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연애 : 인연의 실은 많을수록 더 복잡하게 꼬인다.
w. 아린류
" 팀장님, 2차 가실거에요? "
" 아니, 괜찮아. 다들 재미있게 놀아 "
일주일 동안 나를 괴롭혔던 프로젝트가 끝이 났다. 다행히도 마지막 부분에 수정했던 부분이 깔끔하게 마무리 되어 프로젝트를 발표하는 데에도 지장이 없었다. 외식 1차를 끝낸 팀원들이 2차도 갈꺼냐며 물었지만 눈치없게 끼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감기도 더 심해진 판에 끼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지만.
감기로 인해 운전이 귀찮아 차를 안가져온 탓에, 택시를 잡기 위해 큰 길로 나갔다. 길가에 나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웬 검정 승용차 한 대가 내 앞에 섰다. 곧 조수석 창문이 내려가더니 옹성우의 얼굴이 보인다.
" 타, 너 나랑 같은 오피스텔 살잖아 "
" 됐어, 택시 타면 돼. 너 술 안마셨어? "
" 그냥 한 번만 타주라 "
" ...... "
" 같이 가고 싶어서 일부러 술도 안마셨는데 "
" ...... "
말없이 차에 올랐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라고 대꾸할 말이 없잖아, 하는 핑계를 스스로에게 대면서.
" 가끔 이렇게 막무가내여도 이해해줘. 그냥, 너에대해 기억하고 있는게 많아서, 그래서 그래 "
" ...... "
그 뒤로 오피스텔에 도착할 때까지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아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할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창 밖만 바라보았다. 창 밖만.
" 먼저 올라가, 주차하고 갈게 "
" 같이가 "
" 어? "
" 어차피 나 니 옆집이야 "
옆집이라는 소리에 옹성우의 눈이 커진다. 그래, 당연히 몰랐겠지. 내가 지금까지 안들키려고 무리해서 아침에 출근했으니까. 그 덕분에 이렇게 감기도 심해지고. 왜 말하지 않았냐며 물어오는 질문에 그냥, 하고 답했다. 이제 제법 너에게 내성이 생겼는지 이렇게 가까이서 대화를 나눠도 나는 더이상 혼란스럽지는 않다. 떨리는건 여전할 지 몰라도. 12층 입니다,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주말 잘보내,하며 집에 들어가려던 찰나 옹성우가 나를 불렀다.
" 잠깐만, "
" 어? "
" 잠깐만 기다려봐 "
하더니 제 집으로 들어가서 곧 약국 이름이 적힌 하얀 봉투를 내게 건넨다.
" 감기 심해진 것 같길래. 어떻게 전해줄지 고민했는데, 다행이다 "
" 아... 고마워 "
집에 들어와 한참이나 약 봉지를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약 봉투에서 옹성우가 사온 약을 꺼냈을 때 나는 정말로 울고싶어졌다.
' 여보세요? 이따가 나 올 때 감기약 물약으로 하나만 사다주라 '
' 물약? 왜? '
' 나 알약 잘 못먹어서 '
' 아, 그리고 사탕도! '
' 사탕? 그건 또 왜? '
' 물약 너무 써서 '
' 알았어 금방 사갈게 '
약 봉지 안에는 물약 타입으로 된 감기약, 그리고 사탕이 들어있었다. 아까 차에서 나에게 한 말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나에 대해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말. 그걸 이런식으로 증명할 줄은 몰랐는데, 방심한 사이 어딘가를 한대 세게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너에게 내성이 생겼다고 느꼈었는데, 틀린 것 같다. 나는 또 다시 이렇게 혼란스러워 지는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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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를까, 말까. 누군가 지금 내 꼴을 보면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카레가 담겨있는 작은 글라스락 통을 하나 들고 남의 집 문 앞을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으니. 오전에 장을 보다가 옹성우를 마주친 것이 문제였다. 약을 받은 탓에 아직 마주치기에는 내가 혼란스러웠던 것을 둘째치고 자꾸 옹성우의 장바구니에 눈이 갔다. 라면과 각종 인스턴트 식품들. 채소와 다양한 요리 재료들로 채워졌던 내 것과는 정 반대였다.
한 번 신경이 쓰이면 끝이 없다고, 차라리 그냥 시켜서 먹지로 시작했던 내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결국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 평소보다 많은 양을 만들어 버리게 된 것이다. 그냥 주고 오면 되지 않아? 하고 가볍게 생각했던 나는 내 집에서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그 집의 문 앞에 서고 나서야 비로소 가벼운 일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초인종 하나 누르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일 줄이야. 발만 동동 구르다가 어느 순간 내 손에 들려있는 카레가 조금 식어있는 것을 느꼈다. 와, 이제 진짜 더는 미룰 수 없다. 비장한 자세로 초인종 앞에 섰다. 그리고, 눌렀다.
' 띵동- '
초인종 소리가 이렇게 컸었던가. 괜시리 초조한 마음에 다리를 떤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마치 내가 자신의 옆집에 산다는 것을 밝혔을 때와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맞았다.
" 무슨 일, "
" 밥 먹었어? '
" 어? 아니, 아직 "
" 잘됐다. 이거 카레야 "
" 이걸 왜... "
" 남기도 했고, 약 값 대신으로 "
" 아, 약.... "
" 라면만 먹지 말고, 밥도 먹으라고. 그럼 나 갈게 "
카레를 넘겨주고 돌아서는데 나를 붙잡는다.
" 너는 "
" 어? "
" 너는 밥 먹었냐고 "
" 왜? "
" 안 먹었으면, 같이 먹자고 "
" ...... "
" 다른 뜻 있는거 아니야. 그냥, 밥 한번만 같이 먹자 "
식사 준비가 완료된 식탁은 단촐했다. 전자레인지에 데운 즉석밥 2개와 김치, 내가 가져온 카레. 카레는 만든 직후의 온도만큼 뜨겁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먹을만한 온도였다. 애매하게, 미적지근한. 마치 나랑 옹성우처럼. 공허한 적막 속, 카레와 밥을 비벼대며 숟가락 부딪히는 소리만 공간을 채우던 차에, 동시에 입을 열었다. 저기, 하면서. 서로에게 먼저 말하라는 몇 번의 양보 끝에 옹성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 미안해. 이 말이 하고 싶었어 "
" 옛날 일 때문이라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
" 그거 말고. 우리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날 "
" ...... "
" 휴게실에서 우연히 팀원들끼리 얘기하는 걸 들었어, 부장님이 널 호출했다고 "
" ...... "
" 우리 팀원 실수였으니까, 폐 끼치기 싫어서 그랬던 거였어. 다른 의도는 없어 "
" 이미 다 지난 일이잖아 신경안 써 "
" ...... "
9년 전의 우리는 언제나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었던 것 같은데, 9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한없이 조용하기만 하다. 그 때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며 그렇게 즐거웠는지 궁금 할 정도로.
그렇게 적막이 다시 우리의 식탁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적막을 깬 것은 서로의 목소리가 아니라 다름아닌 내 휴대폰 벨소리였다. 전화의 발신인은 강다니엘 이었다. 예상치 못한 강다니엘의 전화에 당황하여 살짝 머뭇거리는 모습을 본 옹성우가 말했다.
" 받아, 괜찮아 "
" 금방 끊을게 "
식탁 의사에서 일어나 거실로 이동하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하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하고 있었어요?>
" 갑자기 무슨 전화에요, 놀랐네 "
<왜, 내 전화 기다렸어요?>
" 사람이 안하던 행동을 하면 죽는대요, 혹시나 해서 그냥 "
별로 웃기지도 않은 농담에 푸스스 잘도 웃는다. 나랑 연락하고 몇개월이 지나도 전화 한 통 안했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하면 놀라는게 당연하지.
<아직 내 물음에 답 안해줬는데>
" 무슨 물음이요? "
<뭐하냐는 말>
" 아, 밥먹고 있었어요 "
<혼자서?>
" 아니, 혼자 아니고 "
<아니고? 그럼 누구랑요?>
순간 나는 말문이 턱, 막혀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게, 난 지금 누구랑 밥을 먹고 있는 걸까. 옹성우라고 말하면 넌 당연히 모르겠지. 우리가 알기 훨씬도 전인 무려 9년 전에 나랑 만났던 사람인걸. 그런데 그렇다고 그냥 전 남자친구라고 확정지어 선을 그어버리기엔, 그러기엔 너무 애매한 관게가 되어버린 것 같아. 선을 자꾸 넘어오는 그 애 때문에, 넘어오는 그 애에 흔들리는 나 때문에.
누구,누구,누구.... 누구, 라는 단어를 속으로 반복하며 부엌을 등지고 있던 몸을 돌렸다. 내 시야에 조용히 밥을 뒤적거리는 옹성우가 보였다. 아마, 내가 통화하는 걸 다 들었겠지. 하지만 나는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몇초라도 빨리 나는 그 ' 누구 ' 를 표현하기 위한 단어를 찾아야 했고 결국 나는,
" ...친구요 "
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나의 대답을 듣고 더 대화를 이러가려는 강다니엘에게 ' 친구가 기다려서요 ' 라는 말을 건네며 통화를 끊었다. 다시 부엌으로 돌아가 내가 식탁 의자에 앉았을 때에는, 이미 차갑게 식은 카레와 사뭇 다른 분위기의 적막이 나를 뿐이었다. 발신자의 이름까지 보고, 또 그 통화를 어렴풋이 들은 옹성우는 침묵을 지켰다.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은 채. 그리고 그 적막을 끝까지 이어가 우리의 식사는 끝이 났다.
카레가 약간 남은 통은 다음에 돌려주라고 말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뒷정리라도 도와줄까 싶었지만, 사실 그 묘한 적막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리고 옹성우도 그걸 알았었던 것 같다. 다 자신이 하겠다고 한 걸 보면. 침대에 누워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방금 전의 대화를 떠올려 보았다. 옹성우는 뒷정리를 하고, 나는 현관으로 가는 발걸음을 멈춘 채 나눈 대화였다. 눈조차 마주치지 않고,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나눴던, 대화.
' 친구라고 했잖아 '
' ...... '
' 그러면 나, 우리가 조금은 친해졌다고 생각해도 괜찮은거야? '
' ...... '
' 친구잖아 '
' ...... '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그런 말을 꺼낸 걸까. 사실 너도 나처럼 조금은 이 애매한 관계를 정확한 단어 하나로 정의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걸까. 그런데 나는 잘 모르겠다. 친구라는 단어를 내가 먼저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의 이 관계가 과연 ' 친구 ' 인지. 우리는 정말 지금 어떤 사이인 걸까. 나는 왜, 이렇게 불안정하게 행동하고 있는 걸까. 아무것도, 모르겠다.
/분량 많은 거북이가 되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