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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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 - 88 >
현관에 있어야 할 신발이 보이지 않았다. 어딜 간 거야. 집 안을 둘러보아도 정국은 없었다. 녀석이 이 시간에 운동을 가긴했지만 이렇게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은 적은 없었다. 아주 나가버린 건 아니겠지. 그 날의 대화 때문에 속이 상해 별다른 말을 나누지 않았던 터라 걱정이 밀려왔다. 그냥 좀 토라진 건데. 그냥 아무렇지 않게 대할 걸 그랬다. 그래도 이런 기분으로 대하기에는 좀 별로잖아. 아 모르겠다. 아주 가버린 거면 뭐 어때. 이게 원래 내 일상인데. 며칠 함께했다고 정만 들었다. 나도 나지만 정국도 자존심 하나는 알아줘야 했다. 내가 토라져서 말을 건네지 않는다고 정국도 내게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엄마랑 싸워도 길어봤자 하루인데 벌써 이틀째다. 언제까지 가나 두고 보자. 끝에는 내가 먼저 말을 걸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언제 오냐고. 전정국. 사람 불안하게.
걱정하면서도 정작 나는 침대를 뒹굴 거리면서 핸드폰을 쳐다보고 있었다. 행동과 생각이 모순적이긴 하지만 걱정하는 건 맞다. 걱정스럽고. 아주 가버린 건 아닌지 불안하기도 하고. 왜 내가 이런 걱정을 하는 건지 의아하기도 하고. 복잡한 심경을 달래려면 폰이 최고다. 말도 안 되는 신념하에 침대에서 몇 번을 뒹굴 거리다가 결국 핸드폰을 놓쳐 코를 박았다. 방금 폰이 떨어진 코를 문질렀다. 안 그래도 낮은 콧대가 더 낮아진 느낌적인 느낌. 아프기도 겁나게 아프다. 내가 한 실수라 탓을 할 수 없는 건 더 짜증났다.
“아 그래서 전정국 언제 오냐고오!!”
몸을 일으키며 허공에 대고 외쳤다. 이제 삐쳐서 말도 안하고 그런 거 안 할 테니까 그냥 와라. 돌아오면 누나가 성가실 정도로 말 걸어줄게. 원래 혼자 살 때는 몰랐는데 같이 산 이후로 혼자 있으려니 여간 심심한 것도 사실이었다. 요 이틀 동안 대화도 안하고 어떻게 버틴 거지. 오면 맛있는 거라도 해먹여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녀석은 좋아하는 음식이 없다. 그럼 뭘 해야 하려나. 생각에 잠겨 눈알을 굴리는데 선반 위에 하나씩 가지런히 놓인 흑장미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색이라 있어 보이긴 하는데 꽃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섬뜩하다. 그 때 녀석의 목소리가 마치 저주를 거는 것 같기도 했고. 아니 백 일이 될 때까지는 있는다면서 왜 안 들어오고 난리냐고! 며칠 만에 관계가 역전되었다. 내가 쩔쩔매고 있어 놈한테. 언제는 자기가 날 짝사랑했다고 하더니. 이건 뭐 지는 걸 넘어서서 항복이다. 항복.
그렇게 항복을 인정한 내가 옷을 갈아입고 녀석을 찾으러 나섰다. 이번 주말에는 핸드폰부터 사줘야겠다. 핸드폰 비용은 내가 대야 하는 건가. 통장 잔고가 얼마였더라. 통장은 무슨, 텅장일 게 뻔했다. 쓸데없이 또 복잡하다. 애초에 전정국이 우리나라 사람이긴 해? 민증은 있어? 생긴 건 한국인처럼 생겼다. 한국말도 잘하고. 아……. 진짜 뭐야. 평화롭고 단조로운 내 삶에 녀석이 들어온 건 꽤나 큰 사건이고 적응하려나 싶으면 그건 또 아니고. 이젠 좀 받아들일 수 있겠다 싶으면 아닌 것 같고. 내가 내 마음을 알 수가 없다. 녀석도 그럴까. 녀석에게 있어서 난 뭘까. 적어도 내가 간단하게 정의 내려질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어디로 갈지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내가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옆집의 문도 열렸다.
“또 와.”
“원한다면.”
석진 오빠와 정국의 목소리가 순서대로 들렸다. 정국이 석진 오빠의 집에서 나왔다. 뭐야, 둘이 친해? 집까지 드나드는 사이로 발전한 거야? 그 동안 석진 오빠에게 끼니를 얻어먹으면서 나름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나보다 정국이랑 더 친해 보이는 광경이다. 전정국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김석진이랑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한 장본인이 아닌가. 내 얼굴에서 당황함이 묻어나왔다. 내 마음은 신경도 안쓰는 듯 둘은 나를 보고 각자의 방식으로 인사를 했다. 석진 오빠는 안녕하며 손을 흔들었고 전정국은 고개는 그대로 두고 눈동자만 옆으로 옮겨서 나를 잠깐 보았다.
둘을 잠시 동안 보고 있던 나는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뒤이어 정국도 집으로 들어왔다. 서로 눈을 마주친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쳐다보기만 하다가 눈길을 돌렸다. 껄끄러운 침묵이 이어지고 먼저 입을 연 건 정국이었다.
“나가려던 거 아니었어?”
“아... 음…….”
내가 답을 망설이자 정국은 그런 나를 계속 보기만 했다. 녀석은 내 마음을 이미 다 알고 있을 텐데. 직접 입으로 말해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네가 하도 안 오길래. 걱정이 되서…….”
내 말을 들은 정국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이게 웃긴 일인가. 웃음을 참으려 하던 녀석은 끝내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누굴 걱정해.”
“아니, 뭐... 꼭 걱정되기 보다는. 그냥…….”
“이틀 동안 말도 걸기 힘들만큼 삐쳐있던 사람이 누군데.”
“그건 네가 말을 그렇게 하니까! 그래…….”
“지금은 풀렸어?”
내게 물어오는 정국이 눈빛이 다정했다. 저런 눈빛을 쏘는데 아직 풀리지 않았다고 어떻게 말해. 대화하지 않은 이틀 동안 힘들었던 쪽은 정국보다는 나인 것 같고.
“그건 아닌데.”
정국이 내 머리칼을 넘겨주며 말했다. 그가 내 머리카락을 귀에 꽂아주었다.
“나도 힘들었어. 너보다 내가 더.”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아 보이긴 하지만 네가 그렇다고 하니 그런 걸로 해두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 이틀 동안 알게 모르게 정국의 눈치를 보느라 힘들었다. 이제 묻고 싶은 걸 물을 차례이다.
“석진 오빠 집은 왜 간 거야?”
“오빠?”
“둘이 친해?”
“언제부터 김석진이 네 오빠야?”
“나보고 친해지지 말라더니. 자기는 친해지셨다?”
“친해지지말랬더니 오빠라고 부르는 사이가 되셨다?”
“아 그럼, 나보다 나이가 많은데 오빠라고 하지 삼촌이라고 해?”
각자의 말을 이어가던 끝에 결국 내가 먼저 발끈했다. 이놈의 성깔은 도무지 여유로운 척을 하며 답할 틈을 주질 않는다. 하루라도 흥분하지 않으면 몸뚱아리에 가시가 돋나.
“김석진이 나보다 오래 살긴 했던데. 나도 너보다 나이 많잖아.”
“네가? 생긴 것만 봐도 내 동생뻘인데?”
“너 스물다섯이잖아. 난 적어도 천 살이야."
“그건 악마 나이고! 인간 나이로 따지면 넌 적어도…….”
정국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했다. 나보다 어린 건 맞는데 몇 살이나 어려 보이는지. 나보다 피부도 좋고 얼굴선도 적당히 굵어서 미성년자 딱지를 뗀 지 얼마 안 된 얼굴이라고 해도 믿어졌다. 하지만 그건 내가 너무 슬프니까.
“음... 스물하나...?”
“너 스물다섯이라며.”
“응.”
“싫어.”
“싫다고? 야, 젊은 게 좋은 거다?”
“말했잖아. 너랑 운명을 같이 했으면 좋겠다고. 나도 스물다섯 할래.”
정국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애처럼 떼를 썼다. 이 의미 없는 나이 논쟁은 어쩌다 이렇게 돼 버렸을까. 눈을 가느다랗게 만들어 정국의 오밀조밀한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네 비주얼이 스물다섯은 아닌데…….”
“너랑 같은 나이면 너랑 같이 죽을 수 있잖아.”
말만 들어서는 농담으로 여겨졌지만 내게 말을 해오는 정국의 표정은 나름 결연해보였다. 내가 치킨을 먹을지 피자를 먹을지 고민할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이게 그만큼 중요한 문제인가. 나는 녀석을 이해해보기로 했다.
“네가 알아야할 게 있는데 평균 수명이 여자가 좀 더 길어.”
“그래서?”
“네가 굳이 나랑 같이 생을 마감하고 싶다면... 뭐 아주 먼 훗날이긴 하지만. 나보다 어려야 한다는 이야기야.”
“얼마나?”
“그건 뭐... 적당히 알아서 어리면 되겠지.??”
내 말은 들은 정국은 고개를 갸웃 거리더니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내 녀석은 손가락을 들어 내 이마부터 시작해 콧등, 턱까지 쭉 쓸어내렸다. 뭐하는 짓이야.
“내가 너보다 어려야 한다는 게 믿기질 않아서.”
“누가 봐도 네가 더 어려보이거든?”
“난 네가 더 애 같은데.”
애라니. 내가? 누가 할 소리를. 지금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나 놀리는 거지? 이렇게 된 거 우리는 나이 상관없이 그냥 원래 지냈던 대로 사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하고.
“나한테 오빠라고 해봐.”
“뭐어?"
“김석진은 듣는데 나는 못 듣는 건 억울하잖아.”
“헐.”
“좋아. 그럼, 나는 너한테 누나라고 할 테니까 넌 나한테 오빠라고 해.”
이 말도 안 되는 논리에 할 말을 잃은 채 입만 벌리고 정국을 보았다. 눈동자가 흐리멍텅해졌다. 이건 무슨 새로운 호적정리냐고.
“아, 그렇게 해. 하자고.”
녀석이 떼를 쓰기 시작했다. 아까 누나가 어색했다는 말 취소다. 얘 어린애야. 완전 어린애. 옷깃을 잡고 오빠라고 불러 달라고 하는데 도저히 말길을 알아들을 것 같지 않다. 김석진이 듣는 거면 자기도 들어야 한다는데 대체 이게 무슨 논리인지. 그러는 자기도 석진 오빠한테 형이라고 안하면서. 나보고는 왜 하라는 거야.
“내가 이래봬도 천살은 족히 넘어따고!!”
이제는 생떼를 쓰고 있다. 다섯 살짜리 애가 마트에서 과자를 사달라고 조를 때 어머니들의 마음이 이해가 되려고 한다. 나는 내 자식이 그러면 조곤조곤 과자를 사주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주고 아이가 더 이상 피해를 주지 않게 데리고 나오는 현명한 엄마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오빠.”
과자를 사주었다.
과자를 받아 든 아이가 활짝 웃는다. 그래,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저 미소를 볼 수 있다면야. 그가 이렇게 활짝 웃는 모습은 몇 번 볼 수 없으니까. 웃으니까 훨씬 좋다.
“너도.”
정국이 자신의 양손 검지를 내 입꼬리에 가져갔다. 자신의 손가락으로 내 입꼬리를 올려주면서 그가 말했다.
“웃을 때 훨씬 예뻐.”
“......”
“아닐 때도 예쁘고.”
그의 뺨이 조금 붉어진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고맙습니다♥ 남은 주말 잘 보내세용!
내일 또 올게요ㅎ
W. 사프란(Spring Croc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