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단이 말했다, 너에게 보낸다고
02
창밖에서 새가 지저귀었다. 그것은 갓 태어난 생명체가 지르는 비명소리 같기도 했다. 그만큼이나 날이 추웠다. 내 손에 들려있던 유리컵을 창밖으로 내던진다면, 그와 동시에 안에 들어있던 물이 얼면서 유리컵이 공중에서 산산조각 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1월 4일이었으니, 해가 바뀐 지 고작 나흘이 된 것이었다. 나는 드디어 열아홉이 되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기대, 그러니까 곧 스물을 앞둔 아주 위태위태한 숫자인 것만 같은 생각에 들었던 들뜬 기분은 날이 지고, 다시 해가 뜨는 동안 쉬이 수그러들었다. 열아홉이 된 것은 내게 별다른 특별함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어떠한 설렘조차도, 이제는 찾아볼 수 없었다. 매년 드는 생각이었지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가 바뀌어도 본질적인 나는 변함이 없는 것 같았다. 그것을 알면서도 나는 매년 12월 31일이면 스물에 가까워진다는 사실에 설렜고, 매년 실망했다. 이것은 뫼비우스의 띠 같은 것이었다.
학교는 걸어서 40분 거리였다. 두 시간에 걸쳐 학교에 다녔다는 아주머니의 말씀에 따르자면, 비교적 가까운 편이었다. 걸음이 빠른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넉넉잡아 40분씩 걸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동네 안에서 학우들을 만나는 일은 없었으니, 그들이 학교에 가기 위해서 대체로 몇 시쯤 출발하는 지 알 수는 없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을 말리기에 열중했다. 이대로 나갔다가는 학교에 도착했을 때쯤이면 머리칼이 빳빳하게 얼어버려 툭 치면 부스러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나는 겨울방학이 아직 한참이나 남은 것에 대해 불만을 표했는데, 이는 보충수업이 없는 것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방학이라고는 일주일 남짓이었기 때문에 딱히 다를 것은 없었다.
워낙에 학생 수가 적은 학교였기 때문에, 교복은 입지 않았다. 몇 안 되는 학생들을 위해 교복을 들여놓느니, 입지 않는 게 낫다는 의견이 과반수였기 때문이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교복 자율화로 교복을 입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으나, 지금은 1999년. 2000년까지가 20세기라 하지만, 잘 따져보면 20세기의 끝자락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21세기를 앞둔 지금에서 교복을 입지 않는다는 사실은 학교의 학생 수가 얼마나 적은지 짐작 가능하게 했다. 또, 동네의 옷가게에 들어오는 옷들은 모두 유행이 지난 것들이었다. 대략적으로 십 년의 공백이 있다고 추측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워낙에 외곽에 위치한 마을이기도 했고 유행에 민감한 이들이 적은 탓이기도 했다. 오히려 나는 지난 유행들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별다른 불평은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나는 이곳 태생이 아니었다. 정확히 하자면,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이곳으로 온 지 햇수로 약 6년 정도 되는 것이었다. 우리 집안이 유행에 민감한 것도 아니었고, 깔끔하게만 입으면 된다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기 때문에 옷에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서울에서 유행한다는 무지하게 큰 티라든지, 줄줄 흘러내린 것만 같은 바지 같은 것들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결국 꺼내어 입은 것은 분홍색 니트였다. 안에는 셔츠를 껴입었고, 안이 털로 덮인 검은 청자켓을 입었다. 집 주인 아주머니는 색이 칙칙하다고 내게 면박을 주었지만, 외국물 먹은 옷이라는 내 말에 입을 다물곤 천천히 옷을 훑었다. …그렇다면야. 그녀는 말을 아꼈다. 활동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두툼했으나, 추울 것이라는 사실은 예감이 갔다. 청바지에는 벨트까지 단단히 했다. 바지 밑단을 발목뼈가 드러나도록 접어 올렸다. 어제 새로 산 흰 양말이 드러났다. 이것은 모두, 아이들에게 배운 것이었다. 나름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오늘은 왜인지 모든 것이 완벽한 것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옷들만 입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신발 역시도 한창 유행하는 브랜드였다. 흰 색의 스니커즈였는데, 이역시도 외국에 있는 엄마가 보내준 것이었다. 항상 아낀답시고 신지도 않고 고이고이 모셔두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머니가 그런 나를 보며 입버릇처럼 아끼다 뭐 된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기 때문이었다.
“걸음도 느린 게. 빨리 안 가나!”
“다녀오겠습니다!”
집 문을 나서자 온몸을 감싸는 한기에 몸을 잔뜩 움츠렸다. 으, 추워. 말을 하기가 무섭게 입에서는 김이 뿜어져 나왔다. 어찌나 허옇게 뿜어져 나오던지, 시야를 다 가릴 정도였다. 김이 공중에 흩어지고,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을 때 그제야 앞이 보였다. 안 그래도 좁은 길에는 파란색 트럭이 들어와 있었다. 뒤에는 가구들을 잔뜩 싣고 있었으니, 이사를 온 것임이 분명했다. 트럭이 정차되어 있는 곳은 바로 앞집이었다. 앞집에 살던 부부가 이사 간 지도 일주일이 다 되는 시점이었으니, 그런 추측을 하기에도 적절한 시기였다. 몇몇 사람들은 분주하게 트럭에 실린 가구들을 옮기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다른 트럭이 도착했다. 나는 보이지도 않을 집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궁금증 때문이었다. 이전에 거주하던 부부와는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었을 뿐더러, 이사 왔을 이들 중 비슷한 또래라도 있을까 싶어서였다.
대문 앞에서 시간을 지체한 나머지, 나는 학교까지 뛰다시피 가야만 했다. 또래 친구들이 옷을 어디서 샀냐며 물어볼 때도, 나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내 어깨를 흔들어대며 어디 아프냐고 묻는 이들 덕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어, 이건…. 입으로는 중얼거리면서도 머릿속은 과부하 상태였다. 누가 이사를 왔을까, 어쩌면 내 또래도 있지 않을까? 하마터면 입으로 중얼거릴 뻔 했다.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들어오면서 곧 고삼이라는 말로 말문을 텄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곤 한숨을 내쉬었다. 6년 전에 첫 수능시험이 치러지고 난 뒤부터는 더욱 더 학구열을 올리는 것 같았다. 괜스레 머리가 아파 입술을 삐죽거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익숙한 길을 걸었다. 집까지 반절 남은 거리에는 밭이 있었다. 누구의 것인지 나는 아직도 몰랐다. 마침내 집에 가까워졌을 때는, 나는 옆으로 맨 가방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들어있는 책들 사이로 날카롭게 내 손가락을 찌르는 것이 있었다. 집을 앞둔 골목이었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것을 꺼내들었다. 담뱃갑이었다. 담배를 배운 것은 집 주인 아주머니, 그러니까 내가 이모라고 칭하는 그녀에게 배운 것이었는데, 그녀는 이 동네 슈퍼의 주인이기도 했다. 담배를 피우던 그녀를 마치 선망의 대상인 것처럼 바라보던 나에게 자신도 내 나이쯤부터 피우기 시작했다며 담배를 알려준 것이 재작년이었다. 선망이라는 단어는 조금 부적절할 성 싶었다. 그냥 신기했을 뿐이었으니. 아무튼, 내게 담배를 알려준 그녀가 굳이 내게 담배를 금하게 할 리도 없었다.
담뱃갑에는 세 개비 정도가 빈자리에 라이터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자연스레 담배를 꺼내어 들고는 입에 물었다. 필터를 앞니로 콱 씹고는 불을 붙였다. 겨울이어서 그랬는지, 라이터의 톱니가 엄지를 퍽 고통스럽게 했다. 불을 붙임과 동시에 훅 빨아들였다. 볼이 패일 정도였다. 처음에는 시도조차도 하지 못할 정도로 연신 기침만 터져 나왔는데, 이제는 익숙했다. 버릇이 되어버린 탓이었다. 손으로는 라이터를 다시 담뱃갑 안으로 집어넣고 그것을 열린 가방 틈새로 쑤셔 넣었다. 다시 어딘가 굴러다니고 있을 노란색 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모는 내게 담뱃재를 함부로 뿌리고 다니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기 때문이었다.
콜록, 통을 집음과 동시에 어디에선가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통을 손에 꼭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입에 물고 있는 담배를 빼내 들었다. 뒤를 돌기 전에 정면을 향해 후, 하고 길게 숨을 내뱉었다. 입에서 담배 연기가 뿜어져 나와 시야를 가렸다. 그대로 뒤를 돌았다. 청록색 니트를 입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대강 보기에는 나와 또래처럼 보였다. 그는 자신의 겉옷으로 코를 막고는 연신 기침을 해대고 있었다. 나는 입술만 깨문 채로 담배를 등 뒤로 숨겼다. 들키면 안 될 것을 들킨 사람 같기도 했다. 그의 갈색 머리칼 아래로 보이는 올망졸망한 큰 눈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아, 그게, 저기….”
“오늘 이사 왔어요.”
“네? 네, 네. 저는 저기 살아요.”
아까 아침에 봤어요. 당황한 듯 뜸을 들이는 나를 보며 그가 웃었다. 손으로 얼굴을 반이나 가리고 있어, 정확히는 내 담배 연기 때문인 것 같지만 아무튼 그의 웃음을 담은 눈 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문득 그가 손을 치운다면 더 예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웃음만으로도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 생각이 내 전신을 지배하자 나는 급하게 통을 열고 담배를 지져 껐다. 통을 닫고 나니, 고작 한 번 빨아들인 아까운 담배 한 개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가 나 때문에 코를 틀어막았다는 생각이 들자, 괜한 죄책감이 밀려들어왔다. 연기가 빨리 흩어지길 바라며 공중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제야 그가 얼굴을 가린 손을 내렸다. 내 예상과 다름없었다. 그의 웃음은 지나칠 정도로 맑았다. 겨울의 한 가운데서 맞이한 봄 같기도 했다.
“앞집이네요. 잘 부탁해요, 김태형이에요.”
“아, 저는 김아미예요.”
그렇게 말하고는 그는 한참이나 제자리에 서서 가만히 있었다. 내가 낯설어서 불편하면 나를 지나쳐 집으로 들어가면 될 텐데, 왜 들어가지 않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가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헤집었다. 그의 귀 끝이 붉었다. 추운 모양이었다. 나는 이제 추위에 무뎌진 채였다. 손이 얼음장 같아, 이보다도 더 차가운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럼 들어가 볼게요. 내가 먼저 들어가지 않으면 그는 해가 떨어지도록, 어쩌면 날이 새도록 자리에 멀뚱멀뚱 서서 나를 그 큰 눈으로 바라만 보고 있을 것 같았다. 저기, 뒤를 채 돌기도 전에 그가 다시 나를 불렀다. 괜히 낯설어서 그랬는지, 마을에서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사람은 처음이어서 그랬는지 괜히 얼굴이 뜨거웠다. 이름을 부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낯선 기분이었다. 나는 뒤를 돌아서도 아무 말도 못하고 그의 얼굴만 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마주한 지 고작 몇 분이었는데, 참으로 이상했다. 추위에 무뎌진 게 아니라, 춥지 않은 것 같았다.
“어…, 그니까, 그게. 나이가….”
“열아홉이요. 올해.”
“어! 동갑이다, 동갑. 말 편하게 하면 안 될까, 요…?”
“그, 그래….”
어색한 분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으나, 그는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그가 나를 불러 세운 정확한 이유도 나는 알 수 없었다. 서로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어찌나 조용했던지, 눈이 바닥에 닿아 녹는 소리까지도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럼 들어가 봐도 될까요?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고 꺼낸 말이었다. 그가 자신의 입술을 질겅질겅 깨물더니 눈을 깜빡거렸다. 아, 아뇨. 그의 대답에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리에 얼어버린 것처럼 가만히 서있었다. 이상하게 쿵쿵 울리는 소리가 내 귓가를 울렸다. 귓가가 뜨거웠다.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것만 같았다. 손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했다. 손끝으로 피가 쏠리는지 단단하게 굳은 채로 열을 내고 있었다. 연신 주먹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는데, 그마저도 힘들 정도였다.
“저 쪽에 있는 고등학교 다니세…, 아니 다녀?”
“응.”
“그럼, 같이 등교하면 안 될까? 그니까, 그게 다른 의미가 아니고. 내가 이쪽 지리는 잘 모르니까….”
그가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골똘히 생각하는 듯, 눈썹을 찌푸리다가 내뱉은 말이었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그는 손동작까지도 사용하며 내 이해를 도왔다. 그가 말할 때마다 입에서는 허연 김이 새어나왔었는데, 이제는 그것조차도 없었다.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불쑥 기침이 튀어나왔다. 그가 손으로 입을 가리곤 한참이나 기침을 해대었다. 그에게 가서 괜찮냐고 물어야하는지, 그게 아니라면 가만히 있어야 하는지 고민을 하던 찰나, 그가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같이 가. 6시 50분까지 준비 마치면 돼. 걸어가야 하는데, 괜찮아?”
“당연하지. 고마워.”
그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웃을 때 그의 입모양이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원하던 물건을 얻은 만족감에 사로잡힌 아이마냥 웃는 모습에 괜히 나까지도 그의 웃음에 전염된 것 같았다. 그가 잘 되었다며 손뼉을 쳤다. 그 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태형아! 추워, 얼른 들어와. 그의 집 대문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여자의 목소리에서 추측하건대, 그의 어머니였을 것이었다. 지금 가요! 그가 이어 소리쳤다. 문득, 그의 목소리가 겨울과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 위로는 흰 눈이 떨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쌓이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손을 들어 머리를 털었다. 쌓였더라면, 눈사람과 같은 모양새였을 거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본 그가 자연스럽게 손을 들어 올렸다가, 멈칫했다. 들어 올린 자신의 손을 한 번 내려다보더니, 그대로 내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털었다.
“춥다, 너도 들어가.”
“응. 잘 가.”
“내일 봐, …아미야.”
그가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집 대문을 열었다. 트럭이 없는 것을 보니, 내가 학교에 다녀온 사이에 모든 정리가 끝난 듯 했다.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나는 그가 겉옷도 없이 나와 한참을 서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이미 그가 대문을 닫고 들어간 뒤였다. 그가 불렀던 내 이름이 귓가를 맴돌았다. 그와는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이인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했는데, 그는 그런 재주를 가진 사람인 것 같았다. 그의 손길이 닿았던 머리 위로 손을 올려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무래도 추워서인 것 같았다. 아미야. 그의 목소리가 내 귓가를 울렸다. 살면서 한두 번 불린 이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난생 처음 듣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서도 한 번 달아오른 얼굴은 쉬이 식을 줄을 몰랐다. 얼음장 같았던 내 손을 양 볼에 가져다 대고도 나는 더웠다. 손에서도, 얼굴에서도 열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왜 이렇게 늦게 들어왔어?”
“예?”
이모의 말에 나는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평소보다 약 20분 정도나 더 늦은 셈이었다. 그와 주고 나눈 것은 고작 몇 마디였으니, 우리는 그 오랜 정적동안 가만히 마주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그가 고작 니트 하나를 걸치고 오랜 시간동안 밖에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괜히 그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오늘 처음 본 이였지만, 내 가슴은 아주 열렬히 반응하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와,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김태형, 나는 누가 들을 새라 그의 이름을 아주 조심스럽게 발음했다. 혀끝에서 맴도는 그의 이름이 달았다. 아주 묘한 것 같기도 했고, 괜히 얼굴이 붉어지게 만들기도 했다. 생소한 기분에 나는 펼친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열띤 숨이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 이런 내 모습을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속 어딘가가 묘하게 간질거렸다. 몸이 허공에 붕 뜬 것처럼 느껴졌다. 무슨 감정인지, 나는 이 생소한 감정을 통감하고 있었다.
가방에 손을 넣어 잡힌 노란색 통을 꺼내들었다.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방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쓰레기통은 저번에 내가 걸려 넘어져 한바탕 코피를 쏟은 탓에 혀를 끌끌 차던 이모가 치워버리고 없었다. 쓰레기통 앞에서 통을 열자 보이는 것은 제대로 타 들어가지도 않은 담배 꽁초였다. 이모가 그 모습을 본다면 아까운 줄도 모른다며 내 등부터 대뜸 내려칠 것이 뻔했기에 빠르게 쓰레기통에 쏟아 부었다. 그대로 이모가 있는 싱크대로 향했다. 아직 시간이 이른데도 불구하고 그녀가 집에 있는 것을 보아하니, 아마 오늘은 아저씨, 그러니까 집 주인이자 슈퍼의 또 다른 주인인 그가 슈퍼를 지키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내 손에 들린 빈 통을 물끄러미 보더니 빼앗아 들고는 물로 헹궈냈다.
“고마워요, 이모.”
“앞집에 이사 왔더라.”
“아, 봤어요.”
이모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평소 소식이 느린 내가 그 사실조차도 모를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모도 그 사실 외에는 별로 아는 것이 없는지 더 이상의 설명은 덧붙이지 않았다. 아침에 온 것이니 잘 알고 있을 리도 만무했고, 아는 것도 조금 이상할 듯했다. 이모가 냉장고를 열었다. 내일쯤 슈퍼 오면 꼬치꼬치 물어봐야지. 그녀가 들뜬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한참을 냉장고에 얼굴을 박고 부스럭 거리다가 꺼낸 것은 귤 한 봉지였다. 에이, 그러지 마요. 부담스럽게. 내가 말을 받아쳤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처지 알고, 돕고. 얼마나 좋아.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식탁 위로 귤을 올려놓았다. 턱 끝으로 맞은편을 가리켰다. 나는 그간 그녀와 살며 제 2의 언어, 그녀의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 지를 터득했다. 아무 말 없이 나는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어떻디, 좋드나?”
“예, 예? 제가 좋을 게 뭐가 있어요….”
꺼내든 귤을 내 앞에 두고 다른 귤을 하나 더 꺼내어 들곤 껍질을 까던 그녀가 말했다. 나는 왜인지 무언가 들킨 사람처럼 고개를 숙였다. 볼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난방이 잘 돼서 그런지 덥네. 다짜고짜 핑계부터 댔다. 그녀가 곁눈질로 나를 훑었다. 그러곤 깔깔 웃어보였다.
“아니, 좋은 사람이냐구.”
“네? …아, 네. 좋은 사람인 것 같더라고요….”
괜히 제 발 저려 한 행동인 것 같았다. 그녀는 귤 한 조각을 입에 집어넣으며 박장대소를 해보였다. 나는 그녀의 행동에 더욱 더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얼굴 전체가 다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다행이네. 예전 사람들은 얼마나 낯을 가렸던지, 몇 년 동안 도통 제대로 된 얘기를 해본 적이 없어. 나는 그녀의 말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손에 들린 귤의 껍질을 깠다.
“뭐, 딴 건 몰라도. 너는 좋은가보네.”
“아, 이모!”
그녀가 놀리는 투로 말을 이었다. 내 말을 무시하고는 옆에 놓인 카세트기로 노래를 틀었다. 그녀가 경쾌한 박자에 맞추어 고개를 흔들었다. 시선은 내게서 뗄 줄을 몰랐다. 무엇이 그리 웃긴지 자꾸만 나를 보며 히죽히죽 웃었다. 놀리지 마요, 그만 웃어…. 그렇게 말하는 소리가 땅으로 기어들어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말을 다 내뱉어 놓고야 알았다. 그런 게 아니라는 부정도 아니고 놀리지 말라는 소리는 어느 정도 수긍한다는 뜻을 담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것을 이미 알아챈 듯 그녀가 박수를 짝짝 쳤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아까 나를 보며 잘 되었다며 손뼉을 치던 그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그의 모습이 아른거리다니, 나는 나름대로 충격을 받은 채였다. 고개를 도리질 쳤다.
“아고, 열아홉 먹고 이제야 첫사랑이여?”
“아니라니까요….”
“첫인상이 강렬했나? 갑자기 이리 빠진 걸 보니, 잘생겼나?”
잘생겼던 건 맞는,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남은 귤을 모두 입으로 집어넣었다. 그와 동시에 귤 봉지에서 귤 하나를 더 꺼내어 들었다. 그녀의 앞에는 귤껍질이 놓여있었다. 자꾸만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는 것 같았다. 나는 그 껍질에 시선을 고정했다.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흥겨운 노랫소리와 그녀의 웃음소리가 어우러졌다.
“그래그래, 그 나이 때는 다 그런 거지, 암.”
“이모…….”
“괜찮어. 나도 네 나이 때는, 아저씨한테는 말 하면 안 된다? 자기가 내 첫사랑인 줄 아니까는.”
그녀가 그렇게 말하고는 웃어보였다. 나는 알지도 못하는 열아홉의 이모가 겹쳐보였다. 나는, 동네 문방구 오빠를 좋아했지…. 그녀가 귤을 까다말고, 자신의 추억을 회상했다. 나도 내 추억을 회상할 때가 올까. 언제쯤, 십 년 뒤 스물아홉? 아니면 이십 년 뒤 서른아홉…. 낯선 숫자들이었다. 내게는 오지 않을 것만 같기도 했다. 나는 그럼 그때, 지금의 나를 회상할까. 기억이나 할 수 있을까 싶어 웃어넘겼다. 내가 작게 웃는 소리에도 그녀는 자신의 추억에 집중한 나머지 듣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장장 두 시간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모는 할 말이 더 많지만 목이 아프니 조금 이따가 더 이어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나름대로 흥미로웠으니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으로 들어와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손에 쥔 노란색 통도 가방 속으로 밀어 넣었다. 원래 그것이 있던 자리였으니, 이제는 없는 게 허전할 정도였다. 나는 몇 시간 전에 보았던 태형의 모습을 다시 기억해냈다. 사람의 얼굴이나 이름을 잘 기억하는 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는 몇 안 되는 학생 중 모르는 이들이 있을 정도로 낯선 이에 관심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과 이름만큼은 생생했다. 또한, 그의 목소리 역시도 자꾸만 귀에서 맴돌았다. 아미야, 내 이름이 흔하든 흔하지 않든, 많이 들어왔든 아니든 나를 이리도 혼란에 빠지게 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단순히 내 이름 때문이 아니라, 그 때문이었나. 알 수 없는 물음들이 나를 집어삼켰다. 내가 왜 그를 이렇게 곱씹고 있는지, 이상했다. 원래 남들도 다 이렇게 하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아니, 그 전에 그는, 김태형은 나를 다시 생각하고 있을까. 이곳에 또래라고는 없는 사실은 내가 잘 알고 있으니, 그가 이 마을에서 만난 또래는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었다. 그러니, 나를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도 조금은 있지 않을까. 태형, 김태형. 내가 태어나 처음 들은 이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도 깊게 내 뇌리에 박힌 것은 처음이었다. 약간은 충격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내 가슴에 그의 이름이라는 못을 망치로 꽝꽝 내리박은 것 같았다. 망치질에 요동치는 내 가슴에 나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가슴이 쿵쿵 뛰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기도 했다. 내 가슴에 박힌 그의 가슴이 이리저리 요동치는 것인지 한참이나 간질거렸다. 내가 무엇을 한다고 해서 그 간지러움이 해결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예감했다. 난생 처음 느끼는 생소한 감정, 그것이 자꾸만 나를 간질였다.
<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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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닉 신청 해주신 분들 사랑해요. 쪽쪽 ♥3♥
거부는 거부합니다.
계속 신청 받아요, 주저 말고 해주세요!!!
<사담>
첫 화를 올린 지 일주일이 되기도 전에 발을 들였습니다, 여러분!!!!
물론 다음 화가 언제 올라올 지는 장담할 수 없음.
오늘도 역시나 브금을 들어주셨겠지만(제발….) 저번 화를 보고 오셨다면 갑작스런 노래 분위기 전환에 놀라셨을지도 몰라요.
예상하셨겠지만 1화는 29세의 아미, 2화는 19세의 아미입니다.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