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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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사이라고 하는 것 보다는 낫잖아.”
방금 전 발언으로 내가 녀석을 쏘아보자 녀석이 딴청을 피우며 말했다. 당당해도 너무 당당하셔서 내가 오히려 당황스러울 지경이다.
“같이 사는 데 우리가 가족도 아니면 뭐라고 설명해.”
“그래서 나오지 말라고 했는데.”
“그 놈이랑 네 손이 닿았는데 내가 가만히 있어?”
“악수 몰라? 악수!”
“악수고 뭐고 그 놈이랑 닿아서 좋을 거 없어.”
너보다는 훨씬 좋을 거 같은데. 이 생각도 또 읽으려나? 읽었어?
“그 놈은…….”
아니, 읽었냐고. 궁금한데. 읽었어? 이건 생각이 아니라 속으로 말하는 거라서 좀 다른가?
“그게 생각이야. 읽었어. 충분히 기분 나쁘니까 자극하지 마.”
녀석이 또 그 특유의 어두운 기운을 내뿜었다. 숨을 작게 들이쉬며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내 쪽으로 성큼 다가온 그가 입을 열었다.
“하여튼 말은 더럽게 안 들어요.”
그가 조심스럽게 내 어깨에 손을 올려서 어깨를 펴주었다. 방금 전 그에게서 느낀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린 모양이었다.
“조금만 무섭게 해도 벌벌 떨면서.”
내 옆에 있는 수건을 들고 그는 화장실로 향했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의 소년 같은 모습은 특유의 분위기를 훨씬 더 무섭게 부각시켰다. 그의 손이 닿은 어깨를 매만졌다.
“그리고.”
화장실 손잡이를 여는 걸 잠시 멈추며 그가 내게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어. 그렇게 될 사이였으니까.”
문이 열리고 그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이제 나를 볼 수 없으니 마음대로 생각해도 되겠지. 침대에 누워 몸을 뒹굴 거리며 방금 들은 말을 떠올렸다. 그렇게 될 사이였다고? 우리가 사귀게 될 사이였다는 건가.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라고 한 말에 그런 반응을 했던 걸까. 아니지, 그런 건 잘도 기억한다는 말도 했었는데. 내 모든 감각을 동원할 때가 왔구나. 정국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기 전에 생각을 끝내야 했다. 여자의 직감이란 걸 발휘해보자고.
정국이 매일 과거의 이야기를 하고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말을 하는 걸 듣다 보니 정말로 내가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린 것 같은 착각이 들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을 매끄럽게 다닌 내 인생은 그런 일이 일어날 한 치의 틈도 없었지만 녀석의 말과 행동을 가까이서 보고 있자니 마치 세뇌를 당하는 느낌도 들었고 무엇보다 궁금해졌다. 녀석 혼자 기억하고 있는 그게 무엇인지. 정황 상 녀석과 내가 특별한 사이인 것 같긴 했다. 그리고 사귀게 될 사이였고. 으. 머리 아파. 정여주 기억나는 거 있어? 있을 리가 없지. 모든 걸 다 떠나서 궁금했다. 그가 기억하길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 그가 말하는 대로 내가 나도 모르게 기억을 잃은 게 맞을까.
결국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하고 무의미한 생각을 끝냈다. 때마침 그가 샤워를 끝내고 밖으로 나왔다. 누운 자세에서 일어나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의 머리칼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가 샤워가 운의 끈을 매며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뭐야.”
“뭐가?”
“이번엔 또 무슨 불만인데.”
그가 나를 주시하며 머리카락을 털던 수건을 빨래 통에 집어넣었다.
“감추려고 해도 다 보여. 어설프게 감정을 숨기는 건 같은 인간들한테나 통해.”
나름대로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쓸데없는 에너지만 낭비했다. 불공평하다. 나는 하나도 모르는데 쟤는 다 알아. 전부다. 애초에 지고 시작하는 게임이잖아.
“아니야.”
“응?”
“지고 시작하는 거 아니라고.”
깜빡했다. 녀석과 있을 때는 생각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는 걸. 녀석은 여전히 무표정하게 말을 이었다.
“오히려 진 쪽은 나인데.”
어느 새 그가 내가 앉아있는 침대로 와서는 자신도 침대에 앉았다. 그의 머리칼에서 조금씩 흐르는 물방울이 내 허벅지에 떨어졌다. 허벅지에 닿는 차가운 느낌에 내 시선이 밑을 향하자 그가 떨어진 물방울을 닦아주려는 듯 젖은 내 바지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이 집에 처음 왔을 때부터 느낀 건데.”
그가 내 눈에 자신의 짙은 눈동자를 맞췄다. 그리고 내 쪽으로 조금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기억을 잃더니 성격이 변했어.”
“어떻게...?”
“예전엔 차가울 정도로 필요한 말만 했는데. 말도 많아지고 밝아졌어.”
“그래서 싫어?”
“그럴 리가. 좋아서 하는 말이야. 당신이 항상 이렇게 밝았으면 해.”
대화를 이어가며 점점 다가온 그로 인해 말을 할 때마다 그의 숨결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내가 몸을 뒤로 빼려고 해도 내 허벅지에 있는 그의 손이 나를 제지시켰다.
“덕분에 내가 좀 더 불리해졌지만.”
그가 다른 쪽 손으로 내 머리를 받쳐 들었다. 이번에도 그가 하는 이야기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왜 불리해져?
“넌 지금처럼 그 때도 날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말을 하면서 그는 부드러운 손길로 나를 침대에 눕혔다. 그의 말에 집중하느라 그런 건지는 몰라도 그의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넌 아니었어.”
말을 하려고 달싹 거리는 내 입술을 그가 막았다. 자신의 말에만 집중하란 듯이. 그의 손짓에 형광등이 꺼지고 침대 옆의 무드등만이 은은하게 빛났다. 이런 조명에도 생기지 않는 그의 그림자가 내 심장을 빨리 뛰게 만들었다.
“나만 혼자 당신을 사랑했다는 이야기야.”
“......”
“인간들의 표현으로는 짝사랑이라고 했던가.”
아주 잠깐이었지만 쓸쓸하게 빛나는 그의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그는 감정을 숨기는 것에 탁월해지만 이렇게 과거 이야기를 할 때면 짧은 순간이지만 슬픈 표정을 비추었다. 보는 내가 다 아플 정도로. 그가 나를 짝사랑했다니. 상상도 못한 전개인데. 어찌할 방도를 몰라 그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눈동자만 이리저리 돌리는 내게 그가 이불을 덮여주며 말했다.
“다녀올게.”
그가 내 턱 밑까지 이불을 끌어올려주었다.
“네 꿈에 내가 나왔으면 좋겠다.”
눈을 감았다. 그가 나가면서 도어락 소리가 들렸다. 그는 분명 집을 나갔는데 아직까지 내 앞에 있는 것만 같다. 숨결이 지금도 내 몸을 감싸는 듯하다. 그가 덮어준 이불을 꽉 끌어안았다. 오늘은 이불을 돌돌 두르고 잘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굳이 두르지 않아도 충분히 포근하다. 끝으로 이건 여자의 직감인데.
오늘은 그의 꿈을 꿀 것 같다.
독자님들도 오늘 해피 방탄몽 꾸셔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W. 사프란(Spring Croc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