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다니엘/옹성우]
LOVE CIRCLE
W.LIGHTER
여름이 끝이 났다.
내가 옹성우에게 창피하기 그지없는 고백을 했을 때가 방학이 시작될 무렵이었는데 순식간에 변한 날씨와 온도의 차이가 새삼 낯설었다. 하긴, 그 때까지만 해도 학교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친구가 생긴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거니와 옆에서 나와 같은 강의를 신청하기 위해서 한동안 잠도 못 잤다며 투정하는 선배가 있다는 것도 더욱이 믿겨지지 않을 법했다. 개강을 한 첫 날부터 바로 수업을 진행하는 교수님으로 인해 온통 진이 다 빠지는 기분으로 밖을 나오자 하늘이 흐린 잿빛 같았다. 아직도 비가 내리네. 문을 열기가 무섭게 세차게 내리는 비는 새벽부터 내리더니 여적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완벽한 가을의 날씨가 되지도 않았건만 오늘 아침 본 기상캐스터는 지금 내리는 비가 여름에 내리는 마지막 비라고 말했다. 천둥까지 치며 바닥으로 곤두박질 치는 빗줄기는 정말 제 마지막을 훤하게 장식하고 싶은 모양인지 거세기만 했다.
"아, 나 잠깐 과방 좀 갔다 올게."
"책 두고 왔어요? 그거 내일 모레까지 레포트 제출인데."
"아까 애들이랑 있다가 두고 왔나봐. 금방 갔다 올게."
과방으로 급하게 달려나간 옹성우는 새삼 주변이 어수선했다. 펴다 만 검은색의 우산부터 가방에 온전히 들어가지도 못한 책들까지 그대로 바닥에 둔 흔적들이 꼭 그의 성격을 닮아있어서 별 것도 아닌 책들을 주워담으면서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두고 다니다가 조만간 뭐 하나 잃어버리고 와도 이상하지 않겠네.
"ㅇㅇㅇ?"
성우 선배의 가방과 우산을 안고선 바닥에 쭈그려 앉아있던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멀찌감치서 들려왔다. 여전한 버릇으로 한쪽으로 기운 우산과 미처 가리지 못해 물기가 가득 묻은 가방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시간은 이래서 무서웠다. 오랜 시간동안 차곡차곡 쌓아둔 것들이 지금처럼 뜬금없이 마주한 그에게서 발견하게 되니까. 근래에 좀처럼 보지 못한지라 귓뜸으로 다니엘이 휴학을 한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 그를 예전처럼 볼 용기조차 나지가 않았다. 이렇게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마주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누구 기다려?"
"아, 성우 선배 기다리고 있어. 과방에 책 두고 왔다고 그래서."
떨어지지 않는 입으로 건넨 인사가 무색해질만큼 어색한 침묵의 연속이었다. 그나마 비라도 내려서 다행인건가. 천둥소리가 두어번 연달아 났을까 둘 중에 쉬이 말을 하기가 어려운 분위기에 먼저 입을 연 건 다니엘이었다. 뭔가 우리가 만날 때마다 비가 내리는 것 같네.
"나, 이제 괜찮아. ㅇㅇ야."
"응?"
"아니, 괜찮다는 건 좀 거짓말이긴 한데 괜찮아질 거야. 정말로."
시간이 흐르다보면 점점 괜찮아질 거라고 그러더라, 재환이가. 얼마나 걸릴진 몰라도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이거 말해주고 싶어서. 올곧게 전달되지 못하는 문장이었다. 강다니엘이 지금 하는 말들이 결코 쉽게 하는 말들이 아니라는 건 단어 사이사이마다 배어져 나오는 옅은 한숨이 그랬다. 언젠가 내가 제일 잘 어울릴 거라고 했었던 갈색 머리를 하고 있던 그는 이제서야 뒤늦은 정리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런 말에 어떻게 대답을 해주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서 우두커니 그를 올려다 보기만 했을까 어두워진 하늘에 가려져서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그는 말간 얼굴로 웃어 보였다.
"그럴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괜히 너만 힘들게 만들어서 미안해."
"......."
"나도 많이 고마웠어, ㅇㅇ야."
그래도 네가 웃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니엘에게 미안하다는 말과 고맙다는 말을 들었던 것보다 나에게 그 말들을 전달하는 그의 표정이 내가 그에게 나름 모질었던 상처를 주었던 그 때에 비해 훨씬 나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내가 어쩌면 이번 해에 마지막으로 기억될 다니엘의 얼굴이 웃고 있는 거여서, 그래서 좋았다. 미처 제 마음도 헤아리기 어려웠던 시절부터 줄곧 강다니엘에게 있어 내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는지 새삼 느끼는 것만 같았으니. 우리가 다시금 마주했을 때 먼저 다가와 준 사람도 다니엘, 너였는데 끝끝내 이번에도 먼저 내게 손을 내밀어 주는 것도 너였다.
"그럼 나 갈게."
"응, 우산 잘 쓰고 가. 감기 걸리겠다."
내 말에 빙그레 웃던 다니엘은 제 후드에 있던 모자를 쓰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먼저 등을 돌리려는 다니엘을 보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모든 순간에 다니엘은 날 기다리거나, 나를 배웅해주거나, 멀리서 지켜봐주었던 위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변하는 게 있다는 말도 거짓말은 아니었네. 내가 먼저 강다니엘의 등을 보게 될 줄이야. 나도 모르는, 아주 미세하게 변화된 사실이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그냥 안에서 기다리는 게 나으려나. 신발 앞 코를 적셔오는 빗물을 털어내며 앉아있느라 저리는 다리를 풀고 있자 문득 들리는 말투는 사뭇 미련이 가득 묻어있는 듯했다.
"ㅇㅇ야."
나를 불러세우는 목소리가 내리는 비 때문인지 가늘게 떨려왔다. 끝이 났다는 걸 어떻게 표현해야 그나마 예쁘게 포장이 되어서 나올지는 알 수 없었다.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가야 함이 맞았는데 그 마지막이라는 단어 하나가 자꾸만 속에서 미련하게 들이밀고 있었다. 아마, 나를 다시금 불렀음에도 아무런 말도 못한 채 땅만 바라보는 것도 그래서였을 거라, 미루어 짐작만 할 뿐이었다.
"잘 지내."
결국 마지막으로 꺼낸 말조차 참 맥아리가 없었다. 고작 그 한마디를 하기 위해서 날 부른건 아니었을 걸 다 알면서 나 또한 바보같이 인사만 건네고 있었다. 길고 길었던 내 짝사랑이 정확하게 매듭이 지어졌을 무렵 그제야 강다니엘은 앞으로 돌아서 제 길을 가기 시작했다. 거진 6년이란 시간을 함께 보낸 다니엘과도, 오랫동안 그를 좋아하고 있었던 그 때, 그 시절의 나도 이제는 완벽하게 끝이었다. 허무하게 끝나버린 마지막이 아쉽지 않냐, 하면 그건 아니었지만 예전이었다면 혼자 감성에 젖어서 울고 있었을 나도 갈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옹성우가 했던 말처럼 세상에는 완벽한 것들은 없었고 불완전한 축들로 인해서 나는 또 온전한 그의 애정이 기꺼이 피할 수 없을만큼 좋았다. 안으로 들어가 물기가 묻은 외투를 털고 있자 비상구 쪽에서 연거푸 소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ㅇㅇ야, 미안. 계단으로 바로 뛰어내려왔는지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그는 급할 일도 아니었음에도 되려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이렇게 뛰어와요. 그러다 다친다니까."
"너가 기다리니까 그렇지, 왜 싫어?"
짓궃게 물어오던 선배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대놓고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서툰 나와는 달리 옹성우는 자신에게 있어 솔직했다. 처음에야 솔직하다 못해 직설적인 그의 고백을 받았을 때는 그게 퍽이나 당황스러워서 부담스럽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었다. 그런데 부담스럽다고만 느꼈던 그의 올곧은 방식이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고 내 선택이 후회가 된다든가, 다른 생각은 들어올 틈도 만들어주지 않을 정도로 옹성우를 좋아하게끔 했다. 그러니까, 뭐라 설명할 수는 없을만큼 뜬금없이 내 손을 잡은 그의 큰 손이 이왕이면 오래도록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나를 옹성우가 알기나 하련지.
"선배."
"응?"
누군가 그랬다. 사랑은 순환하는 원과도 같아서 상처받지 않기를 원한다고 한들, 다시는 이런 감정 따위 갖고 싶지 않다고 수백번, 수천번을 다짐한다고 한들 단 한 번의 떨림으로 인해 다시 수만번 고생을 하는 게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단숨에 날 안아오는 옹성우의 맥박이 쉴 새 없이 바쁘게 뛰고 있는 지금,
"내가 진짜 엄청 많이 좋아해요."
그렇게 우리는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LOVE CIRCLE
: 돌고 돌아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完
작가의 말 |
안녕하세요, 라이터입니다! 근 4개월을 걸려서 쓴 러브서클이 드디어 완결이 났습니다!!! 좀 더 빨리 났으면 좋았을텐데;;; 그래도 오늘은 완결이니까 완결인만큼 완결다운 후기를 쓰도록 하겠습니다(뿌듯) 러브서클을 처음 쓸 때는 삼각관계의 짜릿한 구도에서 성우와 니엘이를 넣으면 어떨까, 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글이었어요. 그러다가 처음 스토리 라인을 짜면서 사랑에 한 번 실패한 여주가 다시는 만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랬던 니엘이를 돌고 돌아서 다시 만나고 그 사이에서 성우를 만나게 되면서 사랑에 실패도 하고 동시에 성공도 하는 그런 정말 러브서클 같은 글을 써보자 했답니다. 문득 우리가 정말 짝사랑에 실패했다고 다시는 사랑을 안 하는 것도 아니고 안 되는 일이 있다면 그와 함께 반대축에서는 이루어지는 일이 발생한다는 걸 깨닫고 나서 제목도 고심 끝에 순환하는 서클을 붙인 러브서클로 지은 거구요. 결국 한국말로 하면 사랑의 순환고리(?) 뭐 이런 정말 단어 그대로의 글이였네요....ㅎ 그리고 옹녤을 통해서 보여드리고 싶었던 또 한 가지는 사랑에도 때가 있다는 되게 일차원적인 발상이었어요. 다니엘이랑 여주는 서로를 좋아한다고 깨닫고 그걸 말하는 시기가 서로 엇갈려서 안타까울 수도 있지만 그게 제가 만든 다니엘의 캐릭터랍니다. 집안 환경이나 자라온 환경 자체가 많은 생각을 해야 하는 다니엘은 그 때를 맞추지 못한 거고 성우는 그 때를 놓치지 않는 아주 전형적인 불도저 같은 성격인지라 이렇게 러브서클의 끝마무리는 성우와의 럽럽으로 끝나게 되었네요. 쓰면서 되게 행복하게 썼던 글이여서 시험과 알바를 병행하면서 골골대는 감기에도 즐겁게 글을 썼던 것 같아요. 그만큼 재밌게 봐주셔서 너무 감사하고 다음 차기작으로 다시 돌아오도록 할게요. 지금까지 러브서클을 사랑해주시고 재밌게 읽어주신 모든 독자님들 많이 많이 감사합니다. 사랑해요(하트) P.S 이제 곧 있으면 대입 시험이 얼마 안 남았네요.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구 맘편히 늘어지게 쉬는 날들을 즐기길 바랄게요!!!!! 암호닉은 따로 최종적으로 정리해서 메일링 공지와 함께 오도록 할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