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엄청난 이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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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울림오피스텔 2동 303호
나는 울림 오피스텔에 산다. 내가 나온 대학의 근처에 위치하고 있지만 이 동네는 처음 와 본다. 하기야 학교 다닌 날보다 방송국 들락거린 일수가 훨씬 더 많았던 날림 대학생이었으니 학교 근처 숙소에 와본 것 자체에 처음이긴 하지만. 만약 내가 대학을 실제로 다니고 있던 중이더라도 이런 곳에서는 절대 살지 않았을 만큼 더럽고 후졌다. 다 낡아 빠져가지고 벽에 등 기대기도 무너질까 두려울 정도이지만 내가 용케도 이런 데서 살고 있다. 비나 가려주고 바람이나 좀 막아주는 천장과 벽이 있다는 소소한 사실에 감사하며.
이제 고작 2주 째 살아가고 있지만, 사실 산다기 보단 잠깐 눈만 붙이고 가는 정도긴 하지만, 어쨌든 여기서 산다는 건 꽤나 무딘 사람이라 던지 집 자체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던지 할 것이다. 벌써 2개월 전에 입주 청소를 따로 하고 시간마다 칙칙 뿌려대는 방향제도 설치해 뒀음에도 빠져나가지 않은 습한 곰팡이 냄새가 진동을 했다. 엘리베이터인지 바이브레이터인지 모를 그 기계는 3층까지 올라오는 내내 달달달달 떨리기만 해서 정신적인 피곤함만 가중시켰다. 첫 날 이후로 아무리 피곤해도 그냥 계단 몇 개를 걸어오는 쪽을 택했다. 이런 건물의 엘리베이터에서 추락사를 당하고 싶진 않았다. 난 명실상부한 톱스타라 신문에도 날 텐데, 헤드라인부터 쪽팔릴 그런 개죽음일 테니까. 예상 헤드라인을 뽑아보자면, <남스타 낙후한 엘리베이터 줄 끊어져 사망> <남우현 영화 촬영 건물로 착각한 폐건물 서 추락사> .... 생각만 해도 짜증난다.
게다가 건물 외벽은 부실 공사를 했는지 흙이 부슬부슬 떨어져 내리고 화장실에선 위층에서 내려 보내는 물줄기 소리가 나이아가라 폭포소리보다 더 크게 울린다. 뭐 하나 성한 곳이 없었다. 그래서 처음 이 곳에 '그 놈'이 산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 믿을 수 없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사람이 살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해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곧 철거 예정인 폐건물 쯤? 그런데 이 낡은 건물에 무려 입주자가 아홉 명에 빈 방이 세 개 뿐이라니. 그 놈이 3층에 산다는 건 정보통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보통은 그가 몇 호인지 까지는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전 답사 결과 한 층 당 3 가구 씩 있다는 건 숙지하고 있었으므로, 첫 소속사 사장님과 닮은 외모의 집 주인 아저씨를 만났을 때 "201호, 303호, 502호 중 고르라"는 말에 냉큼 303호를 선택했다. 100퍼의 확률로 그 놈이 301호나 302호에 산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나는 배우다. 그 전에는 대한민국의 내로라는 아이돌 그룹의 메인 보컬이었다. 데뷔 6년 차. 정규 앨범 3개와 싱글 5개를 냈고 첫 싱글 빼고는 대개 차트 3위 권 안에 드는 성적을 거둔, 성공한 가수였다. 글로벌적으로 성장한 K-POP 시장을 등에 업고 진출한 일본에서도 예상외의 선전을 해서 현지 언론과 미디어를 장악했다. 내 자랑 같아서 좀 그렇지만 한 번도 가지 않은 브라질이나 프랑스 같은 비아시아권 국가에서도 우리 그룹은 아직도 좀 먹어준다. 이런 인기에 힘입어 나는 이미지 좋은 아이돌이 그렇듯-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겸업으로 연기를 시작했다. 연기력은 그저 그랬지만 배우들 틈에 있어도 꿀리지 않는 반반한 외모를 무기로 그 덕 좀 봐서 쉽게 쉽게 오디션에 통과했다. 처음은 주말 드라마 조연급이었는데, 역할이 꽤나 괜찮았다. 10대들에 이어 아줌마들에게서도 인지도가 쌓이자 좀 더 비중 있는 시간대의 서브 주연 역할에 발탁되었다. 항간에는 너무 아이돌 밀어주기 식이 아니냐는 비판의 기사도 몇 개 났지만 그럭저럭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줬고, 맡은 역할이 요즘 애들 말로 순정파 '훈남'이었기에 물을 잘 타서 인지도와 인기가 확 높아졌다. 비난 여론도 잠잠해졌고, 먹어주는 이미지 덕에 개인 CF도 몇 개 찍었다. 첫 드라마 스타트를 잘 끊어서 그런지 영화 시나리오도 몇 개 들어 왔고, 정규 3집과 영화 촬영을 병행하다시피 하면서 찍은 영화가 대박이 났다. 연기자로서 입지를 굳힐 무렵, 재계약 시즌이 돌아왔다. 소속사와 체결한 계약이 5년짜리였고, 정이나 의리로 다져지기보다는 돈 때문에 뭉친 그룹이었기 때문에 멤버들은 별 망설임도 없이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연기를 계속 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배우를 전문으로 관리하는 회사로 소속사를 이적했다. 계약금도 쏠쏠하게 받았고, 꾸준히 작품 활동도 계속 하고 있어서 모아둔 돈이 좀 된다. 지금 당장 한 시간 내로 굴릴 수 있는 현금은, 그냥 차 몇 대 일시불로 결제할 수 있는 정도? 아니면 한강을 따라 줄지어 늘어서 있는 고층 아파트 한두 채는 거뜬히 살 수 있는, 그런 정도? 이 정도야 뭐, 아무 것도 아니다 사실.
이런 내가 이런 집에서 산다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 분명하다. 물론 표면적인 목적은 분명히 있다. 팬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하여. 현재 내가 살고 있는 것으로 팬들에게 알려진 집은 사실상 매니저 명의이다. 내가 드나들기는 하지만 내가 살진 않는다. 오히려 내 매니저가 제 집을 놔두고 거기서 더 많이 잔다. 팬들도 내가 집보다는 회사나 스튜디오, 촬영장에 더 많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인지 집까지 찾아오는 사생들이 많지는 않은 편이다. 내가 이 집에 편하게 올 수 있는 이유도 그거다. 애초에 여기까지 따라오질 않는다. 스케줄 마치고 매니저가 모는 차에 타는 척하면서 팬들 빠져나가기까지 기다렸다가 택시를 타고 이쪽으로 온다. 내가 사는 집은 개인 경비 시스템이 잘 되어 있는 곳이라 사생들이 지하 주차장까지 따라 들어오지는 못한다. 내 개인 차도 그러한 취지에서 구입했다. 더 좋은 차를 살 수도 있었지만 나는 팬들을 역공해서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 많이 타는 그저 그런 중형차를 뽑았다. 대신 블랙 계열로 선팅을 진하게 해서 밖에서 보이지는 않는다. 팬들이 봐도 그냥 스태프 차겠거니 한다. 이게 바로 함정이란 거다. 이 집도 팬들은 "설마 남우현 오빠가 이런 집에서 살겠어? 설마?" 할 정도로 낡은 외양과 스펙이 선택에 한 몫을 했다. 제 2차 함정. 그런데 함정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이 집을 선택한 가장 중요한 이유이자 정말 중요한 이유, 그리고 유일한 이유는. 바로 그 놈, 이성열 때문이다.
이성열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연이다. 7년 전에 연습생 시절에 만났고, 5년 전, 데뷔를 하고서 첫 1위를 한 날 마지막으로 봤다. 간간히 내가 소식은 찾아 들었지만 뭐하고 어떻게 사는 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대학에 갔다더라, 가수는 포기했다더라, 군대에 갔다더라, 휴학을 했다더라 하는 정말 소소하고 자잘한 근황들일 뿐. 정작 이성열에 대한 소식을 잘 전해듣질 못했다. 어떻게 살고, 어떻게 지내더라는. 기다리고 애태우다 지쳐서 내가 직접 나선 된 거다. 이런 집까지 이사를 올 만큼.
이쯤해서 이성열에 관한 건 잠시 접고 내 얘기를 좀 해보려고 한다. 연예인으로 살아가다 보면, 특히 나처럼 아이돌을 하다가 연기자로 전업한 경우에는 뜻하지 않게 더럽고 치사한 꼴도 좀 감내를 해야 한다. 특히 이런 경우처럼.
전부터 나를 싫어하는 연기자 선배가 있었다. 핀조명은 화려하게 받고 데뷔했지만 포장에 비해 내용물이 부실해서 푸시시 인기가 식어버린 20대 후반의 연기자였다. 다른 더 경험 많고 연세가 많으신 선생님들도 별 말씀 없으신 걸 사사건건 물고 늘어졌다. 나보다 나이도 두어살 더 많고 데뷔 연차도 더 빠르기에 선배 대접 꼬박꼬박하면서 참아 넘기려고 노력했지만 도를 넘어설 때가 많았다. 현장 스태프 말로는 전에도 같이 일한 적 있는데, 저보다 연기 잘하고 인기 더 많은 남자 후배가 들어오면 꼭 저런 식으로 괴롭히곤 했단다. 유치한 자식. 속으로 잔뜩 쌓인 불만은 애써 짓누르고 있는데 이 자식이 또 시비를 걸었다. 평소처럼 넘기면 될 걸 난 또 거기서 받아쳐버렸다. 저 자식이 욱해서 한 대 치려는 걸 주위 사람들과 선배님들이 저지해서 다행히 일은 커지지 않았다. 내 어머니 역으로 나오시는 한 선배님은 저런 자식을 왜 상대하냐고 하시며 다독여주셨지만 영 기분이 풀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자식은 선배이고 내가 대든 건 맞기에 혹시라도 언론에 과장돼서 부풀려질 것을 걱정한 매니저가 그걸 좀 무마해보고자 술자리를 만들었다. 억지로 끌려나온 난 술만 무진장 먹었다. 마시지 않고 먹었다. 동일한 표현으로 들이부었다 정도가 적절하겠다.
이러려고 그랬던 걸까. 생전 필름이란 걸 끊겨본 적이 없던 내가 유난히도 술을 과하게 마신 그 날, 내 이웃을 마주친다.
"어이, 너 이름이 뭐라 그랬지?" "남우현 입니다." "어, 그래 그래. 너. 남우영." "....우현입니다." "우혁이나 우영이나 거기서 거기지 뭘 그래. 자, 한 잔 따라 봐."
일부러 이러는 거겠지. 어휴. 이 개 같은 자식. 싫지만 억지로 비위 맞추고 웃어주고 술 따라 주고 여자 불러 달래서 여자 불러다 주고 비싼 술은 계속 시키고 비싼 안주도 곁들여서 시켜주고 왕년에 노래 좀 했다며? 불러봐 하기에 속으로 내가 니 전용 딴따라 웃음조라도 되냐 이 쌍쌍바야 하면서도 왕년에 1위한 곡들 좀 몇 개 불러서 분위기 띄워주고 미안하다는 듯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매니저 형 등허리를 괜히 툭툭 두드려주고 새벽 6시가 되어서야 꽐라가 된 개그지같은 자식 대리 불러서 대리비까지 내주며 차에 태워보내자,
담배가 말렸다.
가수 하면서 끊었는데, 연기하면서 다시 피우게 됐다. 목 상할 건 염려 되지만 배우 특유의 그 고뇌와 번민 기타 등등 일반인들은 모를 그럴 게 있다. 그래서 담배도 피우고 뭐 그런...거.
수고했다며 어깨에 팔을 두르는 매니저 형의 둔탁한 팔을 치워내고 택시를 잡아탔다. 난 연예인이니까, 선글라스와 마스크는 필수로 쓴 채이다.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올라가기 전에 차에서 내려서 편의점에 들어갔다. 이 밤을 더 초라하게 보내려면 깡소주가 필수 아이템이지. 이 초록색 병에 든 액체가 너를 더욱 블링블링하게 해줄 것이며, 곧 너의 위를 역류하고 나오게 될 잔해물은 너의 완벽한 노숙자 룩을 완성시켜 줄.... 에라이. 새벽 공기를 안주 삼아 깡소주를 자근자근 씹어 삼키며 집으로 가는 길로 향했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아 밤처럼 주위가 어두컴컴하다. 이 동네는 아침이 늦는지 여섯 시가 넘었어도 기척 하나 없다. 어느 집이건 밥 짓는 소리가 좀 나야 그림이 좋은데. 이 상황에서도 씬을 생각하는 게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난다. 이런 게 직업병이라는 건가. 손에 들린 소주 병을 원샷 한다. 쓰레기 더미 위에 빈 병을 대충 던져놓고 기지개를 켰다. 이제 슬슬 졸린데. 집에 가서 바로 자야지. 저기 우리 집이 보인다. 다 낡아 빠졌지만, 그래도 집이라고 제법 견고하게 서 있다. 2주 간 잠만 잤는데 벌써 정이라도 들었나. 낯간지럽게 우리 집 타령이야. 중얼중얼, 취하기라도 했는지 제법 혼잣말을 지껄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혼자 궁시렁대다가 어느 새 3층을 걸어 올라서 303호 앞에 당도했다. 비밀 번호를 누르려고 도어락에 손을 막 가져다 댔을 때,
여기까지만 기억이 난다.
사실 이렇게 만날 생각은 없었다. 이건 실수다, 실수. 그래도 인사는 해야겠기에 다시 일어난다. 현관에 어설프게 붙어있는 전신 거울을 슥 본다. 망했다. 연예인인데. 이 다크서클은 뭐고 턱 아래에 난 뾰루지는 다 뭐람. 술 때문에 피부도 푸석푸석하고 머리는 아주....가관이다. 남스타 망신이다, 망신. 현관 문고리를 잡고 30초 정도 더 고민했다. 이 꼴로 그냥 들어가서 잘 것인가, 그래도 역사적인 첫 만남인데 인사 정도는 하고 마저 좌절할 것인가. 결국 인사를 하기로 한다. 별로 달라질 건 없지만 괜히 거울을 한 번 더 본다. 삐쳐 올라간 뒷머리도 좀 눌러 진정 시키고 언제 흘렸는지 모를 침 자국도 닦아낸다. 제법 남우현다워 졌군. 삐리링. 현관문을 열었다. 먼저 들어갔으면 어쩌지? 걱정이 무색하게 이 놈은 아까 그 자리에 고대로 서있다.
"하이"
인사말을 건네고도 좀 어색해서 괜히 오른손을 번쩍 들어 귀 옆에 붙였다. 이러면 좀 귀여워 보이려나. 뻘쭘하게 손을 다시 내렸지만 역시 별 반응이 없다. 야속한 놈 같으니. 얼굴 이렇게 마주 보는 건, 아마 5년 만일 텐데. 반갑지도 않은가.
"롱 타임 노 씨다. 반갑네, 이성열."
왜 입이 마르지. 아무런 대꾸도 없이 입을 꾹 다문 채로 가만히 나를 보기만 하는 이 놈. 술을 많이 마시긴 했는지 자꾸 목이 탄다. 뭐라고 대꾸를 좀 해 줬으면 좋겠는데. 화장실에 가고 싶은 것 같기도 하다. 등 뒤로 땀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뭐라고 말 좀 해. 이성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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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왔네요ㅋㅋㅋㅋㅋㅋ
제 글 읽어주시는 몇 분, 고맙슴니당ㅋㅋㅋㅋㅋㅋㅋ진심이어요ㅋㅋㅋㅋ진정 감사해서 나름 자주 업데이트 하는 거임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