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그대를 만나러 갑니다 (넌 내게 반했어 OST)
정전국 씨의 노트를 들고 계속 고민했다.
이걸 줄 것인가, 아니면 정전국 씨의 흑역사를 볼 것인가.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내용을 보고 싶었지만 내 마지막 남은 양심은 그러면 안 된다고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양심은 개뿔."
난 그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말았다.
첫 장부터 화려한 배경 소개로 시작하는 그의 글은 정말이지...
"재밌는데?"
생각보다 재밌었다.
나는 그 글을 계속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미 내 마음속의 양심 따윈 사라진지 오래였고 정전국 씨는 내게 잊힌 사람이었다.
이 글보다 뭣이 중헌디!
"2050년, 이곳은 사상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무슨 어린애가 이런 고급진 어휘를..."
그리고 그 소설의 끝은
"그래서 투명 드래곤은 이 곳의 명예 용사로 임명되었다. 해피엔딩이네."
웬만한 소설이 그렇듯 해피엔딩이었다.
"오, 좀 재밌는데? 내 타입이야."
생각지도 못한 그의 글쓰기 실력에 놀라며 번외 같은 건 없나, 싶어 다음 장을 넘기는 순간,
"어? 전화 왔다."
벨 소리가 온 집안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여보세요?"
'이름씨!"
"헐."
'네?'
"아, 아니에요! 어쩐 일이세요?"
이 시간에 전화를 해봤자 엄마 정도겠지, 싶었는데 김석진 씨라니.
나는 놀란 마음을 쓸어내렸고 김석진 씨는 내게 집에는 잘 갔는지, 오늘 저녁은 맛있었는지 등등을 물었다.
'그럼 지금은 뭐 해요?'
"지금요?"
'네.'
나는 정전국 씨의 노트를 가만히 보다 말했다.
"책 읽어요!"
진짜 가식의 끝을 달리는구나, 성이름.
'무슨 책인데요? 나도 지금 책 읽고 있었는데.'
정전국 작가의 '세계 서열 0위 투명 드래곤의 전설'이요.
"그냥 뭐... 읽고 있어요."
차마 이걸 말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말했다간 그날로 내 이미지는 끝이야.
'그래요? 나는 '경제의 숨은 비밀'이라고 경제에 관한 책인데...'
내 귀에 환율이라느니, 주식이라느니 뉴스에서 많이 들어본 단어가 들리긴 했지만... 김석진 씨, 그거 알아요? 아무리 설명해도 난 못 알아 들어요.
"아, 그, 그렇구나- 아-"
이런 영혼 없는 리액션이라니.
내 머릿속은 어느새 저 노트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고 내가 어느 순간부터 안 듣고 있다는 걸 알아챈건지 김석진 씨가 말을 멈추곤 내 이름을 불렀다.
'이름 씨?'
"네?"
'이런 말 재미없죠? 내가 너무 내 얘기만 많이 했네. 이 말을 하려고 전화한 게 아닌데.'
"네?"
'내일 주말인데, 바빠요?'
"아뇨!"
'그럼 우리 내일 만날래요?'
내일 당장 안 하면 안 되는 엄청난 일이 있더라도 오빠가 보자면 봐야죠!
내일 아침에 보자는 말을 남기고 끊긴 전화에 혼자 배시시 웃으며 들고 있던 노트를 껴안았다.
"어떡해! 어떡해! 어떡!... 아!"
너무 세게 껴안는 바람에 노트 모서리에 팔이 찍히긴 했지만 그것마저 기분 좋을 만큼 지금 내 기분은 최상이었다.
그래서... 이 노트를 어떻게 하지...
창문을 살짝 열어보니 불이 꺼져있는 게 이미 자는 것 같아서 다시 조용히 창문을 닫았다.
"음. 나중에 주지, 뭐."
언젠가 줄 타이밍이 생기겠지, 싶어 노트를 소파 위에 올려놓았다.
"씻고 자야지-"
내일 있을 김석진 씨와의 데이트를 기대하면서.
"어디가요?"
아침부터 예쁘게 차려입고 집에서 막 나오는데 빨래를 널던 정전국 씨와 마주쳤다.
"데이트 하러요!"
"아, 그 김석진 씨?"
"네!"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곤 계단을 내려가니 평소와 다르게 평상복 차림인 김석진 씨가 보였다.
역시 얼굴이 되니까 무슨 옷을 입어도 옷이 얼굴 빨이구나.
새삼 그의 얼굴에 감탄하며 문을 열고 나가자 김석진 씨가 웃으며 차 문을 열어주었다.
진짜 완벽한 차문남이야.
서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움직이는 차 속의 공기는 오늘따라 달콤하고 편안했다.
데이트는 생각만큼 평범했다.
밥 먹고, 영화 보고, 산책하고, 커피도 마시고. 아, 옷도 사줬다.
진짜 괜찮다고 했는데 자기가 사주고 싶다며 기어코 사줬다.
망설임 없이 카드를 꺼내는 그의 모습에 다시 한 번 반해버렸다.
정말 완벽한 내 이상형이야. 능력 좋고, 잘 생기고, 키 크고... 이 남자, 갖고 싶다...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을 보다 보니 도착한 집 앞에서 김석진 씨는 내게 오늘 어땠는지, 다음 주엔 뭘 하는지 등을 물었다.
"그럼 시간 날 때마다 전화해요. 보고 싶으니까."
보고... 싶으니까... 보고 싶으니까...
얼굴이 확 붉어지는 걸 느끼며 밤이라 내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거에 정말 감사했다.
아마 낮이었다면 이런 내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겠지.
"네. 그럼 가볼게요."
"조심히 들어가요."
창문 틈새로 내게 인사하는 그에게 맞인사를 해주고 집에 들어오자 그제야 긴장이 탁 풀리며 온몸에 힘이 빠졌다.
"아- 드디어 집에 왔다."
옷을 갈아입을 힘도 없어 소파에 축 널브러져 있다가 손에 딱딱한 게 집히기에 뭐지, 하고 보니 어제 그대로 둔 정전국 씨의 노트였다.
귀를 기울여보니 소리가 들리는 걸로 봐선 아직 깨어있는 것 같아 지금 줘야겠다, 싶어 노트를 열고 창문을 열었는데
"엥?"
정전국 씨만 있을 줄 알았던 내 예상과는 달리 정전국의 부모님으로 추정되는 분들이 케이크에 불을 붙이고 계셨다.
아니, 이게 무슨 상황이야...
"죄, 죄송합니다!"
놀란 마음에 황급히 창문을 닫고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닫힌 창문을 등지고 서있으니 울리는 문자음에 핸드폰을 확인하니
[부모님 가시면 연락할게요. - 옆집 정전국]
정전국 씨의 문자였다.
창문 틈새로 들리는 대화에 나도 모르게 귀를 댔다.
원래 남의 대화는 엿듣는 게 아니지만...
'누구야?'
'옆집 사람이요.'
'그래? 친한 사이 같던데. 불러서 인사라도...'
'안 친해요. 여기 너무 가까워서 가끔 자기 집 창문 열다가 저희 집 것도 열고 그래요. 원래 조심성이 없는 여자라.'
뭐라...?
'아- 저번에 그 아가씨구나? 옆집에 이사 왔다던.'
'네.'
'좀 잘 해주고 그래. 오랜만에 온 이웃인데.'
'네.'
대화로 보아하니 정전국 씨네 부모님도 내가 이사 온 걸 아는 듯했다.
이게 무슨 쪽팔림이야 진짜...
예쁜 모습만 보여드려도 부족할 첫 만남에 이게 무슨 추태... 엥? 나 무슨 상견례 가니? 뭘 예쁘게 보이고 뭐가 부족해. 뭔 소리야, 대체.
쓸데없는 생각이 더 커지기 전에 고개를 힘차게 저으며 다시 노트를 소파 위에 던졌다.
나중에 함부로 창문연 거 미안하다고 사과해야지.
일단 씻고.
"와, 진짜 이 세상에 화장품 없었으면 나 어쩔 뻔했냐."
화장을 지운 내 자연인의 모습을 보며 화장술의 위엄에 감탄을 하고 있을 때쯤, 누군가 내 창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창문을 열자 머리를 긁적이는 정전국 씨가 보였고 이내 내게 뭔가를 내밀었다.
"부모님은 가셨어요?"
"네."
"근데 이건 뭐예요?"
그가 건넨 건 다름 아닌 케이크 한 조각.
"와, 이거 나 먹으라고 주는 거예요?"
"네."
"잘 됐다. 나 초코케이크 엄-청 좋아하는데!"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케이크 옆에 있던 포크로 케이크를 떠서 먹기 시작했다.
분명 지금 먹으면 살로 갈게 뻔하지만... 원래 맛있는 건 0칼로리랬으니까.
"근데 오늘 생일이에요? 왜 말 안 했어요?"
"생일이 뭐 별거라고..."
"별거죠! 당연히 별거죠!"
내 입장에서 생일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날이었다.
다른 날도 아니고 딱 1년에 한 번! 내가 태어난 날인데! 그런 날이 별거라니!
"미리 말했으면 내가 작은 선물이라도 사 왔을 텐데."
"말 하려다가... 데이트 간다길래."
"데이트랑 선물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괜히 신경 쓰이게 하기 싫어서요."
"에이- 나 멀티태스킹 잘 해요. 앞으로는 이런 큰일 있으면 꼭 얘기해요. 알았죠?"
왠지 아까 아침에 정전국 씨가 엄청 우물쭈물하더니. 생일이라고 말하려 했고만.
그래도 이대로 넘기긴 서운해 뭐 갖고 싶은 거 있냐고 묻자 없다고 대답하기에 나중에라도 생기면 말 하랬더니 혹시 모르니까 저축 많이 해두란다.
참나, 대체 뭘 갖고 싶다고 할 생각이길래.
생일 축하한다는 얘기를 하긴 해야겠다, 싶어 시계를 보니 정확히 11시 59분 40초.
"그럼 이만..."
창문을 닫으려는 정전국 씨를 손으로 막고 가만히 시계만 보고 있으니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정전국 씨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게 중요한가.
"6,5,4..."
"지금 뭐 하는..."
"2, 1! 생일 축하해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12시를 알리는, 정전국 씨의 생일이 끝났음을 알리는 뻐꾸기가 울었고 나를 멍하니 쳐다보는 정전국 씨를 향해 말했다.
"내가 그쪽 생일 마지막으로 축하해준 거예요. 어때요?"
"뭘 어떻긴 어때요. 입에 묻은 초콜릿이나 닦아요."
내 얼굴을 가리키며 말하는 정전국 씨의 말에 거울을 보니 언제 묻었는지 덕지덕지 붙은 초콜릿에 민망함이 밀려왔다.
민낯인데다 초콜릿이라니... 이불킥 감이다, 진짜.
"아, 나 갖고 싶은 거 있어요."
"뭔데요?"
거울을 보며 묻은 걸 닦고 있는데 갖고 싶은 게 있다는 그의 말에 그를 보자 그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소원권."
"네?"
난 또 엄청 비싼 걸 얘기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소박한 그의 소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무조건 들어줘야 돼요. 무조건!"
무조건을 강조하는 그에게 알겠다고 대충 열댓번을 얘기해준 후에야 그는 만족한 듯 창문을 닫았다.
남은 초코 케이크를 먹으며 소파에 앉으니 그제야 노트가 생각났다.
"맞다! 정전국 씨! 노..."
급하게 노트를 집어 들고 창문을 열자 벌써 캄캄해진 집 안에 그냥 창문을 닫았다.
"다음엔 진짜 줘야지."
언젠가 또 줄 타이밍이 있겠지, 하고 생각하며.
정국에 뷔온대 사담 |
댓글에 정국이와 전국이가 같이 나와 헷갈리시는 분이 계시더라고요!
작가의 입장이 나오는 부분에서는 정국이라는 이름으로, 이름이의 시점이 나오는 부분에서는 전국이라는 이름으로 표시됩니다!
오늘 대형 떡밥이 나왔어요. 작가는 떡밥을 던져버린 것이고 독자님들은 그것을 확 물어버린 것이여.
저 오늘 부산행 보고 왔어요. 무서워요. 재밌는데 진짜 무서웠어요. 헌혈도 했어요. 뿌듯하더군요. 그럼 내일 봐요! |
너와 나, 30cm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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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 암호닉 안 받아요
p.s. 2 - 정전국 아닙니다. 전정국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