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현은 종현의 방을 연신 기웃거렸다. 강의가 끝나고 집에 오자마자 종현은 휴대폰을 붙들곤 방 안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종현아 밥 안 먹어? 민현이 물어도 괜차나.. 짤막한 대답만 들려올 뿐 종현은 미동 없이 침대에 엎드려 휴대폰 화면만 뚫어져라 보았다. 설마 아직까지 여주에게 연락이 오지 않아서 그런 건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민현은 방문을 조심스레 열고 넌지시 물었다.
" 여주한테 연락 아직이야, 종현아? "
끄덕끄덕. 휴대폰을 붙잡고 있는 종현의 조그마한 손이 애처롭다. 민현은 목 뒷부분을 살짝 긁으며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종현의 방문을 살포시 닫았다. 그리고는 거실 탁자에 둔 휴대폰에서 재환의 이름을 찾았다.
재환아. 오후 7:52
형 왜요 왜요? 김여주한테 연락 왔어요? 오후 7:52
보낸지 채 1분이 되지도 않았는데 재환에게서 답장이 왔다. 꽤나 기다린 모양이다. 민현은 톡톡 키패드를 누르며 재환에게 답장을 하려 했다. 아니, 연락 안 왔. 정확히 거기까지 쳤을 때였다. 내내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종현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헣! 웃는 것도 아니었고 우는 것도 아닌 정체 모를 소리였다. 종현의 방 안에서 들려온 정체 모를 소리에 민현은 휴대폰을 손에 쥐고 종현의 방문을 벌컥 열었다.
" 어..어뜨케.. 미녀나 어뜨케.. "
민현이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종현이 먼저 선수를 쳤다. 고개를 푹 숙인 채 한껏 유난스러운 동공 지진을 보이면서 팔을 쭉 뻗어 민현에게 휴대폰을 들이민다. 민현은 얼떨결에 종현이 내민 휴대폰을 받아들고 화면을 응시했다.
" 여주한테.. 연낙이 너무 안 오길래..그냥..들어갔는데.. "
" 그냥 들어갔는데 여주한테 카톡이 와서 이렇게 보낸거야? 놀라서? "
" ..응. "
" 일단 잘못 보냈다고 해 종현아. 알았지? "
민현은 종현 모르게 짧은 한숨을 토해냈다. 아- 연애가 이리도 어려운 거였나. 괜히 제 자신에게 회의감이 들었다. 민현은 풀이 죽어 있는 종현의 어깨를 토닥여주면서 휴대폰을 건네었다. 얼른, 종현아. 민현이 말을 덧붙이자 그제야 종현의 고개가 천천히 들어올려진다. 물을 잔뜩 머금은 눈으로 종현이 휴대폰을 가만히 보다가 타자를 치기 시작한다.
" 여주가...나 시러하면..어떠카지..? "
그걸 지금 깨달았니 종현아. 민현은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감히 내뱉지 못했다. 말했다간 벌어질 상황은 안 봐도 훤했다.
" 보냈어? "
" 응. "
" 종현아. "
" ..응? "
" 혹시 아직도 여주한테 긴 말 할 때 노트로 말해? "
설마설마했다. 제 아무리 소심하고, 발음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는 종현이라지만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도 뒷걸음질을 치며 모습을 숨길까. 민현의 다정한 물음에 종현은 슬슬 눈치를 보았다. 그에 민현이 종현의 조그마한 어깨를 부드럽게 잡아 쥐며 짐짓 단호한 얼굴로 시선을 마주했다.
" 내일부터 노트 쓰지 않기. "
" 어어...? "
" 노트 쓰면 종현아. "
" .... "
" 정말 끝이야. "
민현의 날카로운 눈매와 목소리가 유독 돋보였다. 말을 마치고 민현은 씩 웃어 보였지만 종현은 차마 웃지 못했다. 노트를 쓰지 말라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여주에게만큼은 혀짧은 소리를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마냥 부끄러운 마음이 컸다. 종현은 무엇보다 여주에게 멋있는 모습만을 보여주고 싶었다. 묵직한 인간의 절제된 모습. 네이바 지식in에서 본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종현은 나름대로 지식in을 애용하는 사람으로서 그들의 말이 무조건적으로 옳다고 생각했다. 참 바보 같은 종현이다. 슬쩍. 종현은 떨떠름한 얼굴로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노트에 시선을 두었다. 이제는 작별할 때가 왔다. 거의 종현의 애착물건이나 다름없던 노트를 내일부터는 쓰지 못한다니. 종현은 다시금 울상을 지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작은 손에 휴대폰을 꼭 쥐고 그저 여주의 연락을 오매불망 기다릴 뿐이었다.
빌어먹을 어니부기는 날 싫어한다
없다. 진짜 없어.
집에 와서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김종현이 날 좋아할 만한 이유나, 나를 좋아한다는 뉘앙스를 풍겼던 적은 결단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지금 상황이 아직까지도 적응이 되질 않는다. 아니면 나 말고 다른 애 아니야? 이름을 내가 잘못 들었을 수도 있고…아. 갑자기 욕이 나오려 한다. 이게 대체 뭔 상황이지. 심지어 김재환도 그 둘과 같이 있었다. 며칠 동안 날 피하던 김재환이 잔뜩 흥분한 채 말을 내뱉고 있었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일단 김재환에게 떠볼 겸 카톡에 들어갔다가 무심결에 친구 추천을 눌러버렸다. 맨 첫 번째로 떠 있는 김종현의 이름 석 자를 보는데 순간 답답한 마음이 불쑥 든다. 결국 타자를 쳤다. 어차피 조별 과제 때문에 내가 카톡을 하기로 했으니 이상할 건 없었다.
오빠 자료 찾으신 거 저한테 보내줄 수 있으세요? 오후 7:53
어라. 방금 보냈는데 벌써 1이 사라졌다. 뭐지? 눈을 끔벅이며 화면을 바라보는데 알림소리와 함께 카톡이 왔다. 김종현에게서 처음 온 카톡을 보며 나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ㅗ 오후 7:53
좋아하긴 개뿔. 우리과에 김여주라는 사람이 두 명 있는 게 분명하다. 김종현이 날 좋아한다는 건 도저히,…
미안해요 잘못 보냈어요 W 오후 7:53
카톡 알림이 또 한번 울렸다. 미리보기로 확인을 하는데 잘못 보냈다는 말의 끝으로 웬 영어가 덧붙여있다. 저건 또 뭐야..? 물어볼 수도 없고. 웬 더블유? 저것도 잘못 친 건가. 알고 보니 이 오빠 수전증 있는 거 아냐? 바로 답장을 하려다가 휴대폰 홀더키를 눌러 화면을 껐다. 모르겠다. 일단은 내일 김재환을 붙잡고 물어봐야겠다.
김종현이 날 좋아하느냐고. 만약 그게 사실이면,…존나 괴담이다.
빌어먹을 어니부기는 날 싫어한다
" 김여주~! "
" 뭐야. 왜 갑자기 친한척이야. "
오늘따라 왠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김재환이 아저씨처럼 웃으면서 내 옆에 앉았다. 아직 교수님이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다소 번잡한 강의실을 한 번 훑으며 주위 시선을 살폈다. 여전히 방긋 웃고 있는 김재환을 보다가 목소리를 낮추며 입을 열었다.
" 야 너 혹시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냐? "
" ..뭐, 뭐. 뭐? 뭐! "
맞네. 숨기는 거 있네. 김재환의 목소리는 웬만해선 잘 커지지 않는다. 전공 시험 때나 커지지 평소에 말을 할 땐 목소리를 아낀다며 큰소리를 내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열이 올라 잔뜩 빨개진 얼굴을 하고선 같은 말을 두어 번 반복한다.
" 너 민현오빠랑 안 친하다며? "
" 갑..자기 민현이 형이 왜 나오지? "
" 그. 종현..이 오빠랑도 안 친하고. "
" 갑..자기 종현이 형이 왜 나올까? "
" 근데 왜 셋이 같이 있었냐. "
때마침 교수님이 강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김재환의 시선이 갈피를 못잡고 방황하며 눈을 요리조리 굴린다. 그 모습이 약간 애잔하기도해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슬금슬금. 김재환이 내 눈치를 살피며 휴대폰을 든다. 촉이 온다. 저거 분명 민현 오빠나 김종현. 둘 중에게 연락을 하는 걸 거다. 20년을 살아 온 인생 중 가장 강력한 촉이 왔다.
빌어먹을 어니부기는 날 싫어한다
결국 종현은 어제 여주와 연락을 나누지 못했다. 잘못 보냈다는 말을 함과 동시에 그대로 여주에게서는 답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인진 몰라도 오늘따라 종현의 어깨가 더욱 작아 보인다. 민현은 필기를 하고 있는 종현을 한 번, 휴대폰을 한 번 번갈아 보았다. 재환에게서 온 카톡 내용대로라면 지금 여주가 종현이 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80퍼센트는 알고 있다.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민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종현은 필기를 하다가도 한숨만 폭폭 내쉬고 있다.
그러다 문득 민현은 좋은 생각이 났다. 일단은 여주와 종현을 친해질 수 있게 만드는 게 1차 목표였으니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 점심이나 같이 먹자고 할 셈이었다. 재환에게 바로 카톡을 보내 생각을 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네 형! 저희도 이 수업 끝나고 밥 먹어요! 같이 먹어요ㅋㅋ 재환의 답장을 보는 민현의 얼굴에 알듯 모를듯 오묘한 미소가 피어 오른다.
빌어먹을 어니부기는 날 싫어한다
강의가 끝나고 김재환은 내 물음에 대한 답도 해주지 않고 무작정 학교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연스레 김재환과 학교식당에 와서 밥을 받는 순간에도 점점 내 촉이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제야 김재환이 왜 나를 피했는지 그들과 왜 술을 마셨는지 이해가 갔다. 다만 한가지 이해할 수 없는 건 김종현의 행동이었다. 만약에, 김종현이 정말 나를 좋아하는 게 맞다면 왜 빌어먹을 노트에다가 의견을 말하는 행동들을 하는 걸까.
" 오랜만에 학식이 먹고 싶더라고. "
식판을 내려 놓으며 김재환이 다소 어설픈 미소를 띠며 말했다.
" 오랜만은 무슨. 지난 주도 먹었, "
" 어- 민현이 형. "
숟가락으로 밥을 퍼서 입 안에 가져가며 말을 잇는데 돌연 김재환이 말을 끊었다. 흘깃. 김재환의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둔 곳에는 민현 오빠와 김종현이 나와 김재환을 보며 학교식당 입구에 서 있었다. 슬쩍 내 눈치를 살피던 김재환이 숟가락을 든 채 손짓 했다. 형, 여기로 와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민현 오빠 뒤로 고개를 반대편에 두고 서 있는 김종현의 모습이 보인다.
" 야 형..들도 같이 먹어도 되지? "
" 재화나. "
" 아 왜 또 그렇게 불러어.. "
" 저 오빠가 나 좋아하지. "
그 순간이었다. 김재환의 콧구멍이 벌렁거리고 입주변에 있는 팔자주름을 잔뜩 내비출 때 식판에 밥을 받은 김종현과 민현 오빠가 우리 앞에 와 섰다. 김재환은 재빨리 내 눈을 피하고 민현 오빠와 김종현을 맞이했다. 내 맞은편에 담담한 얼굴로 앉는 김종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저 오빠가 진짜로 날 좋아해? 자물쇠로 입을 채운 듯 김종현의 입매는 일자를 유지했다.
" 아하- 맞다. 종현이 형이랑 둘이 같이 과제 한다고 하지 않았,..나!? 하하. "
느닷없이 터져 나오는 김재환의 말에 세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 쪽으로 쏠렸다. 어색하게 웃음 짓는 김재환을 보는데 참 애쓴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 재환이 목 마르지 않아? "
" 네? ..아, 하하. 맞아요 형. 저 물 마른 거 어떻게 알았어요? "
" 물 뜨러 같이 갈까? "
" 넵. "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다. 김재환과 민현 오빠는 물을 떠오겠다는 말을 끝으로 천천히 우리에게서 멀어졌다. 그나저나 김재환 진짜 티 난다. 물 마른 거 어떻게 알았어요가 뭐야 진짜. 김재환의 어설픈 행동들 때문에 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숟가락을 손에 쥔 채 웃음을 흘리다가 이내 느껴지는 시선 탓에 고개를 들었다. 역시나 김종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보고 있다. 사연 오조억개는 있는 눈빛이다. 성격 같아서는 정말 날 좋아하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김종현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밑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 저기 오빠. "
" ..녜..! "
숙였던 고개를 퍼뜩 들고 김종현이 눈을 말똥거리며 잘도 대답 한다. 그 모습이 왜인지 웃겼지만 꾹 참았다. 80퍼센트로 확신하고 있던 것이 점점 100퍼센트가 되어 가는 것 같다. 벌어진 입술 새로 보이는 김종현의 웃음이 그랬다.
" 혹시 저랑 말하는 거 싫으세요? "
" ...녜? "
95퍼센트다. 김종현이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짓는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될 것 같은데 어안이 벙벙해서 말을 잇지 못하는 사람처럼 입술을 달싹이면서 내 얼굴만 빤히 보았다.
" 조별과제 할 때 노트로 대화 하잖아요 우리. 그래서 저는 저 싫어하는 줄 알고.. "
물론 내가 말한 건 초반의 생각이었다. 아니, 불과 몇시간 전까지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다. 김종현이 날 싫어하는 게 분명하다며 김재환과 머리를 맞대고 고뇌를 하던 게 생생하다. 마냥 날 싫어하고 검은색 성애자인 줄로만 알았던 김종현이 오늘부터 달라 보이기 시작한다.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도르르 눈을 굴리는 김종현의 얼굴에 당황한 티가 잔뜩 묻어 있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김종현은 날,
" ..안니여..! "
" 네? "
돌연 김종현이 숟가락을 손에 꽉 쥐고 말을 뱉었다. 침을 꿀꺽 삼키며 그대로 날 응시한다. 시선이 맞닿은 순간 말갛던 김종현의 두 뺨이 점점 연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살며시 고개를 숙이면서 김종현이 배시시 웃으며 아이 같은 웃음을 흘린다. 그리고는 나직이 입술을 벌려 말을 잇는다. 벌어진 입술 새로 김종현의 말간 웃음이 점차 선명해지기 시작한다.
" ..안 시러해여. 노트..는 버려써여. "
다시 정의한다. 김종현은 날, 싫어하지 않는다.
다음편부터 둘이 아마 대화 더 많이 하고 그러지 않을까여
조심스레 예상해봅니다^^..
아 그리고..어떤 도짜님께서 종현이 사회생활 걱정 된다궄ㅋㅋㅋㅋ
아유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종현이 여주앞에서 더 그러는거에요 떨려서 두근두근ㅋㅋㅋㅋ
암호닉 신청은 꾸준히 받고 있습니다~.~
다음에 암호닉 정리해서 한꺼번에 올려드리겠습니다!
도짜님들... 벌써 디데이가 하루 남았네요..
우리 모두 웃는 얼굴로..만납시다.. 흑흑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