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연정 w. 채셔
08. 마치 그 자리에 있던 것처럼
웃었다. 처음으로. 정국의 인생에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그 웃음을, 오늘 처음으로 보았다. 정국은 저 밑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간질거림을 참을 수 없어 미소를 흘려보냈다. 어느새 정국과 여주의 사이에 연모지정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정국은 부러 신음을 흘렸다. 방황하던 눈동자가 그제야 상처 쪽을 향하더니, '송구하옵니다.'하고 재빨리 손을 놀렸다. 따뜻한 헝겊으로 열심히 제 탄탄한 몸을 닦아내는 작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당황한 게로군. 그 사소한 것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정국은 상처 부위의 땀을 열심히 닦는 그 손가락들에 당장이라도 입을 맞추고 싶었다.
"어릴 적 꿈이 하나 있었다."
"…무엇입니까."
"연모하는 여인을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주는 것이었다."
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사내들이 그런 꿈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지요. 지켜주고픈 여인네 만나 일평생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말입니다. 여주가 그리 말하자 정국은 꿈에 젖은 듯 혹은 환상에 적셔진 듯 아련한 눈길로 여주를 바라보았다. 그 눈길이 문득 부담스러워 여주는 황급히 정국의 눈을 피해버렸다.
"그래, 그 흔한 꿈을 어찌 내 아비는……."
"……."
"지키지 못하였지."
"……폐하."
"어찌 그리 허망하게 제 연정을 보내야 했지."
정국이 또 한 번 여주의 앞에서 제 속살을 까 보였다. 그 속살에 어찌 그리 상처가 많아 보이던지 여주는 그 생 또한 가여워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꼭 너를 지킬 것이다. 꼭 이룰 것이야, 그 꿈. 정국은 의지에 찬 음성으로 말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순간 정국의 눈에 눈물이 차 보였으나 여주는 그것을 못 본 체 해야 했다. 그 눈물을 본다면 제가 닦아주고 싶을 것만 같아 이를 참아야 했던 것도 있고, 이 사내 또한 제게 눈물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맹세하마. 정국은 여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한 말투로 말해왔다. 그 말에 은근한 안정감이 생겨 여주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사실 기대고도 싶었다. 허나 여주는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석진도… 그리 말했으니까. 또한 제가 정국에게 기댄다면 석진에게 들 죄책감을 어떻게 풀어낼 방법이 없으니.
'이제 제가 정말 부인의 지아비라는 말씀이지요.'
'…예, 방금 가례도 올렸지 않습니까.'
'제 마음이 이리 뛰는 걸 보니 참이긴 한가 봅니다.'
'정말로 전하의 부인이 되었습니다.'
'제가 꼭 부인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헌데 정말로 제 목숨 줄을 걸어 여주 저를 지켜줄 줄이야. 참으로 이 인연은 기구하다 못해 잔인했다. 제 앞에서 기분 좋은 눈을 하고 있는 이 사내가 제 지아비를 죽였다. 명예와 목숨, 사내로서의 자존심까지 모두 거둬버렸다. 헌데… 저를 살려준 이가 바로 이 사내라니. 미워할 수도, 원망할 수도 없는 이 인연을 어찌 해야 하나. 여주는 제 마음속 어딘가에게 물음을 던졌으나 대답을 들려오지 않았다. 여주는 아무 말 없이 정국의 몸을 세심히 닦아줄 뿐이었다. 그저 이 혼란의 밤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며.
폭군의 연정
여주는 가만히 걸었다. 밤새 황룡전에 있다 나와서는 한숨도 자지 못해 어지러웠으나 이리 바람을 쐬는 것이 좋겠다 싶어 나온 것이었다. 제법 쌀쌀했으나 침상에 있다보면 머리가 복잡해져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태형은 그러한 여주의 걱정에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아무래도 밤을 샜던 것이 걱정이 되어 태형은 여주의 뒤에 바짝 붙어섰다. 설령 혼절하기라도 한다면 재빨리 들어 안아 의원을 부를 수 있도록.
"태형아."
"예."
"너는 아무리 생각해도 풀리지 않는 답이 있다면 어떻게 하느냐."
"…결국은 마음이 따르는 쪽이 있습니다."
"……그렇더냐."
"예, 온전히 마마의 마음에 맡기십시오. 그것이 답입니다."
혹여 그 답이 틀렸다 하더라도, 저는 맞다 말씀 드릴 것입니다. 저는 오로지 마마의 편이 되어드릴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 가는 대로 하십시오. 태형은 꽤나 진지하게 여주에게 간언했다. 그 간언에 거짓은 추호도 없었다. 마음. 여주는 마음이라는 말을 되뇌어 보았다. 마음이라는 말을 입밖으로 꺼내었을 때 조금씩 움직이는 쪽이 있었다. 여주는 다시 걸었다. 깊은 한숨에 태형은 여주에게서 조금 떨어져 걸었다. 어찌 되었든 혼절하기 전까지 머리를 굴릴 여주의 성품을 훤히 알고 있었으므로. 그렇기에 태형은, 혼절한다면 제 발이 닳더라도 의원에게 바로 데려갈 테니 그 어지러운 마음부터 정리하기를 바랐다.
한참을 걷다보니 태자전 궁정이었다. 이제 쓰는 사람이 없어 조금은 스산해졌으나 어찌 되었든 매일 관리하기에 궁정은 아직도 아름다웠다. 허나 궁정에서 벌어졌던 일이 또렷이 기억나기 시작했다. 사내의 더듬거리는 느낌이 생생이 살아날 때는 정말 최악이었다. 결국 여주는 무너져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이내 스르륵 쓰러지는 제 등을 당연하게 받아드는 손길이 있었다. 태형인 줄 알았으나 시야가 완전히 잠기기 전, 힘겹게 바라본 사내의 얼굴은… 정국이었다. 이번에도, 정국이었다. 괜찮으냐. 입술을 물며 놀란 눈을 하고 있는 정국은 마치 그 자리에 있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제 등을 받치고 서 있었다.
"어찌 여기에 네가."
"………폐하."
"…여기에 좋은 기억이 무에 있다고."
"………."
"여 봐라, 의원을 부르거라! 어서."
그 당연하고 태연한 손길에 정국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꼭 너를 지킬 것이다. 꼭 이룰 것이야, 그 꿈. 맹세하마. 여주는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허나 귓속에는 정국의 말이 끊임없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하여 제 꿈속의 사내 또한 당연히 정국이었다.
덧붙임
이삐들,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오늘도 만나서 고맙고 또 반가워요.
암호닉은 꼭 달고 댓글 달아주세요. ♥
* 암호닉을 받기 전에 물갈이도 예정되어 있답니다 T-T 활동하지 않으시면 암호닉이 삭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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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군은 제가 메일링을 이미 받는다고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암호닉이 아니셔도 전번 메일링 글 캡쳐본이 있으면 보내드립니다.
단, 번외본은 암호닉만 메일링이 진행됩니다.
*** 제가 예전에 진행했던 연재 방향과는 조금 달라질 예정입니다.
원래 큰 이야기 갈래가 두 개가 있었는데, 재업 전의 글에서는 조금 급해지는 감이 있어 속도를 조금 늦추고, 나머지 갈래는 외전으로 풀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