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는 꼭 재생하기~
11
"다들 점심 맛있게 먹어요."
민현의 목소리가 한적한 사무실을 공허하게 맴돌았다. 항상 어느 사회든, 구성원 안에 속하기란 어려운 법이었다. 나이를 먹었음에도 여적 제 밑에 팀원들이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게 뻔히 보이는 것을 팀장으로서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이었으니. 그놈의 낙하산이란 소문 하나 잘못 나서 인생 말아먹게 생겼네. 바지 뒷주머니에 지갑을 넣던 민현은 오늘도 혼자서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점을 찾아야 했다. 음식이 맛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웬만하면 자신의 회사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굳이 주어진 한 시간 남짓하는 자유시간 마저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바로 아랫층에 있는 구내 식당 대신 거리를 배회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아, 지금 자리가 다 찼는데요."
오늘 일진이 꼬이긴 꼬였나보다. 이십분을 걸어서 온 곳에는 정장을 입고 사원증을 걸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차있었다. 민현 또한 직장인 신분에 점심을 먹으러 나온 이 시간대는 아마도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많을 거라는 걸 간과하고 있었다. 대충 샌드위치라도 사서 들어가야 하나. 회사에서 구차하게 혼자 먹고 싶지는 않았던지라 괜스레 뒷머리만 매만지고 있자 제 셔츠 소매를 잡아오는 손길이 느껴졌다.
"저, 혹시 괜찮으시면 합석하실래요?"
"네?"
"아, 그게 저 혼자 밥 먹는데 테이블 한 개를 다 차지하는 것도 그렇고 그 쪽도 혼자인 것 같아서요."
저 이제 다 먹어가니까 금방 자리 비켜드릴게요. 불편해 하실 필요는 없는데. 작은 목소리로 수줍게 말해오는 것치고는 여자는 당돌하게 제 뜻을 내비쳤다. 다른 사람이랑 같이 먹는 걸 썩 내키지 않아했던 민현은 반대편 의자를 가르키는 여자의 눈짓에 자연스레 자리에 앉아 어느덧 메뉴판을 보고 있었다. 낯선 공간을 싫어하는 만큼이나 낯선 사람을 싫어하는 그가 처음으로 누군가와 함께 하는 점심은 대놓고 저에게 여기 불고기 덮밥이 맛있어요, 그걸로 시켜요. 라며 친히 제 몫의 음식까지 추천해주는 낯선 여자였다.
"그럼 불고기 덮밥 정식으로 하나 주세요."
딱히 메뉴를 생각해 둔 것도 아닌지라 보지도 않은 메뉴판을 종업원에게 건네며 민현이 말을 꺼내자 건너편에서 해맑게 웃어보이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짜 후회하지 않으실거예요. 저는 일주일에 두 번은 꼭 여기 불고기 덮밥 먹으려고 오거든요. 대뜸 이 음식점의 홍보대사라도 된 것 마냥 들떠있는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의 민현은 낯선 사람에게도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건네오는 것이 반은 부러웠고 또 나머지 반은 저 사람은 인생도 쉽게 살겠지, 라고 생각했었다. 사회로 나오자마자 순탄하게 풀릴 줄 알았던 제 인생은 유독 인간관계에서 꼬이는 듯했다. 공부든, 일이든 혼자서 하는 것들은 비단 자신만 노력하면 되는 결과였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는 뚜렷한 답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일주일 중 월요일이 되는 게 자신은 가장 두려웠거늘 '한경물산, 경영팀 ㅇㅇㅇ' 이라는 진한 글씨로 써져 있는 사원증을 목에 걸고 있는 그녀는 그저 행복하게만 보였더랬다.
"그러다 음식 묻을 것 같은데."
"네?"
"사원증 그렇게 걸고선 먹으면 음식 묻을 것 같은데 한 쪽으로 치워놓고 먹어요."
아, 감사합니다. 또 뭐가 그리 고마운지 제 말에 웃던 그녀는 냅킨통 위에 제 사원증을 올려두는 와중에도 감사하다는 말을 해왔다. 앳된 얼굴인 것 같은데 이제 막 졸업을 했나. 그럼 스물셋은 된 건가. 한경물산이면 자신의 회사 맞은편에 있는 곳에 있는 그 회사인가보네. 민현은 자신이 알아차리기도 훨씬 전부터 그녀에 대한 생각을 했다. 제 몫의 음식이 나오기도 전부터, ㅇㅇ가 멍한 얼굴로 있는 저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전부터 말이다. 도통 남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고민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그가 실로 처음으로 해보는 것이었다. 사람이 많아서 음식이 좀 늦게 나오죠?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면서 넌지시 건넨 그녀의 말이 아니었다면 민현의 한동안 얼빠진 얼굴은 돌아올 기미가 없을 뻔 했더랬지.
"괜찮아요, 어차피 점심시간도 한참 남았는데요. 뭐."
"동기분들이 기다리시지 않아요? 요즘 점심은 따로 먹어도 커피는 같이 먹고 그러던데."
"커피 같이 할 사람도 없으니까 걱정 안해도 돼요."
왜 자신이 그런 말까지 했을까. 은연중에 아주 동네방네 사내에서 왕따 당한다고 알리고 싶어했던 건지, 민현의 달싹이는 입은 좀처럼 다물지 못했다. 어차피 회사 들어가도 제 욕 들을 게 뻔한데 점심이라도 오래 먹어야 귀에서 피가 안 날 것 같거든요. 그래, 이게 다 음식이 늦게 나와서다. 사람으로 바글바글 한 식당에선 주문이 들어가고 나서도 삼십분이 다 되도록 나오지 않은 음식 때문이라고 민현은 결국 그렇게 머쓱하기만 한 제 변명을 해왔다지. 낯선 사람과 같이 밥을 먹는 것도 모자라서 이젠 제 사생활 얘기까지 하고 있는 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못나고 모자라 보였으니까.
"그건 그렇네요. 그럼 나도 오늘 늦게 들어가야겠다."
"네?"
"저도 사내 자칭타칭 왕따거든요. 어차피 들어가봤자 욕만 먹을텐데 그동안 뭣하러 일찍 들어갔는지 몰라요."
덤덤하게 꺼낸 ㅇㅇ의 말 한마디에 민현의 시선은 그녀에게서 떨어지지를 못했다. 그 쪽 밥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줄게요. 그래도 돼죠? 사람이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나 바보같이 넘겨짚을 때가 있다. 민현은 그 말을 듣고선 여러모로 반성을 해야했다. 자신보다 훨씬 수월한 인생을 살 것이라고 간과했던 그녀의 삶에 대해서나, 따지고 보면 혼자 밥을 먹으러 오는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이 왕따 당한다는 말을 꺼냈을 때 내심 우리들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는 자신에 대해서 모두 다. 굳이 비교하자면 같은 처지의 친구가 생긴 것만 같았다. 물론 그건 오로지 민현의 생각일테지만 자신이 몫의 음식이 어느새 반쯤 줄어있을 때까지 끊임없이 움직이는 그녀의 입술에, 시답잖은 것에도 큰 소리로 웃고 있는 자신의 웃음에 오늘 하루는 그리 나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헐,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구나. 저희 회사 점심시간이 짧아서 저 먼저 일어나 봐야 될 것 같은데."
"……아, 그래요?"
"먼저 일어나서 죄송해요. 밥 맛있게 드세요!"
밥이야 이미 자신이 뭘 먹고 있는지도 몰랐었다. 민현은 입으로 넘어가는 밥보다 사내에 마음 맞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매일 남 뒷담화나 하는 걸 듣는 것도 지친다고 하는 그녀의 사소한 얘기가 더 중요했으니까. 하루도 아닌 아주 짧은 시간에 먼저 자리를 떠난 그녀의 빈자리가 이렇게 허전해 보이는 것도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반쯤 남겨진 밥을 두고선 민현이 지갑을 챙기며 재빨리 일어나는 그 짧은 순간에 그녀와 자신이 다시 만나기를 바랬던 이유가. 또 만날 수 있으면 좋을텐데. 아는 거라고는 한경물산 경영팀이라고 적혀 있던 그녀의 사원증이 다인지라 이 다음의 인연이 있을지는 미지수였던 것도 아쉬웠다. 괜스레 섭섭한 기분이었다. …ㅇㅇㅇ?
"아, 이거 두고 갔구나."
축 쳐져 있던 민현의 입꼬리가 단번에 올라갔다. 미리 연락처라도 받아둘 걸 하는 아쉬움만이 남았을 때에 우연히 냅킨통에 놓여진 그녀의 사원증 하나로 인해, 민현이 연락할 구실이 생겨났다. 찰나에 바쁘게 나가느라 미처 챙기지 못한 그녀의 부주의함이 이리도 고마울 줄이야. 그는 그녀의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말투를 썩 좋아했었다. 그리고 뒤돌아보면 자신이 먼저 좋아했다고 먼 훗날 저의 짝사랑을 고백하는 ㅇㅇ의 말은 틀렸을 지도 모르겠지. 자신은 그 후에 우리가 사귀기도 오래 전부터, 오늘의 이 날 나는.
ㅇㅇ, 너에게 첫눈에 반했으니까.
What Does The Fox Say?
W.LIGHTER
"그래서 이번에 프로젝트도 나 혼자 다 했다니까?"
오늘은 ㅇㅇ를 만나서 같이 밥을 먹은지 2주가 가까워지는 날이었다. 그 때 민현이 그녀의 사원증을 들고선 제 윗선부터 아랫사람한테까지 다 물어가며 얻어낸 ㅇㅇ의 번호로 전화를 하기까지 수도 없이 했던 고민들이 우습게도 우리는 제법 오랜 시간을 같이 밥을 먹었고 서로의 시간이 날 때면 오늘처럼 밥 대신 카페에 주구장창 앉아 있는 날도 많았다. 그랬어? 응, 진짜 꼭 나 싫다면서 그럴 때만 ㅇㅇ씨, 하고 부르는 것도 완전 싫어. 존댓말을 끝까지 지켜주고 싶다며 말 끝마다 '-요'를 붙이는 것도 귀엽더니 이렇게 반말을 하는 것도 괜찮네. 괜히 빨대로 제 컵에 담긴 얼음들을 여러번 찔러넣던 ㅇㅇ의 입술이 샐쭉하니 나와있었다.
"그럼 내가 ㅇㅇ씨, 라고 하는 것도 싫어?"
"응?"
그러다가 문득 다정하게도 ㅇㅇ씨라는 호칭을 불러오는 민현으로 인해 그녀의 손 끝이 붉게 물들었다. ㅇㅇ는 제가 많은 시간을 함께 하는 회사 사람들보다 민현이 더 좋았다. 좋고 싫음의 문제를 판가름 할 수 있는 기준도 마땅하지 않았다만 어느 순간 그를 보면 좀처럼 남에게 얘기를 하지 않는 그녀가 제 얘기를 하느라 반나절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그걸 아무렇지 않게 고개까지 끄덕여 가며 들어주는 민현의 행동을 볼 때면 고작 만나는 시간은 점심시간 한 시간이 전부였음에도 일을 하는 순간에도, 퇴근할 때도 잠을 잘 때도 그가 떠올랐다.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팀원들이랑은 이젠 괜찮으려나. 서로 번호도 알고 있었으면서 연락 하는 것조차 먼저 하는게 두려웠던 그녀는 그래서 지금과 같이 민현이 ㅇㅇ야, 이건 어때? 이렇게 부르는 게 나아? 라는 참 아무것도 아닌 말에도 설레했더랬다.
"뭐야, 누가 보면 되게 친한 줄 알겠어."
"그럼 우리 안 친해?"
"응? 아니 그건 아닌데. 서로 막 이름을 이렇게 부르니까 좀 낯간지러워서."
"그럼 더 자주 불러야겠다. 너도 내 이름 불러."
이왕이면 오빠라고 해주면 더 좋을 것 같은데. 민현 오빠, 해봐. 테이블 가까이 팔을 뻗어 제 쪽으로 몸을 기울어 오는 민현의 얼굴이 밝았다. 꼭 사람 놀릴때만 저렇게 얼굴이 좋지. 그녀 딴에 외동으로 자란터라 ㅇㅇ에게는 '오빠'라는 단어가 생소하기만 했다. 어디를 가던 언니나 아저씨, 이모, 아줌마. 라는 호칭들은 잘만 쓰면서 식당에서 남들은 쉽게 부르는 오빠라는 말도 못했다. 오죽하면 어렸을 때 좋아하는 아이돌에게도 꼬박꼬박 존칭을 썼을까. 오빠라고 하는 건 더 싫어. 그냥 황민현이라고 해. 어차피 두 살밖에 차이도 안 나면서. 가까스로 사래가 걸리려는 목을 부여잡고 ㅇㅇ는 대답을 해보였다. 자신은 민현을 좋아하는만큼 모든 것에 서툴렀으니까.
"두 살이 얼마나 큰 차이인지 모르고 막 까부네, 이게."
"고작 떡국 두 번 더 먹은게 다지, 그럼 뭐가 더 낫다고?"
의례적으로 다들 그렇듯이 ㅇㅇ와 민현 사이도 처음엔 그렇게 시작을 했었다. 남들에겐 그저 좋은 친구, 좋은 오빠 동생으로 보일 사이. 더도 말고 딱 이 정도의 선으로만 있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서 그런건지, 아니면 차마 서로 말을 하기엔 부끄러워서 그랬는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그맘때 ㅇㅇ에게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민현 또한 만만치 않게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대로 밥만 같이 먹는 건 싫었다. 서로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시켜주자는 우스갯 소리를 하는 그녀도 싫었지만 그 말에 대놓고 싫다는 말도 못한 민현, 자신이 더 싫었었다. 점심시간은 짧았고 그녀와 함께 하는 시간은 한 시간으로는 턱없이 모자랐다. 이상하게, 만난다고 해서 별다른 얘기를 하는 것도 아니었으면서 서로의 시간이 맞지 않아 그녀와 같이 밥을 먹는 것조차 할 수 없는 날이면 그 날 하루가 종일 우울해지는 듯했다.
"그럼 나중에 우리가 더 가까워지면 오빠라고 해줘, 나도 그땐 너 부르는 애칭 하나 생각해둘게."
그래서 그런 말을 한 거였는데. 이대로 다른 사람에게 그녀를 뺏기고 싶지 않았다. 이제 고작해봐야 우리가 만난 지 한달의 반밖에 되지 않은 시점에 대놓고 제 마음을 표현하는 게 혹여 ㅇㅇ에게 부담스러울까 나름 고심하고 고심해서 꺼낸 말이었다. 민현은 오빠라는 단어에 집착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오히려 모르는 여자가 갑자기 오빠라고 부를 때는 온 인상을 다 찌푸리며 싫어한다고 거절했던 사람이 자신이었다. ㅇㅇ라고 두 단어로 그녀를 부를 수 있는 지금도 좋았지만 후에라도 정말 연인들끼리 애정에 묻힌 말로써 서로를 지칭한다면, 생각만으로도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왔다.
"되게 오빠라는 단어에 집착하시는 편이신가봐요, 황민현씨?"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러냐. 너는 사람 말이나 이상하게 해석하지 마."
나는 그럼 너한테 오빠라고 절대 안 불러야지. 그런데 결국 이 눈치라고는 없는 여자는 제 말을 저 딴 식으로나 해석하고 앉아 있었다지. 사람에게 애를 타본적이 언제였더라. 재수없게도 그동안의 연애에선 민현은 상대방보다 먼저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항상 고백을 받는 입장인 그는 본격적으로 마음을 확인하고 난 이후부터 제 나름의 좋아한다는 감정을 얻고는 했으니까. 그랬던 그가, 자신이 이상했다. 요즘따라 목이 자꾸만 말라갔다. 더군다나 사내에서 누가 봐도 ㅇㅇ에게 들이내는 것이 분명한 듯한 남자들에 대한 말을 듣고 있자면 그녀와 자신 사이는 점심 한끼를 해결하는 메이트도 아닌 것이, 이 예매한 관계가 대체 뭔가 싶었더랬다. 그리고 민현과 ㅇㅇ가 점심 뿐만이 아니라 퇴근을 하고 난 이후에 저녁까지 같이 함께한 지 언 서른번쯤 되었을까.
"나 오빠 좋아해."
오빠라고는 절대 부르지 않겠다고 제법 단단하게 각오를 했던 그녀가 먼저 오빠라고 불러왔을 때, 수줍은 내색이 가득해서 손으로 얼굴을 다 가리면서 그런 말을 해왔을 때는 정말이지 민현은 그토록 애가 타는 감정에 대한 답을 찾는 듯했다. 스물여섯의 제 나이가 이젠 얼마 남지 않았던 겨울의 중턱쯤에서 스물넷의 끝자락의 ㅇㅇ는 제 머리 위로 소복하게 쌓여만 가는 눈에도 아랑곳 않고 민현을 마주했었다. 그대로 ㅇㅇ의 붉기만 한 뺨을 두 손으로 감싼 후 부드럽게 맞춰오는 민현의 입술은 줄곧 귀에서 내려올 줄을 몰랐다. 어렸을 때에도 믿지 않았던 산타라는 존재가 어쩌면 지금 제게 선물을 준 건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져있었으니까. 참 일찍도 말한다. …뭐야, 그럼 황민현 너는 나 안 좋아해? 아 진짜 ㅇㅇㅇ, 너는 눈치 좀 키워야 돼. 응?
"나도 많이 좋아한다고, 이 바보야."
"그래서 뭐라고 불러줄까?"
"응?"
그녀를 집에 데려다 주는 동안에도 조금씩 내리고 있는 눈은 금세 공기를 차게 만들었다. 항상 따뜻하게 입고 다니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죽어도 말 안 듣지. 이미 겨울이 시작되고도 한참이나 지나갔음에도 검은 목폴라 하나에 얇은 코트만 입고 나온 그녀를 본 민현은 가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내일부터는 목도리도 하고 나오고 외투도 두터운 걸로 입고 나와. ㅇㅇ는 자신의 목 위로 제 머플러를 꼼꼼하게 매어준 민현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아까 전, 입을 맞출 때는 세상에서 제일 좋았던 것 같은데 막상 그 이후부터는 그녀, 자신과 민현 사이에 없었던 어색함까지 모조리 다 끌고 온 것처럼 할 말이 없어지는 듯했다. 내 말 듣고 있어? 응? 어, 응.
"꼭 이러고 있으니까 내가 애라도 된 것 같네."
"그럼 애기라고 불러줄까?"
응? 애, 애기라니. 제가 갓 태어나서 부모님을 제외하고 나서 저런 단어를 들을 날이 올 줄이야. 오글거리는 말들은 그녀의 인생에 있어 한 번도 해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었다. 심지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애기, 라는 말을 하며 제 두 볼에 뽀뽀까지 해가는 민현과 같은 부류의 사람은 본 적이 있을리가 만무했다. 원래도 다정한 건 알았지만 사람이 좋아한다는 말과 함께 다 와가는 자신의 집이 아쉽다고 하든가, 주말은 하루 종일 같이 있자는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무슨 내가 나이가 몇인데 애기래. 그냥 너가 이렇게 막 챙겨주니까 그게 그렇다는거지. 그래, 그렇다치자. 민현은 자신이 뱉은 말 하나에도 온갖 반응을 다 보이는 ㅇㅇ가 귀여워 죽을 지경이었다. 처음 같이 밥 먹자고 한 것도 그녀였고 고백을 해온 것도 그녀였는데 막상 또 이런 부분에서는 부끄러워 하는 걸 보면 볼수록 괜한 심술을 다 부리고 싶게 만들었다.
"잘 자, 우리 애기."
"아, 진짜 하지 말라고!"
알았어, 안 그럴게. 그는 매일 아침을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더구나 월요일 아침은 죽는 게 더 낫겠다 싶을 정도로 싫어했는데. 너 진짜 그놈의 애기라고 한 번만 더 부르면 오빠고 뭐고 다 없는 줄 알아! 오피스텔 정문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질색팔색 하는 ㅇㅇ를 볼 때면 하루라도 빨리 아침이 왔으면 하고 민현은 빌고 빌었더랬지. 월요병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고 예전 같았으면 일주일 중에 5일을 끔찍이나 싫어했을 민현이 내일 아침도, 월요일도 기대에 가득 차있는 건 비단 제 핸드폰 속에 '우리 애기' 라고 저장되어 있는 ㅇㅇ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여간, 저렇게 귀여워서 저걸 어쩐담. 가로등 불빛에 비춘 민현의 입김이 두둥실 떠올랐다.
"아, 빨리 내일 왔으면 좋겠다."
이제 와서 웃기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ㅇㅇ는 우리 사이가 영원할 거라고 믿었었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이 시간이 지나면 변하는 게 맞는 일인데 그 순리조차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는 민현을 사랑했다. 그와 함께라면 사계절이 다 예쁘고 좋았으며 누군가 자신을 욕하고 무시하더라도 견딜 수 있었다. 자신의 옆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비할데 없이 소중한 민현이 있었으니까. 언제나 제 손을 굳세게 잡아주던 사람이 황민현일줄 알았고 그랬으면 했다. 언제부터인지 바쁘다는 말이 잦아지는 것도, 우리 사이가 점점 무색하게 변질되는 것도 나는 다 참고 이겨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건 ㅇㅇ, 저에게나 민현에게나 여러가지로 지치는 일이었겠지.
돌고 돌아서 또다시 겨울이었다.
*
"네?"
"ㅇ대리는 왜 말 안 했어. 나는 황민현 대표랑 그런 사이인줄 몰랐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다니엘 덕분에 감기도 다 나았고 아픈 곳도 없었다. 무슨 일종의 트라우마인가. 오늘은 좋은 하루가 되겠다 싶은 날이면 꼭 이렇게 족치게 되는 건. 기가 막히게도 회사에 오자마자 또다시 소문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예전에도 거래처인 민현과 여러모로 얽히고 있어지만 오늘은 사내 분위기가 더 이상했다. 대놓고 확신한다는 듯이 말을 해오는 과장부터 다들 그러면 그렇지, 하는 회사 사람들의 눈치까지. 괜히 아침까지만 해도 아프지 않았던 게 거짓말처럼 위가 시큰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제가 황대표랑 무슨 사이라고 그러시는 건지."
"황대표가 직접 그랬어."
ㅇ대리랑 사귀다가 헤어졌다는데. 사람이 그렇게 애를 쓰면 ㅇㅇ씨도 좀 받아줘. 틀린 말도 아니었지만 저딴식의 남의 입에 오르고 내리는 것이 싫었다. 자기들이 자신에게 대해 얼마나 안다고 말도 안되는 훈계질까지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ㅇㅇ는 무엇보다 과장의 첫 마디에 다리의 힘이 풀리는 듯했다. 황민현이 직접 그랬다고요? 지금 자신이 이렇게 그의 이름을 부른다는 건 필시 또 그들의 입방아에 올려지는 거나 다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좀처럼 진정이 되질 않았다. 공과 사는 뚜렷하게 구분하는 ㅇㅇ는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 같은 눈을 해왔다. 쟤 저러다가 쓰러지겠네. 멀찌감치서 그녀를 본 성우는 출근하기가 무섭게 쏘아 붙이는 배려도 없는 과장의 행동에 빠른 걸음으로 ㅇㅇ에게 다가왔다.
"너 여기서 이러면 더 이상해져. 정신차려, ㅇㅇㅇ."
"……."
"우선 나가서 진정 좀 하고 들어와. 내가 과장한테는 잘 말할테니까."
다른 부서이면서도 친히 자신을 챙겨주는 성우 덕에 ㅇㅇ는 그 무성한 소문들을 뒤로 하고 나올 수가 있었다. 굳이 그녀는 회사 사람들을 신뢰하는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싫어했으면 싫어했지. 오직 돈 때문에 다니는 게 다인지라 이렇게 이따금씩 제가 소문에 휩싸이는 게 두렵지 않았다. 워낙에 남을 씹어대는 것이 일상인 그들은 언제나처럼 시간이 지나 시시해지는 순간이 오면 아무렇지 않게 다른 타깃을 찾아 갈게 눈에 훤했으니. 그러나 누구도 아닌 황민현이 직접 소문을 냈다는 건 웬만해선 버틸 재간이 나질 않았다. 그녀가 사람에 치여 사는 걸 싫어한다는 걸 아는 그가, 사내에 자신에 대한 말이 오가는 걸 끔찍이도 원치 않다는 걸 알고 있는 황민현이 직접, 제 입으로 그랬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었다. 아무리 끝이 난 사이라지만 이렇게나 막 나갈 수도 있는 건가.
-여보세요? 왜 갑자기 전화를 다 하고 그래?
"저 옹선배님. 아니, 옹성우. 나 부탁 좀 들어줘."
-나 지금 너네 과장 말리는 것도 벅차다야, 뭔데?
입술만 잘근잘근 씹어대고 있는 ㅇㅇ는 성우의 말에 곧장 대답을 하고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정각 10시를 향해 시침이 돌아가고 있는 시각, 출근하던 복장 그대로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라도 할 요량인지 그녀는 지하주차장 주차되어 있는 제 차의 문을 거칠게 닫았다. 좋게 끝내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다시 만나더라도 그저 스쳐 지나가기만 했으면 했다. 네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 알았으면 정말 그 때 너와 같이 밥을 먹는 게 아니었는데. 나가려는 널 붙잡는 게 아니었어.
"나 오늘 황민현 대표 거래처 문제로 외근 나간다고 과장 새끼한테 전해줘요."
What Does The Fox Say?
Episode 11, fin
안녕하세요, 라이터입니다.
우선 우리 독자님들 기다리게 해서 정말 정말 죄송하고 또 죄송합니다. 빨리 온다고 했는데 이렇게 늦어질 줄이야.....8^8
굳이 변명을 하자면 제가 독감에 걸렸어요. 독감에 폐결핵까지 의심받은 상황이라 격리를 당하고 있었는데 노트북도 챙겨가질 못했답니다ㅠㅠㅠ
물론 솔직히 어제까지만 해도 쓸 힘이 나지 않아서 쓰다가 자고 쓰고 약먹고 그러는 패턴이었어요 그래서 노트북이 있어도 그닥 필요는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긁적)
여하튼 구차한 제 변명일 뿐이에요ㅠㅠㅠㅠ 정말 기다리게 한 것만큼 좋은 글로 찾아오고 싶었는데 오늘은 완전 노잼각이라 또 한 번 죄송합니다....
심지어 이번 화는 다니엘이 안나와써요 미쳤다, 미쳤어....왜 또 분량이 이따구로 되었는지 잘 끊어야지 하면서 이 모양, 이 꼴이 되어서 여러모로 오늘 죄송타임각이네요...흙..
그래도 이번 왓더즈폭스에서 민현이도 나름 비중있는 주연급인 아이인지라 이렇게 차근차근 이야기를 풀어가는 편이 독자님한테도 저한테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는데 어떻게 오늘은 그냥 이 작가가 아직 다 낫지 못했구나 하고 넘어가주세욬ㅋㅋㅋㅋ큐큐ㅠㅠ
우리끼리의 이야기지만 저는 민현이도 많이 아낍니다. 물론 여기서 남주는 다니엘이지만 민현이도 나름 애정하는지라 자꾸만 찌통에 똥차같은 느낌으로 적는 게 민현이 사진을 앞에 두고 석고대죄라도 해야 할 것 같아요
오늘의 교훈: 죄송한 일은 애초에 저지르지 말자.
우리 독자님들은 아프지 말고 요즘 진짜 독감철이라 여러분들 모두 모두 조심하셔야 해요. 걸리면 답도 없다, 정말.
다음에 만날 때까지 우리 독자액희들은 건강 잘 챙기고 작가인 저는 다시 빨리 다음화를 쓰러 가겠습니다!
언제나 예쁜 댓글 달아주시는 독자님들 덕에 힘이 납니다. 사랑해요. 좋은 밤 보내용
#암호닉은 최신화에서 해주세요#
암호닉은 소중합니다. 확인하고 가시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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