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민규) 김여주 어디갔어?
지훈) 이정도 살았으면 게시판 보는 습관 좀 들여라.
민규) 대화가 더 좋잖아-
원우) 카페 갔어. 작업할 거 있다고.
느지막이 일어난 민규가 거실 소파에 앉아있는 아이들을 보곤 물었다. 궁금증이 풀린 건지 부엌에 가 시리얼을 말아 거실로 나온 민규가 비어있던 일인용 소파에 앉았다.
무릎 위에 아슬아슬하게 시리얼 그릇을 올려두곤 휴대폰을 꺼냈다. 어깨와 볼 사이에 휴대폰을 고정시킨 민규가 시리얼을 먹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민규) 어디야~!
-나 카페. 게시판 안 봤어?
민규) 심심해~ 빨리 와~
-나온지 얼마 안 됐어-. 너 이제 일어났어?
민규) 그게 중요해~?
-그럼 뭐가 중요해? 너 내가 밤낮 안 바뀌게 ㅈ-,
민규) 작업 열심히하고 있다가 올 때 연락해-
지훈) ㅋㅋㅋㅋㅋㅋ지 불리해지니까 끊는 거 봐
원우)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민규) 아주 잔소리 대마왕이야. 어떻게 서른이 되어서도 잔소리가…
원우) 여주가 벌써 서른이라니. 난 새삼 저렇게 나이 얘기하면 놀란다니까.
지훈)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내가 서른 넘긴 것도 놀랍지만 애들도 앞자리가 삼이라는 게…
민규) 이제 애 아니라니까? 형들 우리를 그렇게 애 처럼 볼 게 아니야-
지훈) 그럼 뭐해.
하는 짓이 딱 애인데.
2.
민현) 계속 여깄었어?
여주) 아, 쫌 됐을 걸? 한… 한시간 됐나.
민현) 날이 좋긴하지.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
여주) 그치. 퇴근하는 거 볼라고 앉아있었어.
여기 있으면 저어기 가로등부터 애들 퇴근하는 거 오빠들 퇴근하는 거 보이거든.
지수의 테라스. 여주가 손가락으로 담장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민현은 그 손가락을 따라 보더니 여주를 바라봤다.
민현) 왜? 퇴근하는 거 보고싶어 그냥?
여주) 처음엔 그랬거든?
민현) 응.
여주) 근데 맨처음에 석민이가 가장먼저 퇴근하잖아.
그래서 봤는데 애가 좀 털래털래 힘없이 오는 거야. 근데 마당에서 내가 ‘석민아-’ 하니까 활짝 웃더라. 물론 기분은 좋은데 그게 보기 좋았다기 보단… 그냥 마음이 쓰였어.
그래서 혹시 그 다음에 퇴근하는 사람도 그럴까? 해서 계속 앉아있었지.
민현) …그래서?
여주) 근데 마지막 오빠까지 전부 다 그랬어.
죄다 무표정에 터덜터덜. 근데 이름 부르면 활짝 웃어.
민현) 집이 좋아서 그래. 여기 오면 행복해서.
여주) …아.
민현) 왜?
여주) …………
민현) …………
여주) 음.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정적이 딱히 불편하진 않은 듯 두 사람 다 노을이 지고 있는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누우런 하늘이 보라빛으로 물들었다. 푸른 빛으로 물들기 직전이었다. 저녁으로 무엇을 먹느냐는 이야기들이 밖에서 오가는 듯 소란스러웠다. 그제서야 여주가 입을 열었다.
여주) 이런 말이 어떻게 들릴 지, 예상이 가서 말하기 좀 그렇긴 한데,
민현) …………
여주) 어쩌면 난 여전한가봐.
민현) …………
여주) 여기가 좋아서 활짝 웃었다는 생각보단,
나처럼 감추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어서, 혹시 다들 나처럼 힘든 건가 싶어서 다들 퇴근하는 모습 계속 보고있던 거였거든.
3.
승관) 그 자가비 있잖아? 엉? 그거 사와 그거.
석민) 자가비 말고 또 있잖아 그 초코인데 겁나 촉촉하고 빨간색 봉지에 담긴. 그거도 존맛이래.
순영) 난 그 초코송이 말고 죽순? 모양으로 생긴 과자. 그거 맛있다더라.
승철) 야 애 돌아올 때 캐리어 터지겠다 뭘 그렇게 시켜-
저녁식사가 끝나고 나서 2층에서 벌어진 보드게임 판이었다. 창균은 부루마블을 하다가 문득 떠오른 출장에 곧 일본에 간다는 말을 꺼냈고 아이들은 이때다 하며 자신이 먹고싶은 것들을 뱉어댔다. 옆에 누워 만화책을 보던 승철은 보다못해 입을 열었다.
창균) 난 별로 살 건 없어서 괜찮아.
순영) 살 거 없다잖어~
창균) 여주는 뭐 필요한 거 없어?
창균이 누워서 휴대폰을 만지고 있는 여주를 향해 물었다. 여주가 휴대폰을 힘없이 내려놓고 창균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여주) 나아는 없는 듯?
창균) 잘 생각해봐.
여주) ….일본…
창균) …………
석민) 너 그 달걀 캐릭터 좋아하잖아! 그거 사다달라 그래-
창균) 달걀?
여주) 구데타마라니까.
창균) 구데타마?
여주) 엉. 근데 안사와도 돼. 그냥 좋아한단 거지..
창균) 먹을 거는?
여주) …흠.
창균) 먹을 걸 말할 너가 아니지. 알아서 사올게.
여주) 안사와도 된다니까 참.
짧은 대화를 끝으로 2층에는 승철이 만화책을 보다가 감탄하는 소리, 부루마블팀이 주사위를 굴려대는 소리가 오갔다. 이후로는 민규가 씻고 할리갈리를 손에 든 채 여주의 옆에 앉았다. 민규가 여주를 흔들며 말했다.
민규) 할리갈리 하자.
여주) 오. 오랜만에 좀 끌리는데?
여주가 휴대폰을 두곤 몸을 일으켰다.
민규) 메트로놈 켜고 할래?
여주) 뭔 소리야?
민규) 박자감 있잖아.
여주) 또 어디서 이상한 걸 보고 왔어 민규야…
민규) 아니 진짜 이렇게 하면 더 재밌다니까.
민규가 휴대폰을 들어 메트로놈을 켰고 둘은 박자에 맞춰 종을 쳐댔다고…
4.
정한) …깜짝이야.
여주) 엏ㅎㅎㅎ 놀랐어?
정한) 아무것도 안 켜고 뭐해?
물 마시러 내려온 정한이 어둠 속 소파에 덩그러니 앉아있는 여주를 향해 물었다. 별 대답이 없는 여주에 정한은 물을 마시곤 다시 부엌에서 나와 여주의 옆에 앉았다.
정한) 무슨 생각해?
여주) ….창균이 따라서 일본갈까.
정한) …갑자기?
여주) 그냥. 뱉어본 말이야.
정한) ………….
여주) …오빠도 아직 그래?
정한) 뭐가?
여주) ………….
여전히 이맘때 쯤이면 막 보고싶고, 먹먹하고, ….아직도 그래?
정한) …………..
여주) …………..
정한) ….아니.
이젠 안 그래.
의외의 대답에 여주가 고개를 돌려 정한을 바라봤다. 창 밖에서 새어들어오는 빛이 은은하게 정한의 얼굴을 비췄다. 정한이 그런 여주의 눈을 맞추곤 말했다.
정한) 소중한 사람을 잃은 사람들이 나중에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뭔 지 알아?
여주) ………….
정한) ….뭐 어쩌겠어. 산 사람은 살아야지.
여주) ………….
정한) 난 그 말이 이해가 안됐어. 죽을 듯이 힘든데, 어떻게 그런 긍정적인 말이 나오지.
여주) …………..
정한) 근데 그건 긍정적인 말이 아니더라. 그냥 체념이지.
여주) …………..
졍한) 체념이야. 이젠 돌아오지 않는다는 거 완벽하게 아니까.
정한이 씁쓸히도 웃었다. 여주는 그 입꼬리를 따라 올리진 못했다.
여주) …오빠는 행복해?
정한) …………
여주) …………
정한) …행복했는데, 너가 또 슬퍼하는 거 보니까 좀 슬퍼지네.
우리 여주, 갑자기 왜 또 슬퍼졌지.
정한이 고개를 기울이며 여주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여주가 따듯한 정한의 두 눈동자를 보다 시선을 떨궜다.
여주) 나 제외시켜줘.
정한) …뭐를?
여주) …오빠 행복에 내가 관여되고 싶지 않아.
정한) ………….
여주) …내가 행복하지 않다고 오빠도 안 행복한 건, 그건 너무 슬픈 일이야.
정한) …같이 행복하면 되잖아.
여주) ………….
정한) …우리 그러는 중 아니었나.
여주) …맞아.
정한) ………….
거실에 찾아온 정적, 여주의 고개가 점점 숙여져 이젠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툭, 투둑, 여주가 제 바지 위로 눈물을 떨궜다. 한 번의 훌쩍임에 정한의 자세가 바뀌었다. 정한의 품에 안긴 여주가 목소리에 물기를 덜어내며 말했다.
예전보다 자주 행복한 건 사실이라고. 오빠들이 있었기에 여태 살아있는 거라고. 그런데 사실 불쑥불쑥 자기 혐오가 튀어나와 새벽에 자신을 괴롭혔다고.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노력하는 걸 헛되게 하기 싫어 말하지 않았다고.
근데 원래 오래걸리잖아, 우울증이라는 거, 몇 년을 약 먹는 사람도 있대. 그니까 실망하지마. 응? 오빠들 탓이라고 생각하지말고, 노력 안 했다고도 생각하지 말고… 그냥 그렇다고. 내가 요즘 이렇다고 말해야 할 것 같았어. 아까 전에도 민현이오빠랑-…
결국 아이처럼 끅끅거리며 제 마음을 털어놓은 여주였다. 시린 봄의 밤이었다.
5.
민현) 둘이 뭔 일 있었어? 넌 새벽까지 깨어있고, 여주는 죽은 듯이 자고.
피곤한 얼굴로 마당 흔들의자에 앉아있는 정한. 그 옆에 앉은 민현이 물었다.
정한) 생각 중이야.
민현) 뭐를.
정한) 방법이 잘못됐나, 뭐 그런 생각.
민현) …무슨 방법?
정한) …어쩌면 우리의 노력이 여주한테는 부담일 수도 있겠어.
민현) …………
정한) …………
민현) 그렇다고 무관심은 더 가슴아파.
정한) …맞지.
민현) …………
민현) 내 말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정한) ………..
민현) 난 어느정도 만족해.
사람이라는게, 어떻게 행복만 하겠어. 정작 우리들도 안그런데, 여주한테 행복만 하라고 바라는 건… 좀 모순적이지.
사람마다 기본 텐션이 다르듯, 여주의 기본적인 감정이 다를 수 있어. 우린 그걸 심해지지 않게 옆을 지키는 거고.
많이 좋아졌잖아. 자해도 덜 하고, 완전히 어두워지는 그런 날들이 일년에 몇 번 있지만서도 많이 줄은 것도 사실이고,
민현) …다 필요없어.
정한) ………..
민현) 너도 알잖아. 여주한테는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그냥 우린 여주가 살아있음에 감사하다는 걸.
6.
여주) 조심히 다녀와.
창균) 응.
석민) 과자 까먹지 말고~
창균) 알았어 ㅋㅋㅋㅋ
순영) 야 초코송이가 아니라 죽순이다? 그거 헷갈리면 안돼?
창균) 알았어~ 다 적어놨어-
창균이 보안대를 지나가기 직전 아이들과 나누는 마지막 인사였다. 마지막까지 과자를 신신당부하는 아이들이었고 창균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창균이 자신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아이들은 몸을 돌렸다.
순영) 밥이나 먹고 들어갈까?
승철) 그래 오랜만에 밖에서 먹자
승관) 근처 음식점 좀 뒤져볼까?
지훈) 난 화장실 좀.
원우) 나도.
순영) 야 여기 앉아있을게!
화장실에 간다는 몇 아이들이 빠지고 나머지는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입맛이 꽤 까다로운 아이들이 음식점을 뒤지기 시작했고 다른 아이들은 영상을 보거나 카톡을 하곤 했다. 그 사이에 민현의 옆에 앉아 민현의 휴대폰을 빼꼼 보는 여주. 민현은 그런 여주에게 물었다.
민현) 뭐 먹고 싶어?
여주) 난 다 좋아. 뭐든 맛있지 밖에서 먹으면
민현) 그래도. 종류는?
여주) 으음…구워먹는 거.
민현) 고기?
여주) 고기도 좋지.
민현) 소고기, 돼지고기?
여주) 에이. 거기까지도 내가 정해?
민현) 그래주면 좋지.
여주) 싫으네요. 그건 오빠가 정해.
민현) 여주야.
여주) 응?
민현) 엊그저께 정한이랑 밤에 뭔 얘기했어?
여주) …………
민현) …………
여주) 별 얘기 안 했어.
민현) 거짓말.
여주) ..으. 거짓말 싫긴 해.
민현과 여주가 푸스스 웃음을 터뜨리고, 민현은 마저 화면을 내려댔다. 그 화면을 멍하니 보던 여주가 말했다.
여주) …오빠한테 그랬잖아. 어쩌면 다른 사람들이 나처럼 힘든데 숨기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어쩌면 난, 여전한 거일지도 모르겠다고.
여주) ...오빠들이 그렇게 노력하는데,
민현) 여전하면 어때.
여주) …………
민현) 살아있잖아 너가.
여주) …………
민현) 나아지지 않는 것 같아서 미안하면, 우리가 노력한다고 생각하지마.
생각보다 우리 되게 이기적이야. 너랑 같이 살고싶어하는 날 위해서 노력하는 거야.
민현이 은근히 장난끼를 입꼬리에 묻히곤 말아올렸다. 여주가 그런 민현의 눈을 맞췄다.
민현) 그리고 너 많이 좋아졌어. 예전보다 덜 우울해 해.
여주) …………
민현) 기분이 어떤지 말해주는 것도 그렇고 그냥 다 좋아 우린. 네가 우리 옆에 있어서. 그게 다야.
여주) …………
민현) 여주야. 근데 그건 안돼.
너 행복이랑 우리 행복 분리하는 거.
민현) 우리 그거는 안돼. 너가 행복해야 우리도 행복해.
여주) ………..
민현) 그니까 같이 더 행복하자.
네가 일년에 300일이 행복하고 65일이 불행하면 우리 같이 65일도 행복하게 만들자.
우리니까 그렇게 만들 수 있잖아.
네가 살아있으니까 우린 그렇게 할 수 있어.
그니까 미안해하지도 말고, 여전한 것 같은데 어떡하지 하고 생각도 하지말고, 그냥 그렇게 어두운 생각이 자꾸 들면 소파에 앉아있어.
그럼 누구라도 나와서 너의 옆에 앉아서
너의 얘기를 들을 테니까.
네가 살아있어.
우린 그거면 다 좋으니까.
**
외전이 어두워서 속상할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지만, 전 늘 뒷편에서 아이들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우울증이라는 게 사실 떼고싶다고 똑 떼지는 것도 아니고, 주변에서 엄청 노력해도 자신의 노력이 들어가지 않으면 회복되기 힘드니까요.
한 번 죽고싶다는 생각은 우리 곁을 잘 떠나지 않는데, 이상하게 살고싶단 생각은 한 번을 찾아오지 않는 것 같아요. 잘 들지도 않고..
세상에 정내미가 떨어지는 순간이 많아지는 요즘, 세때홍클의 아이들의 위로가 받고싶은 지금이에요.
나의 여주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모든 사람들에게 하고싶은 말들을 아이들의 대사로 써보았네요!
소중한 사람들이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이기적임. 이 이기적임을 부디 미워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간혹 이렇게 세때홍클의 근황을 올리는 걸 상상하곤 했는데, 또 찾아올 지도 모르겠어요! 그 이야기가 어두워도 그것이 세때홍클의 색이니 받아주세요 :)
토요일의 오후, 평안하게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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