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에.. 제가 이 폰 주인 친군데여,’
얘 오늘 안 들어갈 것 같은데여…
시은의 말에 정한의 미간이 적잖게 찌푸려졌다. 제 머리를 쓸어올리며 소파에 완전히 몸을 기댄 정한이 다시금 목소리를 냈다.
“...왜요?”
‘아- 계약 조건이! 만취하고 들어가면 안된다잖아여~’
“………….”
‘그래서 아마 오늘은- 동방이나 과방에서 잘 것 같은데…’
“…저기요.”
‘에,’
자리에서 일어나 제 목과 어깨 사이에 휴대폰을 낀 채 통화를 이어나가는 정한. 정한은 제 방에 들어가 의자에 걸려있던 외투 하나를 집더니 말했다.
그래서 거기가 어디죠.
“…………”
아익 막잔 막잔. 아 야 어디가는데-. 마지막까지 자신을 부르는 순영의 외침을 뒤로한 채 술집을 나온 원우였다. 조별과제때문에 짜증이난 건 여주뿐만이 아니었다.
자신과 정한 둘 사이를 모르는 여주는 그래. 모르니까 과제 해줘서 가져왔다 쳐. 하지만 정한의 경우는 달랐다. 자신이 그 과제를 보면 화가 날 수 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여주의 과제를 대신 해 포스트 잇까지 떡하니 붙여놓은 것이,
“…야아 여주야-. 정신 차려보라고~”
“으어, 시으나. 나 사랑하지…”
“아 당연 사랑하지-..“
“…………”
누가봐도 자신의 화를 돋구려는 게 분명했다. 원우는 가게 앞에 쪼그려 앉아있는 여주를 보곤 걸음을 멈췄다. 여주의 앞에 똑같이 쪼그려서는 여주의 몸을 붙잡고는 말하는 시은. 원우가 고개를 기울이며 둘을 바라봤다.
“금방 온다그랬따고… 나 룸메가 빨리 안 오면 문 안 열어 준댔다고- 택시비 니가 내줄 거냐고~”
“어어- 가라고오~“
”니가 정신을 차려야 가지!“
”나 여기! 여기서 자고 이쓰께…그럼 나 사랑할 거지?”
”…미치인..사랑은 한다만, 나더러 어떻게 가라고오..“
시은이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시은의 시야에 검은 컨버스 신발 하나가 자리했다. 고개를 들어 원우를 바라보는 시은. 시은이 몸을 일으키며 작은 탄식을 뱉었다.
“어..”
“가봐.”
“…에?”
“내가 볼 테니까 가보라고.“
늦었다며.
”…아 에, 에… 가 감사합니다-..“
”…………“
”…………“
시은이 원우를 보곤 짧게 답하더니 룸메에게 지금 출발한다는 전화를 하며 멀어졌다. 원우는 쪼그려 앉아있는 여주를 내려다보더니 슬그머니 다리를 굽혔다. 낮은 목소리가 여주를 향했다.
“야.”
“………..”
“정신 좀 차리지? 아직 3월이라 입 돌아가기 좀 좋은데.”
“…에,”
“………..”
“뭐야.”
“뭐가.”
“…재수탱이.”
“..뭐?”
여주의 말에 안그래도 날카로운 눈이 더 날카로워졌다. 여주는 원우를 째려보더니 다시 고개를 툭 떨궜고 원우가 헛웃음을 치더니 여주의 어깨에 슬며시 손을 올렸다. 자세를 바로잡아주기 위함이었다.
“야 그마-,”
“저기여!”
“………..”
그러자 여주가 고개를 휙 들고, 다시금 원우의 눈을 맞췄다.
“니가 몬데?”
“…후회할 짓 안 하는 게 좋을텐데.”
“니가 모온데 내 자료가 필요없다 있다 난린데!”
“정확히는 니 자료가 아니지.”
“뭐? 사람이든 자료든 싫어? 어?”
“…………”
“너 사람 싫다는 걸 그렇게 돌려말하면, 내가 못 알아 들을 줄 알았냐?”
내가 싫다는 말에! 얼마나! 민감한데! 나 아주 탐지기야!
“…돌려 말 한 적 없어.”
“허? 그럼 뭐 진짜 내가 싫다고 한 거라고? 누군 좋은 줄 알아!? 니 사랑은 줘도 안가져~!”
“………..”
“…너어, 아주 아주 아주아주아주 재수탱이야.”
“………..”
여주가 원우의 어깨를 잡고 흔들며 말했다. 조금은 가까운 거리. 시선이 반쯤 나가버린 여주의 눈을 또렷하게도 맞추던 원우가 말했다. 살면서 몇 뱉어보지 않은 단어를.
“실수했네, 내가.”
“..뭐?”
“사람 중에 넌 없던 걸로 할게.”
“………..”
“미안해.”
“여주야.”
“………..”
“………..”
미안하다는 원우의 말 뒤로 정한의 목소리가 여주를 향했다.
제송함미다… 내쫓지만 말아주세여. 에? 제발려 아직 방을 못 구했어여..
여주가 정한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올 때 주문을 외우듯 웅얼웅얼 거렸다. 정한은 아무말 없이 여주를 침대에 눕혔다. 힘든 내색 하나 하지 않고 방불을 끈 정한. 거실의 불빛이 새어들어와 은은하게도 둘을 감쌌다. 원우만큼 낮진 않지만 훨 다정하고도 나지막한 목소리가 퍼졌다.
“원우도 같이 마신 건 아니지?“
”…………“
”여주야.“
”…미쳐따고 제가.. 그랬겠어여..“
”…………“
”…………“
“다음부턴 연락은 받을 정도로 마셔. 세상이 흉흉해.”
“…………”
정한의 말에 여주가 감고있던 눈을 떴다. 눈커풀이 반쯤 감겨 꽤 오묘해보이는 눈동자가 정한을 향했다. 눈이 은근하게도 촉촉했다.
“모지,”
“…………”
“감정박사 김여주 데이터에 업는 표정이다.”
“…………”
“…실망인가.”
“…………”
“미운털인가,”
“…………”
“선배 저 미운가여, 실망핸나요,”
“…………”
“아. 그럼 안되는데.”
사랑 받아야 하는데.
툭-, 관자놀이를 거치지도 않고 떨어져버린 눈물. 흰 이불을 적잖게 적셨다. 숨소리에도 목소리에도 어느 한 곳 울음이 묻어난 곳이 없었다. 울음에 익숙한 사람마냥.
정한은 또 다시 사랑을 찾는 여주에 한발짝 다가가 침대 밑으로 무릎을 굽혔다. 여주의 촉촉한 눈동자를 알아차렸다. 차가운 정한의 하얀 손이 열감이 꽤 오른 여주의 눈 위로 포개졌다.
”울지마.“
”…우는 것도 미운가,“
”아니. 내가 울음에 약해.“
”…………“
”…………“
”…………“
”…………“
”…전원우한테도 그랬어?“
”…………“
”사랑 달라고 했어?“
”…………“
아니요.
”…………“
”…………“
”…왜요,“
”…그럼 오해하기 딱 좋네.“
내가.
“…………”
“뭘 그렇게 민망하단 표정을 지어. 뻔뻔하게 해.”
“…저 그렇게 염치없는 캐릭터는 아니라서..”
“염치없어야 뻔뻔한가.”
“네?”
“재밌는 캐릭터가 뻔뻔할 수도 있잖아.”
“제가 재밌는 캐릭턴가요?”
“응.”
요즘 티비보다 너가 더 재밌더라 난.
장난기가 가득한 정한의 말에 여주가 그제서야 표정을 풀었다. 주말 아침, 거실에서 티비를 보던 정한은 같이 밥이나 먹자며 해장국을 시켰다. 한국인처럼 소파에 기댄 채.
“그렇게 마셔서 뭐하려고.”
“…그냥 짜증나서 그랬어요.”
“봐주는 것도 한 두 번이야. 알지?”
“그럼요.”
“…원우는 왜 왔대?”
“아, 몰라요. 아무래도 지나가던 길 아니었을까요?”
시은이가 아는 사이도 아닌데.
“어제 시은이라는 친구랑 둘이 마신 거야?”
“네.”
“…………”
“…………”
“아 근데 밥은 제가 사드려야하는 거 아닌가요. 과제도 해주시고 추태도 받아주시고.”
“그러게.”
“어이쿠, 이걸 또 받으시네 우리 선배님.”
“그럼. 그런 김에 이번에 재밌는 영화 나왔다던데.”
“그래요? 하긴 요즘 영화 값이나 밥값이나.”
”오늘 약속 없으면 먹고 영화보러 가자.“
”전 좋죠.“
”근데 여주야.“
”네?“
”집에서 마셔.“
”…술이요?“
”응.“
”방에서 처량하게 혼술하라고요?“
”나 있잖아.“
”에이, 또 뭔 추태를 감당하시려고.“
”한 사람만 감당하면 좋잖아.”
“…………”
“왜 갑자기 표정이 심각해져?”
“제 술주정이 그 정도로 안좋은가 곱씹어보는 중이에요.“
”이 봐. 개그캐 맞다니까.“
”진짜로. 약간 심각한데?“
”심각할 필요 없어.“
그냥 내가 좀 듣고싶어져서 그래. 자꾸 생각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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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