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석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가방을 손에 들고서 빠르게 루한의 집을 벗어났다. 그의 집 근처, 루한과 민석이 처음 만났던 편의점이 보였다. 그 곳을 지나 동네 놀이터로
발걸음을 향했다. 해가 진지 오래인 어둑어둑한 밤하늘은 어느덧 남색빛으로 물들었고, 동시에 차가운 입김이 나오기 시작했다. 오늘부터 한파라는 소식에 사람들은 두꺼운
옷을 입고 재빨리 집에 들어가기에 바빴지만 그는 쉽게 본가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민석의 머리속에 그 사람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한숨을 반복적으로
내쉬며 자괴감에 빠졌다.
마지막인데, 집 앞에서 기다릴걸 그랬나. 정말 마지막인데, 얼굴을 보고 나오는게 좋았던 선택이 아닐까. 그는 애초부터 세워둔 자신의 계획에서 왜인지 모르게 조금씩 벗어나
고 있는 제 머리를 강하게 쓸어내렸다. 의문이 든다. 뭐가 아쉬워서 나는 그 사람을 자꾸 생각하는거지. 왜, 뭐가 아쉬워서 나는 하루종일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걸까.
고통속에서 되뇌여봤다. 그는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일생에 단 한 번도 겪어본적 없는 특별한 사람. 거창한 이유는 없다. 단지 그 뿐이였다. 자신에게 친절을 가르쳐준 사람.
동정심보다는 솔직한 배려를 보여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사람. 민석은 언제까지나 외로움에 하루하루를 살던 아이였기 때문에, 루한은 기적이나 다름없는 그 자체였다.
언젠가 책에서 본 기억이 있다. 기적은 자신이 잡는게 아니라 찾아오는 것이라고. 그래서 우연히 시기가 맞아 그 기적을 제 손에 넣기만 하면 그것은 곧 운명이 된다고. 민석이
거기까지 생각하다 어이없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그걸 나보고 잡으라고..?"
나 같은 바보가 어떻게 그래. 내가 겪어봤지만, 나와 엮이는 사람들은 전부 벼랑 끝으로 내몰아지는데. 그리고 그 사람은 내가 함부로 잡을 사람이 아니야. 내가 언제부터 이렇
게 감성적인 사람이였다고 크게 휘둘리는걸까. 그러다 또 문득 다른 책의 한구절이 스쳐 지나갔다. 기적은, 단지 기적에 그쳐야 진정한 기적이라고.
민석이 어찌 해야할지 모르는 자신의 마음에 경우의 수를 여러개 두었다. 내려진 답들은 전부 내일에 대한 두려움 뿐이였지만.
비밀의 화원 (副題 : 내 사랑, 나의 순수) 04
W. Shelter
"야, 김루한. 정신 차려. 너네 집 다 왔다."
"아..속 쓰리다..."
"술을 그렇게 쳐먹으니까 속이 쓰리지. 그 놈의 경찰서 평생 못 가게 발에 족쇄를 채우던가 해야지 원. 아, 야! 너 똑바로 걸어!"
"걷기싫어. 업어줘라.."
"이 병신이.."
루한은 술에 잔뜩 취해 그의 친구인 찬열에게 몸을 의지해 거의 안기다시피 하여 겨우 걷고 있었다. 찬열은 올라오는 술냄새를 막을수가 없어 억지로 숨을 참으며 그를 부축까
지 하고 있었다. 대낮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그가 이렇게 된 과정은 간단했다.
루한이 경찰에서 나올때, 그는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인 찬열에게 간만에 연락을 했다. 술이 먹고 싶다는 루한의 말에 흔쾌히 같이 마셔줬더니 평소에는 많이 마시지도 않던게
왠일로 이렇게 제 몸도 못가눌 정도로 왕창 마셔댄 덕분에 찬열이 직접 집까지 데려다주는 사태가 생긴 것이다. 루한은 옆에 누가 있는지 분간도 못할만큼 정신을 못차리다가,
서서히 조금씩 의식이 찾아오는듯 말을 중얼거렸다. 루한의 오피스텔 앞에 다다르고 입구까지 들어섰고 찬열은 루한을 놔두고가려 은근슬쩍 몸을 내뺐다.
"...어어.."
하지만 몸에 힘이 없어 바로 땅으로 철퍼덕, 하고 쓰러지는 루한 때문에 찬열은 오만상을 쓰며 루한을 다시 일으켰다. 밤 중에 고성방가는 하기 싫지만, 지금 이 순간 루한이
무척이나 미웠다. 소리 지르고 싶다. 욕하고 싶다!
"일어나."
"어..."
말을 꾹꾹 씹으며 루한을 다시 부축했다. 도대체, 김변호사는 대체 이 새끼한테 무슨 말을 지껄이는거야. 모르는건 아니다. 분명히 그 얘기나 했겠지, 김루한은 한평생에 약한
게 그거니까. 찬열이 땀에 젖은 얼굴로 루한을 훑어보다 이내 고개를 젓고는 그를 억지로 들고 엘레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루한이 조금 희미한 눈으로 깜빡이
며 천장을 둘러보자 찬열이 자신을 세워 안고 있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루한이 손을 뻗어 휘휘 저었다. 찬열은 정면만 바라보다 그런 루한의 행동에 욕으로 화답했다.
"깼냐? 씨발. 너는 좀 취하려면 곱게 취하세요."
"안취했어..나 이제 다 깼어.."
"어후, 역시 술에는 엎어지는게 최고네. 그치?"
"나 엎어졌냐...."
"기억 안나지? 그래. 그럼 또 엎어뜨려줄게."
찬열이 혀로 윗입술을 훑으며 금방이라도 루한을 떨어뜨릴것같은 행동을 취했다. 그러자 루한이 놀란 표정을 짓고는 어물쩡거리며 몸을 세웠다. 아, 술이 깨니까 머리가 아파
온다. 근데 나를 엎어뜨렸다고.. 루한이 뭐라 입을 열려 하자 찬열이 말로 가로막았다.
"김루한."
"......."
"너 내가 경고하는데, 너는 거기 갔다오고 나서는 절대로 나 부르지 마."
"...왜.."
"왜냐고? 하, 시방 내 얼굴 안뵈냐 지금?"
"아....."
"말을 말지."
굳게 닫혀있던 엘레베이터 문이 곧 열리고, 찬열은 루한의 등을 때리듯이 밀어냈다.
"스텝 꼬이지 말고. 그만 들어가서 해장이나 해라. 24시간 해장국 배달집 번호 너네집에 붙어있더라."
"야..들어왔다 가. 너도 같이 해장해."
"나 집에 들어가봐야 돼."
"왜..."
"여자친구가 기다려!!!!"
"아오, 왜 소리를 질러.."
찬열이 못참겠다는듯 소리를 빽 지르자 루한이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걸었다. 찬열을 등지고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고, 찬열이 욕지거리를 하며 '꼭
해장해!' 하고 소리쳤다. 루한은 대답없이 자신의 호실로 향했다.
이윽고 호실에 다다르고, 루한이 비밀번호를 치려 도어락을 오픈하는데 그 바로 아래에 종이로 된 봉투가 깔끔히 세워져 있는게 보였다. 루한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
했다.
"이게 뭐야.."
머리도 어지러운 찰나에 루한은 그 종이가방 앞에 몸을 쭈그려 앉았다. 아, 씨. 올라올것 같아.
그리고 눈만 깜빡이다 손으로 코를 한 번 훑고는 종이가방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게 뭔지 알것도 같고, 모를것도 같고..
"....어.."
이거..
".........."
이거, 이거. 이거..그 애가 놔두고 간거다.
루한이 인상을 쓰며 미간을 짚었다. 걔가 어떻게 우리집을 알고. 아니..아니지. 우리집에 와서 밥까지 먹고 갔었지. 밥이 아니라 뭐였더라. 무튼 내가 뭘 먹이고..씻기기까지
하고..그래서 내가 이 옷을 줬고, 입고 그대로 집에 갔었지, 참. 깜빡 잊고있었다. 손을 뻗어 주섬주섬 옷을 꺼내어 펼쳐보니 자신의 집에서는 쓰지 않는 상쾌한 방향제 향이
코 앞에서 퍼졌다. 얼마나 입었다고 깨끗하게 세탁까지 했네. 아....씨. 이거 뭐 어떻게 된거야.
"이런.."
급히 술이 깬 루한이 집의 비밀번호를 치고 안으로 들어가 종이가방을 내려두었다. 그리고 머리를 꾹꾹 누르며 다시 바깥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요즘 학생들이 대충 몇시에
끝나더라..지금쯤이면 집에 갔겠지. 그게 당연한거겠지? 아, 대체 언제 온거야. 하필 오늘같은 날에..!
루한이 쓰린 속을 부여잡고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집 밖을 나서고 칼바람을 가로지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멀리 찬열의 뒷모습이 보였다. 택시를 잡으려는지 택시정류장
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 쪽은 택시가 오는쪽, 나는 그럼 학교방향으로 가봐야겠다.
찬열은 곧장 택시를 잡고 차에 올라탔다. 한 손엔 핸드폰을 들고서 그의 애인과 전화를 하던 중이였다.
"나 지금 루한이 데려다주고 가는 길이야. 응, 나 금방......"
찬열이 주머니를 뒤적거림과 동시에 문득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다, 왜인지 모르게 빠른 속도로 어디론가 뛰어가는 루한을 발견했다. 어? 뭐야. 저거 김루한 아니야? 해장국
이나 쳐먹으라니까 또 어딜 저렇게 가?
"어? 아, 아니. 아냐. 바로 갈게."
찬열이 택시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한후, 루한의 뒷모습을 쫓았다. 뭐야, 저 새끼. 술이 덜깼나, 저거.
민석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얼굴을 맞은 이후로 손을 대지 않았건만, 찬 바람을 맞은 바람에 더 아파오는것 같았다. 지금쯤이면 엄마도 잠 들었겠지. 민석이 엉덩이를 털고 일
어나 가방을 짊어졌다. 입김을 내쉬며 시간을 확인하려 손목을 들어올리는 순간, 저 멀리 뒤에서 누군가 큰 소리를 질렀다.
"야!"
민석은 저 자신을 부르는 소리라고는 생각 못한채 그저 앞만 보고 걸었다. 어디서 많이 들은 목소리인데, 이 쯤 먼거리에서 들어본적도 있는거 같지만 기분탓이겠지. 그는 느
린 걸음으로 그저 걷기만 했다. 걷고, 걷고. 그런데 누군가 자신의 뒤로 거칠게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민석이 흠칫 놀라며 속도를 바꿔 빠르게 걸었다. 절대로 뒤는 돌아보
지 못했다.
혹시나, 혹시나. 아니겠지만 혹시나 해서.
"김민석!!"
쉬지않고 뛴 루한이 민석의 이름 석자를 크게 외쳤다. 민석이 그제서야 걸음을 멈추고, 놀란 눈을 한채 자리에서 굳었다.
"야, 너! 왜 내가 부르는데 쌩까. 혼날래?"
이윽고 루한이 놀라 멈춰선 민석의 앞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민석의 뒤에서 그를 쫓았지만 지금은 그 앞에 있다. 민석이 눈을 어디에 둘지 몰라 애꿎은 루한의 가슴께만 멍하
니 쳐다보고 있었다. 저승사자라도 본 마냥 정신이 반 쯤 나간것만 같았다, 루한의 눈에는.
민석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설마 설마 했는데 진짜로 찾아왔다. 이건 어떤 종류의 기적인거지. 나는 전자를 따라야 해, 후자를 따라야 해.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는다.
심장이 크게 뛰어서 그 소리가 바깥으로 다 새나갈것 같다.
"벌써 간 줄 알았잖아."
"........"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해야지. 아니면 쪽지라도 써놓고 가던가."
"........"
"누가 애 아니랄까봐. 누가 센스없게 우유를 두고 가냐. 내가 너처럼 앤줄 알아?"
"........"
"말 없는건 여전하네."
루한이 숨을 몰아쉬다가 허리를 굽혔다. 아, 뛰었더니 더워. 그런 루한의 행동을 아무 감정없이 쳐다보는 민석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넌 내가 몰랐으면 했어?"
"........"
"내가, 이렇게 너 안 찾아왔으면 했어? 그래서 그렇게 말없이 할 일만 하고 간거야?"
"........"
"아니면. 진짜 이렇게 말 안할 작정으로 이래?"
달래는듯한 말투로, 루한이 민석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아올렸다. 아, 얼굴 차갑잖아.
"너 언제부터 밖에 있었어."
"....얼마 안됐어요."
"근데 얼굴이 이렇게 차가워? 시베리아에 있다가 왔어? 이 지경이 되도록 집에 안들어가고 뭐했어."
"그래서 지금 들어가려고 했는데요.."
말이 없는것 뿐이지, 했다 하면 하여간 단호한 성격이라니까. 루한이 그의 대답에 픽, 하고 웃으며 그의 작은 얼굴을 매만졌다. 그럴수록 민석의 심장은 더 거세게 뛰었다. 훅
끼치는 술냄새에 민석이 고개를 숙이려 했고, 루한은 가만히 그런 민석을 보다가 쓰게 웃었다.
"내가 생각해도 오늘 좀..그러네."
"무슨.."
"오랜만에 진상 좀 부렸더니. 나한테, 술냄새 많이 나?"
차마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한다. 혹시라도 기분이 상할까 싶어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하겠다. 민석은 고개를 저으며 머릿속으로 되도 않는 생각을 끼워맞추고 이 상황을 이해
하려 애썼다. 아무래도, 집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달려온것 같았다.
내가 여기 있는지를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제 얼굴을 잡고 있는 그 따뜻한 손에 위안을 얻기 충분했다. 민석은 조금만 더 이렇게 있고 싶었다.
"이런 상태에서 또 보게 될줄은 꿈에도 몰랐다."
"...저도 형이 저 찾아오실줄은 몰랐어요."
"찾아와주세요, 하고 아직도 안가고 있던거 아니였어?"
"......"
"에- 진짜인가봐. 얼굴 빨개졌다."
"추워서 그래요..!"
민석이 아니라며 고집을 부렸다. 루한이 하하, 웃으며 알겠다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리고 말없이 손목을 잡고서 놀이터 한 바퀴를 빙빙 돌기 시작했다. 민석이 뒤뚱뒤뚱
루한의 뒤만 힘없이 따르자 그가 민석의 어깨에 친근히 팔을 올렸다. 민석은 루한이 눈치채지 못하게 그의 팔과 땅을 번갈아보았다. 다른 애들이 하는거랑은...많이 다르구나.
"너 밥은 먹었어?"
"아직.."
"그래. 먹을 시간이 있었겠냐만.. 네가 밥을 안먹고 다녀서 이렇게 말랐나보네."
"원래 살이 잘 안쪄요.."
"부럽다."
루한 역시 마른 체질이였다. 그러나 민석은, 보기 안쓰러울정도로 말라있었다. 목뼈는 너무도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고, 잡히는 손목이나 얼굴은 너무나 얇아 한 손에 다 잡
힐 정도였다. 남자가 이렇게 비실비실해서 어디에 쓰나.
아, 그러고보니.
"얼굴 좀 다시 보자."
"아, 형.."
"너 내가 그때 뭐라고 했어? 다시 보면 흉터 하나 쯤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했지."
"...죄송해요. 그때, 주신 약은 발랐는데. 아직 딱지 앉아서.."
"밴드는. 붙였어?"
"붙였다가..아까 뗐어요."
"보자."
루한이 민석의 얼굴을 잡고 여기저기를 살폈다. 피부가 엄청 좋은데. 고운 피부에 흉터나 들어앉고.
루한은, 알 수 없는 서글픔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난. 이런 흉터가 너무 싫어. 정말 너무나.
그들은 한동안 말 없이 놀이터만 뱅뱅 돌았다. 각자 다른 생각에 빠져 생각을 정리했다.
나는 너에게 궁금한건 많은데. 지난번, 자신에게 슬픈 눈을 하고서 아무것도 묻지 말아달라던 그때의 민석이 떠올라 차마 아무거나 질문 할 수가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거절
당하는건 루한도 두려웠다.
민석은 자신이 생각하는 한 사람과 많이 닮아있었다. 평소에는 말이 없고, 위축되어있고, 밝지 못하고. 지금 그의 옆에는 없지만, 한때는 그가 무척이나 지키고 싶어했던 한 사
람을 떠올리면 그런 조용한 성격의 민석이 나란히 교차되어 둥둥 떠올랐다. 그의 궁금함이 두 배로 커졌다.
"민석아."
"네."
"그냥 궁금해서 묻는건데.. 넌, 형제 같은게 있어?"
"아니요. 없어요."
"아..귀한 외동아들인가보네."
"그냥 외아들이에요."
"왜. 귀하진 않은거 같아? 부모님 눈에는 다 귀한거야, 그래도."
"...그럴까요."
유난히 힘들었던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던 민석이, '부모님 눈에는 다 귀한거야' 라고 읊조리는 루한의 말이 다르게 와닿았다. 형이 그렇게 말하면, 그렇게 들려요. 굳이 내 이
야기로 받아들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루한은 민석의 대답을 듣고, 한 고비는 넘겼다고 생각했다. 난 왠지 모르게 너에 대해 알고 싶다. 처음 만났던 그 날부터 예사롭지 않았던 너에 대해 아주 사소한거라도 조금씩
알아가고 싶었다. 그 날 그렇게 나가버린 바람에 더는 볼 수 없을거라 생각했지만 나를 여기까지 뛰어오게 한 이상, 조금씩 알아가야 했다.
분명 네가 나에게 너에 대한 것을 알려주고 싶다고 하지 않았을때, 더 이상 알면 내가 괴로울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나는 동생이 하나 있어."
"동생이요..?"
"응. 남동생인데.. 생각해보니까 너도 내 동생이랑 비슷한 또래더라."
너는, 내 하나뿐인 동생과 어딘가 모르게 닮아있어서.
"......."
"내 동생도 내 화장실만 쓰면 거울에 장난치는거 좋아했는데. 처음보는 사람 집에서 그러기 쉽지 않은데, 너도 그렇더라. 내 동생처럼."
동생이 있었나보다. 내가 잊고 있던 그 낙서 아닌 낙서를 볼 줄은 몰랐다. 민석은 뜻하지 않게 루한의 가족과 잊고 있던 자신의 행동에 대해 듣게 되자, 눈을 올려 그를 어렵게
쳐다보았다.
"꼭 어디에 있냐고 물어보는것 같다."
"아, 아니에요."
"나랑 같이 안살아. 저기 먼 곳에 있어."
"......"
"너랑 나이가 비슷할까 싶은데. 너 몇살이냐? 고등학생이라는건 알겠는데 다른건 잘 몰라."
"저는..이제 열여덟살이요."
루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똑같네.' 라며 중얼거렸다. 그저 동생 이야기를 하는데, 알 수 없는 뜨끈함이 루한의 얼굴에 비춰졌다. 똑같네. 같아.
민석이 눈을 깜빡이다, 용기를 내어 물었다. 그럼 나도 형 나이 정도는 물어봐도 되는건가..?
"형은요?"
"맞춰봐."
"저는 알려드렸는데.."
"너는 내가 물어보면 당연히 대답해야 하는게 맞는거고."
"......."
민석이 고개를 푹 떨구려 하자, 루한이 그것을 막았다. 씨익 웃고 자신의 눈을 굴렸다. 어, 나는 말이지.
"네 나이에서 딱 여덟살을 더해봐."
"........"
...아..그렇게나 많았단 말이야?
언젠가 아저씨라고 불렀다고 혼쭐이 났던게 생각났다. 민석이 눈을 도르르 굴리며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무척이나 어려보여서 기껏해야 두, 세살 정도 차이 나는 줄
알았는데. 완전히 헛짚었다. 민석이 미간을 찡그리며 머릿속에서 호칭에 대한 정리를 하기 시작하자 루한이 얼굴을 잡고 있던 손을 떼고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내가 나이가 많은건 아는데. 그렇다고 아저씨라고 할 건 아니지?"
들켰다. 민석이 어색하게 웃으며 아니라며 손사레를 쳤다. 아, 들켰다.
"아저씨라고 하기만 해."
"안 그래요.."
"나 처럼 체력 좋은 아저씨가 어디있다고."
"저 아무말도 안했어요."
"놀랐잖아. 놀랐으면서."
"저도 언젠간 그 나이가 될텐데요, 뭘.."
"너 맘에 든다."
루한이 호탕하게 웃었다. 술냄새가 민석의 코에 너무 오랫동안 머물렀기 때문일까. 민석은 이제 알콜의 눅눅한 냄새도 인지하지 못한채 자신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왜, 같이
있으면 이렇게 편한거지. 그럴수가 있는건가. 아마, 아마도 가능한가보다. 내가 이 사람과 함께 웃고 있는걸 보면.
"어쨌든. 다음부터는 그렇게 도둑고양이처럼 오지 마."
"이제는..볼 일도 없는걸요."
민석이 중얼거렸다. 그때, 루한의 웃던 얼굴이 조금씩 굳어져갔다. 그럴거라 생각은 안해봤는데. 앞으로는 볼 일이 없을거라는 민석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좋지 못했다.
"너는 그러길 바래?"
루한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차갑게 느껴졌다. 그의 손은 바지 주머니에 넣고, 시선은 민석의 작은 머리통에 고정시켜둔 채였다.
"그러길 바래? 우리가 앞으로 안 보길 바라는거야?"
"........"
"너 때문에 화장실 낙서는 아직도 얼룩져있어."
"...죄송해요. 그건 제가 지울게요."
"민석아."
민석을 부르는 나지막한 목소리는 나지막하고, 또 조용했다. 우리가 다시 만나야 할 이유라던지, 목적은 처음부터 있지 않았다. 내가 그날 학교에서 도망쳐나오지 않았다면
평생을 이 사람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을거다. 기적은, 단지 기적에 그쳐야 진정한 기적인데. 나는 그게 맞다고 생각하는데.
"애써 지우지 마."
"........"
"너랑 나. 매일 봐."
"........"
"그거 지워지면, 넌 또 그려놓고."
"........"
"우리 매일 보자."
"형."
"그래. 넌 지금처럼, 내일도, 내일 모레도 나를 형이라고 불러."
"...형."
"너는 내 동생 하고, 나는 네 형 해주면 되잖아."
".....형."
"지금처럼 우리는 서로 없는걸 채워주는거야. 싫어?"
".....아니요."
"그럼 됐어."
"형."
"앞으로 자주 보자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나는."
그런데, 그 기적이 자신을 잡아달라고 한다.
* * *
"변백현. 아들이 불러."
"..이 밤중에 왜."
"걔한테 뭐 밤낮이 있었냐? 몰라. 너 찾으니까 가 봐."
"김종인 너는."
"난 오지 말라던데?"
"..씹, 무슨 꿍꿍이야."
백현은 한 시간째 검도를 연마하던 중, 누군가의 호출에 인상을 찌푸리며 빠르게 검을 정리하고 도복을 벗기 시작했다. 거울속에 비치는 모습이 상당히 창백하다. 안색이 맘
에 안드네, 잔소리 좀 듣겠다. 또.
"왜 그러는지는 모르고?"
"몰라."
"너 혹시 사고친건 아니지."
"개소리야. 그런거 아니니까 닥치고 좀 가라."
"이유 없이 부를 놈이 아닌데."
"이유가 있으니까 가겠지. 내가 알면 안되는 이유니까 부른거겠지, 병신아."
"입 닥치시고."
백현이 종인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날리며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올리고 검도실을 나섰다.
검도실을 나선 그가, '다도실'이 적혀진 문 앞에 멈춰섰다. 느낌상 이 곳에 있을것 같은데. 백현이 주저없이 노크를 하고, 별 반응이 없자 그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검은 머
리를 한 차가운 얼굴을 가진 사내가 가만히 방석이 깔린 바닥에 앉아 다도를 하고 있었다. 예상이 조금도 어긋나지 않아 백현은 그런 모습에 웃음도 나오지 않는지 무표정으로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왔어?"
"무슨 일이세요."
"꼭 무슨 일이 있어야 부르는건 아니잖아."
"그건 그렇죠."
얼핏이 존댓말을 하는 백현은, 여전히 웃지 않고 있었다. 남자는 눈을 지긋이 감으며 찻잔을 들어올렸다. '향이 너무 좋아.' 마음에 든다는듯이 몇 번 중얼거리다, 눈을 떴다.
삼백안의 모양새를 띄고 있는 매서운 시선은 백현을 끝으로 멈췄다. 고개를 살짝 비틀어 그의 젖은 머리칼을 보았다.
"운동을 열심히 했나봐."
"취미일 뿐입니다."
"나도 네 취미를 좋아하는데, 언제 한 번 나랑 대결이라도 할까?"
"영광이죠."
"자신 있어 보이네."
"제 몸은 제가 지킬줄 알아야 하니까요."
"그래. 그런 마인드 보기 좋아. 아, 그 전에.. 우리끼리 있을때는 말 놓으라고 했잖아."
"그건 아드님이 편하시려고 하시는거고요. 저는 말 높이는게 편합니다."
아드님이라고 불리우는 그 남자는 백현의 말에 비웃음을 흘렸다. 백현은 그의 웃음을 보고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첫출근한 학교는 어떤것 같아."
"별다를것 없이 똑같습니다."
"임무도 똑같고, 학교까지 똑같다?"
"고르고 골라서 주신 곳 아닙니까. 그런 의미로 같다고 한 말은 아닙니다."
"그래. 알아. 네 말은 내가 제일 잘 알아듣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해주세요. 뭐 때문에 부르신겁니까."
"글쎄."
그가 바닥에서 조용히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발소리도 없는 그는 그림자조차 차가워보였다. 창가로 비추는 백현의 모습이 안본 새에 수척해져 몹시 안쓰러워보였다.
"...올해로 2년 됐지, 그 일이 생긴지."
그 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단어가 나오는 순간 백현의 눈썹이 움직였다. 그리고 남자의 뒷모습을 향해 매섭게 노려보았다.
"거 봐. 말을 놓는게 편하겠어."
"그 일에 대해서 논할 목적이라면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아직 내 말 다 안끝났어."
"......."
"너에게는 독한 말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사랑이란게 다 그렇지?"
"......."
백현이 고개를 들며 눈을 감았다. 씹- 욕이 비죽비죽 튀어나오려는걸 간신히 막고 있다. 거지같은 사랑 타령이나 하려고 부른건 아닐거잖아. 개같은.
백현의 속마음을 듣기라도 했는지 여전히 차가운 얼굴을 한 하얀 얼굴의 남자가 뒤를 돌아서 백현의 눈에 눈을 맞추었다.
"혹시 알고 있어? 이 학교에, 그 아이와 비슷한 아이가 있다는거 말이야."
"....못 들었습니다."
"그래?"
남자가 어딘가 싸늘한 미소를 보이며 그에게 천천히 다가섰다. 긴 옷깃을 매만지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걸을때마다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찻잔에 담긴
차가 조용한 파동을 일으키며 흔들렸다.
"있다더라."
"..그래서 그 이야기를 저한테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글쎄. 왜일것 같아?"
"........"
"잘 봐."
남자는 자신의 발 밑에 있는 찻잔을,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발목을 꺾어 쓰러뜨렸다. 옅게 흔들리기만 하던 차의 내용물이 쓰러져 바닥이 빠른 속도로 젖어가고 있었다.
"네가 이 조직에 끼치는 영향력을 생각해."
"........"
"조용한 움직임에도 단 한 번이라도 흔들리면, 저렇게 쓰러진다."
"........"
"물론 지금처럼. 내가 쓰러뜨릴거야."
"........"
"변백현. 네가 두 번은 안 흔들릴거라 믿는다."
"........"
"네가 겪었듯이, 네가 흔들리든 아니든 결과는 똑같을테니까."
"........"
"한 번은 용서 할 수 있어.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니까, 그건 나도 이해하는 바야. 사실 너를 지금까지 살려둔것도 내 실수인지 아닌지 분간이 잘 안가."
"........"
"내가 두 번째로 너를 선택한게 지상 최대의 실수라고 생각하지 않게 해."
"...저는."
"응."
"저는, 그 아이여서 사랑한것 뿐입니다."
남자의 얼굴이 미묘하게 움직였다.
"똑같다고 해서 다 사랑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아드님은 마치, 제가 그 애와 같은 사람이라면 전부 다 안아주는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이 곳은 배신의 연속이 마치 절차인것처럼 일어나는 곳이니까.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어? 그게 너라도."
"..믿어주세요. 앞으로는 그깟 연민따위로 조직을 흔들리게 하는 일은 없을겁니다."
"좋아."
"......."
"내가 듣고 싶은 말이였어."
씨발. 백현의 입가에 경련이 일어났다. 그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할리가 없는 남자가 더 할 말은 접어둔채 다시 뒤돌아섰다. 백현은 그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했으며, 이해해야
했다. 자신의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고, 함께 그 시간을 보낸 한 사람도 떠올렸다.
"학교에서는 나를 뭐라고 부를 생각이야?"
"........"
"거기서도 아드님이라 부를 수 없잖아. 그냥 이름을 불러. 지금부터 친근하게 대하는 법을 배워도 좋고. 김종인은 벌써부터 내 이름을 부르고 난리 났더군."
"상황에 따라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걱정은 하지 마세요."
"그래. 널 아예 안믿는다는건 아니야."
"....오세훈."
"그래. 그렇게 해."
"믿어."
"....그래. 한 번 노력해보지."
백현의 마음에, 알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세차게 피어올랐다.
* * *
암호닉 : 이든 / 치즈스틱 / 연 / 두부 / 텐더 / 히융융 / 초코푸딩 / 홍홍아직도랩을한다 / 올빼미 / 망고주스 / 멈춰라
이게 왠 갑자기 조직물이여. 이게 뭐시여. 하시는 분들... 이야기의 평범한 흐름이 끊긴 이 시점에!!! 이게 뭐시여 하는 큰 걱정은 안하셔도 될것 같습니다..
조직물 그런걸 중점으로 쓴 이야기가 아니기에 ;ㅁ; 그냥 루민 관련된 이야기에 뭐가 필요해서 재료처럼 쓰인거에요ㅜ.ㅜ 쓰다보니 이렇게 쓰게 됐는데..
큰 중점은 안두셔도 될것 같습니다. 아..나중에 가면 중요한 이야기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루한,민석이가 더 중요한걸로....ㅜㅜㅜ
댓글 써주시는건 언제나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왠지 슬럼프 없이 롱런할거같은 기분도 들고...
비록 매 편마다 분량도 짧아서 이야기가 늘어질거 같지만...봐주시는 분들이 있기에 연재도 가능한거겠죠?ㅠㅠ
루민이들의 아픔에 공감해주셔서 제가 다 눈물나고..훌쩍..
늘 감사합니다~ 답글을 달아드릴지, 아니면 한꺼번에 땡쓰투를 드릴지 고민중인 셸터는..
고민을 마치면 다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