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환상
제11장 ; 우리
한 순간이었다. 순영이 칼을 쥐고 그대로 자신의 앞을 휘두른 것이. 피하라는 원우의 말에 지훈이 잽싸게 순영의 밑으로 숙여서 다행이지,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그 뒤로 벌어졌을 상황에 눈을 질끈 감았다.
모든 망자들은 망각의 숲에서 모든 감정들을 잊는다고 했다. 슬픔이든, 분노든, 하물며 기쁨이든. 순영은 그렇지 않았다. 모든 감정을 자신이 느끼는 그대로 표현했다.
살려달라며 나타난 엄마, 지훈이를 죽이라는 어릴 때의 순영. 그걸 스스로 기억해 낸 지금의 순영이.
잃어버릴 기억이 있다는 건, 이승에서 살았던 것임이 분명한데. 감정은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게 말이 되지 않나.
"권순영, 정신 차려!"
무방비한 상태에서 훅 들어와 피하기 바쁜 지훈이를 보고 정한 오빠가 소리쳤다. 어릴 때의 순영이도 어디서 났는지 자신만 한 칼을 들고 걸어왔다. 그것을 발견한 정한 오빠가 승철 씨에게 턱짓으로 가리키자 바로 알아차리고 뛰어갔다.
"티스야, 미안해. 잠깐만. 잠깐만 혼자 있을 수 있지?"
"응. 빨리 가요, 지훈이 이러다 큰일 나겠어요."
고개를 끄덕인 정한 오빠도 어린 순영과 대치하고 있는 승철 씨를 마주 보고 경계를 했다. 그 앞에선 여전히 순영이 칼을 휘두른다. 한 번 더 칼을 크게 위로 뻗자, 원우가 나서서 그 칼을 막는다.
"권순영, 너 왜 그래! 정신 차려 인마!"
"죽여야 해."
"자꾸 뭘 죽인다는 거야!"
그 틈을 이용해 순영의 굴레에서 벗어난 지훈이 무릎에 손을 대고 숨을 고른다. 칼을 쥔 손은 떨리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파들거렸다. 상대가 바뀌어버렸는데도 그저 멍한 눈으로 날뛰는 순영을 바라보는 지훈의 눈동자는 영락없이 갈 길을 잃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지훈의 관자놀이를 타고 내려온 땀방울이 턱에 도롱 매달렸다.
"빨리 죽이라니까, 뭐하고 있어!"
"당장 그만둬."
"언젠간 찾을 기억 아니었나?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구경만 해도 재밌는걸."
정한의 말에 어린 순영이 낄낄댄다. 이 웃음은 분명,
"!!"
앞으로 확 뛰어나가 차마 막지 못한 정한이 재빠르게 그를 베었다.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뒹군 어린 순영의 모습을 한 그것은 곧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나쁜 새끼들. 이 세계를 야비하게 들쑤시는 것도 모자라서 감히 누굴 건드려. 봐주는 것 없이 그대로 칼을 높게 들어 중심부에 꽂아 넣을 찰나, 검은 것은 벌떡 일어나 정한의 가슴께를 주먹으로 쳐냈다.
"정한아!"
바닥에 몇 번 굴러 확 몰려온 고통에 일어나지 못하는 정한의 앞을 승철이 막았다. 형상이 사라졌는데도 너머에 원우와 아직도 아둥바둥하고 있는 순영이 보였다. 대체 어떡해야 순영이가 돌아올 수 있지. 이 생각을 하는 건 승철뿐만이 아니었다. 원우도 차마 앞에서 자신을 공격하는 순영을 받아치지 못하고 막아내는 것 밖에 할 수가 없었다. 역시 정신을 잃게 하는 수밖에 없나. 그래. 그렇다면,
"원우야, 숲을 나가!"
뭐라고, 숲을 나가라고?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지훈이 승철의 뜻을 알아들은 듯 곧바로 순영의 뒤로 이동해 팔꿈치로 세게 등을 쳤다. 원우에게만 정신이 팔려 불러도 아무 소용없던 순영이 반응을 보인다. 전원우, 너 빨리 가서 승철이 형 도와. 칼을 들고 있는 손을 지훈이 급하게 막았다.
"뭐 어쩌려고 그래?"
"억지로라도 정신 잃게 만들어야지. 밖으로 유인해서 부적 쓸 생각이야."
".. 조심해. 얘 진짜 제정신 아니야."
"여기서 그거 모르는 사람 아무도 없거든."
얼른 가기나 해! 순영이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지훈의 발을 걸어 넘어뜨린다. 간신히 중심을 잡은 지훈이 칼을 고쳐 들자, 다시금 날카로운 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지훈은 조금씩 순영을 뒤로 걸어오게 유인했다. 그렇지. 그렇게만 와라.
한편, 승철이 있는 곳으로 달려간 원우는 티스가 신경 쓰였다. 티스를 보호해야 하는 건 자신인데, 그럴 겨를이 없으니 본인을 지킬 수 있는 무기 하나 없이 두 손을 모은 채 그저 이 상황을 바라보는 게 걱정스러웠다. 힐끔힐끔 쳐다보자 숨을 고르고 일어난 정한이 아무 말없이 고갯짓으로 가라는 제스처를 보였다. 눈으로 정한의 고갯짓을 따라가던 원우는 조심하라는 말과 함께 티스에게로 달려갔다.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차라리 가방 속에 있는 것이 조각이 아닌, 온전히 자신의 모양을 유지하는 것이었다면 어떻게든 나도 저들처럼 흔들었을 텐데. 저러다 크게 다치는 것은 아닌지, 정한 오빠가 구르는 걸 보고 나니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한참 순영에게 시달리다 겨우 빠져나와 다른 대치 상황으로 가던 원우가 방향을 틀고 나에게로 왔다. '같이 싸우지. 얼른 이 상황을 끝내주지.' 하면서도 내심 얼른 와주길 바랐다.
"미안해. 정신이 없어서 혼자 뒀네."
"난 괜찮아. 그보다도 순영이가.."
"일단 너도 숲 밖으로 나가 있자. 너무 위험해."
원우는 팔짱을 끼고 일으키는 것을 도와주었다. 뒤통수 너머로 서로 소리 지르고 쇠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얼른 피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 발걸음을 재촉하는 찰나, 기분 나쁜 목소리가 내 등을 콕콕 찔렀다.
'역시 저 아이가 가지고 있었구나!'
뒤를 도니 어느새 제 앞에서 징그러운 몰골을 들이미는 검은 것이 자신의 손을 하늘 위로 뻗어 그대로 우리를 향해 날을 세워 할퀴었다. 다급하게 나를 감싸고 옆으로 뛰어든 원우와 함께 바닥에 쓸렸다. 그대로 다가오는 검은 것을 재빨리 승철 씨가 가로로 베었다. 괴상한 소리를 내며 물처럼 흘러내린 검은 것이 곧 증발했다. 괜찮아? 승철 씨는 곧바로 지훈이한테로 가고 정한 오빠가 다가와 우리를 일으켰다.
"티스, 너 괜찮아?"
"네, 멀쩡해요."
"원우는."
"아, 전 괜찮..."
"뭐가 괜찮아. 너 여기 다쳤잖아."
정한 오빠가 상처 부위를 만지자 고통은 참기 힘들었는지 얼굴을 찡그렸다. 옷까지 찢어진 채로 길게 베인 자국이 선명했다. 같이 넘어질 때 차마 다 피하지 못하고 스친 게 분명하다. 나는 또 도움은 주지 못할망정. 너 안 다쳤으면 됐어. 어깨를 두드려주던 원우가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라며 서둘러 정한 오빠와 나의 등을 밀었다. 하긴, 지금은 순영이를 진정시키는 게 급선무다. 지치지도 않는지 승철 씨와 지훈이, 둘이 붙어있어도 꼼짝을 못했다. 조금만 더 가면 숲 밖인데.
여기서 순영을 확 밀어내면?
"정한 오빠. 부적 효과가 없는 거지, 꺼낼 수는 있는 거죠?"
"응."
"순영이 진정시킬 수 있는 것 좀 미리 꺼내주세요."
"뭐 하게..?"
"빨리요!"
뭐 하려고. 원우가 어깨를 잡고 돌려세웠다. 위험하긴 하겠지만, 정한 오빠만 타이밍 좋게 잘 들어와준다면야. 눈을 마주친 채로 원우의 손을 내렸다. 괜찮다는 무언의 신호를 잘 받아들인 듯한 원우는 더 이상 막지 않고 순영에게로 이동했다. 준비됐어. 정한 오빠의 말에 곧 나도 발걸음을 하나씩 뗐다. 순영의 중심을 잃게 한다면.
제발, 제발 온몸의 힘을 다 써서 한 번에 성공하자.
이를 악물고 순영에게로 돌진했다.
조금만 더...!
"이지훈, 피해!!"
"...!"
눈을 질끈 감고 그대로 순영의 등을 들이받았다. 한꺼번에 몰려온 힘에 의해 앞으로 확 쏠린 순영이 그대로 고꾸라진다. 덕분에 놓친 칼은 승철 씨가 받아냈다.
오빠, 지금이에요! 정한 오빠가 바로 '寢[잘 침]' 자를 순영의 앞으로 날렸다. 등에 달라붙은 부적이 잠깐 빛을 내자 글씨가 사라지고 이내 순영의 몸에서 힘이 풀리는 게 보였다. 잠에 든 모양이다.
"저렇게 쉽게 재울 거였는데. 여기까지 오는 게 왜 이렇게 힘드냐."
"야, 너 피.."
지훈의 옷에 피가 묻어났다. 그게 뭐 대수라고. 진이 다 빠진 얼굴로 대자로 드러누운 지훈이 가쁘게 숨을 쉬었다. 다 막아내느라 아마 많이 지쳤겠지. 승철 씨가 순영을 안아 들고, 정한 오빠도 치료하자며 원우를 데리고 지훈을 살살 일으켰다. 이제야 진정된 상황에 질린 한숨을 내뱉었다. 진짜 피곤해.
순영은 여전히 잘 잤다. 잘 지핀 모닥불 안에 나뭇가지를 몇 개 더 얹어놓고 자리를 잡았다. 다들 어디 갔는지 코빼기도 안 보이고, 나와 정반대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그나마 남아있는 지훈의 뒤통수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켜 줄 뿐이었다. 다리 다쳤으면서, 멀리도 가서 앉아있네.
"따뜻하게 불앞에 앉아있지. 밤 되면 쌀쌀할 텐데."
"아, 오빠. 원우랑 승철 씨는요?"
"응, 혹시 몰라서 주변 좀 보고 온다고."
"원우.. 많이 다친 건 아니죠?"
"*절상인데 심하게 다친 건 아니고. 일단 붕대 감아놨어. 원우가 나대지만 않으면 돼."
*절상 : 끝이 예리한 물체에 의하여 입는 체표의 상처
"이미 나대고 있는 것 같네요. 그래도 다쳤는데, 쉬지도 않고."
도포 자락을 마저 정리하던 정한 오빠가 소리 내서 웃었다. 너 원우 걱정되는구나. 정한 오빠는 말이 굽이굽이 돌아온 적이 없다. 항상 직진. 돌직구. 맞는 말이라 할 말도 없고, 손가락으로 애꿎은 바닥만 건드렸다. 절대 부끄러워하는 건 아니고.
말을 멈춘 두 눈동자에는 지훈과 순영만 눈에 보였다. 아까 많이 놀랐지? 코로 길게 숨을 내보낸 정한 오빠가 입을 열었다. 순영이 기억인 건 어떻게 알았냐고 묻자, 정한 오빠가 찬찬히 머리를 쓸어내렸다. 내가 그동안 궁금해왔던 것들이 이 질문으로 인해 풀릴 수 있을까.
"순영이 내가 데려왔거든."
"그럼 순영이는.. 원래 이곳에 있던 게 아니라..."
"응. 너랑 같은 사람이었어."
"..."
"물론,"
지훈이 포함해서, 우리 모두.
그럼 이 사람들 모두 이곳을 관리하려고 내려온 신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생을 살다가 스스로 이 길을 걸어온 망자였단 말이야? 정한 오빠가 쓴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우리는 이럴 운명이었던 걸지도 몰라.
"순영이가 우리 중에서 제일 늦게 온 아이야. 망각의 숲에서 감정을 잊지도 않고 우리 있는 곳으로 왔더라고."
"그럼,"
"응. 우리도 마찬가지였어. 그냥 살아있던 모습 그 자체였거든."
"..."
"이상하게, 순영이만 기억을 잃은 채 여기로 왔어."
"..."
"불완전한 존재였지, 우리한테는. 혹여나 잘못될까 봐 망각의 숲엔 얼씬도 못하게 하고, 그냥 망자를 데려오는 일만 시켰어. 지훈이가."
"그런데 왜, 지훈이를 죽이려고 한 거예요?"
정한 오빠는 구부리고 있던 다리를 쭉 피고 허리를 젖혔다. 다소 불편해 보이는 신발이 까딱까딱, 시계 초침 돌아가듯 움직였다.
"둘이 좋은 관계는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