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돌아온 크리스마스.
그때 작년 크리스마스 단편 특집을 기억하는가.
녹과 홍, 두 나라의 대립 속에서 살아가는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
그 속에는 녹과 홍의 전쟁이 발발할 시초, 녹과 홍의 화합을 바랐던 유별난 인물이 있었다.
검붉은 도포, 영롱한 호박색 눈의 주황 머리 남자.
후박나무 박, 지혜 지, 하늘 민.
박지민.
같은 꿈을 꿨던 녹의 공주의 배신으로 살해당했지만 운명의 장난으로 녹의 공주가 살았던 거북궁의 영물로 환생했다.
그러나 지민은 다시 태어났지만 꿈을 반포기하고 동면을 선택했다.
잠에 깰 때면 이름없는 녹의 공주가 자신과 대화를 했다.
그야말로 지민은 삶을 포기한 폐인이며 수천년간의 외톨이었다.
하지만 설령을 만나고, 꿈을 다시 꾸기 시작했다.
백의 나라란 꿈을.
얼마나 상처 받고, 얼마나 부서졌는지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다시 일어나면 그만.
세상은 참을성이 없어 내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다.
손을 내밀어 주지 않는다.
세상에게 실망하여 내가 포기한대도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민은 마음을 다잡고 우직하게 기다렸다.
바람을 그림으로 그리며.
그러면 언제간 작은 바람, 큰 바람으로 되기 마련.
어느 뼈저리게 추운 날, 그 바람은 하얀 구름 무리를 데리고 와
'눈'을 내렸다.
그 날은 바로 마지막 설령제.
아무도 통일이 되지 않는다 믿었던 세상에,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마침내 이루다.
백의 나라란 꿈을.
하지만 그 당시 연못에 빠지지 않았던 나머지 사람들은 금지에 남아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백의 나라로 오는 동안 어떤 일이 있었을까.
크리스마스 1주년 특집
잠시 안락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을까,
거북뎐 시리즈 두번째
아니면 거북이처럼 부딪히고 있을까
스스로의 한계를.
단편 아리랑
샛노을 속에서
그 어떤 상황에서도 지금의 사랑에게 차갑게 대하지 말길.
작가 그루잠
노을이 가득한 교실.
햇빛이 차오른 교실 안, 낡은 것들은 따스한 귤즙이 묻어있다.
빛바랜 태극기 아래
멈춘 아날로그 시계.
5:40
오래된 액자의 식상한 급훈
「시간의 귀중함을 알라」.
물칠 자국이 남은 칠판.
칠판 받침대에 누운 칠판 지우개.
교탁 위 동강난 분필들.
기름칠이 벗겨진 바닥.
정갈한 책걸상 줄들.
네번째 줄 중 두번째
앞에서 두번째 자리
책상에 앉아있는 한 남학생까지.
하복 교복을 입은 소년. 그 아이는 슬피 휘어진 눈으로 책상 위의 민무늬 책을 바라보고 있다.
창 밖에는 참새 무리가 어지러운 곡선을 그리며 날았다. 여기저기 날아다니다 창가에 닿는 동백나무 나뭇가지로 쪼르르 앉았다. 비좁게 앉아서 통통 짧게 날아올라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자리를 잡다 다른 녀석의 발을 밟으면 둘 다 놀라 퍼더덕였다. 그 사이에 밀려나온 한 녀석이 창틀로 옮겨 앉았다. 무리를 등진 녀석은 창문 안 소년을 발견하게 됐다. 녀석은 사람이 반가워 외로운 소년에게 날개를 펼쳐보였다. 하지만 소년은 저 참새에게로 관심을 나눠주지 않았다. 그저 물이 고인 눈망울로 책표지를 보고 있었다. 차마 넘길 수 없는 귀한 보물인듯 소중히 책표지를 더듬으며. 그리고 소녀가 사랑한 예쁜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샛별이 사는 그 눈으로 책을 빤히 바라보며 슬픈 생각에 잠겼다.
소년은 한참을 이곳에 머물렀지만, 시공간이 고장난 듯 해는 지지 않았다. 산등성이에 걸려 소년을 기다렸다.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황금물로 교실을 채워 소년의 몸을 잠갔다. 의자에 앉은 채 노을에 가득 물든 소년은 오랫동안 신중히 생각했다. 언제부터 이 노을이 멈췄는지. 눈을 감고 두근대는 소리에 집중했다. 그러자 가슴을 두드리는 심장의 고동 소리가 들린다.
저 밖 펄떡이던 참새는 반응 없는 소년에게 지쳐 가만히 날개를 접었다. 그리고 등을 돌려 푸더덕, 하늘로 떠났다. 그 참새를 시초로 무리마저 노을진 하늘로 날아가버렸다.
모두 떠나 공허한 노을만 남은 공간. 순진하며 솔직한 마음을 느낀 소년은 눈을 떴다. 그는 오랜 시간 끝에 도망치지 전의 곳으로 나아가길 마음 먹었다. 비로소 용기를 낸 여린 손이 책표지를 넘겼다. 천천히 종이를 넘기고 넘기다, 어느 순간 책장 사이에 펼쳐진 공간이 보인다.
하늘에서 내려다보이는 얼음 장벽이 녹아버린 금지의 정원. 짙은 물의 향기가 여전히 물씬하다. 산호색으로 일렁이는 아름다운 금지도. 여전한 그곳엔 여전히 홀로 남은 한 남자가 보인다. 자신을 닮은 몸선. 붉은 갑옷에 붉은 머리. 손의 살갗은 피에 담궜나 새빨갛게 추위에 시려있다. 그리고 등의 보인 뒷모습이 보인다. 익숙한 뒷모습. 위로 스멀스멀 올라온 시야가 창백한 남자의 얼굴을 보여줬다.
소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한 남자였던 자신이. 붉은 머리였던 내가 보인다.
과거의 내가 보인다.
어느덧 소년은 이야기의 속편에
도착했다.
거북뎐 숨겨진 이야기.
정원 위로 새하얀 눈바람이 불어왔다. 녹아가는 얼음 주위는 붉은 갑옷을 입은 군사들이 에워싸고 있다. 그리고 정원의 중앙, 금지의 앞에 우두커니 선 붉은 머리가 보인다. 흔들리는 붉은 머리칼. 광활한 가뭄의 황야를 등에 진 그가.
그는 정국. 모든 걸 잃은 한 나라의 왕. 뻥 뚤린 천장에서 불어온 눈보라가 감히 그의 속눈썹을 치고 지나간다. 허나 정국은 미동 하나 없이 찬바람에 맞서 우두커니 서있었다. 왕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 직위를 내려놓고 오라버니로서 동생을 쓸쓸히 기다렸다. 지민과 설령이 사라져버린 금지 앞에서 하염없이.
하늘의 눈은 그치지 않고 크게 불어나, 외로운 붉은 머리 위로 아름답게 내렸다. 개중 큰 눈꽃 알갱이가 붉은 머리카락에 쌓이자, 누군가 힘없이 금지에 떠올랐다. 정국은 떠오른 시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얼굴을 구겼다. 시체의 얼굴은 천으로 덮여선 설령인지 확실하지 않았지만 정국은 알았다. 그 사람의 머리카락만을 보고. 그 사람의 녹색 향기를 맡고. 익숙하고 그리웠던 향수를 맡고.
금방 몰아친 감정을 눌러참은 정국은 침착하게 무릎을 꿇어서, 못에 뜬 시체의 천을 천천히 걷어냈다.
그리고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천을 걷어낸 채 손이 멈췄다.
손과 함께 정국도 아무 말도 않고, 그 자리에, 이 순간으로, 그대로 멈추었다.
심장마저 덜컥 멈춰 얼어붙었다.
그야말로 정적인 그의 뒷모습은 고요했다. 고요하고 무거운 위화감이 그의 등으로 느껴졌다. 이 느낌을 함부로 한낱 한 단어로 정의내리지 못 했다. 단 한 가지로 그의 감정을 정의할 수 없다. 함부로 그의 마음을 정의내릴 수 없다. 울컥, 회오리치며 피가 역류하는 그의 가슴을.
정국이 마주한 사람은 설령이 아닌 바로 녹의 공주였다. 자신이 집착했던 설령이 아닌 정국이 천으로 입을 쑤셔박고, 양잿물을 퍼부어 죽인 원수였다. 그런데 무슨 연유로 정국은 손을 내밀어 그녀를 안아 금지에서 건져냈다. 그리고 자세를 고쳐, 양반다리 위로 축 늘어진 어깨를 팔로 받쳐선 그녀를 품었다. 정국의 품에 꼭 들어온 그녀는 입에 핏물의 천을 가득 물고 있었다. 그새 시야에 고인 눈물을 떨어뜨리는 정국은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뼈저리게 구슬픈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지긋지긋한 사람."
"그거 알아? 당신은 당신은 내게 아무 것도 아니야."
"난 당신을 잊었거든."
"잊으려 무단히도 노력했거든…."
자신에게 아무 것도 아니라는 그녀를 붙들고 가련히 떨었다. 그에게 제일 소중한 사람처럼 안고. 아무 의미가 없는 사람을 안고 눈물 흘리는 모습이란, 정국의 말과 맞지 않았다. 정국은 그가 가장 사랑했던 녹의 공주를 소중히 품에 안고, 울부짖었다.
"애써 잊었던 게 왜! 또 생각나는지! 왜 또 기억나서 날 괴롭히는지, 난 미쳐야만 버틸 수 있는데, 당신은 왜 멀쩡한 건지!"
"나는 당신을 망쳐놓고도 왜 마음이 후련하지 않은지."
"이렇게 미쳐 발악을 해도 왜 당신한테는 나는 아무 것도 아닌지."
"미운 그대에게 등을 돌리고도 왜 나는 어느 것도 가질 수 없는 건지…."
녹의 공주에게로 얼굴을 떨어뜨린 정국은 가련하게 떨었다.
사랑했던 님을 책망하지 않고는 살 수 없었다. 이 어두운 세상에서. 조상 대대로 내려온 과오를 이고, 악착같이 목을 죄는 이 세상, 점같은 빛마저 소멸된 흑야黑夜에서.
세상은 백색 눈을 내려서 자신을 하얗다고 잠시 착각하게 만들지만 정국은 속지 않았다. 한낱 눈 속임수로 잠시 얄팍한 행복을 선사했다 빼앗는 세상에게, 정국은 속지 않았다.
밤이든 낮이든 정국에게 가증스러운 세상은, 홍도 녹도 구별가지 않는 순흑의 밤.
흑야黑夜다.
흑야黑夜 속에 눈이라.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정국에 눈은 그저 차가운 촉각이다. 시야는 온통 검정. 죽음보다 못 한 곳에 혼자 남겨진 소년은 사랑하는 님의 껍데기를 부여안고 가엽게 흐느꼈다.
눈물을 흘려도 모자라다. 심장이 터져도 모자라다. 막아온 슬픔의 크기론 한없이 모자라다. 정국의 마음은 미어지고 또 미어져서 피가 거꾸로 돌았다. 설령보다 더 크게 사랑했던 님. 자신보다 더 가여운 손을 잡지 못 하고 전전긍긍, 좋아한다 말 못 해서 어린 마음의 상심, 세상이 뼈를 으깨고 내게서 쥐어짜낸 피눈물. 그래, 지옥같은 기분이다. 지은 죄로 지옥에서 받을 화형보다 더 뼛속 깊이 시린 벌이다. 이 세계가 지은 죄는 모두 어깨에 졌는데 나는 사랑한 사람도 지키지 못 한다. 바보같이.
그대의 이 토깽이는
이 약한 토깽이는
이 여린 토깽이는
그대가 말한 것처럼 겁이 많아서, 그대에게 사랑한단 말조차 말도 못 하고
그대를 몰아세웠다.
나를 끝까지 따라올 폭력이 무서워서.
내 마음을 지키기 위해 이기적이게도 그대를 먼저 보냈다.
내 마음 끝까지 전하지 못 하고.
그는 힘없는 시체를 가슴에 더욱 세게 안고, 오열했다.
"비수만 꽂고 가면 어떡해. 어떻게 내 가슴엔 비수만 꽂고 가."
"좋아하냐는 한 마디가 뭐가 그리 어려워서…. 뭐가 그리 무서워서… 한 번도 물어봐주지 않았을까."
"내가 그렇게 미덥지 못했나. 그렇게 날 잘 알고도 미덥지 못 했나."
"정말 너에겐 난 아무 것도 아니었나."
"난 아직도 널 사랑하는데…."
우리에겐 나중이 없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아서, 널 부여잡고 있어. 불쌍하지. 불쌍하겠지. 목이 매인 소년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계속해서 울음을 토했다.
그런 가여운 정국을 차갑게 내려보는 흑야黑夜은 악질이다. 정국이 스스로 정리할 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다며 재촉한다. 세상은 끝까지 정국을 비참하게 만든다.
그래서 갑자기 정국의 곁에 지붕의 잔해가 떨어져 깨부서졌다. 정국은 고개를 들었다. 원으로 뚫린 하얀 하늘은 그대로인데 주위는 산산조각으로 부서져내렸다. 뒤이어 와지끈 정원의 기둥이 무너져 기울었다. 하지만 정국은 자신이 어떻게 되는 상관 없었다. 고통을 무서워하는 대신 녹의 공주를 감싸안아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어서, 꿈쩍하지 않았다.
무너짐은 석진의 군사 짓이다. 그들이 얼음을 깨부수고 들어와 정원을 매장하기 시작했다. 남은 정예 군사들은 이곳에서 발 한 짝 뗄 수 없는 그에게 걸어왔다. 정국은 공주를 힘을 줘 껴안았지만 놈들은 강제로 공주를 뺏어 바닥에 내팽겨쳤다. 그리고 정국의 빈 겨드랑이에 팔을 넣어 속박했다. 군사들이 정국을 거북궁 밖으로 끌어내려고 하자 정국은 미친 듯이 발악하며 애통해했다.
궁 밖에는 기름을 뿌려서 불을 붙히는 군사들. 정원 내 남아있는 군사들은 정국과 있었던 자리에 쓰러져있는 녹의 공주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어깨에 짊었던 축축한 자루를 바닥에 놓였다. 그리고 그녀의 몸통을 가볍게 들어 자루속으로 집어넣었다. 그것을 본 정국은 군사들을 저항하며 울부짖었다.
"손 대지마-!!"
그러자 무너져 서로에게 기댄 기둥에서 불꽃이 쏟아져내렸다. 정국이 군사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불구덩이로 달려갔지만 곧 다시 잡히고 말았다. 자루를 맨 그들은 거북궁 속에 갇히기 전에 서둘러 벗어났다.
과거 녹의 자랑이었던 녹의 공주는, 거북궁 밖 대기 되어있던, 설령이 타고 왔던 꽃마차에 실려 홍의 군사들의 행렬에 들어섰다.
옛날의 설령처럼.
이로써 녹의 공주는 홍의 전리품으로 전락했다.
정국은 끌려나가며 완전히 멀어지는 그대에게, 그저, 그저… 눈물을 흘리면서 후회할 뿐.
"원수가 되어야 하는 운명에 굴복했건만…, *종묘사직이란 족쇄를 차고 미쳐버렸건만, 기나 긴 전쟁을 제패한 대왕이라도 보잘 것 없구나…."
그대와 나의 마지막을 이렇게 맞을 바에
함께 갔으면 좋았을 텐데.
그냥 그때 당신 손을 잡고 도망갈 걸.
당신에게서 도망치지 말 걸.
당신의 모진 말에 화내지 말 걸.
어떤 선택을 하든 비극인 삶인데 왜 널 더 아프게 했을까….
그러나 뼈저린 후회는 그녀에게 닿지 않는다.
거의 다 타버린 정원 속.
많은 재가 가라앉는 금지에 보글보글, 배가 뒤집힌 호랑이 연고가 떠올랐다. 때마침 금지 앞에 검은 군화가 멈췄다.
군화를 신은 사람은 석진. 피 하나 묻히지 않고 말끔한 그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 연고 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이 물에 닿으며 녹슨 호랑이 연고를 건져내, 천천히 관찰했다. 연고통이 손가락으로 인해 돌아가던 가운데, 그의 눈에 쇠통에 작게 쓰여진 이름이 들어왔다.
석진은 곧바로 비웃으며 열린 금지의 문 속, 검은 연기로 가득한 거북궁 속으로 던졌다. 그리고 밖으로 걸어나와 살해한 붉은 머리를 밟고 '붉은 말'에 올라탔다.
같은 붉은 머리 족속인 그는 안장에 앉아서 고삐를 잡고 말을 몰았다.
그러나 말이 앞으로 가길 주저하며 뒷다리를 절었다.
석진은 원인을 향해 땅 아래를 내려봤다.
그곳엔 만신창이가 된 붉은 머리.
말의 발목을 꽉 붙잡은 붉은 머리가 있었다.
필사적으로 매달린 남자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거늘, 말의 다리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석진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다시 억지로 말을 몰았다.
바닥에 질질 끌리는 굳센 시체를 깡그리 무시하고.
그저 꽃가마를 싣고 조국으로 향하는 군사들의 뒤를 여유롭게 따라갔다.
"지랄들한다."
야비한 미소를 짓고.
설령.
너는 알까.
하나뿐인 오라버니가 너에게 집착했던 이유를.
녹의 공주가 너한테 모질게 굴었던 이유를.
하지만 그들의 고되고 진한 진심을.
녹의 공주와 정국의 배후에 가려진 진실을.
너와 그들이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아아,
죽었다 깨어나면 알지도 모른다.
Chapter 1. 전학생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