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일어났구나?”
“…에,”
술을 그렇게 마셨으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기적어기적 방을 나갔을 땐 이미 일어난 선배가 아침을 차리고 있었다. 밥을 내려놓으며 나를 향해 앉아. 하더니 먼저 앉는 선배 앞에 어색하게 앉았다. 그 모습을 본 선배가 웃음을 터뜨리며 물을 따르곤 내게 건넸다.
“뭘 그렇게 부끄러워해.”
“…어제 기억이 하나도 안날 정도로 많이 먹었거든요…”
“…기억이 안 나?”
“..예. 뭐, 제가 뭐 이상한 짓이라도…”
“기억해야할 건 있긴 했는데.”
“예? 뭔데요?”
“음-“
“..............”
“내가 말했는데. 정말 기억 안나?”
“….뭐를….”
“오늘부터 같이 가자고 했잖아. 학교.”
“예?”
“같이 살고 같은 공대인데, 내가 차가 있는 사람으로서 양심이 찔려가지고.”
“에이, 이렇게 살게 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무슨. 괜찮아요.”
“뭐가 괜찮아. 날도 아직 아침 저녁으로 쌀쌀한데.”
“저 일교시 많아서 일찍 가야하기도 하고… 저번에 선배시간표 보니까 일교시 거의 없더만요.”
“그래도 일찍일어나서 도서관 가있으려고. 토익도 계속 봐야하는데 시간이 없었거든.”
“에이…그래도.”
“너 덕에 미라클 모닝도 하고 좋지. 밥 먹고 오늘부터 같이 가자. 어젠 좋다며.”
“…제가 어제 좋다 했어요?”
“응.”
“…이놈의 술이 문제군요.”
“어쨌든.”
얼른 먹고 갈 준비 하자.
“이따 집 갈 때도 주차장에서 보자.”
“선배 몇시에 끝나는데요?”
“글쎄. 너 끝나면 연락 줘. 확인하고 시간 맞춰서 같이 가든 하자.”
“….선배 꼭 일 있으면 말해줘야돼요? 저도 일있으면 같이 못-,”
“그래그래. 늦겠다. 들어가봐.”
“….이따 봐요!”
“응~”
여주가 손을 붕붕 흔들곤 급히 공대로 들어섰고, 그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정한이 차에 올라타려한 순간 원우의 목소리가 정한을 향했다.
“등교도 같이하냐?”
“…아침부터 시비걸지말고 그냥 가지 그래? 여주랑 같이 듣는 거 아닌가? 재수강.”
“숙박도 해주면서 픽업서비스도 하는 거야? 하숙집이야 뭐야.”
“이참에 나가지 말라고 할까봐.”
“뭐?”
“하숙집 사장이 적성에 맞는 것 같기도 하고.”
“…………..”
“그니까 이제 여주한테 신경 끄지? 나랑 관련 있다고 해서 애를 달달 볶,”
“너랑 관련있어서 이지랄 하는 거,”
“…………..”
“시작만 그랬지 이제 아니거든.”
“…그래?”
“그니까 내가 여주한테 뭘 하든-,”
”어쩌지. 난 신경이 너무 쓰여서.”
“뭐?”
“내가 좋아해.”
여주.
정한이 먼저 차에 올라타곤 공대를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원우가 작게 욕을 읊조리며 건물로 느릿하게 들어섰다. 왜 안오냐며 출석 코드번호를 보내온 순영에 어플을 들어가 출석을 완료하곤 한숨을 푹 내쉬며 조용히 강의실로 들어왔다. 순영을 찾아 옆에 앉은 원우는 아이패드를 꺼내면서 앞에 앉은 여주를 바라봤다. 순영이 왜 늦었냐며 물었지만 원우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 시은과 느릿하게 일어나는 여주를 막은 건 역시나 원우였다. 저 미친놈 또 어디가? 순영이 말했지만 딱히 원우의 귀에 닿진 않았다. 시은이 먼저 원우를 보곤 여주를 툭툭쳤다. 여주의 고개가 올라갔다.
“...왜요?”
“그래서. 우리 데이트는 언제해?”
“데이, …그 데이트라는 단어보단, 과제가 어때요? 남들이 듣기도 제가 듣기에도,”
“데이트니까 데이트라고 하지. 그래서. 날짜 못 정했잖아. 언제 돼.”
“…이번주는.. 금요일 될 것 같은데.”
“그럼 금요일. 시간 장소는 카톡으로 보낼게.”
“…예. 뭐.”
원우가 강의실을 나가버리자 순영도 급히 따라 나갔다. 시은은 그 모습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어쩌냐. 저 선배는 너한테 점수 따긴 글렀네.”
“점수판도 없다 야.”
“우리 여주는~ 다정한 남자가 취향인데~”
저리 까탈스러워서야~
“여주야 오늘 점심 학식 괜춘?”
“난 학식 좋지. 넌?”
“상관없어. 우린 학식 먹어야돼. 밥 너무 남겨서. 아 맞다. 너 과제 뜬 거 봤어?”
“뭐? 아 씨. 어제 술퍼마시느라 못 봤나보네.”
“오늘 카공 기?”
“우리 수업 네시에 끝나나?”
“엉. 아님 도서관갈까. 메가에서 커피 사들고.”
“흠. 아냐. 오늘 카페 땡김.”
“그럼 네시에 끝나면 카페 가자.”
“좋아.”
지극히 일상적인 얘기를 나누며 복도에 있는 벤치에 앉은 둘. 아무말 없이 휴대폰만 하는 둘 사이에 정한과 지수가 다가왔다. 그러자 시은이 지수를 보곤 얼굴을 붉혔다.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는 지수 앞에서 정한이 여주를 향해 물었다.
“수업 끝났어?”
“아 네, 삼십분 남아가지구 좀만 쉬고 다음 수업 가려구요.”
“아~ 그래. 그럼 이따가-,”
“아 선배. 오늘 저 카공하려구요. 모르는 과제가 갑자기 아는 척해서…”
“앟ㅎㅎㅎㅎㅎ 그래그래. 그럼 카페 갔다가 연락 줘.”
“네?”
“카페 갔다가 집 오면 늦잖아. 데리러 갈게.”
“에이, 뭘 데리러와요. 학교 근처에서 시은이랑 하다가 금방,”
“시은이는 어디 살아?”
“아 저는 기숙사…”
“다행이네. 가까워서.”
“학교에서 집까지 지하철타면 삼십분은 걸리잖아. 이따 연락해. 꼭.”
“아이, 진짜…..”
“수업 잘 듣고!”
정한이 여주를 향해 손을 흔들고, 휴대폰을 홀드한 지수가 정한을 향해 물었다.
“여주? 쟤는 왜 너한테 카페가는 걸 말해? 둘이 사겨?”
“응.”
“응?”
“우리 성과 사랑 듣잖아. 나랑 커플.”
“….미친. 그래서. 쟤 카공 끝나면 데이트라도 하게?”
“뭐 비슷하지.”
“연애에 관심도 없던 애가 무슨 바람이 불었냐?”
“내가 관심이 없었나?”
“그럼 뭔데.”
“짝이 안나타났던 거지.”
“………….”
“....왜?”
지수가 걸음을 멈추자 정한이 따라 멈추며 뒤돌아 지수를 바라봤다. 지수가 미간을 적잖게 구기며 고개를 살짝 내밀곤 물었다.
“…좋아하냐? 찐으로?”
“…………..”
“…………..”
“티나냐?”
“미친.”
“가자. 수업 늦겠어.”
“미친.”
“그만 미쳐. 니 안그래도 맑눈광이라 미쳐보여.”
“미친.”
“에헤이.”
두 사람이 복도를 완전히 빠져나가 보이지 않을 때쯤 시은은 여주의 어깨를 팍팍 쳐댔다.
“야. 내가봐도 이렇게 설레는데. 넌 안 설레냐?”
“설레질까봐 곤란한 얼굴 안 보이니?”
“설레질까봐 왜 곤란해? 같은 집에 살겠다. 즐기면 되지.”
“선배가 뭐가 아쉽다고 나를 만나주겠니. 내가 몸매가 좋은 것도 아니고 예쁜 것도 아니고 과에서 뭐 유명인사도 아니고. 선배는 공부도 잘해- 잘생겨- 과에서 유명해-.”
“연애를 썅 그런 스펙 있어야 하냐? 넌 가만 보면 외모지상주의야? 어? 지한테 한없이 자비없는?”
“존나 나한테 노멀씨긴 하지. 내 얼굴을 봐라.”
“니 얼굴 뭐! 니 얼굴 존나 차도녀에 매력적이야! 넌 메타인지가 존나 안됐어.”
“닥쳐. 진짜 창피하다.”
“야. 그리고 예쁘지 않더라도, 어? 매력이 있고 마음에 들면 사귀는거지.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마라. 어?”
“야 적어도 자기정도 되는 사람이랑 연애하고 싶지 누가-!”
“그니까! 그 생각도 안드는게!”
사랑에 빠지는 거라고!
“….아 이걸,”
보내야돼 말아야돼. ‘몇시에 갈까?’ ‘아홉시?’ ‘그래.’ 시은과 아까전 정한 시각에 다다르자 여주는 노트북에 정한의 채팅창을 켜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아 여기까지 굳이 차타고 오게하고싶진 않은데.. 여주가 머리를 움켜쥐었다.
“……………”
저 아홉|
저 아홉시에 나가려|
저 아홉시에 나가려구요!|
“…..하.”
저 아홉시에 나가려구요!|
저 아홉시에 나가려
저 아홉|
|
“…….흠.”
커서가 깜빡깜빡거리고, 여주는 또 다시 무언가 끄적거렸다.
저 이제 곧|
저 이제 곧 시은ㅇ
저 이제 곧 시은이랑 나가ㄹ|
저 이제 곧 시은이랑 나가려구요!
“….아익 진짜익,”
탁! 탁! 탁탁탁탁탁탁탁!
짜증난다는 듯 키보드를 크게 내려치며 지우는 여주가 순간 노트북을 덮어버렸다. 먼저 와버린 정한의 톡 때문이었다. 탁-!
정한선배 - 끝났어? 데리러 갈까?
“쓑!”
“깜짝이야! 왜이래? 노트북 박살나겠네.”
“….카톡방에 있었는데,”
“뭐?”
“정한선배가 먼저 보내서 바로 읽어버렸어.”
“….참나. 머리 쥐어뜯길래 뭐하나 했더니 뭐라고 보낼지 고민했냐?”
“야. 후배가 선배한테 어떻게 오라가라,”
“지금은 여친이지 여친.”
“미친놈. 뭔 여친…”
“솔직히 성과사랑 하는 동안은 선배도 점수따려고 그러는지 어떻게 아냐? 걍 지금 곧 나간다 해.”
“…………..”
“야 읽고 이렇게 오랫동안 안 보내면 더 이상하다?”
“아 씨.”
여주가 급히 다시 노트북을 열고 정한의 카톡에 답장했다.
네 이제 슬슬 끝나가요!
정한 선배 - 금방 갈게. 한 십오분만 있다가 나와~
네!
“…하, 과도한 친절..”
“과도는 무슨. 그정도면 정말 다정한 거지.”
“…난 다정한 거에 좀 취약한데.”
“선배가 그걸 아는 걸지도~”
“….그런가.”
“그냥 받거라~ 복에 겨운 년아~”
“…니가 초래한 일인 건 알지?”
“야. 이게 왜 내가 초래한 거냐? 너가 하필이면 원우선배 집에 들어가려고 했고, 다음으로 선택한게 정한 선배인데 하필 정한 선배랑 원우 선배가 앙숙이고.”
“너가 성과사랑만 듣자고 안 했어도 그냥 곱게 한달 살다가 나왔을 거야. 그럼 당연히 전원우선배랑 정한 선배랑 더 만날 일도 없었을 거고.”
“그렇게 따지면 조를 그렇게 짠 교수님 잘못이지~”
“….말이라도 못하면.”
“넌 너무 못 즐겨. 엉? …뭐, 너 살아온 삶을 알아서 내가 쉽게 말은 못하지만, 좀 즐겨봐.”
“………내가 어떻게 그러냐.”
사랑은 믿을 수가 없는데.
“….금요일?”
“네. 대뜸 수업 끝날 때쯤 오시더니 날짜 잡자고 해서.”
“…그럼 우린 주말에 놀러갈까?”
“주말에 어디요?”
“저번에 수족관 좋아한다 했잖아. 오랜만에 멀리 좀 나가볼까 하는데.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귀찮아서 멀리 잘 안나가는데 그래도 가끔 서울가주면 좋을 것 같아서. 어때?”
“오, 좋아요. 가끔은 멀리 나가주는 것도 기분 내고 좋죠.”
“그럼 토요일에 수족관?”
“좋아요.”
“…원우는 그 때말곤 못 봤어?”
“네. 오늘은 그 수업만 겹치고, …동아리실 갔을 때도 못 보긴 했네요.”
“그래?”
“네. 아 근데 지수선배님 있잖아요.”
“지수?”
“네. 지수선배님 여자친구 있어요?”
“…그건 왜?”
“아니 뭐..”
“여주 이상형이 지수야?”
“예? 아뇨. 무슨 말도 안 섞어 봤는데.”
“근데 왜?”
“….아니 뭐 그냥.. 주변에서 지수선배님 여친 유무를 묻는 사람들이 좀 있어서…”
“지수가 인기가 많긴하지. 근데 아주 오래된,”
“오래된 여친이 있어요?!”
“ㅎㅎㅎㅎㅎㅎㅎ뭘그렇겧ㅎㅎㅎㅎㅎ 놀랗ㅎㅎㅎㅎ”
“아니…”
…그 사실을 시은이가 알면 울 것 같아서요. 라는 말을 삼킨 여주가 입을 다물곤 멋쩍게 웃었다. 정한은 지수의 여친 유무를 궁금해하는 여주가 조금 신경쓰이는 듯 말을 아끼다가 결국 진실을 토해냈다.
“아주 오래된 솔로라고.”
“정말요?”
“응. 애가 워낙 잘생기고, 마치 오래된 애인이 있을 것 같은 상이라 그런지, 다들 좋아는 하는데 대시는 안해서. 지수가 또 막 연애를 고파하는 애가 아니기도 하고.”
“다행이네요.”
“뭐가?”
“예? 아니 그냥. 그냥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그 사람들한테 다행이다~ 뭐 이런…”
“좀 서운하네~ 그래도 나 지금 여주 남친인데.”
“예? 아니 뭐… 그런…”
…단어를 서슴없이.
“…그래도 확실히 원우 선배는 이기실 거예요. 선배 다정하잖아요.”
“여주 이상형이 다정한 사람이야?”
“네. 알고 다정하게 하신 거 아니었어요?”
“글쎄.”
잘보이려고 노린게 아니라 그냥 너한테 다정하고 싶어서 그런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