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 짧았던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
그리고 스물 아홉. 다시 한 번 찾아온 첫사랑. 그때 그 설레임.
19세 S의 비망록, A |
퇴근을 하고 집에 가던 길,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용은 다 비슷했다. 이틀 후가 동창횐데 교복은 구했냐, 몇시에 출발할거냐 등등. 그냥 흔한 물음이었다. 동창회 할 때 쯤이면 매번 들린다는, 그런 흔한 물음. 그런데 막상 그 '흔한' 물음을 듣는 순간, 이제껏 멀게만 느껴졌던 동창회가 바로 코 앞까지 다가왔다는 사실이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도 어연 십 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났다. 이성열이 문자로 강조, 또 강조를 했던 교복은 이미 버린지 오래 였다. 어차피 잠깐 만났다 헤어질거, 교복은 왜 챙겨오라고 야단을 부리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혹시나싶어 옷장 문을 열어봤지만 보이는건 거무잡잡한 정장들 뿐, 십 년전에 입었던 갈색의 차이나 교복은 흔적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 동생. 고등학교 교복 있냐. ]
더 이상 답장은 오지 않으리란 것 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울리지 않는 휴대폰을 대충 주머니에 쑤셔 박고, 정장 마이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지갑만 달랑 챙겨 나왔다. 시계는 이제 막 5시 40분을 지나고 있었다. 하늘은 붉었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서서히 모습을 감추고 있던 태양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산의 절반을 넘어갔다. 그리고 그 주위에 넓게 펼쳐진 노을은 이미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 선배! 이쁘죠. '
불현듯, 잊고 있었던 추억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것은 바로 십 년전, 아름다웠던 나의 열아홉을 떠나보내며 어쩔 수 없이 함께 묻었던 첫사랑의 흔적이었다. 더 이상은 위험하다. 눈 앞의 비상등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황급히 시선을 돌리고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천천히 옮겼다. 갑자기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어느 새, 태양은 모습을 완전히 감추었다. 더 이상 저녁 하늘엔 노을이 지지 않았다. 역시나,오늘도 어김없이 어두운 밤은 또 다시 나를 찾아왔다.
∞
시간은 무척이나 빠르게 흘러갔다. 눈 깜빡할 사이에 이틀이 지나갔다. 오랜만에 교복을 입었다. 다리 라인에 딱 맞게 줄여진 바지가 영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와이셔츠 단추를 끝까지 채우고, 촌스럽게만 느껴졌던 넥타이까지 매니 정말 고등학생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 오랜만이네. 형 교복 입은 모습. "
사실인걸, 뭐. 어깨를 으쓱대며 괜히 우스갯소리를 해댔다. 이렇게 해서라도 어색함을 없애고 싶었다. 그래도 역시, 십 년은 긴 시간이었다. 잠깐의 웃음으로 그 동안의 긴 텀을 이겨내기에는.
" 잘갔다와. 오랜만에 친구 만나서 이야기도 좀 하고. "
명수가 둘러주는 목도리에 얼굴을 묻고 서둘러 오피스텔을 빠져나왔다. 금요일의 러시아워. 그래서 그런지 평소보다 사람들이 더 북적거리는 것만 같았다. 버스도 모두 만원이었다. 서있는것 조차도 힘들만큼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겨우 자리를 잡으니 버스 차창 너머로 제자리 걸음 중인 차들이 보였다. 보기만 해도 숨이 꽉 막히는 광경이었다. 송글송글 맺힌 물방울 사이로 얼핏 회색이 비추어졌다.
' 선배. 저기 보여요? 차랑, 건물이랑. 전부 다. '
…이 곳은, 회색의 도시예요. 우리도, 어른이 되면, …스며들겠죠? 갑자기 모든 게 멈추는 것만 같았다.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변했다. 모든 것이 흐려졌다. 더 이상 길게 늘어선 차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건, 교복을 입고 있는 한 소년과, 정장을 입은 '나'였다. 소년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눈이 마주쳤을 때, 소년이 물었다. 그리고 멈추었던 시간이 다시금 흘러가기 시작했다. 소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가 남기고 간 물음만큼은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곳은 어때? 넌 지금, 살아있어?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유리창으로 보이는 나의 모습을 한참동안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리고 소년이 내게 물었던 것 처럼, 나 자신에게 되물었다. 김성규. 넌 지금 살아있어?
" …아니. 나도 잘 모르겠어. "
결국 나는 답을 내리지 못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할 때까지도. 한바탕 소년이 뒤집고 나간 머리가 지끈거렸다. 머리를 부여잡으며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 어? 김성규! "
옆에서 이성열과 장동우의 시끄러운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이제껏 표지판에 머물러있던 시선을 소리가 난 쪽으로 돌리니, 익숙한 얼굴들이 더럿 보였다. 반갑다며 방방 뛰어대는 녀석들을 밀어내고 자리에 앉으니 여기 저기서 안부를 묻는 인사가 들려온다.
" 역시 김성규! 어떻게 졸업 하고 연락 하나 안되냐. "
소리가 점점 커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모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정신없이 이야기가 흘러갔다. 이성열은 교복을 입고 오지 않은 이호원의 허리에 매달려 지금 제 말을 무시하는거냐며 찡찡대고 있었고, 장동우는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다. 모두 십 년 전과 변함없는 모습들이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들과 나 사이에 커다란 벽 하나가 존재 하는 것만 같았다. 익숙함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지고 혼자가 되어버린 것만 같은 것.
그건, 소외감이었다.
∞
장장 여섯 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던 동창회가 모두 끝이 났다. 오랜만에 술이 들어간 탓인지 속이 무척이나 쓰렸다. 하나 둘, 다들 자리를 뜨기 시작하는 틈을 타서 나도 서둘러 가게를 나왔다. 꽉 막힌 숨을 트이기 위해선 당장 찬 바람이 필요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바람이 잘 통하는 가게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크게 한 번 숨을 들이키고 나니 그제서야 눈에 초점이 좀 잡히는 것 같았다.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담배를 하나 꺼내물었다. 주위를 둘러보다보니 무심코 지나쳤던 가게의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지독한 담배 연기에 정신이 돌아올 모양이었다. 흐릿하던 글자들이 조금씩 또렷해지는 걸 보니.
[ 당신의 모든 낭만들이 이루어지는 곳, Restaurant FOR. ]
문득, 잠시 잊고 있었던 소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곳은 어때? 넌 지금 살아있어? 무언가에 홀린 듯 표지판 가까이에 다가갔다. 당신의, 모든 낭만들이, 이루어지는 곳.
" 당신의, 모든… 낭만들이…, 이루어지는 곳. "
어쩌면 답을 이미 찾은건지도 모르겠다.
' 선배. '
가볍게 흘러들었던 십 년전의 그 말들을,
' 나는 선배가 스며들지 않았으면 해요. '
지금 내겐, 소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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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닉이라우'-'* |
일단, 암호닉을 확인하기 전에 먼저 조금 울겠습니다. 엉엉. 댓글이 이렇게 많이 달려본 적도, 추천을 저렇게 많이 받아본적도 처음이예요. 생각보다 많이 관심을 주셔서 더 열심히 썼어요. 하루빨리 B 써서 올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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