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를 처음 만나던 날.
나는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하였다.
처음 본 순간... 그대를 雪花 라 일컬으니 너는 내게 스며들어와 하얀 '눈꽃' 이 되었다.
바람 소리 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한 새벽.
무거운 대문이 천천히 열리는 소리에 남자는 급히 벽 뒤로 몸을 숨겼다.
차마 마주보고 있을 자신이 없어 그를 홀로 두고 나왔지만 쑨양은 멀리 가지도 못하고 오랜 시간동안 집앞을 서성였다.
홀로 두고 나오면 곧 돌아갈거라 생각하였는데.
설화는... 아니, 그는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자신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대문을 천천히 나서는 그의 모습이 하룻밤만에 많이 상해있었다.
장옷을 걸치지 않고 손에 들고 집을 나선 그의 얼굴에 눈물 자국이 한가득이다.
그 모습에 가슴이 매여 이름을 부르려다 쑨양은 끝까지 용기를 내지 못하고 돌아서가는 그의 뒷모습만을 응시했다.
힘없이 걸어가는 그의 모습이... 고운 살구빛 저고리에 스민 붉은 핏자국이...
자꾸만 눈에 박혀들어와 쑨양의 가슴을 짓누른다.
점점 눈앞에서 흐려지는 그를 바라만보던 쑨양은 깊은 한숨을 내어쉬고 무거운 걸음을 옮겨 집으로 들어갔다.
전날 밤의 흔적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의 고운 손을 데이게 한 찻잔도 쏟아진 내용물도 모두 치워진 상태였다.
다만, 그가 했기에 아름다웠던 꽃비녀가 주인을 잃고 빛을 잃어 소반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쑨양은 천천히 상체를 숙여 소반 위에 놓인 비녀를 집어 들었다.
빛을 잃은 듯 탁해진 금빛 몸통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
가식적인 사람이라 조롱하듯 비틀린 자신의 모습에 그는 짙은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내 마음속에 담은 이는... '설화' 였는가, 아니면... 그 '자체' 였는가."
그 누구도 답을 줄 수 없는 물음을 던진채 손에 쥐어진 비녀를 바라보는 그의 깊은 눈동자에
어두운 소용돌이가 휘몰아친다.
"태환. 나 들어가도 되오..?"
조심스러운 물음에도 답이 없어 금옥은 작은 헛기침을 하고 천천히 문을 당겨 열었다.
".........."
며칠을 내내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는 그.
벽에 기대어 앉아 피로 얼룩진 살구빛 저고리를 바라만보고 있다.
밥 한술 뜨지 않고 저리 앉아만 있다가 혹, 병이라도 날까 싶어 금옥은 하루 하루가 노심초사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듣지 못했지만 새벽녘에 초췌해진 모습으로 돌아온 그의 얼굴을 보고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아무래도...가장 우려하던 일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그날로 당상관을 찾아가 나으리에 관하여 묻자, 청나라로 돌아갈 날도 머지 않았다고 들었다.
나으리가 갈때까지만 행복하겠노라 다짐했던 그였는데...결국은 그 다짐을 이루지 못할 모양이었다.
금옥은 그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어쉬고 태환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죽이오.. 딱 한숟갈만 드시오. 이러다가 초상치를까 겁나오."
멀건 죽을 한숟갈 떠올려 하얗게 말라비틀어진 입술에 가져다대자 그제서야 그의 흐릿한 눈빛이 금옥을 향했다.
"뭔 일인지 몰라도 내 눈앞에서 굶어죽는건 못보오. 당장 입 벌리시오."
초점 없는 그의 눈빛에 금옥은 목소리를 높여 그를 재촉했다.
"얼른!!"
아이를 다그치듯 다 큰 사내를 어르는 여인의 목청에 흐릿했던 태환의 눈에 설핏 미소가 비쳤다.
"나 안 죽소. 내가 어찌 살아왔는데... 동이도 굶어 죽었는데.. 나까지 그리 죽을수는 없지."
그의 말에 어느새 눈물을 글썽이는 여인을 바라보던 태환은 힘이 빠져 떨리는 손을 들어 숟가락을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죽을 한숟갈 떠올려 입속으로 우겨 넣었다.
"금옥. 난 금방 괜찮아질거요. 처음 겪는 일이라...어찌해야할지 몰라서... 이런 감정이 무엇인지 몰라서..."
마른 입안으로 죽을 꾸역꾸역 넣던 그의 검은 눈동자에 어느새 눈물 한방울이 맺혀.. 그릇 위로 떨어져내린다.
"조금만 있으면...모든게 꿈인듯 잊혀질테니..... 그렇게..시간은 갈거요."
태환은 소매로 급히 눈물을 닦아내고 다시 죽 한숟갈을 떠 입안으로 밀어넣었다.
그 모습이 애처로워 금옥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부엌에 뭘 올리고 왔는데..... 모자라면 말하시오..."
애써 눈물을 삼키는 그를 배려해 금옥은 밖으로 급히 나갔다.
문이 닫히고 그릇이 바닥으로 떨구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의 물기어린 흐느낌이 문틈으로 새어나온다.
나으리를 만나기전에는 저리 약하지 않았던 사내였는데.
지독히도 강하게 살아서... 이제는 그만 마음을 편히 놓고 살라고 수없이 이야기하였는데...
뒤늦게 찾아온 열병에 그는 한없이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평상에 힘없이 주저앉아 그가 있는 방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금옥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두르고 있던 앞치마를 벗어 옆에 내려두었다.
"태환. 내가 해줄건..이것뿐이오."
그대로 몸을 일으킨 금옥은 힘이 실린 걸음으로 장터 길을 나서 어디론가 급히 걸음을 옮겼다.
"아이고~ 안녕하셨습니까."
관청을 나서던 쑨양은 자신을 향해 반가운 인사를 해보이는 그에게 마주 답하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관복을 단정히 입은 중년의 남자는 함께 있던 이들을 먼저 안으로 들여보내고 잰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전 일은... 잘 해결이 되셨습니까?"
지나는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물어오는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쑨양도 상체를 살짝 숙여 그에게만 들리도록
목소리를 내었다.
"당상관 덕분입니다. 그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아이고~ 아닙니다...제가 도와드릴수 있음에 감사하지요. 금옥의 주막도 알아봐주시고...포도청 눈치보는 장사보다야
지금이 낫지요! ...혹, 그 아이는..?"
환한 웃음으로 물어오는 누군가의 안부에 쑨양은 잠시 멈칫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오..그거 잘 되었군요. 이조판서댁 자제가 지독하기로 소문이 자자합니다. 나으리께서 도와준 걸 알면..."
"당상관."
".....!....."
낮지만 절도있는 그의 부름에 중년의 남자는 화들짝 놀라 얼른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 아이에게도.. 금옥에게도.. 비밀... 잊지 않으셨겠지요?"
기다란 손가락을 하나 펴 붉은 입술에 가져다대는 그의 손짓에 당상관도 얼른 손가락 하나로 입을 막고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청나라로 돌아가기전에 꼭 술 한잔 사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아닙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서로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인 두 남자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자신을 향해 다시 한번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그에게 눈짓을 해보인 쑨양은 그가 관청안으로 모습을 감추고나서야
천천히 돌계단을 내려갔다.
손에 들린 서책을 이리저리 펼쳐보며 집앞에 당도한 그는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어올렸다.
언제부터 기다렸던건지 차가운 바람에 얼굴이 붉게 터진 여인이 눈을 마주치고는 깊이 고개를 숙여보인다.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라 반가운것도 잠시, 잔뜩 그늘진 얼굴로 자신에게 다가서는 금옥의 모습에 쑨양은 펼쳐든
서책을 접고 얼굴을 굳혔다.
"나으리..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그렇군요. 그간 별일 없으셨습니까."
"저는... 없었습니다."
모호한 여인의 대답에 쑨양은 짙은 눈썹을 찡그렸다가 곧, 펴보였다.
"이곳엔 어쩐 일로... 무슨 전할 말이라도 있으신겁니까."
그의 물음에 잠시 눈을 마주쳤다가 다시 고개를 숙인 금옥은 바람에 하얗게 터진 손만 만지작거렸다.
"잠시 들어가서 이야기 하시겠습니까?"
"...아..아닙니다. 저는 그저..."
뜸을 들이는 모양새에 쑨양은 직감적으로 설화때문임을 느꼈다.
우물쭈물하며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여인의 모습에 물끄러미 서서 답을 기다리던 그는 더욱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에
일단 대문을 밀고 안으로 발을 들였다.
"들어오시지요. 바람이 찹니다."
안으로 들어오라 손짓하는 나으리의 모습에 금옥은 크게 당황한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떠올렸다가 곧, 마음을 가다듬고
그의 뒤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섰다.
인사를 건네는 하인에게 따뜻한 차를 내오라 부탁한 그는 안절부절하는 금옥을 이끌어 방안으로 몸을 들였다.
"이 추운 날씨에 얼마나 기다리신겁니까. 얼른 차부터 한잔 드십시오."
"아...예..감사합니다."
다정한 손길로 자신의 앞에 찻잔을 내어주는 그의 모습에 금옥은 설핏 웃음지었다.
'이리도 다정하시니... 그가 마음에서 놓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두 눈을 지그시 내리깔고 차 한모금을 삼키는 나으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금옥은 이내 마음을 먹은듯
깊게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 탓입니다."
"................."
갑작스러운 여인의 목소리에 찻잔에서 입술을 떼어낸 그가 금옥을 바라본다.
"김재호에게 그리 된것도... 나으리와 태환이 힘들어하시는것도... 모두 제 탓입니다."
"..................."
"가여운 사람입니다. 굶어죽을 처지에 놓인걸 살려줬더니...저 힘들다고 사내의 몸으로 그 힘든 일을 도왔습니다.
이리 될 줄 알았다면... 그곳에서 연을 만날 줄 알았더라면..."
"....................."
"처음으로 웃는걸 보았습니다. 나으리를 만나고...그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은..처음이었습니다."
금옥의 이야기에 쑨양은 천천히 찻잔을 소반 위에 내려두었다.
어느새 눈가에 눈물이 맺힌 여인은 마른 손등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두려웠을겝니다. 자신의 처지가... 자신의 마음에 담은 이가... 자신의 거짓이."
여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쑨양은 그 어떤 말도..답도 할 수 없었다.
처음으로 그의 현실을 들으며 가슴 한켠이 돌로 짓눌리는듯 저며온다.
"하찮은 제가 감히 나으리께 이런 소리를 하다니. 벌을 주셔도 괜찮습니다. 하나, 그 아이는..."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고 터져나오는 여인의 눈물에 쑨양은 두 눈을 지그시 내리감았다.
"그만하셔도 됩니다. 무슨 말을 하시려는지...압니다."
가슴을 부여잡고 눈물을 삼키는 여인의 모습에 쑨양은 어두워진 눈빛으로 금옥을 향해 시선을 두었다.
"이름이 무어라 하셨습니까."
"......예..?"
"그의 이름이... 무어라 하셨습니까."
그의 이름을 묻는 나으리의 목소리에 금옥은 얼른 눈물을 닦아내고 물기어린 입술을 열어 그의 이름을 천천히 내뱉었다.
"태환. 박.태.환. 선월의 본래 이름입니다."
금옥의 입에서 전해진 그의 이름을 쑨양은 천천히 곱씹었다.
"태..환..."
조심히 불러보는 그의 이름에.. 쑨양의 입가에 보일듯 말듯 엷은 미소가 떠오른다.
금옥을 돌려보내고 밤이 늦도록 쑨양은 서안 앞에 앉아있었다.
흔들리는 호롱불에 시선을 맞추고 한없이 그것을 바라보던 그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서안에 달린 서랍을 당겨 열었다.
그 안에 주인을 잃고 쓸쓸히 놓여 있는 비녀 하나.
기다란 손끝으로 조심히 비녀를 집어든 그는 그 끝에 매달린 꽃장식을 하염없이 바라만보다가 서안 위에 살며시 올려두었다.
"설화. 그대를 보면 꽃이 생각납니다. 꽃을 보면... 그대가 생각이 나지요."
손끝으로 하얀 꽃잎을 톡..하고 건드린 그는 어느새 눈앞에 떠오른 얼굴 하나에 코끝이 시큰해져옴을 느꼈다.
"설화는 제가 그대에게 붙인 이름일뿐입니다. 저는 아마도..."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에 눈시울이 붉어져 입술을 지그시 깨문 그는,
그날 새벽 자신을 기다리다 돌아간 그의 초라한 뒷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따끔거려왔다.
왜 그때는 용기내어 잡지 못했을까... 차라리 화라도 낼 것을... 속인 이유가 무어냐 따져 물을것을...
그리했다면... 혼자 울게 하지는 않았을텐데... 혼자 울다 지쳐.. 쓸쓸하게 돌아가게 하지는 않았을텐데.
짙은 눈썹을 찡그리며 천천히 감았다가 떠올리는 그의 속눈썹에 반짝이는 눈물 방울 하나가 매달린다.
"저는 아마도...그대...그 자체인 당신을 사랑하는가 봅니다."
깜박이는 그의 속눈썹을 타고 미끄러져 내린 눈물 방울이 금빛 비녀 위로 떨어져내렸다.
그 눈물 위로 비치는 그의 모습.
비틀린 모습이 아닌, 그 자신을 그대로 비추는 눈물에 쑨양은 그제서야 입가에 미소를 지어보이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대를 마음에서 놓고 살 수 있느냐 물으신다면... 저는 그리할 수 없다고 답하겠습니다."
비녀를 다시 서랍에 고이 넣어둔 그는 머릿속을 스치는 누군가의 모습에 깊고 검은 눈동자에 살기를 담았다.
침장 아래에 손을 넣어 긴 환도를 꺼내들고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는 두루마기 자락 안에 그것을 꿰어 차고 그대로 밖으로 향했다.
시린 바람이 불어오는 겨울안에 서있는 그의 붉은 입술이 살며시 열리며 꽉 깨문 이 사이로 비틀린 이름 하나가 새어나온다.
"김재호."
그 이름을 조용히 내뱉은 그는 그대로 마당을 가로질러 어두운 밤길로 나섰다.
***
안녕하세요~흰둥이입니다!
금옥이 태환을 위해 그를 찾아갔네요..
하지만, 이미 쑨양의 마음속에는 답이 정해져 있었던것 같습니다.
쑨양의 그 깊은 속내를 멋지게 표현해내고 싶은데...
아...비루한 손이여ㅠㅠㅠㅠㅠㅠ
한편 한편 끝날때마다 왜이리 아쉬운것들 투성이인지...에효
이제 둘이 행쇼할 날이 머지 않은것 같지요?
그동안 너무 우울하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ㅠ
늘 재밌게 읽어주시고~ 응원의 댓글 달아주시는 많은 분들..
감사합니다~♡
좋은 밤 보내세요! 다음이야기로 다시 올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