표정이 되어 입술을 쭉 내밀었다.
여전히 중학교 시절 그 얼굴 그대로였다.
솔직히 말해, 지호는 유권을 완전히 지울 수 없었다.
그답지 않게 술에 취한 날이면 전화번호부에도 없는 유권의 번호를 외워 치고 전화를 걸 뻔한 적도 많았다.
물론 그 때마다 쓰러져 버리는 바람에 흑역사는 면했지만.
그러나 유구는 지호의 첫사랑이었다.
아무리 불러도 아련한 그 이름, 첫사랑.
유구를 생각하면 언제나 푸르게 맑은 그 미소가 떠올랐다.
마음을 나눈 진실된 친구이자 첫사랑.
지호는 그런 유구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지호쨩이 그렇게까지 화내는 이유를 모르겠어."
생각에 잠겨있던 지호는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유구가 흔들림없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연락을 받아주지 않았던 건 지호잖아.
나 꾸준히 전화도, 편지도 썼는걸.
어느샌가부터 답장이 오지 않아서 나도 지쳐버렸던 거야."
"그건.."
사실이었다.
학기초까지만 해도 누구보다 유구의 연락을 기다리던 지호였다.
주소지가 잘못되어 유구의 편지가 오지 않았을 때도 화를 냈던 것은 지호였다.
그런 지호가 유권을 만나고 유구에게 소홀해졌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미안해."
"괜찮아, 지호. 별 일도 아니잖아.
우리 사이에 뭘-"
또 다시 햇살같이 웃는다.
지호는 제 자신이 미워졌다.
유구와 웃는 모습이 닮아서 유권을 싫어했었다.
이제는 유구의 웃는 모습을 보면 유권이 떠오를까봐 도저히 바라볼 수 없었다.
왜 항상 모든 일은 이렇게 꼬여 버리는 걸까.
"응.."
"어째서?"
"어째서 봐 주지 않는거야?"
"..."
"이제 유구가 웃는 것도 싫어?"
"그런 게 아냐."
지호는 억지로 웃어보려 애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입술만 달싹이는 그를 유구는 지긋이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 화 안 낼테니까."
".."
"정말, 나 화 낸 적 없잖아. 지호쨩에게."
몇 분 간의 정적이 흘렀다.
곧 지호가 고개를 돌려 유구를 바라보았다.
"일본을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
".."
"그래서 널 잊어버리려고, 네가 웃는 것도, 내가 널 좋아하는 것도 다 없었던 일이 되기를 바랬어."
".."
"그래서 한국에서 새로운 친구가 생겼는데, 처음에는 널 닮아서 싫어했었어.
그런데 아니었어.
유구와 달리 화도 잘 내고, 애들도 패고 다니고.
멍청이같지."
"..그래."
"그런데 그게 다 나를 지켜주려고 한 거였어.
죽고 싶을 때마다 그 애가 날 살려줬어."
"지호."
"색청이라는 것도 믿어줬어.
유구도 처음 들었을 때 많이 놀랐었지?"
"지호, 그만 말해도 돼."
"내가 일본을 떠날 때 유구를 잊어버리려고 했던 것처럼 잊어버리고 싶은데,
잘 안돼.
사실은 내가 잊어버리고 싶지 않은지도 모르겠어.
그런데 유구가 내 앞에 나타나니까 무서워.."
지호의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유구는 다 식은 커피를 내려놓고 지호를 끌어 안았다.
그리고선, 토닥토닥 지호의 야윈 등을 다독였다.
"괜찮아, 괜찮아.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난 언제나 지호 곁에 있을테니까.
좋은 친구로 영원히 함께 있을테니까.
친구라는 것만으로도 좋아. 그걸로도 충분해."
지호의 숨소리가 점점 잦아들자 유구는 천천히 지호의 등을 쓰다듬었다.
"고마워, 유구.."
"자꾸 간지럽게 그런 말 할래?
그나저나 날 닮았다니, 한국에 그런 인물이 있단 말이야?"
지호는 젖은 눈을 한 채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마음 속에서 묶여있던 무언가가 툭,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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