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1억
BGM
"……."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누군가가 나와 이 사람을 위해서 마법을 써 시간을 멈춘 것만 같았다. 나와 이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가 멈춘 것만 같았다.
정말 짧은 순간인데 왜 이렇게 길게 느껴졌을까. 서로 한참을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움직이면 남자가 내게 말했다.
"잠깐 얘기 좀 해요."
"지금 바빠서요."
내 말에 남자가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때의 그 냄새였다. 냄새나는 지하실에서 남자에게서는 항상 좋은 냄새가 났다.
내 앞에 선 남자는 내게 명함을 건네주었고, 받은 명함을 확인도 못한 채로 멍하니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생각날 때 연락해요."
"……."
"전화주면 더 좋고."
그렇게 남자는 나와 수영이를 한 번씩 보고선 목례를 하고 차에 올라탔고, 차가 가는 걸 보며 수영이가 팔꿈치로 날 툭툭- 치며 말했다.
"야 저 사람 아까 vip에 있던 사람 아니야? 잘생겨서 완전 난리났었잖아. 맞지 맞지?"
"……."
"저 사람이랑 어떻게 알아? 왜 명함을 줘? 무슨 사이인데? 아니 마음에 들어서 번호 주는 건가? 번호가 아니라 명함을 주네.. 섹시하다 그치이!"
겨우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왜 저 남자는 나를 다시 괴롭힐까. 2년 동안 날 한 번도 찾지 않았으면서 그냥 잊고살지 왜 우연히 마주쳤다는 이유로 아는 척을 하는 건데.
만나서 반가울 사이도 아닌데 그게 가능하다는 것이 신기했다.
"한혜! 왜 이래? 아니면 뭐.. 저 사람이 첫사랑이라도 돼? 넋을 놓고있네."
"…아니야 그런 거."
"에이~ 맞네. 그래서 아까부터 정신 못차렸구만?"
"그런 거.. 절대 아니야."
분명히 아니다. 그런 게 아닌 건 확실하고 밉기만했는데 왜 심장이 그때처럼 뛰고있는 걸까.
"미안한데 수영아.. 오늘 술..말이야 못 마시겠다."
"…응? 아, 그래그래!"
내가 평소처럼 밝지않으니 수영이가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평소 같았으면 왜 안 마시냐며 매달렸을 텐데.
좋은 집은 아니지만, 내 집에 오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돈이 얼마 없어서 별로 없는 물건들과..꾸미지않은 방은 참 초라해보였다.
살아가기도 바빠서 방을 꾸밀 힘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때 그 지하실보다는 100배 더 나은 건 확실했다. 이런 생각을 1년이 넘도록 한 적이 없었는데.
"……."
그 남자가 떠오르니 그때 지하실이 떠올랐고, 지하실에서 대화를 나눴던 그와 내가 떠올랐다.
처음으로 서로 얼굴을 보며 웃었던 때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그리고 눈물이 흘렀다. 왜일까..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그냥 그때가 힘들어서였을까. 난 왜 그를 떠올리면 가슴이 아파올까.
눈이 부어서 거울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출근하면 수영이가 놀려댈 텐데..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레스토랑으로 가는 길에 지갑에서 그의 명함을 꺼내보았다.
"…이준혁 대표."
이름이 이준혁이구나. 그의 이름을 처음 알았다. 어제는 명함을 볼 자신이 없었으니까..
이름이 참 그와 똑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서있던 누군가와 부딪혔고.. 앞을 보지 못했던 내 잘못이니 급히 사과를 하며 바닥에 떨어진 짐들을 같이 줍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아, 아닙니다."
"……."
"레스토랑은 이쪽이 아니잖아요?"
습관적으로 얼굴을 보지도않고 바닥에 있는 것들을 줍고있었는데. 이 사람은 얼굴을 확인하게끔 만들었다. 내가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걸 알고있다.
"…네? 어떻게.. 그걸.."
"아... 출근하는 걸 몇 번 봤거든요."
"……."
"저 레스토랑 옆에.. 꽃집하거든요. 꽤 됐는데.. 못보셨나?"
"…꽃집이요? 아, 아.. 알아요."
"…뭔 생각을 그렇게 하시길래.."
"아, 죄송합니다.."
꽃집이 있는 건 봤는데 한 번을 가보지도 못했고, 평소에 사람들 구경하는 것엔 흥미가 없어서 얼굴도 모르겠다.
"죄송했습니다.."
"아니요."
"……."
"그쪽 말고 이쪽으로 가셔야돼요."
"네?"
"레스토랑이요. 또 반대로 가시길래."
아, 네.. 하고 어색하게 대답을 하고선 레스토랑으로 향하는데 저 멀리 버스에서 내린 수영이가 '야 한혜!'하며 나에게 뛰어오기 시작했고, 난 웃으며 수영이를 바라보았다.
쟤는 어떻게 맨날 저렇게 텐션이 높을까.
"오잉? 꽃집 사장님이네. 뭔 얘기했어?"
"응? 아, 아니.. 내가 멍때리면서 가다가 부딪혔는데.. 들고있던 게 다 떨어져서 주워드렸어."
"그래? 난 또~ 사장님이 너 번호 물어보는 줄 알았네."
"뭐래 진짜. 죽을래?"
"왜애~ 그럴 수도 있지. 너 좋다고 따라다니던 남자들 많잖아."
"진짜 뭐라는 거야. 하지 마."
"왜애~~"
수영과 혜가 웃으며 멀어지는데도 태오는 자리에 서서 수영의 얘기를 듣고 웃는 혜를 바라보고있다.
"……."
오늘도 평소처럼 바빴다. 어찌 날이 갈 수록 바빠지는지.. 어제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나는 일에 집중을 해야만했고
저녁 시간이 되면 사람들이 많이 빠지면서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가 또 나를 그렇게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
잠시 룸에 다녀온 사이에 그가 온 것이다. 웬 여자와 같이 앉아서 진지한 대화하는 것을 멀리서 보았다. 일 때문에 만난 것 같았다.
"야 어제 너한테 명함 준 남자 또 왔어. 봤어?"
수영이는 신나보였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가 정확히 나를 보고선 불렀고, 나는 내 옆에 있던 알바생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한데 네가 좀 가줄래? 내가 룸 갈게."
"네? 아, 네!"
내 무의식은 그를 피하기로 결심했나보다. 최대한 바쁘게 움직여 그를 피한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중간 중간 확인을 했을 때는 일행은 먼저 가고 그가 혼자 남아서 와인을 마시며 일을 보는 것 같았다.
좀 지났을까 매니저님이 잠깐 카운터를 봐달라고했고 나는 그의 눈치를 보았다.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하러 오는 그에 필사적으로 시선을 피한 것 같다.
아직 가지 않은 매니저는 그에게 식사는 어떻냐 물었고, 그는 아무렇지않게 대답했다.
"좋았습니다."
"입맛에 맞았다면 다행입니다."
매니저의 말에 그는 나를 한 번 보며 말했다.
"직원분들도 친절하고요."
"감사합니다.아, 혜야 계산 좀 부탁할게."
급한 듯 가버리는 매니저가 미웠다. 어색하게 그와 마주보고 서있는 게 너무 숨이 막혔다.
조용히 금액을 말해주고선 카드를 받으려 손을 뻗으면, 그가 내게 나지막히 말했다.
"나 일부러 피해요?"
"……."
"연락은 왜 안 해요."
"…생각나면 하라면서요."
"……."
"생각이 안 나서 안 했어요."
"무슨 일 있었어요?"
"2년 동안 한 번도 안 찾아놓고서 이제와서 왜.."
이상했다. 나는 그를 미워했으면서 2년 동안 나에게 아무런 소식 조차 알려주지않아놓고 이제와서 무슨 일 있었냐고 묻는 게 서운한 것처럼 행동했다.
"아.. 어제 한국에 왔어요. 일 때문에 해외에 묶여서 한국에 오지도 못했거든요."
"…그건 나랑 상관없는 일이잖아요."
"……."
"그쪽이랑 할 얘기도 없고, 따로 만나는 일은 더 없었으면 좋겠어요."
"……."
"그냥.. 보기싫어요."
심한 말을 해버렸다. 다시는 나에게 아는 척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한 말이었다.
어차피 그는 소희 언니와 같이 잘 지냈을 거니까. 내가 저 말에 미안하다고 할 필요도 없었다. 너무 비싼 음식 값인데도 불구하고 아무렇지않게 카드를 내게 건네주는 그의 손을 보았다.
그와 나는 이렇게나 다르다. 다르게 2년 동안 살아와놓고 이제와서 나도 이러는 게 참 한심했다. 그는 나를 바라보고있었고, 나는 갈 길을 잃어 바닥만 바라보고있다. 그럼 수영이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매니저님이 불러. 내가할게."
그 말에 나는 수영이가 구해줬다는 느낌을 받았다. 바쁜 매니저가 나를 부를 일이 없으니까. 그에게 작게 목례를 하고선 자리를 비웠다. 여전히 심장이 쿵쾅 쿵쾅 뛰었다.
일이 끝나면 밤이 되어있고, 나는 버스 정류장에 앉아서 지나가는 차들을 보았다.
사람들은 차를 보고 급을 매긴다. 비싼 차를 탄 사람은 당연히 부자여야하고, 싼 차를 타고 다니면 그저 그런 사람.
아까 확실하게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난 그를 볼 때마다 불행하면서도 그를 기다렸던 순간이 떠오른다.
이렇게 그를 미워하기만 하는 게 맞는 걸까 싶기도했다. 그냥 만나서 아무렇지도않게 대화를 나누며 안부 정도는 물을 수 있는 건데.
이렇게까지 그를 피하는 이유를 나도 모르겠어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난 또 바보처럼 울기 바쁘다. 사람들이 볼까 숨죽여 우는데 누군가 내 옆에서 목소리를 내었다.
"…이럴 때 아는 척하는 게 실례인 거 아는데요."
"……!?"
"저밖에 없으니까 편하게 우세요."
급히 눈물을 닦아내고선 아무일도 없었던 척을 하면, 남자는 날 딱히 신경쓰지않는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
"…네?"
"아니면 차를 끌어요. 울어도 아무도 모르고 좋을 텐데."
"…그럴 돈도 없네요."
"……."
"먹고 살기 바빠서요."
그렇게 남자는 계속 내 옆에 있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같은 버스를 타고.. 내가 내릴 때까지 남자는 내리지않았다.
남자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신경쓸 겨를도 없었다. 내가 신경쓸 일도 아니기도했고.
태오는 혜가 내리고나서도 혜를 바라보기 바빴다.
"……."
항상 출근 시간에도, 퇴근 시간에도 친구와 같이 만나면 웃어주기 바빴고.. 한 번도 저런 슬픈 표정을 본 적이 없기에 기분이 이상한 듯 했다.
잘지낸다고 생각했던 혜가 그렇지않다는 걸 안 태오는 마음이 꽤나 싱숭생숭한 듯 했다.
멀리서 소식을 들은 건 1년반이었고, 가까이서 지켜본 건 몇개월이었다. 그렇게 보면서 저런 표정은 처음이었으니까.
어제는 또 울기 바빴고, 오늘도 또 눈이 부었다. 그런 나를 보고 수영이는 놀리기 바빴다.
왜 울었냐고 물어보지도 않는 게 신기했지만 고마웠다. 알아서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만 같아서 든든하기도 했다.
일이 끝나고 마감 준비를 하고 있었을까. 아빠가 사고를 당했다는 전화를 받고 나는 급히 레스토랑에서 나왔다. 근데..
"……."
그는 나를 계속해서 방해를 했다.
너무 힘든 타이밍에 나에게 나타나주었고.
생각도 하지 못할 행동을 해서 나를 놀라게 만들고, 기대하게 만들었다.
"왜 자꾸...!"
"난 그쪽이랑 생각이 달라서요."
"……."
"난 보고싶었는데."
"……."
"난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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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