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PERHERO
(부제: 백현이와 함께 있을 때면.)
‘아침 밥 먹고 왔어?’
백현이 볼을 책상에 뭉개고 엎드려 샤프로오목조목 쓴 글자였다. 무엇인가에 집중해 글자와 씨름이라도 하나 했더니, 쓴 말이 겨우 아침 밥을 먹고 왔냐는 말이었다. 투박한 글씨가 알아보기어려워 한참 동안이나 인상을 찡그리며 읽어 알아냈다. 그것을 보고 나는 슬며시 웃었다. 백현은 계속해서 나를 멀뚱멀뚱 주시했고, 그것이 부담스러워 얼른백현이 들고 있던 샤프를 들어 백현의 글씨 아래에 한 글자씩 쓰기 시작했다.
‘나는 먹었어. 계란말이랑 멸치볶음이랑 김치찌개. 너는 먹었어?’
백현은 그것을 보고 아까의 나처럼 웃었고, 내가 들고 있던 제 샤프를 가져가 그 아래에 쓰기 시작했다.
‘나도 먹었어. 베이컨 토스트 한 개. 근데 배 고프다. 왜 이러지?’
아무리 떠드는 걸 들키는 게 무서워 그렇다하더라도 샤프로 한 문장 한 문장을 쓰는 것은 답답했다. 나는 속삭이다시피 작은 소리로 백현에게 말했다.
“바보야, 한국인은 밥심이야, 몰라?”
백현이 내 말에 잠깐 동안 웃고는 작게 속삭였다.
“글쎄.”
잠시 앞으로 고개를 들어 칠판을 주시하던백현은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말했다.
“샤프로 대화하는 거, 의외로 재미 있다.”
백현이 창문 새로 듬뿍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환하게 웃었다. 사실은 뭐가 재미 있는지도 모르겠다. 너와함께 하는 모든 순간들이 떨림으로 가득 차서.
SUPER HERO
나는 아직도 반에서 존재감이 없는 아이였다. 있으면 있는 거고, 없으면 없는.혹여 교실 이외에 장소에서 잠이 들면 귀찮기도 한. 그런 존재. 내 존재는 백현에게 이끌려 복도를 나가 수지와 백현 친구들 무리를 만나야 드러나곤 했다.
“ㅇㅇㅇ 진짜 많이 변했어. 예전엔 내가 인사해도막 무시하고 그러더니, 지금은 먼저 와서 막 장난치구…”
사탕을 입안에서 이리저리 굴리던 정은지가한 말에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다른 아이들도 거들며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고, 난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기에 바빴다.
“야, 내… 내가언제! 나한테 하는 건 줄 몰랐지.”
나는 요즘들어 변했다는 소리를 자주 듣곤한다. 배수지, 정수정, 정은지, 박찬열, 루한, 김종대, 오세훈. 그러니까 통틀어서 수지네 무리와 백현의 무리들에게. 이젠 그들이라고 이르는 것 조차가 우스울 정도로 나는 아이들과 친해졌다. 이젠그 아이들을 일컬을 땐 내 친구들이라고 말 해도 위화감이 들지 않을 만큼. 어느새 자연스럽게 나도 수지와변백현 무리에 어울리게 되었고, 이젠 수지와 백현의 무리 마저 같이 다니는 듯 했다.
“애들 많이 불편해?”
교실로 돌아온 백현이 내게 조심스레 건넨물음이었다. 나는 백현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라, 친구 잘 못 사귀어 봐서 어색해서… 걔네 되게 좋아. 좋은 애들이야.”
백현은 내 말에 환하게 웃으며 내 머리를쓰다듬어 주었다
“다행이다.”
심장이 또 우둔우둔 뛰기 시작한다. 대체 병명이 뭘까. 항상 궁금했다.약 기운 때문에 나타나는 증상과, 백현을 볼 때 마다 생기는 증상은 매우 흡사하다. 그 둘이 만나면 효과는 배가 되어 나를 괴롭혔고, 백현에 의해 뛰던심장이 점차 정상적으로 돌아오면, 심장이 근질거리는 후유증이 남았다.나는 백현 때문에 하루에 한 번 씩 이유 모를 병에 시달렸다. 그리고 수면시간도 3시간이 넘게 줄어들었다. 항상 피곤한 하루하루의 반복이었다.
SUPER HERO
“아 무슨 게시판을 꾸며? 초딩이야?”
백현이 내 옆에서 툴툴댔다. 나는 그런 백현의 모습에 마냥 웃으며 왜, 재미 있잖아. 하고 대꾸를 했다. 백현은 내 대꾸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툴툴댔다. 시간이 남는다며 게시판에 붙일 종이를 작성하라던 담임선생님이 미워지는 질문이 딱 하나 눈에 띄었다. ‘우리 반에서 가장 좋아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그렇다면 이유는?’ 전형적인 게시판 꾸미기용 용지의 질문이었지만, 나는 10분 내내 머리를 싸매고 생각을 해 봐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에게도난감한 질문일까, 아니면 이 난감함이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 일까. 주위를둘러 보았다. 담임선생님이 교실을 나서자 마자 시장통이 된 교실 사이에서 질문 하나 때문에 쩔쩔매는사람은 나 밖에 없었고, 옆에 앉은 백현만이 조용히 앉아 샤프를 잡고 있을 뿐이었다.
“백현아.”
백현은 나의 부름에 고개를 돌려 빤히 나를주시했다. 그 눈에서 나는 아무 것도 읽을 수 없었다. 주춤당황하기도 잠시, 바다의 심해처럼 끌려 들어가는 백현의 눈빛에 나 또한 눈을 피하지 않고 계속해서 백현을바라보았다. 방금 전의 나의 부름은 까마득히 잊은 듯한 백현의 행동에 나는 다시 한 번 백현을 불렀다.
“백현아.”
“어? 어.”
그제서야 제 색으로 돌아온 백현의 눈빛은여전히 빛났다. 뭘 그렇게 생각해? 하는 내 말에 백현은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불러주는 거.”
나는 백현의 말에 방금 전 ‘백현아’하고 불렀던 내 말을 되뇌었다. 이해가 되지 않아 응? 하고 되물었지만 백현은 아주 긴 뜸을 들인끝에야 입을 열었다.
“처음 인 것 같은데.”
백현은 고개를 숙이고 계속해서 샤프를 제손으로 빙빙 돌려댔다.
“듣기 좋다.”
언뜻 보면 얼굴이 발그스름해 져 있었는지도.
“ㅇㅇ아.”
“어..?”
“그치.”
그리고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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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편에 비해 짧은 것 처럼 느껴지는 건 기분 탓입니다. 기분 탓. 항상 댓글 고맙습니다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