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환이 그랬다. 이번 교양 시간에도 만약 김종현이 전과 같은 행동을 한다면 물어보라고. 오빠 혹시 저랑 말하기 싫으세요? 내가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하냐고 얼굴을 찌푸렸지만 김재환의 일리 있는 반박을 듣자마자 바로 수긍이 갔다. 빌어먹게도 김재환은 말 하나는 참 잘한다.
일부러 평소보다 일찍 강의실에 도착해서 김종현을 기다렸다. 오늘부터는 조별로 앉아서 강의를 듣고 토의를 한다고 그랬는데 지금 생각해도 교수님 취향 한 번 독특하다. 벌써 무리 지어 앉아 있는 다른 조들을 힐끗이다가 다시 강의실 문 앞에 시선을 두었다. 이제 곧 강의가 시작하는데 김종현의 모습이 보이지가 않는다. 그때였다. 이제 막 강의실에 들어오는 교수님의 뒤를 따라 김종현이 모자를 꾹 눌러쓴 채 총총 걸어온다. 자연스레 침이 삼켜졌다.
" .... "
" .... "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입이 떨어지지가 않아서 옴짝달짝 하며 김종현의 옆모습만 스윽 곁눈질 했다. 인사라도 해볼까. 오늘도 인사를 받아주지 않으면 김재환이 하라는대로 할 생각이었다. 다른 조들은 벌써 자기들끼리 웃으면서 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우리 조는 망부석처럼 서로 앞만 응시한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 저.. 안녕하세요. "
몇 번의 고심 끝에 인사를 건넸다. 슬쩍 김종현의 얼굴을 살피는데 미동 없이 앞만 응시하고는 동그랗게 말아쥔 두 손을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아 또 씹혔어. 이건 진짜로 날 싫어해서 그러는 게 분명하다. 김재환도 인정했다. 우리는 피해 망상이 아니라 김종현. 그 오빠가 우리를 싫어함이 분명하다고. 안되겠다. 김재환이 알려준 방법을 실천할 때가 왔다.
" 저기, 오빠. "
" .....! "
공손히 책상 위에 얹어 놓은 두 손을 입에 갖다 대더니 김종현이 놀란 얼굴로 날 바라본다. ..아니, 왜, 왜요. 되려 나까지 놀라서 동그랗게 눈을 뜨고 김종현을 응시했다. 아직도 두 눈을 끔벅이며 김종현은 입만 벙긋거렸다. 그러고 보니 언제나 검은색 옷만 입던 사람인데 오늘은 어쩐 일로 분홍색 옷을 입었다. 확실히 분홍색 옷을 입으니까 얼굴이 밝아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 저.. 말할 게 있는데요. "
" 녜. "
어라. 내내 대답을 하지 않던 김종현이 처음으로 대답을 해주었다. 날 싫어하느냐고 물으려고 했는데 대답을 해버리면 질문을 하지도 못하겠다. 입을 꾹 다문 김종현이 두 눈을 빛내며 날 바라보았다. 이 오빠 눈이 원래 이렇게 초롱초롱했나? 갑자기 무슨 캐릭터가 떠오르는데 이름이 기억나질 않는다. 어... 뜸을 들이다가 시선을 회피하며 결국 아무말이나 내뱉어 버렸다.
" 그.. 뭐 닮았어요. 캐릭턴데 다음에 제가 알아올게요. "
미친 거 아냐. 알아오긴 뭘 알아와. 김재환이 들으면 미쳤네. 미쳤어. 혀를 차는 말이 들려올 게 뻔하고 강다니엘이 들으면 꺽꺽거리며 숨이 넘어갈 정도로 웃을 게 분명하다. 내가 말하고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서 고개를 돌린 채 미간을 찌푸렸다. 흑역사가 생성되는것만 같다. 그 순간, 갑자기 팔꿈치 부근이 잡아 당겨지는 느낌이 들어 자연스레 고개를 돌리면 시선을 둔 곳에는 김종현의 작은 손이 내 옷을 조심스레 붙잡고 있었다.
....? 돌발 행동에 말문이 막혀서 김종현의 손과 얼굴만 번갈아 보았다. 김종현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느릿하게 들어 올리곤 입을 달싹거리다가 숨을 한 번 내쉬었다.
" 버, 버노좀.. "
" 네? "
" ..하핫. "
내 옷을 조심스레 잡은 채 한다는 말은 예상치도 못한 것이었다. 김종현이 내게 번호를 물었다. 뒤로 고개를 쑥 빼고 다시 되묻자 김종현은 또 단어가 아닌 의태어를 내뱉으며 눈을 요리조리 굴렀다. 김재환과 짐작한 레퍼토리에는 없는 씬이었다. 김종현은 가방에서 주섬주섬 노트를 꺼내 무언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몇 번의 손동작 끝에 김종현은 노트를 내게 내밀곤 시선을 바닥에 두었다.
' 번호 알려주세요 ㅎㅎ '
빌어먹을 어니부기는 날 싫어한다
" 그 형은 자아가 두 개일까? "
강의가 끝나자마자 김재환과 만나서 학교 식당에 왔다. 학식으로 나온 상추를 입안에 욱여넣으며 말하는 김재환을 보다가 나는 방금 전의 상황을 회상했다. 뜬금없이 번호를 알려달라기에 놀란 내가 되묻자 이번에는 노트를 꺼내 번호를 알려달라는 말을 적어서 보여주었다. 그리곤 연필을 내밀길래 얼떨결에 연필을 받아 들고 노트에 번호를 적어서 다시 김종현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나와 김종현 사이에는 더이상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김종현은 노트를 품 안에 안고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 야 네가 생각해도 뭔가 이상하지. 그치? "
" 순전히 너를 싫어하는 건 아닌 것 같고. 모르겠다. 그 형 되게 어려운 형이네. "
" ...야, 맞다. 너 민현 오빠랑 친하다고 했나? "
불현듯 김재환이 민현 오빠와 밥을 몇 번 먹었다는 소리가 생각났다. 눈을 번뜩이며 묻는 내게 김재환은 멍한 표정을 짓다가 잠시 시무룩한 얼굴을 해 보였다. 뭐야 그 적응 안 되는 얼굴은.
" 야 뭔데. 표정 왜 그러는데. "
" ..나 이제 함부로 생각 안 하려고. "
" 엉? "
" 종현이 형도 착하고, 나름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한 번도 말을 해본 적이 없었잖아. "
이쯤 되면 김재환에게 궁금증이 생긴다.
" 야 나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
" 뭘? "
" 너는 밥만 같이 먹으면 친한 사이가 되고 막. 그래? "
뭘 그런 걸 묻냐는 듯 김재환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숟가락으로 밥을 퍼 먹으며 두 볼이 빵빵해진 채 말을 이었다. 밥을 함께 먹으면서 생기는 유대감은 어쩌고 저쩌고. 아, 괜한 질문을 했다는 생각에 숟가락을 들어 밥과 반찬을 모조리 긁어 먹었다. 김재환은 그런 내 모습을 빤히 보곤 웃으며 말했다.
" 그러니까 너는 내 절친이라고 할 수 있지. "
" 소름 돋는다 진짜. "
" 내가 민현이 형한테 물어는 볼까? "
짐짓 진지한 얼굴로 김재환이 소시지 하나를 콕- 찝으며 물었다. 김재환 성격상 유도리 있게 눈치껏 민현 오빠에게 적당한 질문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니 김재환과 나. 우리가 지금 궁금한 건 김종현이 우리를 왜 싫어하느냐. 그것 뿐이었다. 아, 한가지 더. 갑자기 내 번호는 왜 물어본거지? 과제를 같이 할 의향이 1%라도 있다는 건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는 사람이다.
빌어먹을 어니부기는 날 싫어한다
성우는 저 멀리서부터 헤실헤실 웃으며 걷고 있는 종현을 발견했다. 뭐가 저리 좋을까 우리 종현이. 성우는 조심조심 종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민현의 말을 듣자 하니 오늘 여주에게 번호를 물어본다고 했던 것 같은데. 종현의 동글동글한 뒷통수가 제법 가까워졌다. 성우는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종현의 뒤에 섰다.
" 워! "
" 엄..마얏. "
" 놀랐어? 야 종현아, 그건 또 뭐야. "
힐끔. 성우는 종현의 품 안에 안겨있는 노트를 보았다. 파스텔 톤 노트가 지금 입고 있는 종현의 분홍색 옷과 어울렸다. 종현은 살며시 웃음을 짓더니 수줍은 듯 고개를 숙였다. 어, 뭐야. 얘 왜이래? 성우는 얄궂게 웃으며 팔꿈치로 종현을 툭툭 쳤다.
" 성공 했어? 번호 드디어 물어 본 거야? "
호기심 가득한 성우의 얼굴을 보며 종현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주위를 살피다가 성우의 귓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 여주가 나보구 오빠래써. "
" 이야 우리 종현이 성공했네. "
두 사람의 기분 좋은 웃음이 흘러가는 바람을 타고 두둥실 번졌다.
빌어먹을 어니부기는 날 싫어한다
" 그러니까 재환이 네 말은.. 종현이가 너랑 여주를 싫어하냐. 그거지? "
" 네 형.. 아니 제가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 생각은 없었는데요. 종현이 형이, "
" 그거 아니야. "
" 네? "
민현은 절로 꿈틀거리는 입꼬리를 꾹 참으며 혀로 입술 언저리를 훑었다. 아, 미치겠다. 민현은 종현이 대체 어떠한 행동을 했길래 재환과 여주가 그러한 생각을 하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그래서인지 더욱 얼굴에 웃음이 흘렀다. 재환은 토끼눈을 하고 웃음을 꾹 참는 민현을 그저 바라보았다.
" 재환아. "
" 네 형. "
" 오늘이 아무래도 날인 것 같다. "
재환은 도무지 이해 가지 않는 말 투성이인 민현의 말에 미간을 좁히며 고개만 갸우뚱 해 보였다. 방금 전 민현은 성우와 종현이 같이 있다는 전화를 받았다. 야 종현이 오늘 성공 기념으로 술 각 아니냐? 한껏 들뜬 성우의 목소리 끝에 성우야 쉬잇.. 조용히 말해야대.. 종현의 말리는 목소리가 함께 뒤섞였다. 민현은 빨리 종현과 성우에게 가서 종현이 어떻게 여주의 번호를 물었는지에 대해 알고 싶었는데, 지나가는 길에 만난 재환이 어쩌면 큰 행운을 가져올 수도 있겠구나 싶다.
" 형. 그러면 종현이 형이 저랑 여주 안 싫어한다는거죠? "
" 싫어할리가 있겠어? "
" 네? "
" 재환이 오늘 뭐해? "
저야..뭐, 시험 준비..? 아..마 연습실..? 재환은 답지 않게 말을 얼버무리며 눈을 굴렸다. 민현은 딱 봐도 한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오늘 재환은 아무런 약속도 없다.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웃는 민현을 보며 재환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이 형 정말 잘생겼네. 참 완벽한 피사체야. 그래서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거였어. 그런 재환의 속마음을 알 턱이 없는 민현은 재환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길을 걸었다.
" 형 저희 지금 어디가요? "
" 가보면 알아. 아, 재환이 술 잘하지? "
이 형이 갑자기 왜 이러지. 재환은 예 뭐 그냥. 어느 정도는. 대답을 하곤 얼떨결에 민현과 발을 맞춰 걸었다. 행선지는 어디인지도 모른 채 그저 발걸음에 맞춰 걸을 뿐이었다.
이 글은 걍.. 제 사심이 가득 들어간 망상일 뿐인데요...
생각보다 훠어얼씬 많은 도짜님들이 봐주셔서 지금 감당이 안됩니닼ㅋㅋㅋㅋ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곸ㅋㅋㅋㅋ저 암호닉? 그거 댓글 보는데 부기를 참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도짜님들 최고♥ㅋㅋㅋㅋㅋㅋ
다음편은 아마도 제가 이 글을 쓴 목적=제일 보고 싶은 부기ㅠㅠ가 나올 예정입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세요ㅋㅋㅋ그리구 브금도 넣었습니다 아주 쌍큼발랄한걸로☆
조만간 또봐여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