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전 남친이 직장상사 05
저 슬퍼보이는 눈빛과 얼굴을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나는 분명 과거에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다. 하나의 기억이 떠오르자 몇 가지의 기억이 줄줄이 따라 머릿 속에서 이어졌다. 지금의 양복 차림이 아닌, 여름 하복 와이셔츠와 바지를 입고 난간에 위태롭게 서 있는 소년의 모습이. 난 그 소년을 보자마자 팀장님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떠오른 기억의 일부에 꼭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생채기가 나 있는 소년에게 작은 샌드위치에도 생색을 내며 서투른 위로를 해주던 소녀의 모습과, 소녀에게 자신의 치부를 모두 털어놓는 소년까지 전부 다. 방금 겪은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모두 듣고있던 소녀는, 바로 나였다. 고등학교 시절의 나.
기억이 떠오른 상태로 팀장님을 바라보자, 기억 속의 소년과 같은 얼굴이었다.
" 나 일부러 여기로 데려 온 거에요? "
" ...기억은 좀 났어요? "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우리 첫 만남이었어요. 멍하니 팀장님의 얼굴만 바라봤다. 기억은 이런식으로 떠오르는 거구나. 내가 과거에 특정한 일이 있었을 때 그와 비슷한 일을 겪을 때 기억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지금의 팀장님이 그렇게 어리고 교복을 입었던 시절이 있었고, 개구장이 같은 지금 모습과는 사뭇 다르게 슬픈 눈을 하며 세상을 등지려 했을 때가 있었다. 그 때 정말 그대로 팀장님을 보내버렸다면 이렇게 기억조차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남았을 지도 모른다.
" 우린 그 이후로 사귄거에요? "
" 아마도. "
" 누가 고백했어요? "
" 내가 했죠. "
조금 예상했던 답이였는데, 직접 그 사람한테 듣게 되니까 간질거리는 기분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내 반응에 혼자 막 웃어댔다. 왜요, 부끄러워요? 팀장님은 이런면에서 눈치가 빨랐다. 드러나버린 것 같은 내 마음에 고개를 홱 올려 째려봤다. 진짜 날 좋아하기라도 하는 건가, 봉이 씨는. 아무리 째려봐도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내 정곡을 찌르는 말들만 해 온다. 부정 할 수 없어서 억울했다.
" 빨리 기억해내야 내가 사과도 하고, "
" ... "
" 편하게 연애 할텐데. 그죠. "
여름의 햇살이 무더웠던 것인지, 저 말을 듣고 나서인지 내 볼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대답하지 않아도 이미 저 말에 대한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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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햇빛이 너무 세서 잠시 비상계단에 들어왔다. 습기가 꽉 찬 기분에 인상을 찌푸리고 손부채를 하고 있는데 그런 나에 비해 팀장님은 양복 마이까지 입고도 멀쩡해 보인다. 나는 더위를 많이 타는 편인데, 팀장님은 별로 그렇지 않은 것 같다.
" 안 더워요? "
" 별로. 많이 더워요? "
" 네. 저 진짜 더위에 약하거든요. "
더위에 약하다니까 오히려 내 옆에 더 붙어온다. 질색을 하면서 밀어내니까 웃으면서 더 붙어온다. 세상 모든 짐을 짊어진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그 소년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능글맞아질 수 있을까. 하여간 못 말린다는 생각을 하고있었는데 갑작스레 크게 들려오는 벨소리에 화들짝 놀라 몸을 살짝 떨었다. 아, 미안해요. 작게 말하고는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는데 어째서인지 내가 볼 수 없게 살짝 돌려서 확인한다.
" 누군데요? "
" 그냥, 아는사람이에요. "
잠깐 전화를 받는다는 제스처를 하고는 통화버튼을 누르는데, 계단이 좀 울려서인지 통화내용이 다 들렸다. 목소리는 분명 여자였고 어딘데 전화를 바로 안 받냐, 지금 팀장실에 와 있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팀장님을 바라보자 나와 눈을 맞추더니 왜 함부로 연락도 없이 찾아오냐면서 짜증을 낸다. 문득 아까 점심시간에 본 그 여자가 생각났다. 지금 통화중인 사람이 그 여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소리도 딱 내가 본 그 나이대의 목소리인 것 같았다. 물론 여자친구라고는 생각 하지 않았다. 이 사람의 마음은 확실하다는 게 느껴졌으니까. 괜히 내가 이렇게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겠다 싶어서 편하게 통화하게 해주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단에서 내려가려는데 탁 하고 손목이 잡혔다. 어느새 통화를 끊은 팀장님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 어디가요? "
" 아, 통화 편하게 하시라고.. "
" 괜찮아요. 전화 다 했어요. "
다시금 울리기 시작하는 벨소리에 괜찮다며 손을 살짝 놨다. 전화가 다시 오는 걸 보니 통화 도중에 일방적으로 끊은 것 같았다. 괜히 나 때문에 그런 것 같아서 얼른 자리를 피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 저 밀린 업무도 있어요! 빨리 가봐야 돼요. "
" 미안해요, 이 사람은 진짜.. "
" 저 괜찮아요, 진짜로. 편하게 통화하고 오세요. "
내가 괜찮다며 피해주고 있는 건데도 괜시리 서운해졌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감정이 내 감정이 아닌 게 되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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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로 내려오자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뭐지 싶어서 순영 씨에게 물어보니 미래의 사모님이 오셨다길래 무슨 소리냐고 되물으니까 회사 회장님의 딸이란다. 나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졌다. 그 순간 팀장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금까지 나에게 연애하자는 말을 한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얼굴을 확 굳힌채로 팀장실로 들어갔다. 순영 씨에게 회장님 딸이 왜 여기에 왔냐고 물으려 했는데 열린 팀장실 문에서 슬쩍 보인 젊은 여자에 입을 다시 다물었다. 저번에 본 그 여자가 확실했다. 안 봐도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 팀장님.. 만나러 온 거에요? "
" 그런 것 같아요. 이미 몇 번 만났다는데요? "
" ... "
" 팀장님한테 못 들었어요? "
아무 것도 듣지 못 했다. 아까 통화한 사람도 분명 회장 딸이 분명했다. 하지만 분명 팀장님은 원치 않게 회장님 딸을 만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직접 나에게 말해주진 않았지만 팀장실에 들어가기 전 잠시 나와 마주친 눈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자신을 믿어달라고. 하지만 조금 억울해지는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럼 나는 아직까지 팀장님과 못 해본 데이트나, 스킨쉽을 저 사람이랑 했을 수도 있는 거잖아. 이런 게 그사세라는 거구나. 보이지 않는 벽이 나와 팀장님 사이를 막아 놓고 있는 것 같았다.
" 봉이 씨는 괜찮아요? "
" 에이, 제가 여기서 화내면 그게 더 이상한거죠. "
" 분명 팀장님도 원하지 않는 관계일거에요.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요. "
" ..네."
마음과는 달리 따라주지 않는 기분에 답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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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시간이라 모두들 분주히 짐을 챙겨 사무실을 나가고 있었다. 잠깐 쳐다본 팀장실은 불이 꺼져 있었다. 안에 안 계시는 건가 싶어서 슬쩍 다가가니 때마침 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는데도 당연히 나는 누군지 알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네, 팀장님.]
[내 번호 저장해놨어요?]
[아니요. 그냥 딱 팀장님일 것 같았어요.]
[사무실이에요?]
[네. 이제 퇴근하려구요.]
[잠깐 옥상으로 올래요?]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잠깐 한 통화에서도 이 사람이 많이 지쳐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서둘러서 옥상으로 가니 팀장님이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건지 팀장님은 고개를 돌렸다. 마주친 눈에 머쓱하게 웃고는 다가갔다. 가까이에서 본 팀장님의 얼굴은, 이유는 몰라도 위로가 많이 필요해보였다. 꼭 내가 떠올린 그 기억 안의 소년처럼 슬픔이 가득했다.
" 나한테 할 말 없어요? 아까 그 여자 관련해서. "
" ..없어요. "
" 오해하는 건 아니죠. "
" 네. 오해 안 해요. "
" 부모님이 원하셔서 만나고 있는 거에요. "
'부모님' 이라는 단어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저번에 기억을 떠올렸을 때도 이런 기분이였었다. 기억속의 소년도 부모님에 의해 세상과 등지려 했었다. 팀장님은 자신이 원해서 회장의 딸을 만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부모님의 압박으로 인해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만나며 기계적인 관계를 유지해왔다. 아직까지도 팀장님은 부모님이라는 존재에 짓눌려지고 있었다. 그 때의 내가 소년에게 그랬듯이, 지금의 나도 이 사람의 손을 잡아줘야 했다.
" 곧 정리할 거에요. "
" ... "
" 당연히 알겠지만. "
" ... "
" 내가 좋아하는 건 봉이 씨인 거 알죠. "
예쁜 밤하늘 밑에서 들려오는 고백에 웃음이 났다. 정말 설레서 죽을 수도 있다는 건 이런 걸 보고 하는 소리일 것이다. 아까 혼자 기분 상해 했던 것들이 모두 풀리는 것 같았다. 자신과의 추억을 기억도 하지 못하는 못난 나를 아직까지도 좋아해주고 있는 사람. 자신에게 내밀었던 손을 아직까지도 잡고 있는 사람. 어쩌면 난 이 암흑같은 기억 속에서 빛을 만났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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