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엄청난 이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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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기억을 더듬어
저 하이. 얼굴 옆으로 손바닥을 내 보이면서 어설프게 인사말을 하는, 저 남우현. 익숙하다. 어디선가 봤다. 한두 번도 아니고 꽤 여러 번, 봤던 것 같다. 그러니까 남우현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더라. 연습생 그만 두려 회사에 갔을 때였나. 아마 5년 전이었던 것 같다. 그 때, 저 인사를 마지막으로 들었다. 그랬다. 연습생 시절에 남우현이 내게 건네던 인사가 저거였다. 연습생 시절이라. 참 오래도 된 이야기이다.
한 때 가수가 꿈이었다. 내 외모에 자신도 있었고, 노래나 춤도 어느 정도 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오디션에 단번에 합격하고 처음 하루는 곧 데뷔도 할 수 있을 거라는 오만한 착각 속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그 환상은 연습생 첫 날부터 와장창 깨졌다.
그다지 큰 회사는 아니었지만 작은 회사도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서 내 실력에 과분한 회사였다. 그러나 그 때는 "이런 작은 회사에 나보다 노래 잘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나보다 노래 못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노래가 비슷하면 춤을 엄청나게 췄다. 그도 아니면 얼굴이 우월했다. 나처럼 얼굴도 고만, 노래도 고만, 춤도 고만고만한 사람들은 명함을 내밀 곳이 아니었다. 매일매일 연습을 하고도 야단을 맞고, 눈물을 찔끔거리고, 다시 연습하고. 이런 날들이 반복됐다. 실력도 부족했지만 끈기는 더 부족했다. 노력 부족이라는 말은 늘 내 뒤를 따라다녔다. 나도 내가 지구력이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배나 노력했고 더 악착같이 굴려고 애썼다. 하지만 별로 나아지는 건 없었다.
연습생들 틈에서도 우열은 나뉜다. 데뷔를 곧 앞둔 레전드 남우현 같은 연습생부터 나처럼 그냥 머릿수만 채우는 식의 열등생들까지 그들 사이에서도 레벨은 천차만별이다. 독하지 않으면 데뷔하지 못하는 세계이다 보니 아귀다툼도 잦고 시기와 질투가 끊이질 않았다. 선배 연습생들이 부려대는 텃세 속에 2년을 버텼지만 더는 무리라고 생각했을 때, 더 큰 혼란이 찾아왔다.
집이 망했다.
아버지가 운영하시는 회사가 도산해서 친척들까지 줄줄이 쓰러졌다. 공동으로 운영하던 아버지 친구가 자금을 횡령해서 해외로 날랐다고 했다. 순진한 아버지는 믿었던 친구와 회사를 모두 잃은 충격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는 식당으로, 공사판 잡일터로 가리지 않고 일하러 나가기 시작했다. 다섯 살 어린 동생은 외할머니 댁으로 보내졌다. 하루아침에 어머니와 둘이 단칸방으로 나앉았다.
연예인이라는 꿈은 말 그대로 꿈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되지도 않는 가수를 하겠답시고 어머니를 더 고생시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 놈의 연습생이 뭐라고, 공부도 다 놓은 마당에 대학은 가서 뭐하겠냐는 내 말에 어머니는 절대 안 된다며 대학은 꼭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돈을 벌고 싶었지만 미성년자라 써주는 곳도 없고, 그나마 써준다는 곳도 월급을 제대로 주지 않았다. 그냥 공부나 하라는 어머니 말씀에 수능을 1년 앞두고 그간 놓았던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웬 개미들이 책 위에 그렇게 줄줄이 지나가나 싶었다. 글자가 글자로 보이지 않았다. 무슨 수학 문제를 푸는데 숫자보다 영어가 많은지. 내가 국어 지문을 읽고 있는 건지 외계어를 읽고 있는 건지. 영어는 이게 대체 뭔 소린지. 까마득했다. 이래서 대학이나 가겠나 싶었다.
공부를 시작한 지 한 달도 안 되어서 다 포기하고 싶을 때,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소지품을 가져가라고. 머리를 식힐 겸 들렀던 회사에서는 마침 파티를 하고 있었다. 마지막 날인데, 뭐 좀 먹고 가라며 손에 피자 조각을 들려준 다른 연습생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그러자 그 녀석은, 넌 TV도 안 보고 사냐? 인피니트, 1위했잖아 1년 만에. 아, 그렇구나. 웅얼거리며 소심하게 피자 조각을 뜯었다. 잘 됐구나, 걔네들. 가장 먼저 남우현 얼굴이 생각났다. 남우현보다 더 친하게 지냈던 다른 애들도 있었지만 이상하게 남우현 얼굴이 제일 먼저 생각났다. 그렇게 남우현을 생각하고 있을 때, 진짜로 남우현이 내 앞을 스쳐 갔다. 하이. 또 그 인사를 하고서.
별로 안 친했는데도 연습생 시절 내내 남우현은 내게 끈질기게 인사를 했다. 하이. 하이. 그 외의 말은 별달리 하지 않았다. 눈을 똑바로 보면서 하이, 인사를 하고 다시금 제 할 일을 했다. 데뷔 후에도 남우현이 변함없이 인사를 해 줘서 멋모르는 신입생 초짜들은 내게 남우현과의 친분을 묻곤 했다. 남우현이랑 친해? 아니올시다. 인사만 하는 사이임. ㅇㅇ그럴 줄 알았어. 이상하게 대화는 늘 이 정도에서 끊기곤 했지만 결론은 이거였다. 남우현이랑 별로 안 친했다는 거.
회사에 다녀오고 나서 나는 공부에 몰입할 수 있었다. 경쟁심이랄까, 아니면 질투라고 할까. 같이 땀 흘리면서 연습했던 이들, 특히 남우현이 잘 되고 있는 모습을 보자 나도 성공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하루 종일 공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공부만 했다. 기초 실력이 없다보니 뭐든지 처음부터 다시 봐야 했지만 가까스로 다 해냈다. 결국 수능에서 인서울 할 수 있을 정도로 성과를 냈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꽤 명문인 한 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을 하게 되었을 때, 누구보다도 기뻐한 건 어머니였다. 3월에 입학식을 치르고, 오티를 다녀오고, 엠티를 다녀오고, 캠퍼스 라이프를 즐기느라 바빴던 대학교 1학년 1학기의 어느 날, 어머니께서 쓰러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응급처치가 늦었다고 했다. 이미 쓰러지고 한참 후에 발견한 거라 손 쓸 도리가 없었다고 했다. 어머니가 일하시던 현장의 소장은 본인 부주의라며 보상금은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했다. 친척들이 보상금 문제로 대신 씨름하고 있을 때, 어머니께서 눈을 감으셨다. 2년 만에 부모님을 잃고 가장이 되어버렸다. 아직 학교를 더 다녀야 하는 동생은 외할머니께서 여태 그랬던 것처럼 함께 지낼 수 있도록 마련을 해주셨고, 나는 군대에 다녀왔다.
내가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남우현은 떠오르는 아이돌 그룹으로 주목을 받고 있었다. 어느 채널을 틀어도 남우현이 소속된 그룹이 나왔다. 군대 선임이 다른 걸그룹은 다 제쳐두고 하필 인피니트를 좋아해서 보기 싫어도 억지로 그들이 나온 프로그램은 챙겨봤어야 했다. 그에 더해 남우현은 메인 보컬로서 말도 잘하고 얼굴 마담이기도 했기에 예능에 참 많이 나왔었다. 밀가루 폭탄 맞고, 물총 맞고 하는 걸 보면서 비웃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남우현은 벌써 대한민국에 내로라는 스타가 되어 있다.
남우현을 처음 봤을 때가 떠오른다. 연습생으로 회사에 들어간 첫 날, 처음 본 사람이 아마 남우현이었을 거다. 내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노래를 부르던 어린 남우현. 자기 노래를 다 마치고서야 날 쳐다보고는, 다시 샐쭉하니 고개를 돌렸던 남우현. 연습생들 사이에서도 단연 돋보이던, 레전드라고 불리던 남우현.
지금처럼 말쑥하고 샤프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같은 남자가 보기에도 쟨 좀 멋있었다. 연습한답시고 다들 꾀죄죄한 트레이닝복 차림일 때도 남우현은 꼭 잘 꾸민 모양새로 나타났다. 연습 중간 중간에 휴지로 땀 닦는 건 기본이고, 물 마실 때도 연습실에 설치된 정수기 놔두고 꼭 비싼 생수 사다가 마셨다. 그런 남우현을 두고 그 때 당시 별명이 '준비된 월드스타'였는데. 내가 그 별명을 부르면서 다른 아이들처럼 개구진 장난을 치지는 못했어도, 누군가가 남우현을 그렇게 부르면 함께 웃을 수는 있는 그런 정도의 친분은 있었던 것 같다.
어울리지 않게 감성이 풍부해서 남우현이 노래 연습을 하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내가 하던 걸 멈추고 헤, 넋 놓고 쳐다보게 됐다. 트레이너 선생님들한테 꾸중도 여러 번 들었다. 그럴 때면 남우현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서로 눈을 마주치곤 했다. 아니, 그랬을 지도 모른다는..... 내 생각이다. 그냥 내가 연습하던 쪽에 남우현이 좋아하던 여자애가 있었을 수도 있고. 그냥 시끄러워서 쳐다봤을 수도 있다. 그리 안 친했던 것에 비해서 꽤나 자주 눈은 마주쳤던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 한 눈에 알아본 건지도.
"...나 안 반갑냐?"
아무런 대답 없이 옛 생각에 빠져있는 날 툭 치며 남우현이 샐쭉한 표정을 짓는다. 이 익숙함. 그랬다. 남우현은 사실 삐치기도 잘 삐치는 놈이었다. 지금이야 시크한 척 멋있는 척 혼자 폼이란 폼은 다 잡고 있지만 아이돌 시절에도 그랬고 연습생 때도 그랬고 얜 진중한 면이라고는 사실 없던 놈이었다. 붙임성도 좋아서 연습생 애들하고 다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고 그랬는데. 유난히 나랑은 별로 친해질 틈이 없어서 였는지 서먹서먹했다. 근데 지금은 이렇게 친한 척 구는 남우현을 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이상하다.
"너 왜 여기 있어?" "왜. 여기 있으면 안 되냐?" "아니...안 되는 건 아닌데."
이상하잖아. 다음 말은 꿀꺽 삼켰다. 너 돈도 많이 번다며 왜 이런 데서... 이 말을 묻기에는 남우현과 그리 친하지도 않고, 지금 남우현 표정도 뭔가를 물어본다고 답해줄 그런 표정도 아니다.
"그냥.... 어, 반가워. 우리 이웃이네." "반응 한 번 참 빠르네요."
내가 생각해도 참 엄청난 개드립이다. 여태 아무 말 않고 있다가 대뜸 반갑다니.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 남우현.
"아....어........그럼 잘가."
더 이상 마땅한 대꾸가 떠오르지 않아서 대충 인사를 하고 집에 들어와 버렸다. 신발을 휙휙 아무데나 벗어서 던져놓고 매트리스 위에 털썩 드러누웠다.
남우현 진짜 이상해. 나도 이상한 애지만, 쟤 진짜 특이해. 왜 이런 데서 살지? 돈도 많이 벌면서. 텔레비전에 나오는 한강뷰 아파트나 비싼 오피스텔 그런 데 살아야 되는 거 아니야? 진짜진짜 이상하네.
그러고 보니까 나 연예인이랑 얘기한 거잖아? 그것도 이웃사촌. 대박. 오늘 새벽 있었던 서글픈 기억은 다 잊고 방금 일어난 새로운 에피소드에 키득거리던 나는 무차별적으로 눌러대는 초인종 소리에 식겁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시간에 대체 어떤 싸이코가 남의 집 벨을 막 눌러대는 거지? 그것도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왠지 칼 든 사이코패스나 연쇄 살인마가 현관 앞에 서 있을 것 같다는 헛된 망상에 겁이 나서 조심스럽게 현관에 대고 물었다.
"누구세요?" "나."
....헐. 남우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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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째네요ㅋㅋㅋ저 치고는 굉장히 빠른 속도와 끈기로ㅋㅋㅋ연재를 이어가고 있네요ㅋㅋ믿기지않는다
저 혼자 올리고 쓰는 재미에 빠져서 읽어주시는 분들 생각을 못했네요ㅋ
어떤 그대가 저번에 지적해주셔서 알았어요ㅋㅋㅋㅋ
나름 성실히 연재 하고 이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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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 읽어주시는, 얼마 되지는 않지만,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