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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패러디



최승철 ver.


다음날은 비가 쏟아졌다.


장마가 시작되려는지, 비는 쉽게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더 미룰수록 그는 더 아플 테니.


꼭 오늘이어야 할까,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음속에 더 담아두는 것보다는 나았다.



우산을 들고 그의 집 대문까지 가는 동안 바지 밑단이 젖었다.


바지를 한 번 접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문의 초인종을 누르자 문이 활짝 열렸다.


대문 사이로 저택을 나서는 그가 보였다.


그가 우산도 없이 드넓은 잔디밭을 가로질러 나에게 다가왔다.


안겨드는 온기가 따뜻했다.




“김칠봉, 헷갈리게 하지 마, 제발.”




그는 내 손을 잡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온실을 옮겨 놓은 듯 다채로운 화분이 곳곳에 자리했다.


그가 크고 하얀 수건을 내 위에 얹어 주고 자기 역시 수건으로 머리를 털었다.


우리는 거실의 소파에 앉았다.


가정부가 홍차를 내왔고 그는 오늘 그녀더러 퇴근하라고 했다.


가정부가 퇴근 준비를 하는 동안, 꾸며낸 그의 교양 있는 목소리가 거실을 채웠다.




날씨가 궂은데 오셨네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




마음의 가장자리가 조금 욱신거렸다.


그는 하지의 저녁에 신사들을 상대했듯 내게도 지극히 공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내가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를 건넸다.




다시 만나서 정말 반가워요.”




우린 만난 적이 있죠.”




우린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죠.”




“11월이면 딱 5년이 돼요.”




그의 기계적인 대답에 침묵이 흘렀다.


그의 눈이 긴장되고 불행한 눈빛으로 찻잔을 응시하고 있었다.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우리 관계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요.”




나는 말을 꺼낸 걸 후회했다.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 뿐 아니라 우리 사이의 간극을, 5년간을 되새기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지난 5년의 꿈속에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망가진 나침반처럼 보였다.




말해 봐요.”




나는 말할 수 없었다.




날 떠날 거라고.”




나는 말할 수가 없었다.




내 앞에서 다시 말해 봐요.”




그의 눈이 젖어들고 있었다.


그에게 도망쳤던 일들이 그를 아직까지 괴롭히고 있구나.


나는 죄책감에 잠겨들며 허우적댔다.


이렇게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검고 미끈한 몸체를 자랑했던 그의 바이크, 라이딩 재킷에서 났던 가죽 냄새와 푸르고 쌀쌀한 보스턴의 날씨.


미친 듯이 도로 위를 달리던 우리.


그건 어린 추억에 불과했다.




“끝까지,”




숨을 들이마신 건지, 눈물을 삼킨 건지 모를 그의 목소리는 창밖의 비처럼 조금 잦아들었다.




"너는 나를 망가트리지."




그의 목소리가 점점이 내 속으로 파고드는 동안, 나는 그에게 나를 내어 주었다.


우리의 어리고 푸르던 날들 중 하나에 젖어 들어갔다.




“Never seek to tell thy love,

love that never told can be

for the gentle wind does move silently, invisibly.

I tole my love,

I told my love,

I told her all my heart,

trembling, cold, in ghastly fears-”



 

승철의 목소리는 고저 없이 담담했다.


우리가 나누던 시였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우리 둘은 사념문을, 그 단어들을 깨물며 시간을 보냈다.



열한 시, 커튼 사이로 햇빛이 가늘게 새어 들어올 때,


그는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저걸 속삭였다.


어둑한 방 안에서 나른한 공기에 섞인 알파벳을 뱉으며 우리는 다시없을 사랑에 빠지곤 했다.



 

“Ah, she did depart.”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승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는 현관문으로 향하다 그가 내 손목을 휘어잡은 탓에 춤이라도 추듯 한 바퀴를 돌아 그의 품에 안겼다.


한 편의 희극처럼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고서 나머지 구절을 드리웠다.




“Soon as she was gone from me,

a traveller came by,

sliently, invisibly,

he took her with a sigh.”




스티브 최.


최승철.


우리 관계 따위,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도망칠 걸.


다시 이 집에 들어오는 게 아니었는데.


어째서 나는 상황판단 능력이 떨어질까.


너에게 다시 돌아오면 다시 떠나기 더 힘들다는 걸 잘 알면서.




자리에 앉아. 칠봉아.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는 사람을 위압하는 힘이 있었다.


나는 소파에 다시 주저앉았다.


그는 식어버린 차를 화분 중 하나에 붓고서 다시 차를 따랐다.


한 잔을 내게 건네고, 그는 누구보다 여유롭게 나를 본다.



나는 그 눈빛을 잘 알고 있다.


나의 우위에 있다는 그 잘난 눈빛을.


그러나 그는 동시에 나에게 한없이 약한 존재다.


내 말 한마디면 그는 내 발밑에 꿇어 애정을 갈구할 것임을, 나는 그 누구보다 잘 안다.


그는 나에게 미쳐 있다.


확신은 자신만만한 그의 입술에서 풍기는 피 냄새에서 기인한다.


여린 입안 살을 씹어대다 피가 터졌겠지.


멍청한 새끼, 그러니까 내가 네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는 거야.


그의 면전에 대고 말해주고 싶었다.




버논이한테서 고백을 받았다면서.”



우리 관계에 대해 말하려고 온 거야.”




떠날 거라면 진작 문 밖으로 나섰겠지.”




네가 날 잡았잖아.”




지금은 아니잖아. 내 핑계 대는 건 여전하네.”




버논이 얘기는 꺼내지 마.”




세컨드는 허용해 줄 수 있어.”




장난하는 거지?”




아니. 진담인데.”




세컨드라.


머릿속에서 계산은 바쁘게 돌아갔다.


그는 나를 얼마만큼 순수하게 대하고 있을까.


궁금해졌지만 나는 희대의 썅년이니 그 정도는 넘어가기로 했다.


알 게 뭐야.


그런 점에서 버논과 나는 딱이었다.




집 구경하고 가.”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잡아채 손바닥에 입을 맞추고 검지 손끝을 깨물었다.


손바닥에는 빨간 립스틱 자국이 진하게 남고 검지 한 마디 정도에 잇자국이 남는다.


처음엔 깨끗했던 그의 손은 갈수록 더럽혀지고 있었다.


바로 나 때문에.




그는 그걸 닦지 않는다.


내 손을 겹쳐 잡고 나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는다.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이 의미를 잃었다는 표정이다.


그가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은 그의 소유물이 아니라, 내가 그를 떠났던 시간의 전유물이다.


그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그를 떠났어도 죽지 않았으며, 이토록 고상하게 나를 그리워했노라고.


그가 나에게 보여주고 싶어 했던 것들을 보러 간다.


오 년간 어떻게 참았니.


그는 고서가 가득 들어찬 서재를 들어간다.


성수 부인이 극찬하던 조각상과 도자기는 인테리어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다.


나는 한 켠에 놓인 게 천체망원경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와 내가 꽃과 같았을 때 별을 따다 달랬더니, 이젠 질리도록 쳐다볼 수 있을 줄이야.


우리는 호화스러운 홀과 방과 복도를 지난다.


그의 치부까지도 구경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는 나를 드레스룸으로 이끈다.


드레스룸을 통과하면 곧바로 침실이라는 걸 알기에 온 몸의 근육은 긴장한다.




긴장 풀어. 그냥 보여주려는 거야.

넥타이로 네 목을 조르거나 벨트로 널 결박하려는 게 아니라고.”




나는 그가 부와 권력의 순혈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낸다.


그러니까 그의 말대로 그냥 보는 건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그의 드레스룸 안으로 들어선다.


그의 거대한 옷장에는 색색의 셔츠가 쌓여 있다.


나는 그것들이 언젠가 미술 시간에 배웠던 RGB 색상표 같다고 생각한다.


채도와 명암에 따라 각기 다른 색의 셔츠가 정렬되어 있는 모습은 신선한 충격을 내게 불러일으켰다.


모든 셔츠에는 그의 애칭인 S. Coups가 쓰여져 있었다.


쿠데타라.


그가 일으킨 것은 정말 쿠데타일지도 모른다.


내 인생에 그라는 독재자만을 남기고서 살아가도록 명령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는 아름다웠으니까.




그는 셔츠를 아무렇게나 집어던졌다.


장난끼 있는 눈웃음과 섞여 버건디, 머스타드, 코발트 블루, 인디 핑크를 시작으로 색색의 셔츠가 내게로 쏟아졌다.


웃음이 터지고, 셔츠는 공중을 돌아다니며 청결한 먼지를 내뿜었다.


회백색 타일이 부드럽고 값비싼 셔츠로 완전히 뒤덮일 무렵, 우리는 셔츠 더미 위에 엉켜 누워 있었다.


공기는 탁했고 베개싸움 이후의 열기를 띠고 있었다.


나는 플란넬 셔츠 하나를 집어 냄새를 맡았다.


예전 스티브의 땀과 종이 냄새와는 다르게, 고혹적인 승철의 향수 냄새가 났다.




우리의 과거는 그의 수많은 셔츠처럼 세탁되어 버렸을까.


쓸데없이 눈물이 났다.


그는 괜찮을까.


그는 더러워지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드레스룸 밖으로 난 창문으로 비가 잦아들고 있었다.


셔츠 더미에 울음소리가 파묻혀 제대로 들리지 않기를 빌면서, 나는 그의 셔츠를 더럽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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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자까님... 진짜 레알트루 왜 슨처리 저렇게 달달하죠? 네? 저런...저런 재벌 최고됩니다...
7년 전
독자2
잘 읽고 갑니다! 작가님 매번 승철이 잘 보고 있어여...♡
7년 전
비회원도 댓글을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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