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와 당신 사이
w. 채셔
이제까지 저를 가르쳐준 선물로 뭐든 사주겠다기에 질질 끌려오다시피 온 신발 매장. 누구나 그렇듯 정국이를 본다. 훤칠한 키에 재단해놓은 것만 같은 비율, 연예인인 것만 같이 느껴지는 외모. 정국이를 데리고 밖에 나오면, 나는 왠지 모를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을 느끼고는 했다. 그들은 우리를 연인 사이로 바라보았고, 나는 흡사 잘생긴 남자친구를 둔 평범한 승리자가 된 기분이었기 때문에. 사실 정국이가 구두를 들고 뭐라고는 하는데, 귀담아 듣지는 않았다. 항상 이렇게 잡 생각을 하게 된다. 안 좋은 습관인데. 나는 곧장 생각을 헤쳐버리고 정국이의 말에 경청했다.
"이게 진짜 겁나 비싼 거라니까."
"아, 그래?"
"또 이상한 생각하고 있었죠."
정국이는 다정스레 내 머리를 주먹으로 콩 친다. 웃어주길래 나도 따라서 빙그레 웃어줬다. 습관처럼 빨개지는 정국이의 귀. 나는 신기하다며 귀를 만지작거렸고, 정국이는 기겁하며 뒤로 물러선다. 조금 어색해져서 내가 앞서 걸었고, 정국이는 계속 헛기침을 해댔다. 이게 썸을 타고 있는 거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쯧.'하고 혀를 찰 것이다.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으니까. 사귀자는 말은 서로 하지 않지만, 언제나 자연스럽게 연인처럼 스킨쉽을 한다. 왜인지 우리는 외길 다리를 조심스레 건너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누나, 우리 여기 나가요."
정국이는 앞질러 가던 내 손목을 붙잡고 어딘가로 향한다. 나는 또 다른 매장이겠거니 하고 다시 잡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전정국과 나 사이. 다시금 생각해보면 정국이는 꽤 많은 애정 표현을 해왔던 것 같다. 사귀자는 말만 하지 않았지, '예뻐요.', '다른 남자는 믿으면 안 돼요.', '밥은 꼭 챙겨 먹어야 돼요."와 같은. 사귀는 사이에 하는 간지럽고 설렘 분자들이 막 돌아다니는 것만 같은 그런 말들. 그래, 정국이와 나는 사이를 걷고 있다.
누나와 당신 사이, 딱 그 사이.
정국이는 정처 없이 몇 바퀴를 돌다가 엘리베이터 앞 작은 방 안의 소파에 앉는다. 2인용 소파인 것 같다. 딱 2명만 앉을 수 있는. 아, 그러고보니 커플 석이라고 버젓이 이름이 붙어있다. 여기 이름도 커플 방. 신기해. 이런 게 있었나.
정국이는 침을 꼴깍 삼켰다. 얼굴이 상기되어 있어 나는 정국이의 이마를 만졌다. 아픈 게 아닌가 걱정이 됐지만 열은 없다. 부끄러워 하고 있는 걸까. 나는 그런 정국이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었다. 예전에 펌을 해서 그런지 머릿결이 많이 상했다. 조금 더 길면 자르라고 해야지. 정국이는 내 손을 꼭 잡고 있다가 차오르는 땀에 손을 뗐다가를 반복했다. 나는 정국이의 손을 떼고,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정국이의 어깨는 언제 기대도 넓고 넓다. 요즘은 딱딱한 것 같기도. 그도 그럴 것이 정국이는 요즘 운동 광이다. 나를 만나지 않는 날이면 온종일 헬스장에서 시간을 보내곤 한다. 예전에 학교 수업 시간이나 나와의 과외 시간을 빼면 온종일 독서실에서 공부를 했던 것처럼. 나는 딱딱해진 정국이의 어깨가 불편해 결국 똑바로 앉았다. 정국이는 나를 묘하게 바라보다 홀린듯 나에게 점점 다가온다. 그리고…
키스한다.
아랫입술이 촉촉하다 못해 말랑하다고 느껴질 때쯤 정국이가 다시 나에게서 멀어진다. 방금의 느낌은 형용할 수 없다. 첫 키스니까. 정국이는 이제 막 수능에서 벗어난 '무늬만' 고등학생이고, 나는 아직 고등학생에 머물러 있는 것만 같은 '무늬만' 대학생인데. 그러니까… 서로의 첫 키스일지도 모른다. 정국이도 공부만 했으니.
"그렇게 남의 귀 만지고 그러면 안 돼요."
"…나는."
정국이의 눈이 묘하게 풀려 있다. 빤히 정국이를 바라보다 눈을 돌렸다. 계속 바라보기에는, 내가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우리는 마치 사귀기를 예약해둔 예비 연인처럼 서로를 다시 바라보았다. 약속은 하지 않았지만, 약속한 것처럼 아주 뻔뻔하게.
"나랑…."
"……."
"사귈래요?"
정국이는 조용히 말한다. 누가 들을까 걱정하기보다는 연인끼리의 속삭임에 가까운 그런. 정국이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정국이는 망설이다 '누나.'하고 멋쩍게 웃으며 다시 말한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은데, 정국이가 보는 나는 그렇지 않아 보일 거다. 나는 한참을 정국이를 바라보다 수줍게 끄덕인다. 정국이의 초조하던 표정이 비로소 맑아진다. 나는 정국이와의 미래를 생각한다. 정국이는 나와 같은 학교를 지원했다. 계획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원래 하나에 집중하면 거기에서는 1등을 차지하고는 마는 애라, 수능에서도 똑같았다. 오히려 하향 지원을 한 꼴이 됐다. 뭐, 어찌 됐든. 그래서 우리는 CC가 되는 걸까.
"아니다."
"으응?"
"우리 법은 지켜요."
"…응?"
"나 대학교 들어가면."
"……."
"사귀는 거예요."
나는 꾹 참던 웃음을 터뜨렸다. 정국이는 웃는 나에게 또 기습적으로 키스한다.
그래, 우리는 아직 누나와 당신 사이. 딱 그 사이에 머무르며 걷는다.
덧붙임
대학교 가면?
이런 훈남 없슴다..
똥글이니까 도망 가야지.
내일은 진짜 글 쓸게요. (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