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성] 0214, 더 파라디(The paradis) 13
w.규닝
13. molto vivace
처음엔 그게 싫었다.
자신이 천사를 알아보기 전, 이미 그를 찾는 사람은 존재했다는 사실. 자신이 이제서야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옥탑방엔 이미 주말이면 찾아오는 발걸음이 있었다는 사실. 그것은 아주 사소한 문제에서 시작한 일종의 샘이었다. 질투라고 하기에는 약하고, 집착이라 하기엔 호기심인 것. 우현은 그래서 한 순간에 반찬이나 배달하는 놈팽이로 전락했어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런 변명거리를 통해서라도 이 집에 머물 이유가 생길 수 있게 되었다는 건 생각보다 멋진 일이었기에.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주어지면 주말을 제외한 날들은 모두 제가 누릴 수 있는 하루하루였다. 제 손으로 달력을 채워넣고, 온기 없는 싱크대에 그릇들을 쌓아놓는 일들도 전부 제 차지. 하지만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행복해져만 갈거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모두 미묘한 틈새로 조금씩 무너져 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성규가 집을 비운 그 날부터, 지금까지도 분명.
처음과는 다르게 그런 게 싫었다. 저에게만 쌀쌀맞은 행동은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김성규는 제가 어떠한 짓을 해도 관심조차 주지 않았으니까. 그에 비해 성규는 그 남자에게서 연락 한 통이라도 오는 날이면 바짝 자세를 틀어잡기도 했으며 주말엔 집에 발도 들이지 말라며 싸늘한 충고까지 마다 않았다. 천사는 그렇게 남자와 관련된 이야기라면 하나하나, 머리 끝 부터 발 끝까지 우현의 앞에서 너무나도 확연하게 동요했다. 그러니까 매일, 거의 하루 종일.
화장실에 놓인 파란 칫솔은 지금까지도 언제나 그 자리에 보란듯이 꽂혀져 있다.
"야 남우현."
"……."
"문을 그렇게 세게 닫으면 어떡해."
불과 몇분 전, 떠밀리듯이 옥탑방 안으로 들어오게 된 호원과 동우, 성열이 현관 앞에 우두커니 선 우현의 눈치를 살피고만 있었다. 바닥에 떨어졌던 화투패들을 주섬주섬 주워 든 성열이 현관 앞에 다다라서야 녹색 담요를 바닥으로 내려두며 말했다. 어쩐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문소리가 사납다고 했더니, 결국엔 문틈이 기울여져버린 듯 한 모양새에ㅡ 처음 발길을 들여놓는 집인데도 입을 떠억 벌린 성열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꺼냈다.
"문 고장났다."
어느새 일어나있는 호원의 등 뒤에서 숨듯이 서있던 동우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나서 마찬가지로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우현아. 뒤이어 우현의 이름을 덧붙여 불러오는 동우는 이리저리 눈을 돌리며 우현의 눈치를 보고 섰다. 우현은 아직까지도 푹 꺼트린 고개를 들어올릴 줄을 몰랐다. 성열과 함께 등장한 남자가 성규의 손목을 잡아 끌고 옥탑방을 벗어났던 아까의 그 때 이후로 계속.
'들어가.'
'…….'
'따라오지 말라고 했어.'
짐짓 단호한 목소리가, 본능적으로 반대편 팔을 잡아버린 제게 화난 듯 뚝뚝 끊겨왔던 그 순간부터.
셋의 걱정스러운 눈은 줄곧 우현을 향해 있었다. 그러기를 몇분 더. 호원이 먼저 거실 쪽으로 걸음을 옮긴 다음에서야 성열도 늘어지는 소리와 함께 바닥 위로 드러누웠다. 우현아. 숙여진 우현의 고개를 아래에서 들여다보며 말하는 동우의 목소리만이 조용한 거실 위로 뱉어졌고, 어색하고도 긴 침묵을 깨려 리모컨을 집어든 호원 탓에 곧이어 시끄러운 예능 프로그램의 소리가 복잡했던 공기 위로 덮어졌다.
* * * * *
"그만 좀 가지?"
성규가 세게 잡힌 저의 왼쪽 손목을 내려다보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어디까지 가시려고. 지구는 둥그니까 계속 걸어나갈거야? 유난히 바쁘게 걷던 명수의 발걸음을 뚝 멈추게 된 것은 결국 되지도 않는 말장난을 던지고 나서였다. 옥탑방을 빠져나와, 가까운 놀이터도 한참을 지나서ㅡ바닥도 성치 않은 어느 좁은 골목길 앞에서야 걸음을 멈춘 명수가 저를 따라 멈춰선 성규에 몸을 돌려 골목 안으로 밀어넣었다.
"여기 너무 어두워."
"김성규."
"어두운 거 싫어. 다른데로 가."
"넌,"
명수가 자칫 높아지려던 목소리를 꾹 눌러 어금니를 깨물었다.
"주인집 아들이,"
"……."
"저녁거리도 배달하나보다?"
찬바람에 조금은 얼어있던 손 끝이 성규의 어깨를 세게 잡아왔다. 그것도 다른 새끼들까지 전부 데려다가. 무슨 파티라도 열 기세던데, 형. 지독히도 어두운 빛 앞에서도 보이는 건 명수의 비웃듯이 올라간 입꼬리였다. 성규가 분명 저를 내려다보고 있을 눈을 피해 아무곳이나 쳐다보려 눈을 떨어트렸다. 결국 성규의 시선이 머문 곳은 명수의 발치였다. 저의 발과 나란히 선 명수의 발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응. 고개를 끄덕인 성규가 좀 더 밝은 골목 끝자락으로 몸을 비켜섰다.
"저녁거리 뿐만 아냐. 매일 아침도 걔가 다 해줘."
"…뭐?"
"점심도. 그 다음날 아침도, 또 점심도, 저녁도. 내가 저번에 말하지 않았나? 내가 개새끼 한 마리 키운다면 어떨거같냐고 물어본 적 있잖아. 너는 그 때 분명 잔다고 했었던 거 같은데."
"……."
"말도 하고, 두 발로 걸어다닐 수도 있는 개새끼야. 종은 진돗갠데. 그렇게 안 보이지? 신기해?"
급기야는 고개를 들어 웃어보인 성규의 눈꼬리가 생글생글 웃고있었다.
"옛날에 우리 키우던 개 닮았잖아. 그래서 키우고 있다, 한 달째."
성규가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빼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골목길 안에서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명수의 눈에 확,하고 오르는 라이터 불이 비쳤다. 탁탁 하는 소리를 내더니 사라진 라이터 불은 성규의 입에 물린 담배의 끄트머리에 빨간 불씨를 안겨두고 사라졌다. 명수가 그런 성규의 팔을 잡아 골목 안 쪽으로 더욱 끌어당겼다. 형. 제 앞에 어른거리는 빨간 불씨를 쳐다보며 이를 악 문 명수가 성규의 이름을 불렀다. 김성규, 나.
"장난 아니야."
"뭐가."
"장난 아니라고. 진짜 개새끼라면 니가 키우고 살던, 잡아 먹던 상관 없는데 그새낀 아니잖아. 또 이렇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넘어가려고 하지마. 예전이나 지금이나 형 그런 거 진짜, 짜증나 죽겠으니까."
"나돈데?"
"뭐?"
"나도 장난 아니라고. 진짜 개새끼라고."
살짝이 웃은 성규의 입새로 독한 담배연기가 새어나왔다. 얼굴을 가까이 한 명수가 나즈막한 목소리에 인상을 찡그렸다.
"넌 항상 날 좆같이 안믿어."
"……."
"아무 뜻 없다고. 진짜 개새끼라고 백번 천번을 말해야 믿겠어? 걔가 어떤 의미인지 너한테 설명해야 하는 것도 웃기지만, 이렇게 오래 봐왔으면서 아직까지 나란 놈은 뭣같이도 안 믿는 니가 더 짜증나. 나한테 아까, 예전이나 지금이나라고 했어?"
"……."
"나야말로 하고싶은 말이야. 예나 지금이나 너는 너무 좆같아."
웃고있는 눈꼬리와 마찬가지로, 독한 말을 내뱉고 있는 주제에 그 목소리는 반은 웃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골목 안에서 순식간에 굳어버린 명수의 눈이 성규의 윤곽을 예리하게 훑어왔다. 성규는 입에 문 담배 끝을 잘근잘근 씹고나서 골목 끝자락으로 다시 한 번 몸을 비켰다.
거기까지 보고 나니 참아왔던 화를 금방이라도 주체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건너편의 가로등 불빛에 비친 성규의 뒷통수를 보자 세게 힘이 들어간 주먹을 말아 쥔 명수가 저에게만 들릴만큼 작은 소리로 헛웃음을 지었다. 또 이렇게 등을 돌렸다. 골목을 빠져나가고 있는 뒷모습이 미치도록 밉고 미워서 욕지거리보다도 먼저 터진 것은 주체할 수 없는 헛웃음 뿐이었다. 명수가 성규를 따라 골목에서 한 발자국 걸어 나와 어울리지도 않게 웃어보였다. 씨발, 김성규형. 성규의 이름을 또박또박 부른 명수가 한 번도 불러본 적 없는 호칭으로 성규의 발걸음을 잡아두었다. 좀 더 밝은 곳으로 걸어나오던 성규가 몸을 돌려 명수를 돌아다보았다.
"나는 이러려고 온 게 아닌데."
"……."
"김성규형이랑 싸우러 온 게 아니라구요. 난."
명수가 어색하게 올린 입꼬리를 굳혔다. 분명 이러려고 찾아온 건 아니었다. 제가 선물했던 화분은 잘 자라고 있는지를. 평상 밑에 쌓아뒀던 소주병들이 혹시나도 다 비워져 있었는지를 확인하고도 싶었다. 만약 그랬다면 잔소리도 해보고 싶었고, 형 몸을 생각해서라도 그러지 말라고. 술로 술을 해장하는 버릇은 나쁘니까 이제 그만 좀 고치라며 오랫동안 해오고 있는 충고도 다시 한 번 해보고도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성규의 옆에 서있던 사람들은 너무나도 많았다. 입구에서부터 마주쳤던 이방인이 달갑지만은 않다 했더니, 결국 마주하게 된 김성규는 제가 모르는 얼굴들과 어깨를 마주하고 꽤나 밝은 얼굴을 한 채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제 앞에서는 몇분이 멀다 하고 줄담배만 피워대는 성규의 입가는, 정말이지 거짓말처럼 풀어져 자연스러워보였으니까. 아마 거기서부터 열이 올라버려 결국은 또 화를 내고 만 것일테지. 명수가 저의 말에 말간 눈을 한 채 몸을 튼 성규의 입가를 쳐다보았다.
아까와는 달리, 또다시 담배가 물려있다. 그러니까, 내 앞이라서. 명수가 쓴 침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안 싸우고 싶어서."
"……."
"내가 내 준 어깨를 일부러 피하는 형이래도 괜찮으니까. 적어도 세 달동안만큼은 형이랑 행복하게 있다 가게 된다면 좋을거라고 생각하는데."
"……."
"그것도 안되냐? 형 나 군대가면 휴가 나와도 안 만나 줄거라면서."
"…응."
"그래서 가기 전 동안만이라도 잘 지내보고 싶은데."
"……."
"내가 좋아하는 것처럼 형 나 좋아하길 안 바란대도 그건 안돼?"
명수가 빤한 눈으로 저를 보고있는 성규와 마주봤다. 나랑 잘 지낼 맘…없어? 명수가 그렇게 묻는 와중에도, 노란 가로등 빛에 비친 얼굴을 한 순간이라도 더 담아보려 집요한 눈을 치켜떴다. 그렇게 묘한 표정 위로는 피워대고 있는 담배연기가 올라와 얼굴 윤곽을 가리고 있었다. 성규가 입에 문 담배를 빼내 연기를 내뿜었다.
한참동안이나 침묵이 이어졌다. 입에서 담배를 빼낸 성규는 아직도 골목 안에 버티고 선 명수의 머리 끝에 눈을 고정하고 자리에 서 있었다. 불씨가 꺼지지 않은 담배에서는 아직도 아지랑이같은 연기가 피어오르고만 있었고, 독한 연기가 찬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성규가 오른손을 들어올려 몇번이나 담배를 물었다가, 뺐다 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니까, 저의 대답이 떨어질 때까지는 언제까지고 거두어지지 않을 집요한 눈에 맞서듯이 대꾸하다가.
그런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성규 쪽이었다. 김명수, 있잖아. 담배를 무느라 엉긴 말투로 정적을 깨트린 성규가 가볍게 입을 열었다.
"나 지금까지 너 하나 때문에 살았어."
"…그런 소리 안 하기로 했잖아."
"아니지. 살았다기보다는 버틴 게 맞지. 근데 이제는,"
"……."
"니가 내 앞에서 사라졌으면 좋겠어."
진심이야. 어깨를 으쓱한 성규가 퉤,하고 담배를 뱉어내며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나는 니가 너어무 싫거든. 춥다. 할 말 끝난 거 같은데, 집에 안 가? 뺨을 스치우는 찬 바람에 코를 훌쩍인 성규가 두 팔을 싹싹 문질렀다. 호들갑스럽게 건넨 말투에도, 아까처럼 명수의 눈빛은 차갑기만 한 게 도통 거두어 질 줄을 모르는 듯 하니까. 성규가 고갯짓으로 언덕 끝을 가리켰다. 추우니까 이만 들어가자고.
그 때, 가만히 버티고 섰던 명수를 움직인 것은 성규의 말이 아닌 난데없는 휴대폰 벨소리였다. 또다시 찾아왔던 정적을 단번에 깨뜨린 발랄한 벨소리는 명수의 주머니에서 울려대고 있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런 명수의 모습을 쳐다보고 있던 성규가 주인과는 어울리지 않는 밝은 벨소리에 풉,하는 웃음을 터뜨리려는 찰나ㅡ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꺼내든 명수가 격한 욕지거리와 함께 '이건 또 누구꺼야',라고 하는 것을 보아 제 휴대폰은 아닌 모양이라고 으레 짐작을 했다. 성규가 싹싹 문지르던 두 팔을 멈추고 명수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아! 저승사자 형!
지나치게 키워져있던 볼륨은 멀찍이 선 성규에게까지 들릴 정도로 크게 들려왔다.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목소리에 인상을 찡그린 명수가 휴대폰을 귀에서 조금 떨어트렸다.
-그쪽하고 나 핸드폰 또 바꼈어! 아까 우리 부딪히면서 그랬나봐요. 어디서 봤나 했더니, 그 때 그 정류장 맞죠? 나 지금 집에 갈 건데, 핸드폰 바꾸게 빨리 돌아와요!
전화는 방금 전 걸려올 때처럼 멋대로 끊어졌다. 심지어 끊겨 들려오는 수화음마저 크게 울려 둘의 귀에 들려왔다. 그만큼 주위는 고요했고, 휴대폰이 내고 있는 소음은 컸다. 방금 전까지도 열이 올라 꽉 쥐었던 주먹에서 힘을 뺀 명수가 지끈거려오는 머리에 눈을 꼭 감았다. 집 앞에서 만났던 멀대같이 키만 컸던 녀석. 언젠가 스치듯이 만난 적 있던 정류장에서의 그 남자가 빠르게 겹치면서 복잡해져오는 머리에 짜증이 일었다. 이런데서까지 엮이고 지랄이야. 크게 한숨을 내쉰 명수가 휴대폰을 내리며 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을 않자 성규가 멍청히 서있는 명수에게 싱긋 웃었다.
"뭐해. 가자."
"나 아직, 할 말 남았어."
"뭔데."
명수가 입술 끝을 깨물었다. 그러니까, 형은 짜증나는 게 너무 많아서 일일이 말해봤자 입만 아프다.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가만히 서 있던 명수가 발을 놀려 성규의 옆을 지나쳤다.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웃기지도 않다. 김성규.
"형. 나는 형이 거짓말을 못하는 게 그렇게 싫다."
제발 거짓말 할 땐 눈 좀 똑바로 쳐다봐. 속아주고 싶어도 못 속겠으니까 허탈하잖아. 명수가 손에 들었던 휴대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으면서 걷고 있는 보폭을 크게 했다. 그렇게, 아직도 제자리에서 따라오지 않고 있는 성규를 뒤로 하고.
앞서 걸어간 명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언덕을 올라가고 있었다. 성규는 빠르게 지나친 명수가 언덕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도 멈춘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진짠데."
거짓말 아닌데. 난 빨리 네가 군대든 어디든, 내 앞에서 사라졌으면 좋겠어. 그게 잠깐동안이 아니라 영원히라면 더 좋겠지만. 성규가 이제 텅 비어버린 길바닥을 훑어보다 생각했다. 남의 진심을 멋대로 거짓말이라고 치부해버린 녀석을 생각하다 씁쓸한 침을 삼키며.
그러니까 해결책은 반대로, 내가 사라져 주는 거밖에.
*
"어! 형."
한 시간 쯤 지난 시간이었다.
한껏 이상해진 분위기 속에서, 성열이 가지고 온 화투판을 펴고 본격적으로 고스톱을 실행하려던 호원과 동우가 슬그머니 판을 정리하고 일어섰다. 난데없이 휴대폰이 바꼈다며 오늘은 이만 가겠다고 일어선 성열은 삼십분 쯤 전에 이미 옥탑방을 뛰쳐나갔었다. 그에 하릴없이 뒹굴고만 있던 호원이 동우에게 나가자는 눈치를 주었고, 우현이 세게 닫은 탓에 기울여져버린 문을 걱정스럽게 쳐다보다가 마악 혀를 차고 있을 때였다. 그렇잖아도 밀려던 문이 반대편에서 열려지고 소스라치게 놀란 호원과 동우가 쿵덕쿵덕 뛰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저, 그러니까. 이제 나가려고 했는데."
"…가게?"
문 앞에 멀뚱히 선 것은 성규였다. 갈 거냐고 물어오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호원이 어설프게 웃어보였다.
"저,절대 뭐 사고쳐서 나가는 게 아니구요. 이 문은 저희가 한 게 아니라 남우현이 그랬어요. 아까 그자식이 힘조절을 못하는 바람에 이게 좀 많…이 기울여졌는데."
"……."
"바람이 좀 많이 새더라고요. 형. 그래서 거실이 많이 추울텐…데. 어쨌든 저희가 안 그랬어요!"
누가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지레 속사포로 변명을 늘어놓은 호원이 제 뒤에 숨듯이 선 동우의 팔목을 잡고 현관 밖으로 뛰쳐나갔다. 형 죄송해요! 다음에 놀러올게요! 도망가듯 걸어나가고 있는 주제에, 갖가지 화분에 몸을 부딪힌 둘은 쏜살같이 계단을 내려갔다. 그에 제가 지나온 문을 위아래로 살펴본 성규가 흐음,하는 소리를 내었다. 고장나기는 했네. 추위는 잘 안 타니까, 바람이 새든 어쩌든 상관은 없지만.
문에서부터 한 발자국 물러서 요리조리 뜯어보기를 잠시, 성규의 눈에 들어온 것은 평상 끄트머리에 등을 돌리고 앉아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우현이었다. 그 흐릿한 인영에 잘못 본 것은 아닌가 싶어 성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뒷모습을 살펴보았다.
"집에 안 갔냐?"
조용하길래 간 줄 알았더니. 픽 웃은 성규가 고장난 문을 대충 닫아놓고 몸을 틀었다. 따라오지 말라고 말한 것 뿐인데도 그렇게 상처 받은 표정을 지어보이길래 당연히 집에나 가버렸을 줄 알았는데. 성규가 터덜터덜 걸어 평상 위로 엉덩이를 당겼다. 야, 남우현.
우현은 성규의 입에서 오랜만에 나온 저의 이름에도 전혀 미동조차 없었다. 푹 숙여진 고개는 난간에 받쳐져 있는 모양인지 조금이라도 들려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두어번 눈을 깜빡인 성규가 우현의 뒷통수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이지 개였다면 축 쳐진 귀라도 머리에 달려 있을 것 같은 느낌이야. 평상 위로 완전히 올라온 성규가 몸을 끌어 우현 쪽으로 바짝 붙었다.
"나 올라오는 거, 보고 있었어?"
"……."
"나 되게 추워하면서 올라왔는데, 다 봤…너, 술 마셨어?"
흡사 죽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던 우현의 옆 쪽으로 고개를 따라 숙이던 성규가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뺐다. 술 냄새 나. 가까이 다가가자 우현에게서 확 풍겨오는 알싸한 냄새는, 성규의 미간을 구겨지게 만들기에 충분할만큼 독했다. 아마 저가 피고 온 담배만큼이나 불쾌한 냄새. 성규가 우현의 옆 쪽에 진열되어있듯이 놓여있는 빈 병들을 훑어보았다. 술이 먹고 싶어지면 언제든 먹을 수 있도록 평상 아래 놓아 두었던 제 소주를 멋대로 마셔댄 모양이다. 딱 봐도 그림이 나오네. 성규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혀를 찼다. 저번에 보니까, 술도 존나 약해 보이더니 이게 어디서. 성규가 우현의 어깨를 살살 흔들었다.
"집에 안 갈거면 들어가서 잠이나 처 자. 술 먹고 추운 데 있으면 저체온증 빨리 온다, 너. 얼어 죽으면 치워주지도 않을 거니까 좋은 말 할때 곱게 자는 게 좋을걸"
"됐어."
"되긴 뭐가 돼. 문 부순 거 너라며. 그거 다 용서해 줄 테니까 들어가서 자."
"너는 무슨 술을,"
"……."
"이러엏게 많이, 쌓아놨냐. 평상 밑에."
우현이 억눌린 발음으로 말하는 와중에도 취해버린 머리가 몇번이나 꾸벅거렸다. 그에 표정을 굳힌 성규가 짐짓 자세를 바로 하자 우현이 평상 위롤 소리나게 탁,탁 때린 후에 몸을 돌렸다. 내가ㅡ내가 저번에도 말한 것 같은데. 금방이라도 옆으로 넘어질 것 같은 꼴을 하고서는 고개를 들어올린 우현이 딱딱하게 굳어있는 성규의 얼굴을 마주했다.
"다 마셔준다고 했잖아. 내가."
"……."
"더 이상 술 마시지 말라고. 내가 다 마셔주고 갈 거라고 저번에도 말했잖아."
"야."
"그게 그냥 말 그대로, 그런 뜻이 아니란 거 너도 알잖아. 그러니까, 너 대신 내가 절반 정도 힘들면 안되겠냐고 물어본거였잖아."
그렇게 말하며 우현이 씩 웃어보였다. 기억안나? 나는 다아. 나는데. 제 옆머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린 우현이 흐릿하게 보이는 성규를 똑바로 쳐다보려 눈을 바로 떴다.
하지만 그렇게 취한 와중에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성규의 똑바른 눈이 아니었다. 아까까지도 열심히 저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성규의 시선은 제 등 뒤 어딘가를 향해 비켜있었다. 우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성규의 시선이 가는 곳으로 머리를 가져갔고, 그렇게 또 반대쪽으로 비키는 성규의 시선에 반대쪽으로 머리를 가져가 어떻게든 눈을 마주하려 암묵적인 씨름을 이어갔다.
성규는 자꾸만 제 눈앞에서 알짱거리는 우현의 얼굴을 보기가 싫어졌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그냥,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씨발새끼. 언제는 기억같은 거 안 난다며 이제서야 기억 운운하며 지랄하는 거 봐. 성규가 애먼 입술을 아프도록 깨물었다. 그런 주제에, 이렇게 귀찮을 정도로 눈을 마주치려 시도해오는 것도 싫고, 뭣보다. 그 때 했던 대화의 연속이 미칠만큼 싫다. 개새끼. 너는 진지한 거 안어울려. 그래서 그게 너무 싫어. 성규가 마침 제 앞에 놓여있는 반쯤 남은 소주병을 들어올리려 할 때였다.
평소보다 억센 힘으로 제 손목을 잡아온 것은 우현의 손이었다. 그래서 하마터면 병을 놓칠 뻔 한 것을 마주잡은 것도 우현의 다른 쪽 손이었다. 병목을 왼손으로 잡아 든 우현은 그렇게, 성규의 손에서 소주병을 단번에 빼내었다.
"마시지 마."
"싫어."
"마시지 말고 나 봐."
"……."
"그냥 보고만 있어도 좋아. 마주보고만 있어줘. 니 술은 내가 다 마실게."
"……."
"나를 봐줘. 그게 좋아."
왈칵 눈물이 쏟아지려는 눈가에 힘을 준 우현이 잔잔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에게 그만 기대면 안 되겠냐고 물어보고 싶지만 그게 안 된다. 그런 말 같은 건 시도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김성규는 단단하니까. 아까 전, 명수의 손에 이끌려 내려가던 성규의 한 마디에 얼어버린 것도 그 탓이었다. 기대게 만들고 싶은데, 내가 모든 것을 받쳐주고 싶은데 그러기엔 이미 성규의 말에 꿈쩍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져버렸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쩌면 성규한테보다 화가 나는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우현이 어느새 벌겋게 달아오른 저의 눈가를 느끼며 점점 술이 깨오는 듯한 기분에, 이제는 저와 눈을 맞추고 있는 성규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있잖아."
그런 자신에 응답하듯 말해오는 성규의 목소리가 옥상 위로 흩어졌다. 한참 동안이나, 가슴 어딘가를 후벼파는 듯한 우현의 눈동자를 받아내고 있던 성규가 우현의 이름을 불러왔다. 남우현.
"세상에는 기대세요 보다 기대지 마세요 란 말이 더 많아."
"……."
"엘리베이터에도, 난간에도, 유리벽에도, 창문에도. 왜냐면 편할 줄 알고 기대는 순간이면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으니까."
성규가 저의 말에 한층 더 벌게진 우현의 눈가를 살펴보다가 뜸을 들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눈을 똑바로 쳐다봐오는 듯 해도 사실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걸 누가 모르나. 성규가 잠시 목을 가다듬어 우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도, 내가 너한테 기대지 않는 게 슬픈 일이야?"
성규의 말이 채 끝나기가 무섭게 우현의 고개는 두어번 끄덕여졌다. 왜? 성규가 조심스러운 물음을 던졌다. 그에 우현은 허탈한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왜냐고?
"꼭 좋아한다고 말해야만 이해할 수 있어?"
"……."
"그게 그렇게 알기 힘들어? 죽어라고 티냈어도 모르는거야, 아니면 알기가…싫은거야."
성규는 대답이 없었다.
여느때처럼 평상 위는 조용했다. 그러니까 불과 한달 전, 그 때처럼. 손목에 남겨졌던 상처를 발견하고 또 죽지말라고 말했었던 그 때처럼 고요했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소복히 내려오던 함박눈들은 어느새 말끔하게 사라져 한 층 더 시원한 바람만 남겼다는 것 뿐이었다. 시간만 흘렀을 뿐 변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우현이 힘들게 꺼낸 저의 고백에도 아무 말 없는 성규의 얼굴을 살피다가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김성규."
"응."
"하나만 묻고 싶어."
우현은 이제 금방이라도 쪽팔리게,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은 눈가에 힘을 꾹 주면서 입을 뗐다. 그러니까, 내 천사가. 지난 두어달 간 미칠만큼 나를 홀려버린 그런 천사가.
"천사가, 지옥을 선물할 수도 있어?"
정말이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믿어 의심치 않던 그런 천사 말이야. 우현이 꽁꽁 얼어붙은 손을 술병에서 떼어냈다.
성규는 아까처럼 대답이 없었다.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이라는 거 안다. 매일마다 밥은 챙겨 먹었냐는 말에, 귀찮아하면서도 대충 흘리듯이 먹었어,하는 거짓말에조차 눈길을 피하며 얼버무리는 사람. 그래서 거짓말에 불리한 상황이 닥칠 때마다 대답 대신 침묵으로 일관했던 그런 사람. 우현이 씁쓸하게 떨어지는 심장을 느끼며 한참동안이나 미동도 없는 성규의 표정을 눈으로 훑었다.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다. 그냥 딱, 나는 이만큼이나 아프다. 그걸 그렇게 설명하고 싶었으니까. 이번에도 답 없이 두 손만을 만지작거리던 성규가 잠시동안 저의 눈을 바라보고나서야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했다. 그에 우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몸을 움직였다. 그러니까 성규의 대답이 들려오기 전까지는, 두달 전 평상에서의 일과 변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건 모르겠는데."
조금은 순서가 바뀐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일어서려던 우현의 멱살을 잡아 챈 성규가 그대로 그 얼굴을 저에게 가까이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그렇게 부딪히듯이 입술이 닿은 우현의 눈동자는 아까와 달리 또렷하게 힘이 들어왔다. 키스를 하자, 멱살을 잡혔었던 그 때와는 다르게ㅡ김성규가 먼저다. 그리고 이것도. 세게 끌어당긴 것 치고는 지나치게 달콤하게 느껴지는 감촉을 느낄 새도 없이 눈에 보인 것은 성규의 꼭 감긴 두 눈이었다.
그 때와는 달리 예쁘게 감겨있는 눈꺼풀을 내려다보다 우현이 마저 눈을 따라 감았다. 맞물린 입을 통해 끼쳐오는 김성규의 담배 냄새. 두 병째 연겨푸 들이마셨던 저의 술 냄새가 뒤섞였지만 정말이지 세상에서 제일 달콤한 순간이었으리라. 시간이 가도 오래도록 기억될 만큼 그렇게.
"천국을 줄 순 있지."
입을 떼어낸 성규는 그렇게 말했다.
우현이 다시금 성규의 입술을 덮쳤다. 그런 것 같아. 확실히 천국이 맞아. 제가 무슨 대답을 뱉고있는지도 모를 만큼 자연스러운 속마음이었다. 우현이 뒤쪽으로 꺾어지려는 성규의 뒷통수를 한 손으로 받쳐 잡았다. 천국 맞아. 너는 정말로…천사가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