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방을 나온 뒤, 나를 보고 밥을 같이 먹자는 작업실 애들을 먼저 보내고 사람이 잘 찾지 않는 학관 뒷편 아래 벤치로 향했다.
하루종일 먹은 것도 없는데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명치 쪽이 뻐근한 게 위가 안 좋아진건지 도통 고통이 가시질 않으니 숨 쉬기도 버거웠다.
머릿속은 엉망진창이었다.
옹성우와 같이 등교하며 나눴던 이야기들, 우진이를 만나 들었던 지훈이 얘기, 그동안 지훈이가 내게 했던 행동들, 이제야 느껴지는 따가운 눈초리들.
마구잡이로 굴려 엉켜버린 실타래처럼 제대로 된 사고가 되지 않았다.
황민현은 내가 옹성우에게 하루 빨리 말하기를 원했다.
안 좋은 일을 혼자서 끌어안고 있어봐야 해결책이 나오는 것도 아닐뿐더러, 이 소문을 옹성우가 늦게 알아차리는 날에는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이유였다.
나는 동의했지만 실행할 수 없었다.
말 해야지... 하며 우물쭈물거리기만 하자 황민현은 한숨을 쉬었고 재환이는 이해한다며 어깨를 다독였다.
- 형, 누나 입장에서 생각해봐요. 그렇게 쉽게 꺼낼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예요.
- 재환아 고마워..
- 그렇다고 꼭꼭 숨기고 있을 얘기도 아니예요. 때를 잘 봐야한다 이거죠.
그래도 이게 제 최선의 조언이에요. 시도는 누나가 하는거니까요. 재환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 말이 맞았다. 타인에게서 사랑하는 사람의 안 좋은 이야기를 전해듣는 것보다는 내가 직접 말하고 오해를 푸는 게 낫겠지.
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된 오해인지 알수가 없으니 해결을 해보려고 해도 시작점이 보이지가 않았다.
배의 통증이 아까보다 더 심해졌다.
당장 치뤄야할 커다란 일들이 더 몇 배로 불어나버려 체력이 받쳐주질 못하는 것 같았다.
아르바이트, 과제, 작업, 박지훈, 옹성우, 황민현....
조금 억울한 마음에 눈물이 날 것 같아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을 묻었다.
시간이 지나면, 이것들도 다 우스웠던 일이 될거야 그럴거야 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위로했다.
좋아해 16
: '좋아해'라는 말의 무게 (1)
박우진은 어디서나 자신감이 넘쳤다.
다재다능하며 남들보다 월등한 무언가를 갖고 있어서가 아닌, 그저 자신 스스로를 당당하게 만드는 아이었다.
그건 내 앞에서도 같았다.
남들에게 좋은 인상으로 남는다는 이유로 여기저기 불려다니던 내게 '넌 왜 그러고 사냐?' 라는 한 마디를 던져주고는 망설임 없이 자리를 벗어나는 모습에 돌로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
박우진과 친해진 건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술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그 뒤로 쏟아지는 비난 사이를 지나쳐 그를 따라나섰을 때.
담배를 피우다 쫓아 나온 나를 보며 웃던 얼굴이 멋져보여서.
아, 얘는 진짜 멋있는 애구나 싶어서.
하지만 박우진과의 통화에서 들은 말들은 나를 화나게 하기에 틀림없는 이야기였다.
내가 알던 박우진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들이었다.
'나 네가 좋아하는 그 누나 만났다.'
딱 봐도 목소리가, 네가 싫어할만한 행동을 했으니 화를 내던 말던 알아서 하라는 투였다.
그 뒤로는 어떤 이야기가 오고갔는지 드문드문 기억에 남았다.
내가 처음으로 그에게 소리를 질렀고, 화를 냈고, 전화를 끊자마자 학교로 가는 택시를 잡아 탔다.
'내가 잘못했다.'
'근데 너라면 화 안 나겠냐?'
'너 오늘 휴학계 내러 온다고 말 안 했어.'
'..너 찾더라, 그래도.'
오늘 수업이 있을까? 누나가 학교에 계속 있어줄까?
조금씩 밀리는 도로 위에서 하염없이 입술만 깨물었다.
다 알게 되었다면, 이 망할 애틋함을 다 알게 되었다면, 누나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혹은 평생 전하지 못할 말들이.
캠퍼스에 도착하자마자 박우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냐는 물음에 당황함이 역력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너 설마 학교냐?
- 빨리. 어디냐고.
- 와.. 천하의 박지훈이 이렇게까지..
- 어디냐니까?
- 하.. 근데 지금 상황이 안 좋은데.
아씨. 모르겠다, 그냥. 너도 와라. 여기가...
박우진은 미대 캠퍼스가 아닌 경영대 캠퍼스 이름을 불렀다.
왜 거기 있냐는 물음도 못 던지고 끊자마자 학교를 가로질러 달렸다.
눈 앞에는 오로지 환하게 웃던 OOO의 얼굴만 보였다.
꼭 전해야한다, 이 말들을.
*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학관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혼자 숨어 있는 것보다는 옹성우를 만나서 이야기 하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무슨 연유에서인지 옹성우가 아까부터 전화를 받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문자로 여러 통 남겼지만 묵묵부답에, 1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들이닥치는 불안감.
항상 어디에 있던 연락은 꼬박꼬박 해주던 애였는데.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작업실에 둔 가방을 가지러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무언가를 하기에는 마음이 뒤숭숭해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우선 연락 없는 옹성우를 찾는 게 시급했다.
캠퍼스 내에서 나에 대한 좋지 않은 이야기가 오가는 와중에 소식 없는 옹성우라니.
어디선가 그 소문을 듣고 불 같이 화를 내며 싸우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계단을 뛰어오르느라 헐떡거리는 숨을 진정 시키며 아무도 없는 작업실에서 가방을 서둘러 정리하는데,
예고도 없이 벌컥 열리는 문에 소스라치게 놀라버렸다.
- 어? 언니! 밥 안 먹고 여기 있었어요?
- ..지민이?
같은 수업을 듣는 같은 과 동생이었다.
놀라서 의자에 주저앉은 내게로 빠르게 다가왔다.
동그란 눈이 더 커지며 내 어깨를 붙잡았다. 언니, 괜찮아요?
- 다들 돈가스 먹으러 갔어요. 그 고양이 카페 옆에 있는 돈가스 가게 있잖아요. 바삭바삭하게 잘 해주는 데!
- 으, 응. 맛있겠네. 근데 너는 왜 안 갔어?
- 아...
저는 두고 간 게 있어서요. 하하.
어색하게 짓는 웃음에 갸웃했지만 나도 따라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그럼 같이 나가실래요? 애들이 저보고 방 문 잠그고 오라고 했어요.
그래, 그러자.
지민이는 웃는 얼굴로 내가 가방을 정리하는 걸 도와주었다.
다른 애들은 밥을 먹고 다시 돌아올테지만, 나는 오늘 이후로 삼 일간은 작업실을 안 오기 때문에 정리할 것들이 많았다.
고맙게도 나를 도와주며 이런 저런 말들을 건네주는 지민이 덕에 일이 금방 끝났다.
입은 웃으며 작업실 문을 잠구는 지민이를 보고 있었지만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옹성우 찾아야 하는데..
- 언니 주말에는 안 나오세요? 필요하시면 열쇠 드릴 수 있는데.
- 아냐 괜찮아. 나는 그렇게 급한 게 아니라서 천천히 나와도 돼.
- 근데 언니도 곧 있음 졸작 서서히 준비해야 하지 않아요? 스트레스 엄청 받겠다.
- 그래도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여유롭게 준비하려고. 지민이는 과제 때문에 작업실 나와?
아.. 저는 작업 때문에 나오는 거 아니예요.
지민이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 웃음 뒤에 싸하게 다가오는 정적에 얼굴이 바짝 굳었다.
이 느낌... 뭐지?
- ... 그러면?
- 그냥. 누구 보러요.
..누구?
정말 무례하게도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질문에 입을 꾹 다물었다.
남을 곤란하게 하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 나도 씨익 지민이를 따라 같이 웃었다.
그 웃음이 무슨 웃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당장에라도 옹성우를 찾으러 여기저기 쏘다니고 싶었지만,
지민이와 이야기를 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이야깃거리는 깊은 주제로까지 흘러가 있었다.
학자금 대출, 취업난, 휴학, 편입.. 정말 주제가 짙은 이야기들이라 함부로 맥을 끊기가 어려웠다.
이럴 때마다 정말 우유부단한 내가 싫었다.
분위기에 휩쓸려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던 게 하루 이틀도 아니면서, 아는 동생한테 제대로 말도 못 하고 붙잡혀 있는 신세라니.
지민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살짝 곤란한 웃음을 지었다.
미대 캠퍼스를 지나친 지는 오래였다.
여전히 앞서 걸으며 투덜거리듯 신세한탄을 하는 지민이를 겨우 붙잡고 미안한 얼굴을 했다.
- 지민아, 진짜 미안한데..
- 언니.
- ..어?
- 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 물어볼 거...?
- 네.
어린애 같던 표정이 어느새 날카로워져 있었다.
지민이는 우뚝 서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시선이 너무 망설임 없어서, 나는 다시 명치 끝에서 고통을 느꼈다.
- 박지훈이 언니 좋아하는 거 맞아요?
지민이의 팔을 붙잡았던 손을 스르르 아래로 떨어트렸다.
오늘 하루종일 나를 짓누르던 이름 중 하나가 갑자기 툭 튀어나오자, 순간 관자놀이를 찌를듯한 통증이 스쳐지나갔다.
고통에 본능적으로 미간을 찌푸리니 지민이의 얼굴이 굳어졌다.
- 맞네. 지훈이가 언니 좋아하는 거, 맞구나.
- .. 지민아,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야?
- 무슨 소리라뇨. 언니, 옹성우 선배랑 사귀는 거 아니예요?
- 맞아. 그게 왜?
- 근데 왜 지훈이 가지고 놀아요? 박지훈 뿐만이 아니예요. 민현 선배나, 재환이나..!
너...
뇌가 차갑게 굳는 느낌이 들었다.
관자놀이를 규칙적으로 찌르던 통증도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울그락 불그락한 어리고 작은 얼굴에서 보이는 나를 향한 원망과 분노가 모든 걸 말해주는 것 같았다.
너였구나. 너가, 너가..
금방이라도 뱃속에 있는 것들을 다 게워낼 것만 같았다.
- 아마 박지훈 언니 때문에 휴학하는 걸거예요. 예전에는 동기들한테 유학 갈 생각도 없다 그랬다고요!
- ...
- 그렇게 실컷 갖고 놀다가 버리니까 좋아요? 이젠 남자친구도 있으면서 주변에 남자들 다 꼬시려고요?
- .. 그만해.
- 뭐를요? 그러는 언니는 대체 언제 그만할건데요?
이제 가식 그만 떨고 제대로 말 해보세요! 대체 어디까지 사람 가지고 놀아야 직성에 풀리겠냐고요!!
더 이상 찢어질 듯이 높은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이 빙빙 돌고, 말들은 그대로 귓가를 흘러 어디론가 쏟아져내렸다.
나는 옹성우 하나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시간들을 보냈다.
내 감정 하나 컨트롤 하지 못해 매일을 휘청거렸으며 붙잡아주길 원한 적도 없었다.
그저 홀로 서는 방법을 터득하는 과정에서 좋은 친구들을 만났을 뿐이었다.
그 인연들이 짧지 않은 긴 인연으로 발전되기까지도 꽤 많은 시간을 가졌다.
그렇기에 서로에 대한 신뢰와 믿음, 배려가 쌓여 지금의 모습으로 어우러지게 된건데.
누군가에게 그 모습이 원망이 될 수도, 분노가 될 수도 있는건가.
이 아이가 나에게 표출하는 불만이 정말 오롯이 나의 잘못일까?
내가 정말 옹성우와 함께 했던 학창시절 대부분을 이런 식으로 보낸 것처럼,
옹성우와 있는 과정에서 항상 이런 걸 겪어야 하는걸까?
우린 이렇게 항상 좋지 못한 일들을 받아내야 하는 걸까?
윽박지르는 지민이 때문인지 어느새 주변의 시선이 우리 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인지한 건 지민이가 좀처럼 화를 가라앉지 못해 가슴을 팡팡 내리치고 있을 때였다.
윤지민, 하고 부르는 낮은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을 땐 우진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 너 지금 뭐하는 거야.
- 넌 여기 왜 왔어?
- 네가 이렇게 소리 지르고 있는데 어떻게 지나쳐
..누나, 또 뵙네요.
- ...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돋았다.
정말 너무나도 부끄럽고 창피했다.
지민이는 어쩌면 나에게 이런 수치스러움을 주기 위해 캠퍼스 입구에서 일부러 나에게 말을 걸었을지도 모르겠다.
드문드문 눈에 익은 얼굴들과 눈이 마주쳤다.
속에서 열이 훅 끼쳤다.
나 이제 그만 하고 싶어.
이렇게 매일을 누군가에게 안 좋은 소리 들어가면서 살고 싶지도,
이런 말들을 들으면서 꾹꾹 눌러 참는 것도, 옹성우 하나만을 생각해서 아무런 말도 없이 속으로 삼키는 것도,
나 다 못하겠어.
- 누나..!
- OOO!!
나 정말,
아무것도 못 하겠어.
도와줘.
안녕하세요.
정말 오랜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