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이스트 민현 & JR - Daybreak
005. 도망가지 마요
참고: 구름이네 쉐어하우스 구조 |
"굿모닝."
띠리리리- 정신 없이 울리는 내 모닝콜을 듣고 우리 엄마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네 알람 듣고 못 인나면 귀때기가 쳐썩어뿐 기라고.
다행히 나는 오늘도 귀때기가 쳐썩어뿌지는 않은 상태로 잘 일어났다. 하암- 소리내어 하품을 하고, 한 손으로는 입을 톡톡 두드리며 침대를 정리했다.
어느덧 이 분홍빛이 낭낭한 방에도 다 적응이 되었나 보다. 처음에는 낯설게만 느껴졌던 것들이 이제는 꽤 익숙하니까 말이다.
눈을 비비며 나오자마자 부엌에서 나는 빵 굽는 냄새를 마주했다. 아침부터 빵을 구우며, 부지런히 달걀을 튀기고 있는 사람은 황민현이었다.
이렇게 바로 마주칠 걸 알았더라면 거울이라도 한 번 보는 건데. 그렇지만 이미 내 인기척을 느낀 황민현은 나를 돌아보며 굿모닝, 이라고 외쳤다.
"안녕하세요...."
잠이 덜 깨도 한참 덜 깬, 푸욱 잠겨버린 목소리의 듣기 싫은 '안녕하세요'가 입 밖으로 나왔다. 황민현은 나를 향해 씨익 웃어보였다.
누가 봐도 편한 옷차림에 살짝 부은 얼굴. 굉장히 편해 보이지만 잘생긴 건 여전하다. 일어나자마자 거울도 채 확인하지 않은 내가 괜스레 초라해졌다.
어디론가 숨고도 싶고, 무언가 가릴 게 있으면 가리고도 싶지만 마땅히 그럴 만한 게 없어 주변을 두리번댔다.
아무래도 씻고 나오는 게 빠르겠다 싶어 발걸음을 옮겼다. 옮긴 발걸음에 얼른 씻고 나와서 아침 같이 먹자- 하는 말이 따라붙었다.
"뭐 바를래? 땅콩크림? 딸기잼?"
"저는... 딸기잼이요."
"자, 여기."
양 손에 땅콩크림과 딸기잼을 각각 들고 나를 향해 뭘 바를 거냐고 물은 황민현이다. 나는 고민하다 딸기잼을 택했고, 그는 친히 뚜껑을 열어주었다. 친절하기도 하지.
황민현은 잼 바르는 칼을 내게 먼저 내밀고, 냉장고로 걸어갔다.
냉장고 한 켠에 자리했던 더치 원액을 꺼낸 그는 두 잔의 컵에 비슷한 양으로 더치 원액을 따르고, 적당한 양의 물과 얼음을 넣었다.
그렇게 잠깐 사이에 두 잔의 더치커피가 생겼다. 나는 감사합니다. 하며 한 잔을 받아 들었다.
"아침에는 무슨 수업이야?"
"호텔경영분석과 M&A전략이요."
"그거 한 학기 내내 팀플이지? 내 친구 중에 그 수업 들었던 애 있거든."
"네에... 벌써 힘들어요...."
전공 수업 중 헬 중의 헬이라고 불리는 <호텔경영분석과 M&A전략>. 제목이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영사례를 분석하고 전략을 평가하고.. 뭐 그런 내용이기 때문에 한 학기 내내 팀플이다.
첫 수업부터 팀을 구성하기 시작해서는, 그 팀 그대로 한 학기 내내 쭉 간다. 잠도 덜 깬 상태에서 내가 뭐라고 하는지도 모르는 채 계속 토론하고, 토론하고, 또 토론하고..
생각만 해도 딱 죽겠다. 학교에 가고 있는데 이미 집에 가고 싶어지는 신기한 기분을 바로 지난 주에 경험했다.
"선배는 그럼 수업 끝나면 계속 도서관에 계세요?"
"응. 주로. 도서관이 제일 공부가 잘 되더라구."
민현선배는 아침이어도 목소리가 잠기는 법이 없다. 나긋나긋, 조곤조곤한 말씨는 기복이 없는듯하다. 얼굴과 마찬가지다. 살짝 부어도 여전히 잘생긴 것처럼.
선배가 구워준 빵은 맛있었고, 발랐던 잼과도 잘 어울렸다. 특히 거기에 더치커피란... 정말 행복 그 자체.
우리 마시라고 성운이오빠가 특별히 따로 빼놓았다고 했다. 며칠 숙성되었으니 지금이 딱 맛이 잘 올라와서 제일 좋을 때인 것이다.
선배는 미리 깎아둔 과일을 조금 가지고 와서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와, 과일까지... 내 입에서는 절로 탄성이 나왔다. 선배는 귀엽다며 웃었다.
".....같이 학교 갈래?"
눈을 마주치며 물어오는 모습에 잠이 확 달아난 것 같았다. 같이, 학교라. 와.... 영광이죠, 제가.
그래도 뭔가 이래도 괜찮은가 싶어 선뜻 대답을 못하고 있자, 찬찬히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으며 나 먼저 씻고 나올게. 마저 먹고 같이 출발하자. 하는 선배다.
거부할 타이밍을 놓쳐버린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 자리에 일시정지. 하지만 오늘은 청소해주시는 아주머니가 오지 않는 날이니 설거지는 내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벌떡 일어섰다.
해봐야 메뉴는 토스트였고, 단 둘이 먹은 게 전부라 많지도 않았다. 쓱싹쓱싹 수세미로 몇 번 닦고, 물로 헹구고 나니 타이밍 좋게 선배가 나왔다.
선배는 저가 설거지할 생각이었는데, 미리 이야기를 못하고 씻으러 가서 네가 하게 만들었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얻어먹었는데 이 정도는 해야죠. 하면서 웃었다. 선배는 고맙다고 멋쩍게 웃었다. 40분에 출발하자. 나긋한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를 닦고 나왔고, 방으로 들어와서 옷을 골랐다.
왠지 아무거나 막 입으면 안 될 것 같고... 고데기로 머리도 좀 예쁘게 해야 할 것 같고... 그런데 이러다 지각할 것 같고... 그래서 에이, 고를 옷도 없는데 뭘 골라. 하는 생각으로 대충 막 주워입고 말았다.
꾸미는 것도 버릇이고 습관인데, 사는 게 바빠서 안 꾸미고 다니다 보니 한 번 꾸밀 때 시간이 엄청 오래 걸린다. 이래서 계속 꾸며야 하는 건가 보다.
여튼 어영부영 시간은 가서 시계는 39분을 가리키고 있었고, 그래도 선배보다 늦게 나오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가방을 들고 공용공간으로 나왔다.
나보다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던 선배는 백팩을 매며 갈까? 하고 물었다. 나는 네!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수요일 1교시는 너랑 나밖에 없네?"
"그러니까요- 다들 3교시부터 시작이라..."
"점심은 보통 누구랑 먹어?"
"성우요. 시간표가 얼추 맞아서.."
"그렇구나. 나도 보통 계속 학교에 있는데."
그 말은 곧 본인과도 같이 밥을 먹자는 뜻인가....? 단박에 알아듣지 못한 나는 선배의 말이 주는 의미를 고심하다가, 선배를 쳐다봤다.
선배는 쑥쓰러운듯 말했다. 그러니까, 뭐 혹시 괜찮으면 나랑도 같이 먹자구. 하며 맑은 웃음소리를 냈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숨기고 아아, 그럼요. 그럼요. 하고 대답했다.
음... 말하자면 좀 설레게 웃는 사람같다. 웃는 모습이 사람을 설레게 하는, 그런 사람 말이다.
언제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있었더라... 고등학교 때, 농구하던 전교회장 오빠가 3점슛을 넣고 씨익 웃을 때, 그때 보았던 것 같다. 민현선배는 딱 그런 느낌이었다.
"이번에 빌린 책 반납은 언제까지야?"
"다음주 화요일이요."
"그럼 다음주 화요일에 점심 같이 먹을래?"
"...네, 좋아요."
"학식 말고, 학교 근처에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네!"
난 씩씩하게 대답했다. 얼떨결에 약속이 정해졌다. 화요일 점심이라.. 호경론 끝나고 서두르면, 다음 수업 시작하기 전까지 학교 근처에서 밥을 먹고 들어올 여유는 되었다.
메뉴 생각해볼래? 나도 고민해볼게. 하는 민현선배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행복한 고민에 제일 자신있습니다. 제 주특기거든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학교에 도착했다. 나도 전공이고, 민현선배도 민현선배의 전공 수업이라 수업 듣는 공간이 달랐다.
캠퍼스에 들어서자마자 이따 뵐게요- 하는 인사를 하고, 나는 호텔관광대학으로 향했다. 으응. 밥 잘 챙겨먹구. 하며 웃는 선배는 참... 스윗했다.
- 오세요 구름이네 쉐어하우스 -
지잉, 지잉, 지잉. 별로 울릴 일 자체가 없었던 휴대폰이 쉴 새 없이 울리고 있다. 단톡방에 초대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름도 찬란한 '화목한 구름이네'.
단톡방에서 주로 오고 가는 이야기는 쉐어하우스 생활수칙이나 오늘 누가 몇 시쯤 들어오고, 그래서 공용공간 불을 언제까지 켜둘 건지 등이었다.
학식이나 학교 근처에서 식사 같이 할 사람? 같은 걸 물어보기도 했다.
[성운오빠: 지성이형 우유 몇 개 남았어? 오늘 주문해야겠지?]
[배진영: 네]
[성운오빠: 웅 나 들어가는 길에 주문할게!]
쿨하지만 친절한 진영이는 저에게 물어본 말이 아닌데도 곧잘 대답했다.
'화목한 구름이네'에 초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클라우디 존잘러들♡'에도 초대된 나는 그야말로 휴대폰이 쉴 새가 없었다.
내 휴대폰이 이렇게 일을 열심히 했던 적이 있던가... 그리고 내 정체성은 언제부터 '존잘러'였던가... 약간.. 잘 모르겠는데... 허허.
아, 그리고 또 하나. 성운오빠는 두 방 모두에 들어와있는 데다 실제로 클라우디에서 일을 할 때도, 구름이네에서 잠을 잘 때도 함께하는 사람이라 접점이 제일 많다.
어째 일주일에 7일 전부를 한 번도 안 떨어져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새삼스럽게 그게 또 그렇게 느껴졌다.
이걸... 가족이라고 해야 하나. 실제 핏줄로 연결된 가족보다 더 많이 부대끼고 같이 지내니, 오히려 순수한 의미로만 본다면 성운이오빠는 가족보다 더 가족같았다.
[성운오빠: 오늘 다 언제 와? 집에서 저녁 먹니?]
구름이네 톡방에서 성운오빠가 말했다.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숫자 둘이 쑥 줄었다. 한 명은 나고, 한 명은 곧바로 대답한 민현선배다.
[민현선배: 저 먹을래요.]
[성운오빠: 뭐 먹을까?]
남아있던 숫자 2는 금방 사라져 성우도, 다니엘도 다 읽은 게 되었는데, 그 둘로부터는 조금 더 기다려도 답이 오지 않았다. 밖에서 먹는 모양이네...
나는 마침 알바도 없는 날인데다가 딱히 할 것도 없었다. 아직 개강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과제도 없었고...
그렇다고 일찍 들어가도 방에 혼자 있으면서 쉴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어찌할까 고민을 하다가 학교 근처를 방황했다.
연락해볼 친구들이야 조금은 있었지만, 먼저 연락하는 걸 세상 귀찮아하는 나로써는 우연히 만나지 않는 이상 굳이 불러내기는 또 귀찮았다.
요즘 어디를 가도 사람들이 득실득실한 데 있으려니 사실 혼자만의 시간이 좀 필요하다는 생각도 있었고.
그래서 책이나 좀 읽어볼까 하는 생각으로 학생회관 카페에 자리를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내 휴대폰은 정신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다니엘?"
전화의 장본인은 다니엘이었다.
- 오세요 구름이네 쉐어하우스 -
"짠-!"
"반갑습니다아-!!!"
학생회관 카페 의자에 엉덩이를 내려놓기가 무섭게 울린 전화였다. 커피 한 잔 시켜볼까 했는데, 시켰으면 돈이 아까웠겠다 싶다.
여보세요, 내가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다니엘은 누나 어데고? 하고 물어왔다. 나는 학생회관 카페. 라고 대답했다.
다니엘은 저녁 집에서 무요? 하고 물었고, 나는 아니. 별로 생각이 없네. 하고 답했다.
"우째 저녁에 생각이 없을 수가 있노.
나와라, 누나. 내 삼겹살 먹으러 간다."
삼겹살.... 삼겹살...... 진짜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 생각 없었는데. 저녁 안 먹어도 아무 상관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니엘의 입에서 나온 '삼겹살'이라는 세 글자라 이렇게 내 가슴을 푹, 하고 찌를 줄은 상상도 못했다.
누가 혼자 있고 싶대? 혼자 있는 시간 필요하다던 사람 누구야? 나야? 아닌데?
나는 넌 어딘데? 하고 물었고, 다니엘은 내 울 누님 델러 가고 있다요- 하곤 전화를 끊었다.
전화가 끊기고 한 5분 지났을까, 누나! 하는 목소리에 돌아보니 보이는 건 익숙한 얼굴 하나, 낯선 얼굴 하나였다.
익숙한 얼굴은 다니엘이 맞는데, 낯선 얼굴은... 영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나도 모르게 누구...? 하는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더니, 묻기도 전에 자기소개를 시작하는 낯선 얼굴.
"아, 안녕하세요. 체육교육과 16학번 김재환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하며 좀 낯을 가렸더니, 다니엘이 야가 김재환이에요. 내 짱친이다. 하면서 다시 한 번 더 소개해줬다. 나는 아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김재환이라는 이름을 몇 번 들어보았기 때문이다. 다니엘이 종종 이야기하곤 했다. 김재환이, 재환이가, 이런 말을 했던 적이 있다.
어쨌든 그렇게 셋이서, 그러니까 다니엘과 김재환 사이에 내가 낀 채로 우리는 삼겹살을 먹으러 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기분 좋게 삼인분이요! 를 외치는 다니엘에게 근데 오늘 무슨 날이야? 왠 삼겹살이야? 하고 물었다.
"아. 오늘 축구해가. 배 억시로 고파서 고기 묵자했는데 누나 생각이 딱 났다."
"축구?"
"응. 운동장서 맨날 축구하는 놈들 있는데, 재환이 야는 축구부고, 내는 걍 낄 때 있고, 안 낄 때 있고. 뭐."
"아아."
아.. 그래서 오늘 뭔가 이렇게 운동복을 입고 있었구나, 싶었다. 나는 조금 멍청한 아아, 소리를 내며 이해한 티를 냈다.
재환이라는 친구는 싹싹하게 휴지를 깔고, 그 위에 수저를 놓았다. 물론 컵에 물을 따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체교라 그런가, 선배를 대해본 티가 많이 났다.
다니엘은 집게와 가위를 자유자재로 놀리며 고기를 구웠다. 나는 멍하니 구워지는 고기를 바라보다가, 짠 하자는 김재환의 말에 잔을 들었다.
"아 시원타-"
"그러게- 진짜 시원하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소맥이 그 비율도, 양도 딱 좋아서 한 번에 한 잔을 모조리 비워냈다. 다니엘은 시원함을 온몸으로 표현했고, 그러면서도 고기에 신경을 끄지 않았다.
어느 정도 익은 고기는 곱게 잘려, 먹기 좋게 내 앞에 자리했다. 나는 젓가락을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하는 말에 다니엘이 마이 무요. 하고 웃었다.
"와, 진짜 맛있다.
너 고기 잘 굽는다, 다니엘."
"내 또 별명이 강고기 아입니까. 부산서 강고기였다, 강고기."
"나 고기 잘 굽는 남자가 이상형이었는데."
별 생각 없이 한 내 말에 갑자기 정적이 흘렀다. 조용해진 분위기에 고개를 들어 다니엘과 김재환의 눈치를 보니, 뭔가 내가 말실수를 했나 싶다.
나는 아, 그냥 그렇다구. 하면서 내가 뱉은 말을 무마하려 했으나, 다니엘은 근데 왜 과거형이고. 하고 물었다. 나는 고기 한 조각을 더 입에 넣으며 말했다.
"별로. 고기 잘 굽는 거 말고는 매력이 하나도 없었어."
물론 이상형'이었던', 지나간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다니엘은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럼 고기도 잘 구우면서 매력도 많으면 되겠네요. 했다.
나는 그럼 좋지. 하고 술잔에 술을 더 따랐다. 아, 누나 천천히 마셔라. 지난 번처럼 또 쓰러질라고. 다니엘의 핀잔이 이어졌다.
"야, 다니엘 너 이제 막 누나한테 핀잔 주고 그러냐?"
"...핀잔은 아이고."
"그러면."
"내 다 걱정이 돼가 하는 말이제. 누나 과음하지 말라고."
재환이도 있고, 이쯤 해두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다니엘은 마셔라, 마셔라. 누나 왕창 마셔라. 아주 내가 고주망태 델꼬 구름이네 갈란다. 하고 제 속에 술을 부었다.
재환이는 우리가 같은 쉐어하우스에 살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느꼈다.
술도 어느 정도 들어갔겠다, 나는 다니엘에게 궁금했던 걸 조금씩 흘리기 시작했다.
"야 다니엘. 너는 왜 호경 왔어?"
"호경? 울 아부지 땜시로."
"아버지가 왜?"
아부지가 호텔 하니까, 뭐 내도 그거 아니면 딱히 하고 싶은 일도 없고. 어렸을 때부터 엄니, 아부지한테는 내가 아부지 호텔 물려받는 거가 당연했거든요.
핵교 다닐 때 춤추러 다닌다고 아부지한테 억시로 맞고, 결국에 수능 쳐서 호경 온 기다. 졸업하고 아부지한테 일 배우면 그걸로 내 인생 빼박이다, 빼박.
다니엘의 말이 이어졌다. 부잣집 아들이었구만.. 역시 어딘가 여유롭고 늘 급하고 서두르는 게 없더라니. 사람이 자라온 환경이란 게 새삼 중요하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다.
그래도, 좋겠네. 안정적이고... 고민할 일은 없잖아. 안 그래? 하고 내가 물었다.
"고민할 일은 없죠. 생각 없이 살게 될까봐 문제지."
"무슨 소리야?"
"니 남들보다 좀 더 많이 갖고 태어났다캐서 막 살고, 생각 없이 살고, 그카지 말라고 울 아부지 맨날 말했거든요.
귀에 딱지 앉도록 들었는데, 대학 와보니까 그 말 쫌 맞는 거 같은디."
인생 이야기가 길어지면서 어느덧 고기를 굽는 건 재환의 몫이었다. 재환이는 다니엘보단 고기를 못 구웠지만(....), 그래도 술과 함께 먹으니까 그런대로 괜찮았다.
재환이도 열심히 굽고는 있는데, 마음처럼 잘 안 되는 걸 거야. 암, 그렇고 말고.
다니엘은 고기를 잘 못 굽는 재환이가 엄청나게 신경 쓰였지만, 일단 말은 해야 하니까 말한다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들은 호텔 사장 아들내미다, 뭐다 하면서 치켜세우는데, 그 뭐 내돈이가. 엄니, 아부지 돈이지.
내라고 망나니처럼 사는데 아부지가 호텔 주는 거 아인데, 아들은 막 살아도 아부지 호텔 들가면 되지 않냐는데, 뭐 장난하나..."
"애들이 그랬어? 과 애들이?"
"응. 그래서 과 애들 좀... 부담시럽다. 내 별로 안 좋아한다.
뭐 내는 다 갖고 태어나서 만날 놀고 먹어도 되는 것처럼 말하고. 내 물론 노는 거 좋아하는 건 맞는데. 그래도 생각 없이 노는 거 아이거든."
이제야 다니엘이 그때 했던, '좋아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에요. 하나도 상관 없다 아이가.' 하는 말이 조금 이해가 갔다.
만약 다니엘의 말처럼, 과 애들 다수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다니엘을 그렇게, 그러니까 막 살아도 갖고 태어난 게 많아서 괜찮은 놈으로 생각하고, 대했더라면,
다니엘의 입장에서는 과 애들과 어울리는 게 하나도 좋지 않았을 것 같기 때문이다.
"누나는. 호경 왜 왔어요?"
다니엘의 물음에 어디부터 말해야 할지 좀 막막해졌다. 글쎄. 지금 와서야 하는 이야기지만 사실 많이 후회한다.
집안 사정 생각 안 하고 4년제 서울로 대학 온 것도 후회되고, 굳이 하겠다고 선택해놓고 이게 맞는지, 아닌지, 결정도 못하고 있는 것도 후회되고.
친구들은, 그러니까 곧 졸업을 앞둔 동기들은 다 제 살 길 찾아서 떠나고, 취업하고, 그것도 아니라면 준비라도 하고 있는데 나는 뭔지... 내 자신이 한심했다.
나는 어렵게 말문을 꺼냈다. 나는.... 좀 후회해. 호경 온 거.
"지금은 우리 집이 그렇게 넉넉하지가 않은데, 그래도 고등학교 때는 아빠 돈벌이가 좀 괜찮았거든.
그땐 그냥 서울로 대학 가고 싶었고, 점수 맞추다 보니까 여기도 괜찮겠다 싶어서 왔는데.
생각했던 거랑 많이 다르기도 하고.. 휴학하고 일해보니까 이게 맞나 싶은 생각도 들고.. 이래저래 고민이 많아. 그래서 좀 후회돼."
내 말을 끝으로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고기를 열심히 굽던 재환이는 조금 안쓰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니 뭐... 그렇게 측은하게 여길 것까진 없지만...
나는 괜히 너무 숙연한 분위기를 만든 것 같아서 좀 민망했다. 그래서 괜히 너넨 군대 언제 가냐? 하고 물었다. 둘의 입에서는 동시에 곡소리가 나왔다.
"이번 학기 끝나면 같이 가요, 저희."
"날짜 나왔어?"
"요새는 군대도 마음대로 못 가요. 기다리고 있어요, 그래서."
"육군 아니야?"
"네. 근데 진짜 가기 힘들어요. 세상이 힘들어서 그런지, 군대나 가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나 봐요."
"맞아. 세상이 힘들어서 그래."
또 다시 짠. 술잔이 부딪혔다. 이 둘을 앞에다 앉혀놓고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뭐 썩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얼마간 더 술잔을 기울이다가, 다니엘이 지갑을 열면서 대강 마무리를 하고 나왔다. 이미 배는 두둑히 불러 있었다.
나는 다니엘에게 고맙다고, 잘 먹었다고 말했다. 다니엘은 쑥쓰럽고로. 하면서 눈썹을 긁적였다.
"안녕히 가세요, 누나. 다음에 또 봬요!"
재환이는 밝은 목소리로 인사하곤 사라졌다. 기숙사에서 살아서 톹금시간 전에 학교로 다시 들어가봐야 된다고 했다.
나는 다니엘과 고기집에서 시작해서 구름이네로 가는 길을 함께 걸었다. 몸에 잔뜩 밴 고기냄새가 바람을 타고 주변에 진동했다.
"으, 고기냄시."
"그니까. 고기냄새 엄청 난다."
"잘 묵었으요?"
"으응. 간만에 엄청 배부르게 먹었어."
"뿌듯하고로."
다니엘은 웃었다. 나는 처음으로 다니엘이 듬직하다고 생각했다.
딱 제 나이 만큼 놀기를 좋아해서 그렇지, 그렇게 불량(?)하다거나 불성실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정말 그 나이의 남자아이들, 그 만큼이 즐기고, 놀고, 누리고 싶어하는 그 정도일 뿐 그에 대한 악의는 없다고. 그저 그런 믿음이 좀 생겼다.
"내 고기 잘 굽지요."
"응. 잘 굽더라. 재환이는 열심히 굽긴 했는데 다 태웠어."
"글고 억시로 매력이 철철 넘친다 아이가."
"누가? 네가?"
"응."
".....그래."
뭐꼬. 인정 안 해요? 묻는데 무어라 답하기가 곤란했다. 여기서 맞다고 해도 이상하잖아. 인마. 퉁퉁거리니 아따, 철벽이다, 또. 하며 혀를 찬다.
"내 성격이 느긋해가, 원래 서두르는 법이 없거든요."
"응."
"그카는데 꾸준하고 끈질긴 게 좀 있다."
"........."
"내 그래서 꾸준하고 끈질기게 좀 해볼라고."
"뭐를?"
뭐를? 하고 묻는 내 말에 다니엘은 아무런 말이 없다.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열고 한 말은 겨우, 그게.... 좀 그런 게 있다. 였다. 말을 마친 다니엘은 실없이 웃었다.
나는 뭐냐. 싱겁게. 하며 앞장서서 걸었다.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으면 밀려드는 술기운을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같이 가요오- 하며 성큼성큼 걸어오는 발의 주인에게 잡히지 않으려 미꾸라지 빠져나가듯 부지런히 다리를 움직였다. 비록 얼마 못가 잡혀버렸지만.
"도망가지 마요."
술김이어서 그랬을까. 웃음기 없는 눈으로 날 보며 했던 그 말이 좀, 마음에 남아버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냥... 자려고 누우니까 그 눈빛이 천장에 동동, 떠다녔을 뿐이다.
...그게 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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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편 암호닉(강과장 최종 암호닉 리스트에 계신 분들에 한함. 005편 업로드 전 댓글 달아주신 분들에 한함.) [구원자] [녤과장] [녤부] [블라썸] [지블] [엘제이] [@불가사리] [다녤잉] [레몬사탕이지] [달달한복숭아] [121027] [숮어] [강달리엣] [일개사원] [짠따라] [크뽀] [뇽뇽] [에비츄] [분홍색솜사탕] [해령] [샤넬] [과자] [포카리] [딸기시럽] [다니스] [1122] [리베르떼] [옹성우] [사용불가] [입학하자] [마요] [꼬꼬망] [마카롱] [무네큥] [리본] [휘린] [칸타타] [맥주톡톡] [슬] [짚고긴한커피] [피치수플레] [둡돌고래] [몽쟈] [11023] [녜리] [사모녤드] [쀼쀼] 안녕하세요, Y사원입니다! 내일 출근이 10시인 관계로 오늘은 좀 늦게 잘 수 있어서 글을 올리고 가요. 그리고 이번 주말에는 올 수가 없어서 겸사겸사 해가지구 글 올립니당...ㅠㅠ 흑흑 오늘(12시 넘었으니까ㅎㅎ) 수능 보시는 분들 끝나고 오시면 이 글 보시면서 힐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다들 최선을 다한 만큼 좋은 결과가 있기를 제가 응원하고 있을게요~! 특히 우리 애정하는 독자님들 중 고3이 많았는데ㅠㅠ 한 분 한 분 모두모두 고생 많으셨다는 말씀 꼭 드리고 싶습니다. 여튼 구름이네 잘 읽으시구 오늘 밤도 꿀잠 주무세요>.< P.S. 여주는 바버야.. 다니엘 마음도 몰라주는 바버... 멍청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