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 진짜 민현이 너무 잘생겼어. "
" ..큽. "
" 헐 여주야 괜찮아? "
" 어어, 아 괜찮아. 마저 얘기해. "
하마터면 음료수를 동기들의 얼굴에 뿜을 뻔했다. 내게서 시선이 집중된지 얼마 되지 않아 동기들은 다시 황민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스트로우를 입에 문 채 눈을 굴리며 동기들의 이야기를 마저 들었다.
" 1학년 때 왜 몰랐을까. 아, 입학하고 바로 군대 갔다고 했나? "
" 응. 스무살 땐가. 나도 이번에 알았잖아. "
" 학년 달라서 아쉽다. 걔 그래도 개총은 오겠지? "
" 왜. 오면 뭐 어떡하게. "
아니, 그냥 뭐…. 동기 한 명이 말을 얼버무리며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아 존나 다행. 슬슬 동기들의 눈치를 보다가 손가방 안에 고이 넣어둔 휴대폰의 홀더 버튼을 눌렀다. 어둡던 화면이 곧 밝아졌다. 부재중 23통. 이 미친새끼.
" 여주야 왜? "
" 어? "
" 아니, 표정 안 좋길래. "
또 시선이 내게로 고정되었다.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휴대폰을 다시 손가방 안에 넣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다가 결국에는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학을 하고 오랜만에 만나는 동기들과 즐거운 티타임 좀 보내려고 했더니만 23통의 부재중으로 인해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내게 인사를 해주는 동기들을 뒤로하고 카페를 나오자마자 휴대폰을 꺼냈다. 전화 건지 얼마나 됐다고 휴대폰 액정 가득 저장하지 않은 11개의 숫자가 보란듯이 떴다.
" 아 왜! "
- 나 강의 끝났는데.
" 아 그래서 뭐! "
- 밥 먹었어?
" 지금이 몇 신데. 아직까지 밥을 안 먹으면 그게 사람이냐. 죽어 그러면. "
오후 3시. 점심을 먹기에도 애매했고 저녁을 먹기에도 애매한 시간이었다. 빈정대는 말투가 뭐 그리 웃기다고 반대편 너머 상대방은 픽픽거리며 바람 새는 웃음을 잘도 흘린다.
- 나랑 밥 좀 먹어주면 안돼?
" 야 너 이제 애새끼 아니잖아. 군대까지 다녀왔으면 좀. 어? 나말고 다른 사람이랑 밥도 먹고 좀 그래 제발. "
- 애새끼야 나.
" ..뭐래 진짜. 죽고 싶냐. "
- 애새끼 할래. 그러니까 밥. 먹자.
결국 오늘도 난 애새끼한테 휘둘리고 말았다. 아 알았어. 신경질적으로 대답을 하고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늘 같은 패턴인데 휘둘리는 내가 나조차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어쩌면 내게 여전히 어렸을 적 그 모습이 아른거리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보다 두 뼘은 작았던 놈이 이제는 나를 제 덩치로 가릴 수 있을 만큼 컸는데 나는 아직도 이새끼가 애새끼로 보인다.
황민현. 걔가 말이다.
죽마고우 황민현은 날 좋아한다
황민현을 처음 본 건 미운 일곱 살 때였다. 우연찮게도 이사를 온 집의 바로 옆집이 황민현네 집이었다. 이사를 오면 누구나 치르는 관례가 그러하듯 우리 엄마도 접시에 떡을 담고 나와 함께 황민현네 집으로 인사를 하러 갔다. 우리 엄마와 황민현 엄마는 생각 보다 잘 통했고 무엇보다 옆집이라는 유대감 때문인지 황민현의 가족과 우리 가족은 뭐든 함께 하는 일이 잦게 됐다.
어린 내가 그때부터 느낀 게 하나 있다면 황민현은 외로움을 많이 탄다는 것이었다.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 때문에 항상 혼자 어린이집에 남아서 부모님을 기다렸다. 오지랖이 넓은 우리 엄마는 그런 황민현이 꽤 안타까웠던 모양인지 그 사실을 안 이후로 황민현을 우리집에서 아주 키우다시피 했다. 거의 키웠다는 게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 황민현은 제 엄마가 아닌 우리 엄마를 꽉 안으며 눈물을 훔쳤다. 입학식 날 눈물이라니. 다시 생각해도 황민현은 어딘가 특이한 구석이 있었다.
비록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황민현과 같은 학교로 가지 못했지만 그때도 여전히 옆집에 살았기 때문에 황민현의 얼굴은 시도 때도 없이 보았다. 앞서 말했듯 황민현은 어딘가 특이하면서도 또 조용했다. 나는 걔가 다른 친구들을 집에 데려온 걸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땐가. 친구들과 시험이 끝나고 영화도 보고 스티커 사진도 찍고 실컷 놀다가 집에 들어오는데 황민현이 주택 입구 계단에 혼자 앉아 있던 적이 있다. 야 뭐해? 황민현을 빤히 내려다보며 묻자 걔가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찬찬히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왜 요즘 우리 집 놀러 안 와? 그때 당시 나는 새로운 환경에 이제 막 적응을 할 때 즈음이었다. 중학교에 올라가서 사귄 친구들과 놀기 바빴던 나머지 황민현과 관계 유지에 소홀해진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더욱 황민현의 말이 충격이면서 비수가 되어 꽂혔다. 미안한 마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이후 황민현을 더욱 챙긴 건 맞다. 다만 나는 그게 성인이 된 지금까지 지속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만약 알았다면,…이하 생략이다.
" 맛있냐. "
" 넌 왜 안 먹어. 다 식어. "
" 너나 많~이 드세요. "
학교 근처 식당에 와서 황민현과 마주 보고 앉았다. 내 앞에 놓인 밥그릇을 어느덧 비워진 황민현의 그릇과 바꿔치기했다. 감동을 받은 듯 황민현이 고개를 들고 날 보며 씩 웃는다. 그러더니 다시 숟가락을 들고 열심히 밥을 먹는다. 턱을 괴고 밥을 먹는 황민현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렇게 보면 겉으론 참 멀쩡한데. 순간 카페에서 동기들이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 야 너한테 막 말거는 여자애들 없어? "
밥을 우물거리고 있던 황민현이 고개를 번쩍 들고 날 바라보았다. 갑작스런 내 물음에 놀란 기색 하나 없다. 황민현은 언제나 그랬다. 미동없이 내 얼굴을 슥 보더니 느릿하게 숟가락질을 하며 입을 연다.
" 없는데. "
" 이상하네.. 동기들 말하는거보면 너 인기 많은 것 같기도 한데. "
" 김여주. "
" 왜. 밥 더 시켜? "
" 오늘 우리집에서 영화 보자. "
별안간 영화를 보자는 말에 대답 없이 눈만 치켜 떴다. 그러자 황민현은 내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진지한 얼굴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 군대 제대한 기념으로. 소원. "
" 야 내가 그거 지금 쓰라고 준 게 아니라 너 군대에 있을 때, "
" 지금 쓰려고 1년 9개월을 참았는데. "
" ..무슨 영화 보고 싶은데. "
" 너 좋아하는 거. "
그래라 그럼. 대답을 끝으로 휴대폰에 시선을 두었다.
죽마고우 황민현은 날 좋아한다
어젯밤 늦도록 황민현과 공포영화를 보는 게 아니었다. 영화를 보고 밀려오는 후유증 때문에 잠을 설치느라 결국 아침 수업을 가지 못했다. 전공이 아니라 교양이어서 망정이지 새학기부터 에프벌레가 될 뻔했다. 대충 모자를 쓰고 간단한 화장만 한 채 집을 나섰다. 열쇠로 문을 잠그는데 내내 고요하던 황민현의 집 문이 소리를 내며 열렸다. 고개를 살짝 돌리자 가방을 멘 황민현이 천천히 문을 닫고 내 앞으로 가까이 왔다.
" 뭐야. 너 오전수업이라고 하지 않았어? "
" 늦잠 잤는데. 지금 학교 가? "
" 엉. 야 너도 꿈에 귀신 나왔어? "
" 너 꿈에 귀신 나왔어? "
나란히 주택 현관을 빠져나가면서 묻자 황민현이 되려 내게 질문을 한다. 그에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을 찌푸렸더니 하하, 소리를 내면서 황민현이 웃음을 짓는다. 진짜 웃음 코드 특이해. 이게 뭐 웃길 일이라고. 불어오는 봄바람을 맞으면서 지하철역을 향해 걷다가 문득 개강총회가 생각났다. 비록 우리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달랐지만 대학교와 과는 같았다. 아직도 약간 의문이긴 하다. 나보다 성적이 좋은 놈이 굳이 우리 학교에 오겠다고 했을 때부터가 의문이었는데 심지어 관심도 없던 국문학과에 지원을 할 줄은 나도 몰랐고 황민현의 엄마도 아마 몰랐을거다.
" 너 오늘 개총 올거야? "
" ..개총? "
" 개강총회 멍청아. "
" 아- "
황민현이 짧은 탄성을 질렀다. 예상하건대 황민현은 시끄러운 자리는 매우 싫어하고 여러 사람들이 한 데 모여서 같이 술을 마시는 것조차 이해하지 못함으로 개총에 오지 않을거다. 군대에 있을 때도 그랬다. 내가 꼭 술을 마신다고 말을 하면 집에 가라는 둥 조근조근 잔소리를 늘어놓곤 했다.
" 너는. 가? "
" 가야지. 나도 이번에 복학해서 애들이랑 어색해졌어. "
잠자코 내 말을 듣던 황민현이 돌연 걸음을 멈추고 지그시 날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왜 또 이래. 빳빳이 고개를 들고 시선을 맞받아치는데 그만, 황민현이 먼저 시선을 피했다.
" 나도 가. "
" 네가 개총을 온다고? "
" 응. "
짐짓 단호한 대답에 더이상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진심인가보다. 눈빛에 굳은 결의가 보인다. 군대 다녀오더니 거기서 술이라도 배웠나? 내가 아는 황민현은 소주 두모금이 주량이었다. 이제 막 스물이 되었을 때 집 앞 슈퍼에서 소주 한 병을 사들고 황민현과 꼴깍이던 적이 있었다.
' 야 먼저 취한 사람이 치킨 사기다. '
' 나 치킨 안 좋아하는데. '
' 그냥 해 멍청아. '
' 그래. '
황민현은 결국 소주 두모금을 마시고 나보다 먼저 취해버렸다. 다음날 먹은 치킨은 정말이지 꿀맛이었던 기억이 난다. 황민현은 그때 굉장히 억울해 하면서 처음으로 내게 목소리를 높였다.
" 오. 주량 늘었냐 너? "
툭툭. 황민현의 팔을 치며 묻자 알 수 없는 미소만 옅게 지어보일 뿐이다.
죽마고우 황민현은 날 좋아한다
" 어! 민현아 오늘 오전 수업 왜 안 왔어? "
오늘 수업은 오전 강의가 다였지만 민현은 여주와 함께 학교에 오고 싶은 마음에 그만 머저리 같은 짓을 하고 말았다. 여주와 헤어지고 나서 다시 집으로 가려는 도중 느닷없이 저를 부르는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둔 곳에는 낯익은 여자가 있었다. 민현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이름이 뭐였더라. 모르겠는데.
" 교수님이 과제 내주셨는데...아, 저 민현아. 혹시 오늘 개총.. 어, 민현아 어디가! "
사실 여주에게 솔직히 말하진 않았지만 민현에게 치근덕대는 여자 동기들은 여럿 있었다. 민현은 가뿐히 그들을 무시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개총을 잠시 잊고 있었다. 민현은 집에 가는 것보다는 학교 근처 서점에 가 있는 게 낫다는 판단이 들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만 해도 민현은 책 따위는 좋아하지 않았다. 책을 읽을 때면 글자들이 꼬불거리면서 민현의 시야를 방해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일었다. 분명, 여주가 그 말을 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 이상형? 야 갑자기 뭔 이상형이야. '
' 엄마가 물어보래. '
' 이모가 궁금하대? 나 참. 이모 진짜 나 엄청 좋아하시나보네. '
' ... '
' 책 좋아하는 남자. 됐냐? '
아마 그때부터였을거다. 바야흐로 고2 여름방학, 고요하던 황민현의 세상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투표 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참여해주셨더라구요ㅋㅋㅋㅋ
이자리를 빌어 감사합니다! 매우 감사합니다&^^
세 개 다 연재는 무리여섴ㅋㅋㅋㅋ원래 진짜 단편으로 쓰려고 했는데
최소 4편?정도 될것같습니다 연재 주기는.. 글쎄요.. 그래도 쓰긴 쓸겁니다
이번에도 클리셰 범벅이구요 ㅠㅠㅋㅋㅋ잘 부탁드립니다
읽어주신 도짜님들 모두 사랑해요
// 제목 수정했슴니다 볼수록 어감이 뭔가 그래섴ㅋㅋㅋㅋㅋ
게다가.. 부랄이 아니라 불알이었더군요..^^.. (먼산)
지식 부족한 제 탓입니다...흑흑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