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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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 - 90 >
아 제발 사고만 치지 말아라. 하늘에 대고 기도했다. 세상에 악마가 있다면 하나님도 존재하시겠지. 따지고 보면 정국이 큰일은 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나는 항상 걱정스러웠다. 특히나 오늘은 내가 아는 한 정국이 처음 해가 떠있을 때 밖으로 나온 날이다. 전부터 좁은 집에 있는 게 심심하다고 징징대던 녀석은 결국 오늘 나를 따라서 나왔다. 병원으로 실습을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는 내내 주변 사람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꼿꼿이 서있던 녀석은 하차할 역에 도착하자 누구보다도 빨리 지하철에서 내렸다. 내려서 바깥 공기를 들이마시는 정국의 모습은 영락없는 출근 시간의 지옥철을 처음 경험한 소년이었다. 저런 비주얼이 악마라니. 웃음을 참으며 녀석을 바라보고 있으니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너 내가 여기서 내리는 줄 어떻게 알았어?”
나는 내가 여기서 내린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이곳에서 내려버렸다. 사람들 틈에 부대껴서 내 생각을 읽을 수도 없었을 텐데.
“이 병원 자주 왔었잖아.”
“우리가?”
“들어가. 난 병자들로 가득한 곳은 취향이 아니라서.”
“넌 어디 있을 건데?”
“너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이쪽으로 올게.”
“끝날 때까지 어디 있으려고.”
“신경 꺼.”
“그래.”
녀석처럼 나도 무심하게 답했다. 그러나 속은 전혀 무심하지 않은 게 문제다. 아무래도 이거 지는 게임이 확실한 것 같다. 짝사랑은 무슨. 자기는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나도 자기 마음대로 해야 하고. 어딜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다가 돌멩이에 걸려서 넘어져라. 밑을 내려다보며 애꿎은 땅에 발목을 세워 신발코를 짓이겼다.
“네가 알아서 좋을 게 없어서 그래.”
놈이 몸을 살짝 숙여 나를 바라보며 퍽 다정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제 갈 길을 갔다. 작아지는 정국을 보며 무의식적으로 내 머리카락에 손을 올렸다.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녀석의 손이 닿았던 부근을 다시 매만졌다. 정국의 손이 내 생각보다 훨씬 컸던 탓에 손을 여러 번 움직여야했다. 오늘도 졌다. 내일은 이겨야지.
“뭐해.”
익숙한 목소리에 기도를 한다며 감았던 눈을 떴다. 바로 앞에 정국이 서있었다.
“그 사이에 종교라도 생긴 거야?”
“그건 아니지만…….”
“그 맞잡은 손이나 풀고 말하시지.”
그의 말에 맞잡았던 손을 황급히 풀었다. 정국이 사고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는 얘길 하면 그는 무슨 반응을 보이려나. 분명 못마땅해 할 것이다. 걸음을 옮기려는데 옆으로 구급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막 도착했다. 구급차가 선 쪽으로 몸을 돌렸다. 환자가 들것에 실려 나오고 의사, 간호사들이 신속하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 옆으로 가족으로 보이는 어린 남자 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한 여자 분께서 발을 동동 구르고 계셨다. 누구신지는 몰라도 괜찮아지시기를. 나는 이번에도 기도했다.
“안됐군.”
정국이 내 뒤쪽으로 다가왔다. 방금 실려 온 환자를 어떠한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얼굴로 주시하고 있었다. 고개를 뒤로 틀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들어가자마자 죽을 운명이야.”
그의 시선을 따라 방금 실려 온 환자가 병원 안으로 들어가고 남은 자리를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그렇게 많은 의료진들이 환자를 위해 노력했는데. 그럴 리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그를 보았다. 그는 자신의 왼팔을 들어 손목시계로 초를 세고 있었다. 삼. 이. 일. 일정한 속도와 억양으로 그가 말했다.
“운명이 다 했군.”
한쪽 볼을 씰룩거린 정국은 자신과는 단 하나의 상관도 없다는 듯이 발길을 돌렸다. 뭐야 이게. 한 사람의 죽음이 이렇게 간단히 치부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와 다른 방향인 병원 쪽으로 뛰어갔다. 그가 틀렸을 수도 있다. 틀렸을 것이다.
“정여주!”
나를 붙잡으려는 그를 뿌리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는 순간 내 시선을 끄는 건 어린 남자아이였다. 복도 벽에 기대 쭈그려 앉아 울고 있는. 불길한 예감은 항상 틀린 적이 없다고들 하는데 이번에도 그럴 것 같았다. 젠장. 눈물을 펑펑 쏟는 아이를 보자 괜히 마음이 아팠다.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조심스럽게 아이에게 건네주었다. 나를 흘끔 쳐다본 아이는 훌쩍거리기만 할 뿐 내 손수건을 받아들지는 않았다.
“괜찮아.”
콧물을 들이키며 아이가 나를 쳐다보자 내가 손수건을 살짝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아이는 내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그걸로 만족해야했다. 아이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성분께서 팅팅 부은 눈을 하고 아이를 데리러 오셨다.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이는 그 때, 정국이 내 손목을 채고는 나를 밖으로 이끌었다. 건물을 나와 병원 주차장을 지나서 병원으로부터 완벽하게 멀어져서야 그는 내 손목을 놓아주었다.
“내가 이래서 병원을 싫어하는 거야.”
녀석의 걸음에 맞추어 걷느라 차오른 숨을 골랐다. 녀석이 인상을 쓴 채로 나를 보았다. 뭐가 문제야.
“의사는 결국 하기로 한 거야?”
그가 인상을 풀지 않고 내게 물었다. 의사하려고 노력한 시간이 얼마인데. 당연하다는 답을 하기 위해 고르고 있던 숨을 멈추려고 했다.
“알아들었으니까 진정이나 해. 누가 보면 육상대회라도 한 줄 알겠어.”
갑자기 또 뭐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내게 이러는 건지 영문을 모르겠다. 내가 의사가 되고 싶은 게 못마땅한 건가? 대체 왜?
“어렵게 마음을 돌려놨더니 결국엔 제자리군.”
“마음을 돌렸다고?”
“인간들의 직업 중에 가장 무의미한 게 네가 원하는 그 의사야.”
“뭐?”
“각자 죽을 때는 정해져 있고 고작 의사들의 손짓 몇 번으로 그 운명이 바뀌지 않아.”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 입만 살아서는.
“인간들이 언제 삶을 다할 지 뻔히 보이는 입장에서 의사들이 하는 모든 행위가 의미 없어 보인다고.”
“말 함부로 하지 마.”
그의 발언이 무조건 옳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만약, 정말 인간의 운명이 정해져 있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전부 소용이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노력의 가치마저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모르니까. 모르잖아 우리는. 그러니까 악마들한테는 몰라도 우리한테는 전부 유의미한 것들이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가치 있는 것들을 해봤자 정해진 때가 돼 버리면 그만이야.”
그는 자신의 주장을 굽힐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죽으면 끝인데 굳이 그런 일을 하고 싶어?”
“죽음을 그런 식으로 단정 짓지 마.”
“맞는 얘기잖아.”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일보다 슬픈 일이야.”
“난 부러웠는데.”
“뚫린 입이라고 지껄이면 다인 줄 알아?”
“너야말로.”
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장난스러운 모습이 조금 보였던 눈에서 순식간에 뒤바뀐 눈빛에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괜히 주눅이 들었다.
“영겁의 시간을 산다는 게 얼마나 미칠 노릇인데.”
“......”
“너와 운명을 함께하길 바랐었어.”
“......”
“지금은 더 미친 듯이 갈구하고.”
그가 내 볼을 감싸고는 엄지손가락으로 천천히 쓸었다.
“백 일 뒤에도 우리가 여전히 함께였으면 좋겠어.”
초록글로 올라갔더라구요!! 고맙습니다ㅠㅠ
아직 글 초반부랍니다. 같이 달려주셔서 감사해요~ ♥
W. 사프란(Spring Croc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