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둘은 친구들과의 모임으로 같은 자리에 앉아있었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앉은 채로. 다같이 좋은 분위기에서 술을 마시고 얘기를 나누고 평소와 다름 없는 그런 날이었다.
종인도 늘 그렇듯 술이 떡이 되도록 들이붓고. 딱 한가지 다른 게 있었다면,
"어? 경수 네가 웬 일이냐? 평소엔 입에 잘 대지도 않던 술을 다 마시고?"
"야 야!! 그만 마셔!! 너 무슨 일 있냐? 오늘따라 왜이래?"
"취하겠다 이자식아!! 속버려!! 착하지 우리 경수~ 이만 마시자 응?"
바로 평소엔 술을 마시더라도 적당히 조금만 마시다가 잔을 내려놓던 경수가 웬일로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위장으로 알콜을 집어넣었다는 것이었다.
경수가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많은 양의 술을 마시기 시작하자, 잔이 비는 족족 술 잔을 채워주던 친구들이 경수를 걱정을 하며
그만 마시라고 했지만 경수는 듣는 둥 마는 둥 계속해서 술을 들이켰고, 이내 술버릇을 뽐내는 대신 조용한 성격대로 테이블 위에
머리통을 박으며 픽- 쓰러져버리고 말았다.
경수가 인사불성이 되던 말던 별 상관없이 쭉쭉 술을 들이키던 종인도 곧 취기가 올랐지만 다른 친구들보다는 그나마 멀쩡한 정신이었다.
시간을 확인한 종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주변에 널부러져있던 친구들이 종인을 잡으며 그나마 멀쩡한 네가 경수를 데려다줘라
하는 소리에 온 몸으로 거부하던 종인을 얌전한 양 한마리로 바꿔놓은 것은,
"술 값 면제"
하는 친구들의 구세주같은 목소리였다.
덕분에 돈의 노예인 종인은 마르긴 했지만 그래도 남자라고 꽤나 무게가 나가 결코 깃털마냥 가볍지만은 않은 경수를 어깨에 짊어지고 술집을 나섰다.
당연한 수순대로 경수를 택시에 태워 보내려했건만, 어머 이런 젠장. 집주소를 모르네?
한차례 구성진 욕짓거리를 내뱉은 종인이 경수의 양 뺨을 결코 상냥하지만은 않은 손길로 터치하며 경수의 정신을 들게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지만 이미 잠의 나락으로 빠져버린 경수로 인해 종인은 다시 경수를 질질 끌고 술집으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술집으로 향한 종인이 친구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했건만, 이미 모두 뻗어버린통에 까딱 잘못했다간 다른 친구들까지 자신이
떠맡을까봐 두려워진 종인이 슬그머니 발걸음을 돌려 술집을 나왔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상황에서 종인은, 경수의 집도 모르고, 그렇다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기엔 뭔가 꺼림직스러워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결국은 눈에 띄는 호텔로 경수를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겨우 호텔 카운터에 도착한 종인이 식은땀을 흘리며 한 손으로 힘겹게 자신의 어깨에 걸쳐진 경수의 팔을 붙잡은 채 얼른 아무 룸이나
달라고 사정했고, 대충 카드를 긁고 룸키를 받아 올라가 룸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경수를 던지듯 내려놓은 종인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침대에 주저앉았다. 한숨 돌리고 무심코 호텔영수증을 확인한 종인이 치밀어오르는 욕에 영수증을 갈기갈기 찢었다.
"이런 젠장. 무슨 호텔비가... 공이 몇개야 이거? 젠장... 괜히 아무 룸이나 달라고 했어...
무조건 싼 방으로 달라고 할걸..."
술 값보다 더 나온 호텔비에 분노한 종인이 괜히 사서 고생은 다 하고 돈은 돈대로 더 나가게 만든 장본인
경수-고의는 아니었으나 어쨌든 결론은-을 째려보았다.
"너 이자식... 이거 너... 계획적이야..."
"으음..."
평소 자신이 좀 많이 부려먹었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복수를 하나싶어(솔직히 좀 찔리긴 한 종인이었다) 괜히 화딱지가 난 종인이
경수를 분노의 눈빛으로 노려보지만 경수는 신음섞인 숨소리를 내뱉으며 여전히 꿈나라.
결국 이러나 저러나 나오는 답은 없고, 치사하긴 하지만 학교에서 경수를 만나면 호텔비를 물어달라고 할까 아니면 평소보다 더 부려먹어서
복수를 해줄까 하고 고민하던 종인이 그냥 쿨하게 적선 한 번 한 셈 치자 하며-여태까지 자신이 저지른 만행이 있으니까-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종인아..."
"ㅇ..응..? 뭐.. 뭐야 너- 언제 일어났냐?"
분명 방금까지만해도 종인이 옆에서 자기 욕을 하던 북치고 장구치고 쌩 쇼를 하던 잠만 자던 경수가 어느새 반쯤 몸을 일으켜 세우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종인을 바라보았다.
괜히 자기가 욕한걸 들었을까봐 찔린 종인이 말을 더듬었고, 그런 것에 아랑곳않은 경수가 여기가 어디냐며 물었다.
"아 여기- 술 집 근처 호텔인데... 네 집주소를 몰라서... 아! 혹시 정신 들었으면 지금이라도 집에 갈래?"
"으... 아니... 저기 나 물 좀..."
"으..응..? 어 그래- 자.. 여기-"
"고마워"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종인에게 심부름시키기는 이미 술에 취한 경수에겐 아웃 오브 안중이었고, 종인 또한 별다른 감흥없이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친절히 뚜껑까지 열어 경수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경수가 술기운으로 인해 발그스름한 두 뺨에 홍조를 띠고 고맙다며 종인에게 살풋 웃어보였고,
"어? 어... 그래..."
이것은 종인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갑작스레 뛰는 심장으로 인해 놀란 종인이 술을 많이 마셔서 취해서 그런가 아님 내가 왜이러나 싶어 곰곰히 생각해봐도
자신의 심장을 뛰게 하는 원동력이란건 경수가 자신에게 지어보인 미소 뿐이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경수의 미소가, 경수가 취해서 그런건지 아니면 자신이 취해서 그렇게 보이는건지 왠지 모르게 묘한 색기를
띠고 있다고 느낀 종인이었다.
이내 쓸데없는 잡생각을 털어버리기 위해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종인이 집으로 가기 위해 문 쪽으로 향했다.
"나 이제 가볼테니까 쉬고 다음 주에 학교에서 보자"
"아- 응... 이제 가려구...?"
"응- 시간도 늦었고 얼른 집에 들어가서 쉬어야지"
"그래... 고마웠어...잘가"
종인의 가보겠다는 말에 뭔가 아쉬운 기색을 띠긴 하지만 곧 언제 그랬냐는듯 고맙다며 잘가라는 인사를 건네는 경수 덕에
종인의 발걸음이 멈춰섰다.
'뭐지.. 이 아쉬운 느낌은' 하고 생각한 종인이 대체 뭐가 아쉬울까 생각해보지만 잘 모를 뿐이고.
보통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호텔이든 어디든 좋아하는 사람이 가려고 하면 일단 붙잡지 않나?
아니 근데 쟤는 뭐야? 쟤 나 좋아하는거 맞아? 원래 이럴 땐 가지 말라고 붙잡아야 하는데...
쟤는 술도 취한 애가 뭐 저렇게까지 예의를 차리는거야?
경수가 가지말라고 붙잡지 않으니 괜히 기분이 묘하고 뭔가 마음 속에서 뒤틀린 감정이 일어나는 종인이었다.
자신도 술에 취한지라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잘 분간이 안가는 종인이 결국 뒤돌아서 다시 경수가 누워있는 침대로 향했다.
"야 너-"
"응?"
"너- 나 좋아하는거 맞아?"
"ㅇ..어? 갑자기 그런건 왜 물어봐..."
"아 그냥 쫌!! 물어보면 대답을 해!!"
뜬금없이 자신을 좋아하냐고 묻는 종인에 당황한 경수가 슬쩍 얼굴을 붉히며 뭐 그런걸 묻냐고 대꾸하지만 막무가내인 종인은
그런건 관심없이 그저 자신이 물어본 말에 경수가 얼른 대답하기만을 원할 뿐이었다.
"ㄱ... 그러엄... 좋아하지..."
경수의 입에서 쑥스러운듯한 대답이 튀어나오고 종인이 마치 기다리고 있던 대답이기라도 한 듯 흡족하게 웃는다.
아 나 왜이러냐... 하면서.
"그런데-"
"응?"
"그런데 왜- 가지말라고 안 해?"
"응...?"
"그니까 왜에~~ 좋아하는데 가지말라고 안붙잡냐고오..."
"그러니까... 네가 간다고 하니까..."
"좋아하면 잡아야지이!! 넌 애가 왜 이렇게 둔해빠졌냐 미련곰탱이같이..."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는데...?"
"네가 하고 싶은대로... 감정 억누르지말고..."
"가지마.. 밤새 나랑 같이 있어줘... 라고 하면 그렇게 해줄래..?"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서 그날 밤의 역사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로, 둘이 만리장성을 쌓으면서 끝이 났다.
따지고보면 경수가 종인을 유혹하거나 꼬신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매개체는 경수가 종인을 좋아한다는 것에 있었고,
이를 잘 알고있는 종인이 끓어오르는 욕구를 주체하지 못하고 속된 말로 경수를 '따먹었다'라는 얘기다.
그런데 이게 무슨 문제가 있냐고?
종인이 경수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아서? 아니면 단순히 종인이 남자취향이 아니라서? 그것도 아니면 경수와의 잠자리가 싫어서?
결론을 말하자면 셋 다 정답은 아니었다.
오히려 종인은 경수와의 섹스가 황홀할 만큼 좋았다. 한마디로 홍갔다. 없던 감정이 마구마구 솟아오를 만큼.
경수의 처음이 자신이라는 사실이 좋았고, 부끄러워하는듯한 경수의 얼굴이 마냥 귀여웠으며, 자신의 밑에서 차오르는 신음을 참지 못해
붉은 입술로 숨을 몰아쉬는 모습,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절정에 치닫았을 때의 그 섹시한 표정까지 모두 좋았다.
종인이 이만큼이나 만족스러웠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경수에게 불같이 화를 내는 이유는
"너랑 나랑 잤다는 걸 왜 애새끼들이 알고 있냔 말이다!!"
"뭐...?"
둘의 은밀했던 밤의 이야기가 더이상 은밀하지않은 사실이 되어 자신의 친구들 사이에 퍼져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은 당연히 일을 치룬 두 사람 뿐일텐데 자신이 말하지 않았으니-솔직히 어떤 미친놈이 친구들에게
나 같은거 달린 사내놈이랑 잤어, 하고 그것도 평소 자신을 좋아하던 놈이랑 했다고 말하겠느냔 말이다- 결론은 경수가 공공연하게
친구들 사이에서 입을 놀린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 것은 종인의 프라이드에 엄청난 스크래치를 남겼다.
남자와 잔 것이 창피해서라기보다는 단지 자신이 그렇게도 피해다니고 별로 내켜하지 않던 경수와 잤단 것을 안 친구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까 괜한 걱정이 되어서였다.
"모르는 척 하지마"
"아니 난 정말... 그걸 애들이 어떻게..."
"내가 그걸 알면 지금 여기서 너랑 이러고 있겠냐?? 내가 말 안했으니 당연히 네가 말했을거 아니야!!"
"아니야.. 나 안그랬어... 진짜야.."
"거짓말치지 마라. 너 아니면 누가 그걸 말했겠냐? 엉? 넌 내가 그렇게 좋냐? 나한테 깔린게 뭐가 그렇게 좋아서
그걸 애들한테 다 떠벌리고 다녀? 어? 쪽팔리지도 않냐 진짜? 너 나 망신주려고 이래? 둘이서만 알고 있으면 될 일을 가지고
왜 이렇게 일을 크게 만들어? 나 여자 못만나게 하려고 수쓰는거냐 지금?"
"진짜야... 내가 말한거 아니야... 애들이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는데... 나도 진짜 모르겠어...
애들한테 말해야할 이유도 없고 그런거 말해서 좋을 것도 없고 네가 싫어할 거 뻔히 아는데 내가 왜 그런 말을 하겠어.."
"그럼 이 상황 어떻게 설명할래? 아 나 진짜 씨발 쪽팔려서 애들 앞에서 어떻게 얼굴 들고 다니란거야 진짜..."
종인이 미간을 구기며 한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넌... 넌 내가 그렇게 싫어 종인아...?"
"ㅁ...뭐...?"
욕짓거리를 내뱉으며 안절부절 못하는 종인의 모습에 순간 경수가 물기어린 눈으로 종인에게 묻자 살짝 당황한 종인이
말을 더듬다가 경수가 상처받을 말만을 골라서 하기 시작했다.
"아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진짜 이번 일로 너한테 있는 정 없는 정 다 떨어졌다.
앞으로 나 아는 척 하지도말고 말도 걸지 말고 내 눈 앞에 띄지도 마- 더러우니까."
말을 마친 종인이 실험실에 경수만을 남겨둔 채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음산한 기운의 실험실에 홀로 남겨진 경수만이 쏟아지는 눈물을 삼키며 종인이 나간 문을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