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_기억조작.txt
1. 중학교 입학과 동시에, 학교는 온통 황민현의 얘기뿐이었다.
다른 반, 게다가 아예 다른 건물이라 마주칠 일이 없어 그 아이를 알게 되는 데는 한참이나 걸렸지만.
황민현 알아?, 입학생 중에 잘생긴 애가 있대, 너 초등학교 어디 나왔어? 황민현이랑 같은 학교야?,
그 아이는 모든 이의 관심사였다.
선배들에게 불려갔대, 걔 잘생겼다고 선배들이 때렸대라는 이상한 소문들도 돌기 시작했다.
대체 걔가 누구길래? 생각이 들던 때 급식실에서 너를 처음 보았다.
매번 주위에 애들이 둘러싸여 있던 탓에 볼 수 없었는데,
그 아이가 걸어 와 내 맞은편에 앉았다.
처음엔 생각했다.
'저게 잘 생긴 거야?'
당시에 나는 아이돌 그룹을 좋아하고 있어서 눈이 꽤 높았었는지
무성한 소문 때문인지, 그런 생각을 했다.
딱히 잘 생긴 건 모르겠는데, 별로네.
왠지 싸가지없어 보여.
2. 2학년 때까지 황민현의 인기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아이와 나 사이에 접점 또한 없었다.
영어마을로 수학여행을 가기 전까지만.
영어마을에서 여러 가지 수업을 듣고, 게임을 하기 위해 친화 목적으로 선생님들께서 조를 정해주었는데,
황민현과 내가 같은 조가 되었다.
6명이 한 조를 이뤘는데 나와 내 친구, 황민현과 친구 2명, 그리고 아예 다른 반인 남자애가 한 조가 되었다.
수학여행 내내 함께 다니는 거였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이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나는 그런 관심이 부담스러웠고, 싫었다.
조별로 모여 다니고부터는 다른 아이들을 부딪칠 일이 없어서 괜찮았지만.
조장의 승리욕에 우리 모두 하얗게 불태워갈 때쯤,
스피드 퀴즈 미션을 했다. 몸으로만 설명하고 영어로 맞추는 거였는데
"animal해, animal."
기린이나, 고양이, 코끼리 같은 쉬운 것들이 나와 문제를 술술 맞히다가 내 차례가 되었을 때,
"야, 괜히 내숭 떨지 말고 똑바로 해. 잘 보일 사람도 없으니까"
조장 강동호가 말했다.
예,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만.
내게만 보여준 그림은 원숭이 혹은 고릴라 뭐 그런 류였다.
진짜 누구보다 열심히 팔을 휘두르며 원숭이 흉내를 냈다.
"monkey?"
"gorilla?"
둘 중 하나는 답이겠거니 하고 들어가려는데 틀렸다며 그림을 다시 보여주었다.
원숭이는 아닌 것 같고, 고릴라 같은데.
아까와 똑같이 인중을 잔뜩 늘린 상태로 팔을 휘젓는데
"아 뭐야, 아니라잖아."
그러다가 시간이 끝나버렸다.
"제대로 설명한 거 맞아?"
황민현은 모든 게임에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만 참여했고, 딱히 적극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여태 잠자코 지켜만 보더니 "침팬지?"하고 입을 열었다.
그러자 선생님이 "yes!!!"하며 격한 반응을 했다.
아 침팬지..
"아..왜 침팬지를 생각 못 했지.."
바보같이 여전히 아이들 앞에 서서 뒷머리를 긁적이는데
다른 조원들은 빨리 다음 미션을 가자며 이미 등을 돌린 상태였고, 황민현은
웃고 있었다.
그런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 때 처음 생각했다.
'너 되게 잘생겼구나?'
뭐랄까, 뒤에서 후광이 난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날 보고 환하게 웃어줄 때 정말이지 무언가 빛이 났다.
3. 나는 그때부터, 혼자 조용히 황민현을 좋아하고 있었다.
티를 낼 수 없었다, 이미 많은 애들이 그 아이를 좋아하고 있었고, 고백을 하고 차이고를 몇 번이나 반복했으니까.
수학여행을 다녀온 뒤로는 학교에서 간간이 마주치고 그저 같은 조원이었을 뿐,
다시 우리 사이에 접점은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3학년이 되면서 우리는 같은 반이 되었다.
그저 같은 학교, 지나가다 만나도 인사 안 하는 사이는 이제 끝났다.
같은 반, 매일 한 교실에서 수업을 하고 고개만 돌려도 네가 보였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는데
어쩌다 너와 짝꿍까지 되었다.
제비뽑기로 짝이 되었는데 처음 내 자리를 찾아가 앉았을 때,
네가 내 옆에 오자마자 다른 여자아이들이 제발 쪽지를 바꿔달라고 했다.
거절할 용기가 없었는데 다행히도 선생님이 그걸 보셔서 그런 일은 없었다.
하지만 짝이 된 후에도 담임선생님의 시간을 제외하고 자리를 바꿔 달라고 하는 애들이 많았다.
담임 선생님 수업이 없는 날이면 자리를 바꾸고는 하루 종일 비켜주지 않는 애도 있었다.
너는 그런 나를 딱히 신경 쓰지 않아서 내가 바꿔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슬프게도.
"준비물 안 가져온 사람, 다 복도로 나가."
미술 시간, 나는 황민현의 뒷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아이와 자리를 바꾼 상태였고
준비물을 가져오지 않았다. 내가 나가려고 일어서 너를 지나쳐 가려는데
네가 내 손목을 잡았다.
놀라 앉은 너를 내려보니 "내가 네 것도 사 왔어." 라며 도화지 한 장을 더 꺼내어주었다.
옆에 앉은 여자아이가 "민현아, 나도 준비물 안 가져왔어.." 라고 말하자
"넌 내 짝꿍 아니잖아, 복도로 나가면 되겠네." 하고 말했다.
널 좋아하고는 처음 있는 일이라 눈물이 날 뻔했다.
4. 그리고 얼마 뒤, 짝을 바꿨다.
그렇게 그저 같은 반 학우 그 이상, 이하도 아닌 관계로 우리는 졸업을 했다.
나는 여고에 갔고, 너는 남고를 갔다.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라 생각하며 차츰 맘을 접어가고 있을 때,
다른 과에 중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를 만났다.
"야 오랜만에 만나서 얘기하니까 너무 좋다."
카페에서 거의 3시간쯤 떠들다가
"아 너 황민현 기억나지?"
네 얘기가 나왔다.
"응?"
"나 걔랑 같은 아파트 같은 동 살 거든?
그래서 거의 아침마다 엘베에서 만나는데 나 ㅂㅂ여고 다닌다니까 너 안부 물어보더라."
너, 나를 알고 있었구나.
5. 고3, 여고라서 다른 남자를 만날 일이 없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너를 몇 년째 잊지 못하고 있었다.
네 핸드폰 번호조차 모르면서, 지나가다 마주칠 일조차 없다는 걸 알면서도 쉽게 정리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저 날 향해 웃어주던 2학년 때 네 모습. 그거 하나만 생각해도 나는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여름방학, 친구의 집에서 공부를 하기로 했다.
문자를 받고 집을 찾아가는데
"ㅇㅇㅇ?"
?
뒤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너였다.
내 기억 속에 넌 아주 멋졌었는데
키도 좀 더 크고, 목젖도 도드라지고, 굵어진 목소리에. 더 멋있어졌구나.
너무 반가워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물이 차올랐다.
"오랜만이야, 내 짝꿍."
졸업 전에 너랑 나는 짝꿍도 아니었는데, 넌 여적 나를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구나.
"여기 살아?"
"..아니.. 친구네 공부하러 가는 길이야."
네 앞에 가만히 서서 너를 올려다보지도 못하고 수줍게 말하는 나를
너는, 그저 가만히 내려보았다.
그러다가
무릎을 굽혀 나와 눈을 맞추고는
"더 예뻐졌네."
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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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쓴 글에 댓글 달아주신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글이 너무 쓰고 싶어서 이렇게 시간이 나는 새벽을 쪼개 쓰고 있어요, 부족하지만 더 열심히 쓰도록 할게요!
음, 다음에는 누구로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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