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행복을 원합니다
아무도 고통을 원하지 않죠
하지만 비가 내리지 않으면
무지개를 볼 수 없어요
완연한 여름 햇살이 교실 창문을 비집고 아이들의 둥근 머리 위로 쏟아지는 종례 시간. 마침내 학교로 전해진 ‘2016년 전국 연합 학력평가 6월 모의고사’ 성적표가 배부되고 있었다.
- “서명호.”
- “조퇴요.”
- “문준휘.”
- “양호실이요.”
- “권순영.”
- “지금 일어났어요.”
중간에 삐딱하게 앉아 손을 번쩍 들던 회장은 담임을 향해 휴대폰 화면을 세차게 흔들었다. 내일 오후에 도착 예정이래요. ‘최한솔’이라 적힌 명찰이 장단에 맞춰 흔들렸다. 한솔은 자신의 성적표를 여러 번 접으며 부재자의 상태를 전했다. 담임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뱉었다. 요약하자면 권순영 이 새끼가 또 정도.
- “반장이라는 놈이 하루가 멀다고 학교를 안 와?”
- “내일 점심 먹고 온다고 걱정하지 마시래요. 그리고 제비뽑기로 정한 거라 저희도 할 말 없는데요.”
- “뭘 먹고 온다고?”
- “점심이요. 쌤이 좋아하는 거.”
주변 아이들은 애써 웃음을 참으려 저마다 입을 막았다. 담임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다 다시 이름을 호명했다. 한솔은 종이비행기로 탈바꿈한 성적표를 허공에 띄웠다. 뒷자리로 날아오는 그것을 단번에 잡아 속을 들여다보면, 오류 난 듯한 미친 성적이 정신을 괴롭혔다. ‘1’만 상종한다는 수험생이 바로 너였구나. 상대방에게 엄지를 치켜들자, 한솔은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 “……김여주?”
왔다. 왔어.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자에게 내려진 부름에 교탁 앞으로 한걸음 씩 발을 떼었다. 연말 카운트다운보다 떨린다. 담임의 당황스러운 표정도 그런 내 심정에 한몫했다.
- “여주야, 일등짜리가 도움 많이 됐나.”
- “네?”
- “옆 반 담임한테는 좀 미안하지만 기분은 좋네.”
수험 생활 이래 담임의 함박웃음을 처음 보았다. 심지어 그 웃음의 대상이 바로 나였다는 게 썩 좋지는 않았지만. 담임은 어깨를 한두 번 치더니 수고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적응되지 않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어색한 미소와 함께 뒤를 돌았다. 그제야 빳빳한 성적표를 곧게 내려다보는 겁 많은 두 눈.
- “김여주, 한 건 했어?”
- “뭐야, 진짜야?”
눈만 깜빡거리는 동상에게 부리나케 다가온 한솔이 크게 웃는다. 너, 수능에 목숨 걸어야겠다. 이런 급변은 처음 봐. 이번엔 내게 엄지를 치켜 세우며 어깨를 토닥였다. 3학년 8반, 김여주. 학년, 반, 이름까지 몇 번이고 확인해도 결과는 같았다. 믿기지 않는 사실에 곧게 뻗은 숫자를 손가락으로 살짝 쓸어보았다. 손가락을 스쳐 지나간 숫자는 여전히 똑같다. 진득이 문대 봐도 지워지지 않는다.
- ‘너 잘해, 김여주.’
……
- ‘걱정하지 마.’
지훈아.
Oh My Rainbow
Kiss me hard in the pouring rain
Chapter. 4 <비와 당신>
#16.
- ‘집중해. 못하면 될 때까지 하는 거야.’
모의고사 전날까지 내 볼을 콕 찌르며 예쁜 입술로 ‘다시’를 외치던 그가 있었다. 피곤함에 무너지려 하면 머리를 쓰다듬었고, 지겨움에 눈을 감으면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 ‘점수 잘 나오면 소원 들어줄게.’
파격적인 제안에 몇 번이나 되묻는 내가 다소 바보 같았는지, 그는 작게 웃으며 대답 대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깊게 생각하는 척 창문 밖을 내다본다. 두 검지로 입꼬리를 부러 꾹 내려뜨리며 진지함을 유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기분은 무척이나 좋았지만 들키고 싶지 않아 내린 특단의 조치였다.
- ‘억지로 참는 거 힘들지 않아?’
- ‘이럴 땐 모른 척 해주는 게 좋아.’
- ‘지금 얼굴이 다 웃고 있어.’
- ‘모른 척 좀.’
- ‘글쎄.’
그는 어깨를 통통거리며 반달 눈을 지었다. 아직 나사에 연락 안 했는데, 지금 보니까 안 하길 잘한 것 같아. 아무래도 나만 보는 게 좋겠어. 테이블에 엎드려 손등에 얼굴을 얹으면, 나와 똑같이 자세를 고쳐 앉는 그였다. 이렇게 보니 더 동글동글하다.
- ‘어떤 소원을 말해야 잘 빌었다 소문이 날까.'
- '내가 할 수 있는 거.’
- ‘네가 할 수 있는 거?’
- ‘어, 그래야 편해.’
- ‘그럼 업어 주…….’
- ‘매일 업어 줘, 이런 건 안 돼.’
힘들어, 허리 아파. 쉽게 간파당한 마음에 스크래치가 난다. 사람이 뭐 이리 단호한지, 앙다문 입술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매정한 사람. 나쁜 사람.
- ‘그럼 종이접기.’
- ‘아직 어려?’
- ‘당연하죠, 이제 열아홉인데요.’
- ‘안 돼.’
- ‘ 왜? 도대체 왜?’
- ‘열심히 접으면 뭐해, 네가 다시 펴 놓잖아.’
언젠가 그가 학을 접어 내 손바닥에 올려 둔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난 감탄과 동시에 완성품을 다시 원상태로 만들고 있었다. 과거에 몇 번이나 학을 접으려 시도하였으나,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던 터라 그 비결을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완성된 학이 한낱 종이 나부랭이가 되었을 때, 그는 만렙 찍은 캐릭터의 초기화 현장을 본 것 같다 인상을 찌푸렸다. 분홍 가지에서 학이 탄생할 때마다, 난 반대의 과정을 실천하고 있었다.
- ‘아무튼, 종이접기 말고. 특히 학.’
- ‘그럼 팔색조.’
- ‘……접는 방법이 있어?’
- ‘일단 학을 접고 꼬리를 색칠하면 되지 않을까?'
- 그런 잔머리는 어디서 나오는 거야.’
- ‘아니면 학교 끝나고 집까지 업고 가기. 어때, 끌리지?’
- ‘응, 정말 별로다.’
도무지 되는 소원이 하나도 없다. 이건 뭐 소원이 아니라 부탁이잖아. 아련한 눈빛으로 한 번만 찬스를 외치는 내게, 손에 턱을 괸 채 그는 말했다.
- ‘하루 같이 보내기.’
- ‘……응?’
- ‘놀자고, 둘이서.’
그날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하면 되잖아. 그가 웃으며 대답을 기다릴때면, 난 주로 이런 순간이 좋아 부러 뜸을 들였다. 온전히 내게 집중하는 눈빛이 좋아서, 말을 하지 않아도 대화하는 것 같아서.
- ‘놀면서 업혀도 돼?’
- ‘시험 잘 보고 나서 그때 다시 얘기해주세요.’
- ‘두고 봐, 내가 꼭 업히고 만다.’
- ‘좋을 대로.’
#17.
수능과 가장 근접한 6월과 9월 모의고사에서 이제 고작 하나를 넘었을 뿐인데, 입가엔 계속 옅은 미소가 걸렸다. 교과서를 가방에 담는 것인지, 가방을 교과서에 담는 것인지 분간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 “언어가 좀 걸리긴 하는데……. 그냥 저 파트가 없어졌으면 좋겠다. 난 문학이 좋다고.”
이번 언어영역에서도 과학기술 지문만 못 푸는 병에 걸렸다. 시험지 한쪽 면은 대찬 장맛비가 내려 잘못 없는 다른 지역까지 홍수가 날 참이었다. 그래도 외국어와 수리는 나름 선방했으니 작은 기대를 걸어본다. 둘이서 만나는 거니까 흔히 말하는 ‘데이트’ 이런 건가 싶기도 하고.
담임의 퇴장과 함께 교실 내에 수선함이 몰려왔다. 공지사항과 그 밖의 안내사항 등, 반장의 몫까지 떠맡게 된 한솔은 ‘권순영 개새끼’를 외치며 학급 단톡에서 권순영을 강퇴했다. 이럴 땐 건들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 가방과 함께 유유히 교실을 빠져나왔다.
굳게 닫힌 옆 반을 창문 틈으로 몰래 훔치며 기회를 엿봤다. 처음에는 완전히 망한 척 울상을 짓다, 상황이 진지해지면 성적표를 내밀 참이었다. 완벽한 시나리오에 자찬하며 부드러운 실타래를 찾는다. 그러나 빈 자리만 눈에 띌 뿐, 그는 보이지 않았다. 반대편 자리에 엎드린 승관이 한숨을 푹푹 내쉬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곧 울리는 휴대폰 진동에 승관의 목적이 나였음을 깨닫는다.
- [어디냐?]
- [너희 반 앞에서 대기 중]
- [망했어]
- [왜? 점수 안 나왔어?]
- [너무 잘해서 망했어 ㅜㅜ]
- [열 받아서 소름 돋음]
교실 창문을 사이에 두고 승관은 내게 손가락질을 하며 끅끅 웃어 젖혔다. 담임의 말을 대신 전달해주는 듯, 교탁 앞에서 성적표 배부와 함께 메모를 읽던 학생은 ‘오늘 청소는 부승관’이라는 명쾌한 한 방을 날리고 빠르게 사라졌다. 승관은 분노하며 청소함을 뒤적거렸다. 아마 제일 잘난 빗자루를 찾고 있을 것이다.
- “뭐야, 왜 그렇게 웃어? 설마 OMR에 이름 안 썼냐?”
- “그런 거 아니거든.”
- “아, 말로만 듣던 샤프 마킹?”
- “샤프로 맞을래?”
- “아니, 뾰족해서 싫음.”
어깨에 새 빗자루를 얹고 가볍게 휘휘 돌리는 승관에게 꼬깃하게 접은 성적표를 들이밀었다. 미리 구상한 시나리오는 지훈이에게만 하는 걸로 하자.
- “짜잔, 이것은 자랑이다.”
- “와, 언어가 파국을 맞다니. 굉장히 비극적이다.”
- “영어에 초점을 맞춰 봐.”
- “세종대왕님이 지금 너 때문에 울분을 토하신다.”
- “제발 영어 등급 좀 봐 주세요.”
- “문호 개방의 원인이 너였냐?”
승관은 자신의 등을 강타하는 짜릿한 손맛에 그제야 ‘이 시대의 진정한 승리자는 김여주’라며 두 엄지를 치켜들었다. 눈 앞을 가리는 손가락을 툭툭 쳐내고 교실 안을 다시금 뒤적였다. 기분이 들뜬 탓에 그를 찾지 못한 건 아닐까 하고.
- “왜, 이지훈 찾아?”
- “어디 갔어?”
- “종례 전에 나가던데. 그것도 엄청 빠르게.”
- “……그래?”
실망감은 감추고 싶어도 감추지 못하는 것이라 그대로 티가 난다. 승관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말없이 성적표를 다시 내밀었다. 그리고는 미리 선수를 치는 것이다.
- “오늘 밥 먹기로 약속한 거, 나중으로 미루자.”
- “…….”
- “이지훈도 먼저 가버리고……. 나도 뭐, 피곤하기도 하고.”
네 기분 잘 알겠으니 먼저 빠져주겠다는 의미였다. 멋쩍게 웃는 무던한 아이였다. 대충 손을 흔들며 교실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가방 앞주머니에 식어 빠진 종이 한 장을 구겨 넣으며 입안을 깨문다. 목적을 잃었으니 잠시 방황을 하는 건 당연했다.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니 승관이 어깨를 두드리며 방황을 깨웠다.
- “야, 근데 너 혹시 울 담임 만났냐?”
- “……아니, 왜?”
- “나한테 너랑 이지훈이랑 친하냐고 갑자기 묻더라.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는데, 내 추측으로는 쌤들이 같이 있는 거 많이 봤나 봐. 별것도 아닌데 선 넘게 생각하는 꼰대들 많잖아.”
- “…….”
- “아님 다행이고. 신경 쓰지 마.”
이번엔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승관이다. 항상 바빠 보이는 뒷모습에 옅은 미소를 남겼다. 처음 듣는다는 거짓말에 마른 침을 삼켰다. 승관이도 담임에게 같은 질문을 받았다면, 당사자인 지훈이도 피할 수 없었다는 얘기였다.
-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걸로 된 거야.’
……
- ‘좋아하면 안 되는 이유는 없어. 굳이 필요하지도 않고.’
……
- ‘그게 사물이든 사람이든.’
비로소 우연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어쩌면 나보다 먼저 불려 갔을 터였다. 이미 내 상황도 알고 있었으니 운명처럼 맞아떨어진 것이다.
속이 시큰거렸다. 울렁거리기도 하는 것이 꼭 얹힌 것처럼 내려가지 않는다. 만약 지금 내 옆에 네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무거운 감정을 혼자 안고 있으려니 너무 버겁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통화 목록에 들어있는 이름은 단 하나였다.
-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 샘으로 연결됩니다. 연결 후에는…….]
몇 번이고 걸어봐도 오직 낯선 여자의 메시지만이 울릴 뿐이었다. 토닥토닥 손가락을 움직이며 화면 안으로 글자를 새긴다.
- [지훈아, 뭐해?]
아니야, 이건 별로.
- [부재중으로 확인되어 문자 보냅니다.]
……사무실 직원도 아니고.
- [어디야? 아까 교실에서 기다렸는데]
이건 좀 스토커 같지 않나.
지우다 쓰기를 반복하며 시침을 한 바퀴를 뚝딱 해치웠다. 쏟아지는 졸음에 카페에 들려 커피를 안았다. 창가에 앉아 빨대를 씹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그러다 여태 보내지 못한 인스턴트 문자함을 열어 키패드를 두드렸다.
- “……뭐라고 보내야 답을 해주려나.”
한두 방울 땅을 두드리던 빗방울이 거대한 눈덩이가 되어 세상을 적셨다. 일기 예보도 감당하지 못한 급작스러운 소식에 사람들은 가방을 우산 삼아 빗줄기를 피했다. 차가운 에어컨 바람에 몸을 웅크리며 눈을 감는다. 사실 더위를 식혀줄 에어컨도, 비를 막아줄 우산도 필요 없다. 그저 옆에 있어 줄 사람이, 그 누군가가 필요했다.
- “보고 싶어.”
지훈이, 너.
네가 필요해서.
#18.
현재 시각, 오전 10시 06분.
부재중 전화 없음.
확인하지 않은 문자 메시지, 네 통.
비교적 한가로운 주말이었다. 등교는 없지만 정신적인 등교가 필요한 이 시각, 온전히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리며 메시지 함을 확인했다.
- [시계는 와치!! 시계는 와치!! 오버 워치 하자아ㅏㅏ]
발신자는 부승관. 가볍게 패스.
- [무담보 대출 100%. 지금 바로 전화 연결 가능]
김미영 팀장님, 안녕하시죠.
- [여주, 시험 잘 봤어? 나 수리 개망했어ㅠㅠ 자퇴가 답인가ㅠㅠㅠㅠ]
넌 혼자가 아니야. 난 언어를 고이 접어 날렸거든.
- [토니모리 반값 세일! 오늘부터 시작!]
반 값이라고 하면서 받을 건 다 받잖아요.
화면을 꾹꾹 누르며 한자, 한자 씹어 읽는다. 어느새 메시지 함 팝업창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고 두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허리를 곧게 세웠다.
- “……이게 끝이야?”
미처 확인 못한 연락이 있을 것이다. 이건 분명했다. 와이파이나 데이터가 필요치 않은 메시지를 굳이 의심하며 전원을 껐다 켰다, 침대에 내팽개치다, 다시 어루만지며 화면을 응시해도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 ‘한 사람 인생 망치는 거 한순간이야.’
……
- ‘네가 정말 지훈일 생각한다면, 지금부터라도 처신을 잘 해줬으면 좋겠어.’
답답했다. 그동안 같이 보낸 시간이 그녀의 말마따나 독이 되어버린 건 아닌지 그날 이후로 불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감정이라는 것이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닌지라 더더욱 그랬다.
- ‘공부 같이하자. 나 19번 알려주면.’
……
- ‘그냥, 번호 맞나 확인 차.’
아이 같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눈이 마주치면 이윽고 귀 끝을 빨갛게 물들인 채 샤프 끝을 만지작대던 그가 생각의 끝에 서성였다.
지훈아, 넌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엉키는 생각들과 그의 잔상들. 결국, 점점 어둡게 변해만 가는 생각의 마지막 꼬리를 잡는다. 파노라마처럼 모든 것들이 스쳐 지나갈 때, 유독 지워지지 않는 짙은 목소리가 의식을 깨웠다.
- ‘여주야.’
……
-‘나, 죽을까.’
신발장에 나뒹굴던 신발 두 짝을 구겨 신고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목적지는 학교, 과학실 구석에서 아슬히 몸을 맡긴 그가 머릿속에 흐트러진다. 마지막 비상구 계단을 지나쳐 밖을 나섰다. 고달픈 두려움이 뛰기 시작했을 때, 걷잡을 수 없는 절망이 도사렸다. 그때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마지막이 오늘이 되지 않게 해달라는 바람뿐이었다.
- “……지훈아.”
벤치에 앉아 무릎을 세운 채 그 안으로 고개를 묻은 그가 보였다. 그리고 그리던 사람이라 환상은 아닐까 낯을 쓸어내렸다. 주변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그가 묻었던 얼굴을 든다.
차가운 과학실 구석에 웅크려 세상을 내다 보고 있던 그 아이였다.
우는 법을 모르는 아이는 울지 못한다.
대신 늘 두 눈 속에 까만 밤바다가 일렁였다.
Epilogue |
- ‘이지훈, 정신 안 차려?’ 점심시간이 끝나 갈 무렵, 복도 계단을 빠르게 올라가는 지훈을 붙잡은 건 다름 아닌 그의 담임이었다. 교무실 안에서 시작된 취조, 이곳이 싫어 옆에 딸린 양호실도 찾지 않는 그에게 있어 충분히 불편한 자리였다. 더불어 여주까지 들먹이는 말투가 못마땅해 더더욱 심기가 거슬리던 참이었다. - ‘네가 지금 연애할 때야?’ - ‘…….’ - ‘김여주, 맞니?’ - ‘…….’ -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대답을 해.’ - ‘학교에 영향 없어요.’ - ‘이지훈.’ - ‘만나고 말고를 떠나서 피해 없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된다고요.’ 지훈에게 이번 점심시간은 매우 중요했다. 그녀가 아이스크림을 건네며 했던 말 때문이었다. 단순히 ‘메로나’를 좋아해 자신에게 강요한 건 아닐 테고, 갑자기 의식이 불분명해 벌게진 얼굴로 줄행랑을 친 건 더더욱 아닐 것이다. 답답했다. 그녀가 자신에게 전하고 싶은 건 대체 무엇이었는지. 그래서 이리 붙잡혀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에 화가 치밀었다. 담임은 뭉툭한 손가락으로 지훈의 최근 성적을 하나씩 집어가며 불안함을 엎질렀다. 결국 ‘A대에 가려면 이렇게 해서는 어림없다’ 라는 말을 돌려 말하고 있는 담임 덕분에 짜증과 더불어 온몸을 덮치는 피곤함이 한꺼번에 그를 삼켰다. 허공으로 띄워지는 그의 정신과 여전히 아무런 대책이 없는 담임의 일명 ‘똑같은 말 또 하고’의 완벽한 콜라보레이션. - ‘너희 어머니뿐만 아니라 학교도 너한테 거는 기대감이 큰 건 알고 있니?’ - ‘…….’ - ‘넌 우리 학교 자체야. 여자 사귀고 그런 건 대학 가서 물리도록 하면 돼. 당장 A대만 가봐, 얼마나 예쁜 여자애들이 네 주위에 넘치고 넘치는지.’ - ‘…….’ - ‘막말로 너보다 나은 애를 만나도 모자랄 판에 그런 애를 왜 만나? 이지훈 학생, 정신 빠진 소리 그만 하세요. 네가 쌓아 왔던 걸 생각하란 말이야. 아깝지 않니? 이대로 다 버릴래?’ 승관과 정반대인 지훈은 감정 조절이 원체 쉬운 사람이었다. 화가 나도, 짜증이 치밀어도, 심지어 일말의 즐거움을 느껴도 내색을 하지 않는 그였다. 아마 내색을 하지 않는 것보다 하지 못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감정 표현에 서툰 사람은 그런 것이다. 그런 그가 불쑥 목소리를 높였다. 이유는 여주를 깎아내리는 상대방의 헛소리부터였다. - ‘그동안 쌓아온 거, 당장이라도 버리고 싶은데요.’ - ‘뭐라고?’ - ‘김여주, 걔가 잡아주는 거예요.’ - ‘…….’ - ‘왜 아는 척 하세요.’ 손가락에 끼운 비닐봉지를 담임의 눈앞에 흔들었다. 지훈의 차가운 어투에 업무를 보던 몇몇 교사들은 수군거리기 바빴다. - ‘밥 먹으러 가야 해서요.’ - ‘너 지금…….’ - ‘그리고 아직 시작도 안 했어요.’ - ‘……’. - ‘죄송한데 지금 좀 바빠요. 먼저 갈게요.’ 묵직한 비닐봉지가 흔들린다. 혼자 남겨진 사람을 위해 건네는 그의 마음. -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걸로 된 거야.’ …… - ‘좋아하면 안 되는 이유는 없어. 굳이 필요하지도 않고.’ …… - ‘그게 사물이든 사람이든.’ . . . . . . . . - ‘나도 메로나 좋아해.’ 직접적인 대화는 할 수 없었다. 다만 그녀의 마음이 부디 자신과 같길 바라며 예쁘게도 웃는 그였다. * 6월 모의고사 성적표가 배부되는 날이었다. 종례 시간이 되도록 오지 않는 담임을 기다리며 뒷문을 서성였다. 여주의 교실을 흘긋하길 여러 번, 두꺼운 돋보기 안경을 쓴 아이가 낯선 손짓을 했다. 담임이 당장 교무실로 오래. 화 많이 났어. 엉거주춤 말을 이어가던 아이는 교실로 자취를 감췄다. 그는 이마에 두 손을 맞대 기도를 하고 있는 그녀에게 잠시 시선을 두다 서둘러 계단으로 향했다. 굳이, 또, 따로 부를 필요가 있었는지. 복도를 걷던 중, 휴대폰 전원을 켜자 방전 직전인 화면이 깜빡였다. 메시지 함 근처에 가보지도 못한 채 어둠을 먹는 유일한 연락망. 미간을 찌푸렸다. 곧 있으면 여주가 자신을 찾거나 교문을 나가고도 남을 시간이었기에 무척이나 다급했다. 승관이에게 미리 말이라도 할 걸 그랬다. 고작 이런 후회나 하면서. 그런 지훈의 사정을 알 리 없는 담임은 얼굴을 붉히며 감정에 충실했다. - ‘시험 말아 먹고 잠이 오던?’ - ‘…….’ - ‘너 미쳤니?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의대 보내려 너희 어머니가 얼마나 노력하시는 줄 알아?’ 학교에 비상이 걸렸다. 주제는 1등의 볼품없는 성적 때문이었다. 지훈은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담임을 응시했다. 담임이 말하는 어머니의 노력은 ‘돈’과 ‘돈’, 대강 이런 것들이었다. 꺾인 성적표가 눈앞에 휘몰아친다. 픽 터지는 실소를 참지 못해 고개를 돌렸다. - ‘이딴 성적으로 학교 먹칠을 해? 지금 웃음이 나와?’ - ‘네.’ - ‘야 이 새끼야!’ 부던히 노력했던 지훈의 지난날은 안중에도 없었다. 다만 그의 어머니의 위대한 돈바람에 홀린 담임의 눈물겨운 노력이 돋보일 뿐이었다. 아이러니란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다. 화를 억누르듯 이를 꽉 깨무는 상대방에게 지훈은 묘한 안쓰러움을 느꼈다. - ‘대학 가기 싫어? 그래서 반항하는 거니?’ - ‘가야죠. 그래야 선생님도 보너스를 챙기니까.’ - ‘……뭐?’ - ‘돈 그만 받으세요.’ - ‘…….’ - ‘그러면 안 되잖아요, 선생님은.’ 지훈의 목소리가 낮게 울린다. 상대방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였다. 담임은 도끼눈으로 사방을 살폈고, 그는 답답한 듯 넥타이를 풀었다. - ‘교감 선생님 오실 거야. 잠깐만 기다려. 인사라도 해야지.’ - ‘…….’ - ‘그 얘기는…… 나중에 하자.’ 지훈은 창문을 넘어 사라지는 노을을 보며 작게 욕을 읊조렸다. 불편한 소파에 앉아 네 살짜리 유치원생도 할 수 있는 뻔하디뻔한 대답을 스스로가 지겨워 할 때까지 뱉고 나서야 지옥이나 다름없었던 공간으로부터 그를 자유롭게 했다. 저녁 7시가 가까워지는 시간이었다. * 긴 복도를 뛰는 지훈의 발소리가 다급했다. 자율학습에 한창 매진하는 승관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이어폰을 꽂고 몰래 라디오를 듣고 있던 승관은 본능적으로 교복 안에 이어폰을 숨겼다. - ‘김여주 봤어?’ - ‘아오, 깜짝이야. 너였냐?’ - ‘집에 갔어?’ - ‘지금 시간을 봐라.’ - ‘언제 갔는데.’ - ‘진작 해 떨어지기 전에 갔네요.’ 한두 시간은 더 됐을걸. 승관은 왼쪽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확인했다. 고요했던 교실에 잡음이 섞이자 아이들은 뒤를 돌아보기 시작했고, 눈치 빠른 승관은 피치를 줄이며 말을 이었다. - ‘설마 지금까지 담임한테 붙들려 있었냐?’ - ‘어.’ - ‘뭐야, 아까 여주가 너 찾길래 그냥 없다고 했는데…… 서로 연락 안 했어?’ - ‘배터리 나갔어.’ - ‘내 꺼 빌려.’ - ‘…….’ - ‘야, 근데 김여주 영어 완전 대박. 신이 내린 공부 법 나도 공유하자.’ - ‘먼저 간다.’ 백 년 우정 다 필요 없다는 승관의 아우성이 복도를 수놓는다. 지훈은 학교 본관 건물 벽에 기대 신발 앞코를 바닥에 톡톡 두드렸다. 누구보다 최선을 다했을 그녀를 잘 알기에 직접 말해주고 싶었다. 잘했어, 수고했어, 그리고, 내가…… 내가……. - ‘타이밍 한 번 좋네.’ 망쳐버린 꼴이 우스웠다. 늘 ‘최우선의’, ‘최상의’, ‘최고의’ 타이틀을 옆에 두고 살던 그가 한 번에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라. 그럼에도 최악을 거머쥔 그는 의외로 차분했다. 결과의 원인은 정확했다. 부러 답안지를 밀려 쓴 까닭이었다. 계획을 실천한 것과 다름없으니 그에게 있어 오늘은 명백한 ‘성공’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녀를 생각하니 일말의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온다. 분명 자신의 탓이라 자책할 바보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지훈은 자신을 망치는 일을 오래전부터 생각했고 그 꿈을 하나씩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불어 닥친 그녀가 마음 한 켠에 걸렸다. 외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김여주, 그 아이는. - ‘형, 어디야.’ 이미 어둑한 도심의 하늘을 보고 있는 지훈의 눈동자가 높은 빌딩 사이를 스치다 아래로 곤두박질친다. 비가 내렸다. 작게 패인 웅덩이를 신발 끝으로 살짝 건드리자, 중심으로 잔물결이 일어나 하나의 피사체를 반사했다. - ‘……병신.’ 그 안에 잠겨버린 자신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