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나가는 명문대인 N대 근처에는 하숙집이 하나 있어. 그 하숙집에는 하숙생 4명하고, 하숙집 주인 부부라고 하기도 애매하고, 커플이라기도 애매한, 뭐 여튼 그런 남정네 둘이 살고있지. 하숙생들은 이재환,이홍빈,김원식,한상혁 이라고 하는데, 전부 N대 학생 아니면 N대 입학 예정인 애들이야. 우선 이재환. 이재환은 N대 수학교육과 3학년이야. 코도 크고 좀 외국인처럼 생겨서(...) 뒤에 나올 하숙집 주인 중 한명이 첫인사로 "hello?" 라고했다지? 그다음 이홍빈. 이홍빈은 컴공과 1학년. 초등학교 졸업 이후 남중남고를 다닌 것도 모자라서 컴공과.... 눈물이 앞을 가린다 아주.... 반대로 김원식은 국문학과 1학년인데, 성격도 좋고 옷도 잘입고 다녀서 여자들한테 그렇게 인기가 많아. 특히 N대 여신 집합소라는 국문학과의 여선배들한테. 그리고 막내인 상혁이. 상혁이는 이번년도 고삼이야. 수능 끝나고 N대 최종합격 발표난 뒤에 일찌감치 사촌형 하숙집에 하숙하기 시작했지. 그럼 상혁이 사촌형이 하숙집 주인이냐고? 응 맞아. 하숙집 주인 중 한명이 상혁이네 사촌형이야.
자, 이제 하숙생들을 다 소개했으니 하숙집 주인을 소개해야지. 근데 앞서 말할게 있는데, 사실 이 하숙집 주인 둘은 게이야. 대충 눈치 챘겠지만 둘이 사겨. 그것도 5년째. 그래서 둘이 커밍아웃이라던가 아웃팅 당하면 어쩌나 해서 하숙생을 받을까 말까 하다가, 결국 타협 끝에 호모포비아가 아닌 사람들만 받기로 했지. 그래서 들어온게 위 네사람이고, 이미 네사람 앞에선 전부 커밍아웃을 끝낸 상태야. 이 둘은 가만히 보고있으면, 진짜 그냥 깨소금이 풀풀 날려. 가끔 싸울때 빼고는. 싸우면.......
말이 길어졌네. 그럼 이제 진짜로 소개해봐야지? 우선 차학연. 차학연은 법적으로 하숙집 주인이야. 나이는 스물여덟살이고, 출판사 직원이야. 근데 스물여덟에 일개 회사원이 자기 명의의 집은 어떻게 구했냐고? 할아버지가 차학연 어렸을 적부터 그렇게 이뻐하시더니, 결국엔 유산으로 물려주셨대. 그래서 그 집에서 생활하다가 자기 애인하고 살기에도 너무 넓어서 하숙을 놓은거고. 여담인데, 상혁이의 사촌형도 차학연이고, 재환이한테 "hello?" 라고 인사한 집주인도 차학연이야. 두번째 집주인은 정택운. 나이는 똑같이 스물여덟이고, 작년에 첫부임한 사립 고등학교 지리 교사야. 둘도 N대 출신이었는데 교양수업을 같이 듣다가 친해졌고, 그러다가 사귀게 됐다고 그러더라고. 근데 둘은 성격은 정 반대야. 말도많고 치대기도 엄청 호들갑스러운 학연이가 하숙집의 엄마라면, 조용하고 무뚝뚝한 택운이가 아빠라고 보면되지. 근데도 요상하게 둘이 붙어있으면 죽이 척척 맞아. 연인은 정 반대인 사람하고 만나야 된다는게 맞나봐 정말.
아무튼, 지금부터 이 하숙집 생활을 소개해보려고해.
* * *
"정택운 존나존나존나존나존나 싫어. 진심으로. 개새끼. 씨발새끼. 말새끼."
첫 소개부터가 조금 순탄치 않구나. 아무래도 오늘 무슨 일이 있었나봐. 택운이는 부엌에서 말없이 라면을 끓이고 있고, 학연이는 소파에서 그런 택운이를 죽어라 노려보고 있어. 수업때문에 잠깐 학교에 간 재환이를 제외한 나머지 하숙생들은 소파 구석에 쭈굴쭈굴 쭈그려앉아서 그런 학연이의 눈치만 보고있고. 이런 일이 있을때는 대게 두가지로 나뉘어. 학연이가 지나치게 쪼잔하게 굴고있거나 아니면 택운이가 정말 잘못했거나. 뭐, 계속 보다보면 알겠지.
그렇게 한참을 냉전상태로 있는데, 갑자기 띠로롱 하면서 문이 열려. 저왔어요! 재환이 목소리가 들리는 걸로 봐서는 재환이가 집에 왔나봐. 평소같았으면 왔어? 하고 맞아줄 학연이가 있어야 되는데, 웬일인지 그런 학연이가 대답도 없이 택운이만 노려보고 있네. 거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 거라고 직감적으로 느낀 재환이가 힐끔힐끔 택운이랑 학연이를 번갈아보더니, 슬그머니 제 방으로 들어가. 그러고서는 옷을 갈아입어. 이 이후로 약속도 없고 수업도 없거든. 집에서 입을 옷으로 편하게 갈아입은 재환이가 종종걸음으로 거실로 나오더니, 씩씩거리고 있는 학연이한테 가서 웃으면서 말을 걸어. 형 무슨 일 있었어요? 표정이 안좋아요. 그 말에 여전히 택운이를 노려보면서 학연이가 한마디해. 정택운 저놈의 새끼. 저거 고추떼야돼 저거. 오랜만에 들어보는 학연이의 찰진 욕에 재환이가 지금 택운이가 학연이의 심기를 심하게 건드릴 잘못을 했구나. 하고 생각을 해.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길래 이러는 걸까?
시간은 몇시간 전으로 돌아가.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이기도 하지만, 택운이네 학교 개교기념일이기도 해. 그래서 학교는 하루 휴교한 덕분에 택운이는 크리스마스 이브랑 크리스마스를 이틀 연속으로 쉬게됐어. 그래서 학연이도 이틀동안 진득하게 택운이한테 붙어있어보자 싶어서 월차를 냈지. 문제는 크리스마스 이브날, 그러니까 오늘, 같이 마트에 장을 보러 간 것 부터가 문제가 벌어졌지.
"택운아, 우리 장 보러갈까? 크리스마슨데, 케이크랑 이것저것 맛있는건 해줘야지."
"어 학연이형! 그럼 저는 삼겹살이요! 삼겹살 먹고싶은데!"
"전 도넛이요."
"전 그럼 이것저것 과자 사주세요. 아무거나."
"이것들이 완전 나를 밥주는 기계로 아네?"
"사랑해요 학연이형. 사주실거죠?"
상혁이가 살랑살랑 애교섞인 목소리로 말하니까, 이 미자덕후(라고 쓰고 상혁이 덕후라고 읽는다.) 차학연이 어쩌겠어. 바로 ok사인 내리지. 결국 차학연 정택운 둘이서 같이 홈플러스를 찾아갔어. 가니까 이것저것 먹을 것도 많이 보이고, 크리스마스 시즌이라고 이것저것 파는 물건들도 많이 보여.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자며 이것저것 카트에 담는 차학연과, 그런 차학연을 말없이 쳐다보는 정택운이야. 겉으로 보기엔 그냥 일방적으로 학연이가 혼자 떠드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둘은 굉장히 화기애애하게 쇼핑을 하고있었어.
그런데,
"정택운?"
누군가가 뒤에서 택운이를 불러. 택운이는 뒤를 돌아보지. 학연이도 누군가 싶어서 뒤를 돌아보다가, 얼굴을 굳혀. 저 씨발년. 작게 중얼거려. 대학 졸업한지는 몇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생생한 얼굴이야. 누군가하면, 정택운 짝사랑녀 겸 차학연 공식 썅년, 한주현이야.
학연이랑 택운이 동기 사이에서 한주현은 유명해. 대학 입학때부터 줄곧 택운이를 따라다니면서 추근거렸거든. 택운이랑 학연이가 연애하기 시작한 이후에는 학연이를 줄곧 남몰래 괴롭히기도 했고. 어쩌면 그거때문에 학연이는 한주현을 더 싫어하는걸지도 모르고.
"오랜만이네 택운아."
"그러게."
"근데, 둘이는 아직도 사귀네? 오래 간다. 보기좋네."
니미 저 씨발년이 뭐라고 나불대는거지? 학연이는 차오르는 욕을 억지로 참아. 누가봐도 비꼬고 있는거야. 너희 아직도 사귀냐? 하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택운이는 그냥 말없이 웃기만해. 거기서 1차 분노가 쌓이는거지. 차학연은. 아무 말도 안하고 있는 정택운이 답답해서.
"보기좋지? 근데 넌 아직도 애인 하나 없이 그러고 있나봐? 우리 동료들 중에 돈많고 잘생긴 사람 많은데, 어떻게 소개시켜줄까?"
학연이가 끼어들어서 대답을 가로채. 한주현 얼굴이 묘하게 굳고. 그러다가 다시 한주현이 웃으면서 대답하지.
"아무리 그래도 택운이만 할까."
저 썅년이 정택운 잘난건 알아가지고. 학연이가 다시 열이 뻗쳐서 얼굴을 굳혀. 택운이를 데리고 무시하고 가려는데, 한주현이 택운이를 붙잡아. 그러고는 살랑살랑, 그 특유의 여우웃음(차학연이 말하는 바로는)을 흘리면서 핸드폰을 내밀어.
"택운아, 핸드폰 번호 혹시 바꼈어? 나중에 또 연락할테니까, 번호 좀 알려줘."
왜 남의 애인한테 막 그렇게 전화를 하고 그러실까? 학연이가 짜증이 나서 그 손을 내치려는 찰나, 택운이가 그걸 받아들어. 그러고서는 핸드폰 번호를 눌러주고는, 친절하게 한주현한테 내미네? 이러니 학연이가 짜증이 나 안 나? 고마워 택운아. 온갖 예쁜 척을 해대면서 한주현이 나가고, 남은건 정택운과 차학연 단 둘뿐이야. 카트를 끌고 다시 장을 보려는 정택운의 손목을 턱, 하고 차학연이 잡아채더니, 씩씩거리면서 노려보다가 이윽고 입을 열어.
"정택운, 너 미쳤어?"
"뭐가"
뭐가아? 뭐가아? 열이 오를대로 오른 차학연이 넌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라면서 소리를 질러.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쓰여서 말리고 싶지만, 어차피 말리면 더 흥분할 학연이를 알기때문에 차마 말리지도 못하고서 택운이는 가만히 서있어. 차학연이 다시 입을 열어.
"아니, 한주현 저년이 지금 너한테 마음이 남아있는지 아님 또 무슨 개수작 부리고 있는건지 어떻게 알고 전화번호를 그렇게 쉽게 덥석 알려줘? 어?"
"그렇다고해서 알려달라는데 안알려 줄 순 없잖아."
저게 말이야 방구야. 되도않는 정택운의 지론에 열이 뻗친 학연이가 결국에는 그래 너 잘났다 씨발! 이라고 소리를 지르고는 택운이를 지나쳐서 그대로 왔던 길을 되돌아가. 학연이는 택시를 잡으면서 여전히 열을 올리고 있고, 택운이는 멍하니 그런 학연이를 바라보다 제가 또 뭘 잘못했구나 싶어서 콧등을 긁적여. 그러면서도 제가 뭘 잘못하고 있는건지 모르는게 함정. 여기까지가 학연이가 분노한 이유고, 결국 끝에는 지금 이 사단이 난거지.
끝끝내 택운이를 노려보던 학연이가 쿵쿵거리면서 제 방으로 들어가. 쾅! 하고 문닫는 소리가 나는데, 거기에 또 하숙생들은 움찔움찔 하지. 정작 당사자인 택운이는 여유롭게 라면이나 끓여먹고 있고.
"저기 형."
안되겠다 싶어서 재환이가 슬쩍 택운이 옆으로 다가가. 그러고는 무슨 일이에요? 하고 물어.
자초지총 이야기를 들은 재환이가 음…. 하고 중얼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말해. 형이 잘못 하신 것 같은데요..여전히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택운이는 ? 하는 표정을 지어보였고, 재환이가 설명을 하기 시작하지.
"그 여자분이 형 좋아하신다면서요. 그거때문에 학연이형 욕도 많이 하고 다녔고."
"응."
"자기 애인 탐내고, 자기한테 해코지하는데, 누가 그런 여자를 좋게 보겠냐구요."
듣고보니 그렇네. 이제서야 슬슬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감이 오는 택운이야. 알았으면 꼭 사과하세요, 알았죠? 뿌듯한 표정으로 상담을 끝낸 재환이가 다시 티비를 보러 거실로 나가. 택운이는 멍하니 학연이가 들어간 방문만 바라보고있고.
한편, 학연이는 여전히 속에서 천불이 나서 짜증나 죽으려고 그래. 샐샐거리던 한주현 얼굴도 생각나고 거기다대고 번호를 찍어주던 정택운도 생각이 나고. 마음같아선 전부 그냥 한대씩 후리고 싶은대, 또 그럴 수도 없어. 괜히 자기 가슴만 퍽퍽 내려치는 학연이야. 답답하고 짜증나서 죽을 것 같에.
그때, 똑똑 하고 문두들기는 소리가 나. 누구야. 물어보는데 대답이 없어. 누구냐고! 결국에는 학연이가 소리를 지르지. 그러니까 문이 열리더니, 익숙한 머리통 하나가 들어오네? 누구긴 누구야. 정택운이지.
"뭐야. 너 왜들어왔어."
학연이가 까칠한 목소리로 말하니까, 택운이가 입을 달싹거려. 뭐라고 말은 하고싶은데, 도저히 말이 안나와.
"왜 들어왔냐고."
"…미안해."
"뭐가."
"한주현한테 번호 준 거."
"……."
"그냥, 나는 친한 동기였으니까 그런 거였는데…. 그게 기분 상하게 할 줄은 몰랐어. 미안."
예상치 못한 사과에 학연이는 이미 화가 싹 풀려있어. 웃으면서 택운이를 껴안고싶은 충동을 꾹 참고서 한껏 낮은 목소리로 물어. 정말 다신 안그럴거야? 택운이가 고개를 끄덕이지.
"아무튼, 한 번만 더 그래봐 아주. 혼나."
"응."
"한주현한테 연락오면 수신 차단하고. 연락 죽어도 받지말고."
"응."
"…하여튼. 이제서야 좀 다시 예뻐보이네. 우리 정택운."
그제서야 차학연이 슬그머니 웃으면서 택운이의 품으로 파고들어. 택운이도 슬며시 웃었고. 거실에서 엿듣던 하숙생들도 그제서야 한시름 놨고. 아무튼 이래저래 힘들었던 크리스마스 이브였어. 올해는.
*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잠깐 써 본 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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