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되어줘
기말고사도 끝나고 슬슬 고등학교 1학년 생활이 마무리가 되고 있을 때쯤이었다. 쌀쌀한 날씨 속에서 교실은 하루 종일 히터가 돌아가 답답한 기분을 조금 더 심화시키기 충분했다. 체육시간 역시 교실수업으로 바뀌어 자유시간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자유시간이 자신에겐 독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며 눈 감고 엎드려 있는 채로 그저 시간이 빨리 가기를 소망했다. 이윽고 종이 울려 아이들이 우르르 빠져나간 교실에서 조용히 가방을 손으로 더듬어 집에서 가져온 조금은 딱딱해진 빵을 더듬더듬 찾고서 그것을 들고 음악실로 곧장 향했다.
눈 앞을 제대로 보지 못 하는, 선천성 시각 장애 1급인 제 이름은 김여주였다. 중학교 시절 철이 덜 든 남학생들이 짓궂게 괴롭힌 덕분에 현재는 남자들과 대화를 잘 못 하는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고 착한 아이들만 모여있는 반 속에서도 혼자 지내는 것이 편했다. 앞이 보이지는 않지만 같은 층에다가 자주 들락거리던 곳이라 제법 익숙하게 음악실로 향했다. 사람이 없는 텅 빈 복도에서는 부딪힐 만 것이 없어 제게는 한 없이 딱이었다.
음악실 문을 더듬어보며 열자 평소에는 적막만 흐르던 음악실에서는 부드럽고 저를 안심시키는 듯한 피아노 선율이 연주되고 있었다. 한 학기 동안 거의 텅 비어있었던 음악실에 사람이 들어와 있다는 것은 제 성격을 한 층 더 예민하게 만들어줄 수 있던 상황이었다. 음악실 문 앞에서 허공을 바라보며 제 경계심을 보여주었다.
"거기, 누구세요?"
"어.. 오늘 전학 온 1학년인데요."
학년 말에도 전학이 오는 것이 조금은 신기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저와 상관이 없겠구나 하며 그저 같은 1학년인 것에 대해 조금은 안심을 했다. 남자와의 대화를 두려워하였지만, 이 남자 애는 달랐다. 극도로 예민해진 저를 달래는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 덕분일까 지금은 공포스럽지는 않았다.
그저 그 애가 연주하는 것을 더 듣고 싶을 뿐이다. 용기를 내고 그 노래를 계속해서 연주해줄 수 있겠냐는 요청에 그 남학생은 하하, 하고 웃더니 알겠다며 방금 들었던 노래의 반주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자신의 목소리를 그 선율에 조심스럽게 섞어내었다.
억지로 강한 척하며 참고 있으면 네 마음이 부서져버리니까
울고 싶으면 울어버리면 돼 그 눈물이 전부 말라 잠들 때까지
오늘은 이만 잘 자 괴로움도 외로움도 뭐가 됐든 전부 내 탓이야
노래가 끝나고 남자 애는 꽤나 머쩍였는지 헤실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는 소리가 들렸다. 저는 노래에 대한 여운이 가시지가 않아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그 노래가 좋은 것인지 그 아이가 노래를 잘 부른 것인지는 몰라도 종종 그 노래를 듣고 싶어서 제목이라도 물어보았다.
"그 노래 제목이 뭐야?"
"내가 좋아하는 밴드 노랜데 제목 STAY야."
"노래 정말 멋있네, 대단해"
"진짜? 사실 내가 가수가 꿈이거든. 내가 가수되면 꼭 사인받으러 찾아와. 아, 근데 나 하나 물어봐도 돼?"
"뭐 상관은 없어."
"왜 점심시간인데 음악실에 있어? 그리고 혹시... 눈이 조금 안 좋니?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줘도 상관없어!"
" 시각 장애가 있어. 그냥 도움받는 것도 불편하기도 하고 해서 점심시간마다 매일 음악실에 와서 쉬고 있을 뿐이야. 이 학교 음악실 안 쓴지 꽤 됐거든…."
가끔 시각장애가 있다고 하면 깜짝 놀라며 죄송하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제가 장애가 있는 것이 질문자가 실수를 한 것도 아닌데 쩔쩔매는 모습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이 남자 애도 제게 그럴까 싶어 걱정되었지만 그저 아 그렇구나-라며 자연스럽게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대화를 하면서 알게 된 것은 이 아이의 이름은 이지훈. 지훈이의 노래를 오늘뿐만 아니라 자주, 오랫동안 듣고 싶었다.
그 후로도 점심시간마다 그의 연주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종종 지훈은 자신이 만든 노래를 들어달라며 연주해주기도 하였는데 그 실력은 17살이 만들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이러한 지훈이의 천재적인 능력이 어서 빨리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혹 이러한 만남이 끊기게 되더라도. 어떤 날은 갑자기 지훈이의 얼굴이 궁금했다. 분명 그 아이의 마음씨처럼 고울 것이 분명하였지만 그래도 느껴보고 싶었다.
"부탁이 하나 있어."
"뭔데?"
"네 얼굴이 궁금해. 한 번만 만져봐도 될까?"
"한 번이 아니라 계속 만져봐도 돼 너가 궁금하다면."
지훈이의 얼굴은 생각보다 작고 아담했다. 하지만 아기 피부처럼 곱고 부드러운 피부는 제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었다. 지훈이의 얼굴 굴곡과 속눈썹 따위의 사소한 부분까지 만지면서 알 수 있었다. 지훈은 마음씨처럼 얼굴이 고운 것이 맞다고. 그동안 만져와본 얼굴들 중에 제일 고운 것만 같았다. 지훈이의 얼굴에서 손을 여운을 남긴 채 떼고 고운 얼굴이라고 칭찬을 하니 고맙다며 머리를 긁적이는 것이 또 부끄럼을 타는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항상 점심시간만을 기다리며 끝이 얼마 안 남은 학교생활을 하니 아쉽게도 방학식이 되었다. 방학식 날에는 점심시간이 존재하지 않아서 하교 시간에 잠깐만 음악시간에 수다나 떨자고 하였다. 마지막 날인 것이 아쉽기도 했지만 2학년이 되어서도 지훈이와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게 제 마지막 희망이었다. 교장선생님의 '마지막으로', '끝으로'라는 말을 수십 번 듣고 나니 방학식이 끝나있었다.
싱글벙글해 보이는 반 아이들의 사이에서 유유히 교실을 빠져나와 음악실에 갔다. 음악실에 들어가자 지훈이가 먼저 들어와 있었는지 제가 놀라지 않게끔 인사해준 후 내게 다가왔다. 저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지훈이의 이런 친절이 좋았다.
"분홍색은 어떤 느낌일까? 국어시간에 시 배울 때 너무 궁금했어."
"이거 좀 부끄러운데, 좋아하는 사람과 단둘이 있으면 심장이 막 두근거리는 게 분홍색 아닐까? 사실 제대로 연애 해본 적은 없지만 말야…."
"음... 조금 알 것 같아. 파란색은?"
"가을에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맞이하는 바람이 파란색일 거야. 나중에 가을에 같이 바람 느껴보면 좋겠다."
국어시간에 색채 이미지를 불러일으키는 단어라며 체크하라던 국어 선생님의 말이 갑자기 생각나서 던져본 질문이었다. 전부터 색깔에 대해서 많이 궁금했었다. 수많은 색깔들을 사람들은 어떻게 구분하고 좋아하는 색을 정할 수 있는지 말이다. 지훈이의 말을 들으니 제가 좋아하는 색은 어쩌면 분홍색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 휴대폰에서 울리는 진동소리에 저를 데리러 온 엄마의 전화임을 확신했다. 휴대폰 폴더를 열고 엄마에게 곧 간다고 말을 전한 뒤 전화를 끊었다. 가야 되냐는 지훈이의 아쉬워하는 목소리에 조금 머뭇거리다가 가야 될 것 같다고 하였다. 그래도 겨울방학이 지나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니까 늘 그래왔던 것처럼 기다리면 될 것이다.
"여주야, 겨울 방학 동안 잘 지내. 나중에 다시 만나면 내가 노래 더 잘 불러줄게."
"고마워, 너도 잘 지내."
겨울 방학동안은 여느 고등학생들처럼 평범하게 공부도 열심히 하며 지훈이의 노래를 회상하기도 하였다. 지훈이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학교가는 것이 죽을 만큼 싫었는지만 지금은 빨리 개학해서 지훈이의 노래를 다시 듣고 싶은 마음. 그것이 다였다.
지훈이의 노랫소리를 너무 듣고 싶은 날에는 처음 만날 때 불러주었던 그 노래를 듣곤 했다. 방학 첫 날에는 하루종일 들었지만 혹여 노래가 질려질까봐 아껴 듣기로 제 자신과 타협을 하였다. 매일 듣고 싶었지만 노래를 듣는 대신 공부를 한다던가 가족들과 산책을 하는 등으로 시간을 때워보도록 노력하였다.
매일매일 엄마에게 개학까지 며칠 남았냐고 물어보는 게 제 낙이었다. 엄마는 내게 학교에 꿀단지라도 숨겨놨냐고 넌지시 농담을 던졌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꿀단지를 숨긴 게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을 물처럼 흘려보내자 개학이 코앞에 다가왔다. 저와 같은 평범한 대부분의 학생들이라면 개학이 다가오는 것을 원하지 않을 텐데 나는 간절히 바랬다.
"독서록이랑 봉사활동은 종업식인 13일까지 받을게요. 4일만 학교 오면 되니까 잘 버티고 종례 끝."
제가 그토록 바라왔던 선생님의 가벼운 종례가 끝나고 아이들이 점심을 먹을 준비를 분주하게 하는 소리가 시끌벅적하게 들려왔다. 종업씩까지는 점심을 먹고 하교를 바로 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 덕분인지 아이들은 점심을 빨리 먹고 집을 가는 것을 간절히 원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한두 명 사라질 때쯤 저도 음악실로 직행했다.
음악실 문을 잽싸게 열고 들어서자 내부는 적막한 공기만을 가지고 있었다. 혹시 지훈이가 자신에게 장난을 치고 싶어서 몸을 어딘가에 숨기고 있을까 싶어 벽을 한 손으로 짚고 다른 손으로 교실 내부를 휘저으며 지훈아, 지훈이의 이름을 그저 연신 내뱉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음악실 밖으로 소란스럽던 복도의 소리는 잠잠해졌다. 잠시 지쳐 음악실 문 앞에서 벽에 기대서 있다가 엄마의 전화에 그저 음악실에서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하며 종업식을 하기 전 날까지 매일을 음악실에서 살아오듯 하였지만 지훈이의 목소리는 끝까지 들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바쁜 일이 있어서 하루만 안 오는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있었지만 점차 그 확신은 약해져만 갔다. 종업식인 오늘까지 지훈이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이 저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 조건을 충족시켜주었고, 종업식조차 제 모습을 비추지 않은 지훈이를 사실 조금은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멍하니 음악실에서 우두커니 서 있다가 엄마의 전화에 정신을 차리고 학교를 벗어내렸다.
차 안에서는 다양한 부정적인 생각들이 저를 휘감았다.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결국 눈물을 흘려내자 엄마가 내 울음소리를 들었는지 저를 다정하게 달래주었다.
"딸, 왜 울어~ 오늘 종업식이라 아쉬워서 그래?"
"그냥 평생 못 만나면... 어떡하지?"
"평생 못 만나는 건 없어. 스쳐 지나가더라도 한 번쯤은 볼게 될 거야, 분명."
평생 못 만나는 건 없을 것이라는 것이 현재 제 머리에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포기가 옳다고 생각하며 앞으로는 지훈이를 생각하게 하는 음악실을 가지 않기로 마음을 먹으며 지훈이의 생각을 접기로 결심했다. 사실 텅 비어 조용한 음악실에 누군가가 찾아오기를 바랐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 반가운 손님이 이지훈일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그래서 지훈이를 최대한 잊어보려 애쓰기로 하였다.
"김여주, 우리 매점 갈까?"
"으, 살찌는데.. 사이다나 마셔야겠다."
잊으려고 마음을 먹으니 시간이 꽤나 빨리 갔던 것 같다. 어느덧 더운 날씨에 시원한 청량음료로 제 목을 달래주고 싶어지는 여름이 저를 반겼다. 일 학년 때는 트라우마 덕분에 친구들과 얘기를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지훈이 덕분에 이학년으로 진급한 지금은 제법 아이들과 어울려 지내며 또래 아이들과 다를 것 없이 평범하게 지내오고 있었다.
기말고사가 끝난 지금 여유가 찾아와 따분해졌다. 시험 준비 때문에 잊고 있던 사람이 다시금 생각나게 하는 시간이었다. 지훈이와 처음 만난 것도 기말고사가 끝나고 나서 였는데-라는 지훈이와 관련된 생각을 하자 음악실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져서 점심시간이 된 친구들을 급식실로 보내고 지금 제 발길은 음악실로 향해있었다. 오랜만에 찾아가는 길이라서 벽을 더듬더듬 거려야 했지만 추억을 회상하기에는 딱인 장소였기에 저에게는 중요했다.
음악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치 꿈꾸는 것처럼 지훈이의 목소리와 부드러운 피아노 선율이 들려왔다. 오랜만에 제 귀를 자극하는 소리에 몸이 돌처럼 굳었지만 저 노랫소리는 필시 지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쿵쾅 거리는 심장을 억지로 잠재우며 굳은 입을 열어 지훈이를 불렀다.
"이지훈? 너, 지훈이니?"
"여주야! 오랜만이다."
"... 그동안 왜 음악실 안 왔는지 물어봐도 돼?"
"그동안 매일 기다렸어?"
그동안 기다렸냐는 말에 어찌 답을 해줘야 할까 머뭇거려져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가만히 있자 지훈이가 눈치챘는지 곧바로 자신의 사정을 토해냈다.
"미안해. 겨울방학 때 오디션을 운 좋게 합격한 뒤로 연습생 생활만 했어. 학기 중에도 오전 수업만 하고 연습하고.. 오늘은 시험 끝나서 쉬라는 의미로 수업 다 듣고 오라 하셔서 왔어. 연락하고 싶었는데 내가 너 연락처를 모르더라, 연락처 알려줄 수 있어?"
"...보고싶었어."
"나도 보고싶었어, 여주야."
지훈이의 사정을 듣자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사실 저는 지훈이를 잊고 살아가지 못한 것 같았다. 곧 터져 나올 것만 같은 눈물을 억지로 꾹 참고 지훈이에게 미소를 지으며 노래를 연주해달라고 부탁했다. 거의 반년 만이었지만 첫 만남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지훈도 그것을 느꼈는지 연신 웃고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음악을 전문적으로 배우기 시작하더니 발전한 것이 제 마음에 와 닿았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색깔인 분홍색은, 이지훈일지도 모르겠다. 단둘이 있는 지금 제 심장소리가 지훈이에게 들릴까 부끄러웠지만 그저 지훈이의 피아노 연주 소리와 목소리에 집중할 뿐이었다. 지훈이의 연주가 끝나고 음악실은 그저 정적만이 흘렀다. 시각장애인인 제게 불편함을 전혀 느끼지 못할 만큼 다정하게 대해준 너는 내게 빛이 앞으로도 빛이 되어줬으면 한다. 그동안 그래와준 것처럼.
"지훈아."
"응?"
"내 빛이 되어줘"
어쩌고 저쩌고 (+질문 ㅠㅠ) |
이번 글은 좀 오래전에 쓴 글이라 포인트 안 걸었습니다!! 브금 하는 법 이제야 알게 되었는데 공식 음원을 브금으로 해도 저작권법에 안 걸리나요? 유튜브 html로 하는 건 안 되나요?ㅠㅠ 아직 잘 몰라서 죄송함미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