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석아, 잘지내?」 한참을 이 한문장만 노려보던 루한은 이내 지우개로 편지지가 찢어져라 박박 지웠다. 편지는 제 스타일에 맞지않아 이미 유치원 시절부터 남들 다쓰는 편지 한장 안써본 루한이었지만 민석의 한마디에 그저 꼼짝없이 연필을 들 수 밖에 없었다. '난 편지가 좋아. 진심이 제일 많이 담긴것 같아.' 중국에 돌아가서도 편지를 주고받자는 약속을 반강제로 한 후 민석은 총 두장의 편지를 보내왔다. 내용도 길고 무엇보다 맞춤법 하나 틀림없이 깔끔한 편지였다. 그러기에 루한은 더욱 편지에 대한 자신감이 줄어만 갔다. 「루한에게. 잘 도착했어? 내가 편지 주고받자고 해놓고 전화했네. 고작 일주일인데 목소리 들으니까 반가워서 눈물났어....」로 해서 쭉. 총 다섯장의 편지지가 한 봉투 안에 들어있었다. 정성스레 눌러 쓴 반듯한 글씨에서 표정 하나하나가 묻어나왔다. 이 긴 장문의 편지들을 읽으며 루한은 민석의 편지에 대한 집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다른 어떤것 보다도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편지를 주고받자고 확실히 약속을 했건만 보는것과 쓰는것은 확연히 달랐다. 민석을 덜 사랑하는것도 아니었고 한국말을 못하는것도 아니었다. 다만 마음속에 있는 그 거창하고 부푼 생각을 어떻게 풀어내야 민석이 알 수 있을지 몰라서였다. 루한은 턱을 괴고 연필 꼭지를 입에 물었다. 민석이 주로 하던 버릇이었는데 이젠 이런 버릇마저 똑같아졌다. 「너 연필 물지 말라니까. 네가 두고간 연필들 전부 끝이 헐어있어. 내가 할말은 아니지만 너까지 버릇들면 어떡해. 난 이거 고치려고 하는데.」 루한은 문득 편지속 이 구절을 생각해내곤 입에 물던 연필을 빼냈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옆에서 생생하게 들려오는 잔소리가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 「방금 네가 옆에서 연필 물지말라고 말한것 같았어. 그래서 안 물었다. 나도 고칠께. 다음에 만날때 연필 무는지 안무는지 꼭 봐줘.」 사각사각하는 소리가 방안에 곱게 퍼졌다 사라졌다. 역시 이상한가. 루한이 연필꼭지로 머리를 긁었다. 어렵다. 감정을 글로 적어낸다는건 무리였다. 기운이 쫙 빠진 루한이 책상에 엎드렸다. 그냥 이런 편지말고 보고싶다. 다시 볼도 만지고 싶고, 삐죽 나온 입술에 입맞춤도 하고싶다. 동그란 콧망울을 살짝 건드리면 자연스레 올라가던 예쁜 입꼬리까지도 모조리 그립다. 눈물도 별로 없는 성격이었건만 막상 상황에 닥치니 눈물이 날것마냥 마음이 일렁거렸다. 「밤에 너 없으니까 팔이 허전했어. 첫날은 그냥 네가 쓰던 베개 안고잤어. 너는 없는데 네 냄새가 나니까 그럭저럭 잠은 잤다. 그리고 나서 바로 큰 인형 샀어. 들고 집 가는데 다들 쳐다봐서 부끄러웠어. 언제쯤 다시 너 안고 잘까. 비밀인데 아주 쪼오끔 울었다. 진짜야.」 루한은 다시 편지의 구절이 떠올랐다. 민석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갑자기 모든게 서럽단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기쁘지 못하다는게 서러웠다. 마음이 떠나 몸만 있는게 이런 말이구나 싶었다. 루한이 연필을 쥔 손에 힘을 풀었다. 맑은 소리가 나며 연필이 책상위를 몇바퀴 굴러갔다. 전화 해볼까. 목소리 들으면 좀 괜찮으려나. 사진 한장 보내달라고 할까. 편지 못쓰겠다고 말할까. 글로 쓰려니 한글자도 생각 나지 않던 말들이 전화를 중심으로 생각하자 별말들이 마구 떠올랐다. 심지어는 먹다 남긴 요플레마저도 떠올랐다. 정말 전화해야겠다라고 생각한 루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실로 나가려는데 자꾸만 노란 편지지가 눈에 밟혀 루한은 한발짝도 움질일 수 없었다. 편지를 못 쓰겠다고 하면 분명 실망할 민석이 생생히 떠올랐다. 당장 전화로는 아무렇지 않은척 하겠지만 말이다. 루한은 그래서 섣불리 전화도 하지 못했다. 편지는 두말할것도 없고. 결국 다시 자리에 앉은 루한은 심기를 가다듬고 연필을 손에 쥐었다. 「민석아, 보고싶다. 나 글 못쓰는거 이해해줘. 너 그리운 만큼 노력해서 쓰고있어. 종이만 몇번째 버리는지 모르겠지만 편지 쓰는거 너무 어렵다.」 루한은 끙 소리를 내며 발가락을 움직였다. 「전화 하려고 했는데 편지 먼저 보내야 할것 같아서 얼른 써 봐. 네가 보낸 편지 다 잘 읽었어. 나도 조금 울었다. 편지에서 네 모습이 보이는것 같아.」 루한은 앞뒤가 안맞는 문장도 그냥 넘기며 쭈욱 편지를 써내려 갔다. 그렇게 쓰다보니 어느새 한장이었다. 뿌듯해진 루한은 얼른 편지를 접어 봉투에 넣고 겉봉지에 이름과 주소를 써넣었다. 오래 미뤄오던 일을 끝내자 순식간에 피로가 밀려왔다. 기지개를 쭉 킨 루한은 정말 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전화기 쪽으로 향했다. 전화기 밑에 깔아둔 민석의 전화번호. 외운 번호지만 혹시나 해서 적어놓은 번호였다. 버튼을 누를때의 그 설렘에 루한은 가슴이 콩콩 뛰었다. 신호음이 걸린지 얼마 지나지 않아 루한은 그리웠던 그 목소리와 마주했다. "민석아." -루한! 먼저 전화했네? "목소리 듣고 싶어서. 뭐하고 있었어?" -그냥..이것저것. 너 없으니까 뭘 하는건지도 모르겠다. 민석은 잠시동안 말이 없었다. 조용히 수화기 선을 타고 마음의 끝자락이라도 전해질듯이 손가락으로 빙빙 선만 꼬아대고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텐데 그저 아까운 시간만 흘려대며 보이지 않는 서로를 그렸다. -..나중에 꼭 돌아와. 기다릴께. 나는 너 믿어. 나 이제 알바 가야한다. 편지 쓸께. 민석이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질것 같았다. 대뜸 중국으로 돌아온것에 대한 회의를 느꼈다. 며칠뒤 떠날 독일도 갑자기 모든것이 후회스러웠다. 루한은 천천히 편지 앞으로 돌아왔다. 아직 부치지 않은 하얀 봉투가 슬몃 초라해보였다.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피가 나올만큼 아무생각 없이 힘을 줬지만 그저 쓰라릴뿐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민석아 나 잘하고 있는거 맞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루한은 편지를 손에 쥔 뒤 나갈 채비를 했다. 민석을 생각해서라도 이 악물고 성공해야 할 일이었다.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민석은 걸핏하면 말없이 펜을 들었다. 그냥 말로 하면 편할 것을. '보고싶었다..엄청 뛰었더니 힘들어ㅠㅠ' '밥 안먹을래 살쪘어'사소한 말부터 좋아한다는 말까지 몽땅. 루한의 손에 쥐어주며 개구지게 보이는 하얀이가 불현듯 떠올랐다. 루한은 걷던 걸음을 멈추었다. 시끄러운 거리의 소리가 귀를 찌르는데 민석의 웃음이, 작은 쪽지가, 흑연이 묻어있던 손이 떠올랐다. 「루한아 나 네가 독일 안갔으면 좋겠어. 못볼 생각하니까 당장 눈물부터 나오더라. 근데도 꾹 참고 너 응원하는거야. 사랑해.」 편지의 마지막 구절이었다. 다시 한번 차오르는 뜨거운 감정을 미루었다. 아직은 맘놓고 울면 안된다. 루한은 손에 들린 얇은 편지봉투를 바라보다가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이제야 하고싶은말이 정리가 되었다. 벌써 많이도 걸어온 길이지만 루한은 망설임 없이 달렸다.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고 심장은 뛸때마다 날카롭게 찔러왔다. 헐떡이며 집에 도착한 루한은 얼른 새 종이를 꺼내 마구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한장의 메모지를 새까맣게 채울 정도의 글을 쓴뒤 루한은 그것을 편지봉투에 넣었다. 그런다음 아직 닫지 않은 편지봉투를 들고 루한은 앨범을 뒤적였다. 다섯장쯤 넘겨서 루한은 자신의 사진 하나를 봉투 안에 집어넣었다. 그제야 시원하게 한바탕 웃은 루한은 다시 집을 나섰다. 너에게로, 나에게로. 「민석아, 미안해. 난 더 높은곳을 보고싶었어. 어제도 오늘도 또 언제일지 모를 날까지 매일 니가 그리울꺼야. 많이 후회했었는데 이제 안그럴꺼야. 앞으로 편지 많이 보내줘. 나도 많이 보낼게. 네 생각밖에 안난다. 나중에 나 성공해서 돌아오면 우리집부터 만들자. 그때까지 건강하고 울지마.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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