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성] 0214, 더 파라디(The paradis) 15
w.규닝
15. 달이 차고 기운다
딱,하고 나무젓가락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고서야 성열이 멍하던 눈빛을 바로했다. 아, 얘기하느라 다 불었겠다. 호원이 동우와 머리를 때리며 놀던 장난질을 그만두고 컵라면의 뚜껑을 열었다. 진짜? 나도. 그에 딱밤을 맞은 이마를 문지르던 동우도 따라 자세를 고쳐 잡았다.
"진짜 언제까지 이렇게 도망다녀야 하냐."
"그러게 누가 선호 형한테 집 주소 알려주래?"
씨바알. 힘없이 라면을 뒤적거리던 성열이 제 귀에 들려오는 낯익은 이름에 욕지거리를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긋지긋한 인간. 도대체 얼마나 더 괴롭혀야 직성이 풀리려는지 모르겠다. 성열이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라면을 훅,훅 불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이래저래 신경쓸 게 많은데, 요즘들어 하나 더 늘어난 걱정거리도 꽤나 성가시게 본인을 괴롭혀오고만 있었다.
「바빠」오후 5:17
보란듯이 테이블 위에 올려둔 핸드폰이 진동음을 내며 울었다. 라면 한 젓가락을 입에 문 성열의 눈이 번쩍이며 액정으로 날아가 꽂혔다. 얄미운 저의 셀카와 함께 떠오른 문구는 바쁘다는 두 글자. 라면을 목구멍으로 급하게 삼킨 성열이 우악스럽게 핸드폰을 주워들어 채팅 창을 켰다. 바쁘면 다야? 나도 바쁘긴 마찬가지거든요, 이 사람아.
오후 5:18「5분만 만나자고요」
오후 5:18「5분만」
「그냥 그거 갖고 살아」오후 5:19
「귀찮으니까」오후 5:20
타자는 또 엄청 느린 주제에, 몇일째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는 상대방에 열이 오른 성열이 급기야는 손부채질을 하며 핸드폰을 뒤집어 놓았다. 만나기 귀찮으니까 핸드폰을 바꾸자고? 이건 대체 무슨 논리냐고. 성열은 어느새 저의 존재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수다를 떨고 있는 호원과 동우의 옆에서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생긴 거는 흡사 저승사자 못지 않게 어두침침 해가지곤. 말투도,심지어 하는 행동마저 딱딱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다. 그 때는 분명 울고 있기에 그저 안 좋은 사연이 있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을 뿐 별다른 생각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성열이 머릿속으로 그 날의 밤을 떠올렸다. 대문 앞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신발에 눈이 들어와 꽁꽁 얼어버린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기다리기를 몇십분 째, 언덕 위를 올라온 것은 그 남자와 같이 나갔던 눈이 째진 남자 뿐이었다. 급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저를 쌩하니 지나친 남자는 그대로 옥탑방 위를 향해 계단을 올랐다. 성열은 코를 훌쩍이며 다시금 대문 앞에 몸을 수그렸다. 추워 죽겠는데, 도대체 언제 오는거야.
잘은 몰라도, 악연이 가득한 집이라고 생각했다. 뒤늦게 떠오른 거지만 방금 전 지나쳤던 그 남자는 편의점의 사치남이 분명했다. 그리고나서 떠오른 저승사자는 버스 정류장과, 강도를 연상케 했던 새까만 남자. 성열은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섞인 인연들에 고개를 저으며 머리를 쳐댔다. 무슨 우연이 이렇게 많았는지. 어서 핸드폰이나 돌려 받고 집으로 돌아가 몸을 뉘여야겠다고 생각한 성열은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대문 앞에서 남자의 발걸음을 기다리고만 있었다.
그러기를 다시 몇십분. 수도 없이 통화버튼을 눌렀어도 돌아오는 것은 지독히도 긴 수화연결음 뿐이었다.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가라앉히고, 성열은 그제서야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일단은 추우니까 다른 날에 연락하기로 마음 먹고 내려가던 길이었으리라. 성열이 달달 떨리는 이를 부딪히며 발걸음을 빨리하기 시작했을 때 마주한 건 그토록 기다렸던 저승사자 비슷한 새까만 남자였다. 성열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남자의 형체를 가늠했다. 저 사람, 오라니까 오지는 않고 저기서 뭐하는거야. 성열이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남자의 인영에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더해가 다가갔다.
차가운 밤공기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노랗게 빛을 내는 가로등은, 그토록 기다렸던 그 남자를 뚜렷하게 비춰내고 있었다. 성열이 한쪽 눈썹을 찡그린 채 남자의 앞에 다가가 섰다. 가로등에 몸을 기댄 남자는 눈이 채 녹지 않아 더러운 바닥은 신경조차 쓰이지 않는 모양인지 털퍼덕 주저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차가운 바닥에 떨어진 남자의 손 주변에는 깨어진 소주병 두개와 아직 절반은 남아있는 또다른 병 하나가 어지럽게 놓여있었다. 성열이 머리를 기웃하다가 남자의 얼굴에 가깝게 쭈그리고 앉았다. 저기요.
"핸드폰 바꾸게 오라니까 왜 안오고, 이런 데에 앉아있어요?"
성열이 남자의 얼굴 위로 제 손바닥을 휘휘 저었다.
"술 먹었어요?"
성열이 제 물음에도 대답 없는 남자에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손바닥으로 바람을 일으켰다. 부채질하듯이 떠안게 된 냄새는 영락없는 술냄새. 아무래도 옆에 둔 술병들은 남자가 마신 게 맞는 모양이었다. 성열이 휴,하는 한숨을 내쉬고 꽁꽁 언 두 손을 무릎 위로 올려두었다.
"핸드폰 좀 줘봐요. 바꿔 가게."
아무래도 잡고 있는 의식이 없는 것 같아 고민 끝에 꺼낸 말이었다. 엄동설한에 길거리에 나앉아 있는 사람이라지만, 그 옥탑방까지 이 남자를 업다시피 끌고 데려갈 자신은 없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데려다주지 못해 미안하지만 핸드폰만은 바꿔가야겠다고 생각한 성열이 웅얼거리듯이 혼잣말을 뱉고 있는 남자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실례좀. 만취상태의 남자에게 심심한 사과를 건넨 성열이 어둡게 인영이 진 주머니를 찾아 손을 뻗으려고 할 때였다.
"만지지, 마."
힘없이 휘둘린 남자의 손이 성열의 팔을 툭, 쳐내었다. 성열이 짐짓 인상을 찌푸렸다. 떡이 되도록 취한 주제에 제 몸 보호할 의식 정도는 있나보네. 성열이 한심스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저기요. 그 쪽 해치는 거 아니거든요. 생긴 건 꼭,
"강도같이 생긴 주제에, 누구한테 강도 취급이야."
"…김성규."
"핸드폰 찾아갈게요."
이번에는 한층 더 조심스러운 손동작으로 남자의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성열이 주머니 안을 이리저리 헤집었다. 이건 열쇠. 이건 이어폰. 그렇게 저의 핸드폰을 찾아 뒤적거리던 손을 멈추게 한 것은 또 남자의 팔이었다. 성열의 손을 바깥으로 뺀 남자의 손은 아까보다 센 힘으로 성열의 팔을 뿌리쳤다. 그렇게 한참을 남자의 주머니와 씨름하던 성열이 답답한 목소리를 높였다. 아오!씨.
"그만 울고, 내 핸드폰 좀 돌려주면 안돼요? 나 집에 가야된다니까!"
"……."
"아 씨이발. 추워 죽겠네. 이게 무슨 개고생이야. 내 말 듣고 있기는 해요?"
성열이 이제는 짜증으로 일그러진 얼굴으로 남자의 고개에 눈을 맞추었다. 까만 머리칼이 비록, 숙여진 눈을 가리고 있기는 했지만 알 수 있었다. 성열이 세게 다문 입술을 물어뜯고 잠시 후에는 두번째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됐다. 정신도 없는 사람한테 화를 내봤자 뭐하겠어. 성열은 마지막으로 뻗어 본 손조차 저지당한 후에는 답답한 제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린 후에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나 가요."
"……."
"나중에 연락할테니까, 핸드폰은 정신 있을 때 주고."
성열이 남자의 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추위때문에 벌게진 귀 끝이 보는것만으로도 시려보여 눈살을 찌푸리고 혀를 찼다. 술이 웬수지, 이러다가 진짜 죽기라도 하면 그거야말로 개죽음이 아닐 수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성열은 제 목에 걸치고 있던 귀마개를 신경질적으로 벗었다. 내가 아끼는건데 씨발. 불평스러운 입을 쭈욱 내밀어 남자의 새빨갛게 얼어붙은 귀에 귀마개를 씌워 준 성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홉시 뉴스에 그 쪽 얼어죽었다는 소식 듣고 죄책감 느끼긴 싫으니까 준 거에요. 핸드폰 돌려줄 때 같이 돌려줘야 하고. 오케이?"
성열이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후에 코를 훌쩍였다.
울지 마요. 날씨도 추운데 눈물 빼면 체온이 더 내려갈텐데. 성열이 아직까지 푹 꺼져 있는 남자의 고개를 가만히 내려보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잘생긴 사람은 울어도 잘생겼네. 원빈이 울면 저런 느낌이려나. 그런 시덥잖은 생각들이 성열의 머릿속을 꿰차고 들었다. 성열이 가던 걸음을 멈추어 남자를 잠깐 돌아다보았다. 여전히 그대로인 고개. 성열이 추위 때문에 얼얼해진 코 끝을 소매로 훔쳤다가 다시 발길을 돌렸었다.
*
"장동우."
"응?"
"얼굴이 너무 가까워."
호원이 제 앞까지 다가온 동우의 이마를 꾸욱 누르면서 말했다. 그와 동시에 쭈루룩, 빠른 속도로 들이킨 면발이 동우에게로 국물을 튀겼다. 아! 그제서야 얼굴을 뒤로 뺀 동우가 씨이,하는 목소리를 내었다. 뜨겁잖아! 제게 튀긴 국물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컵라면에 코를 박은 호원에게 목소리를 높인 동우가 계속해서 툴툴댔다.
그러다가 동우의 시선이 호원의 입술에 머물렀다. 문득 쳐다본 것 치고는 화들짝 놀란 동우가 손에 들었던 젓가락을 반사적으로 컵라면 안으로 쿡 찔러넣었다. 아, 또 쳐다봤다. 동우가 당황감에 물든 머릿속을 헤치려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다. 이러다가 습관 되겠어. 머릿속은 이미 옥탑방에서의 순간을 떠올리고 있으면서 그런 생각을 떨치려 헛기침을 해보기도 했다.
"답답하기는."
그러니까 그 날, 그렇게 말하며 호원의 머리통을 발로 꾸욱 밀어버린 건 성규의 잘못이었다.
우현이 사 놓은 통 아이스크림을 숟가락으로 퍼올리면서, 카드게임을 하는 호원과 동우의 뒤에 서 있던 성규가 느닷없이 한 행동이었다. 갑자기 저의 왼발을 들어올리더니 호원의 뒷통수를 눌러버린 성규는 그대로 호원과 동우의 입이 닿자 몸을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거실 바닥에 배를 깔고 드러누워 얼굴을 맞대고 있던 둘은 갑작스러운 이질감이 느껴지는 입술을 인식하기도 전에 우악스러운 비명과 함께 몸을 뺐었다.
"아! 뭐야!"
"뭐뭐뭐뭐야!"
"…야, 너네."
최대치로 뒤로 무른 호원과 동우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며 얼빵한 악소리를 내고 있을 때에는, 한껏 기가막힌 우현의 목소리도 끼어들었다. 소파에 드러누워 티비를 시청중이던 우현의 얼굴이 보란듯이 리얼하게 구겨짐과 동시에 입술을 틀어막은 둘이 짜기라도 한 것처럼 손사래를 쳤다. 일,일부러 한 게 아니라!
"성규형이 밀었어! 남우현 너도 봤지?"
"…변태새끼들…."
"그 반응 뭔데????"
너희가 그런 사이일 줄은 몰랐다,하는 눈빛으로 저희 둘을 찬찬히 번갈아보는 우현의 눈빛에 참다 못한 호원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아아아니라고, 그렇게 속사포로 변명을 해오는 호원의 옆에는 한껏 동그래진 눈으로 입술을 막고 있는 동우가 있었다.
아직 주현이랑도 뽀뽀는, 안했는데. 그러려고 하지 않아도 급격하게 밀려드는 의미부여에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진정시키려 눈을 힘껏 감았다가 뜬 동우가 펄펄 뛰고 있는 호원의 얼굴을 쳐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대박, 대박. 진짜 주현이랑도 아직이었는데. 급기야는 몸을 반대쪽으로 틀어 앉은 동우가 등 뒤에 꽂혀오는 저의 이름에도 꿋꿋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건 진짜 대박사건. 몇번이나 손등으로 입술을 훔친 동우가 한참 후에서야 고개를 돌려 호원을 마주했다. 이, 이건 사고지…? 개미만한 목소리로 호원의 동의를 구하는 동우는 딱 보기에도 겁을 집어먹은 산양의 모습같았다. 호원이 오른손으로 동우의 뒷통수를 내리치며 대답했다. 그럼 일부러 그랬겠냐 띨빡아! 뭐가 좋다고? 호원의 표정도 동우처럼 경악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겨우겨우 자세를 바로잡은 둘은 아까보다 조금은 더, 어딘가 모르게 조심스러운 기색을 띠며 카드게임을 이어나갔다.
못볼 걸 봤어. 찡그린 두 눈을 잠시동안 가렸던 우현이 혀를 차며 채널을 돌렸다. 그런 우현의 옆에 걸어와 앉은 성규가 멍하니 티비 채널에 눈을 고정했다. 뽀뽀 한 번 가지고 호들갑은. 성규가 아이스크림을 입 안 가득 퍼넣으며 생각했다. 서투른가보네. 이 새끼는 선순데. 성규가 오른쪽으로 시선을 비켜 우현의 옆모습을 훔쳐다보았다.
개새끼 이거 먹을래? 큼지막하게 퍼올린 아이스크림을 우현에게 건네면서 한 말이었다. 응. 한껏 찌푸렸던 인상을 편 우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스러운 둘과 티비 화면을 번갈아보던 우현이 입만 벌려 아이스크림을 받아먹었다.
*
그 때 이후로는 얼굴이 조금만 가까워도 민감해진 것이 버릇이었다. 물론 둘 다에게 나타난 이상현상이기도 하고. 호원이 동우에게서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걷어내지를 못했다.
"야, 너."
"어어?"
"애니팡이 한물 간지가 언젠데 아직도 그걸 해?"
"…왜, 왜? 재밌는데."
"혼자만 처 하라고. 맨날 하트 좀 보내지 말고."
호원이 동우를 노려보며 이를 으득 갈았다. 기분 이상하니까. 뒷 말을 꺼내면 괜히 분위기까지 이상해질 것 같아 입 속으로 삼켜두기로 했다. 동우가 난데없는 호원의 시비에 입술을 비죽이면서 라면을 집었다.
"아! 답답해 죽겠네!"
그러다가 들려오는 성열의 목소리에 적대적이던 둘의 시선이 성열에게로 나란히 향했다. 잠시동안 안중에도 없던 성열은 아직까지도 핸드폰 액정을 노려보며 노발대발을 하고 있었다. 성열은 자잘한 욕지거리를 남발하며 자리에서 고쳐 앉았다. 분노가 가득한 손가락은 분명 입에서 뱉는 욕과 마찬가지의 것을 적어내리고 있을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호원이 그런 성열을 쳐다보다가 종래에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핸드폰 안 바꿨냐? 징글징글하다."
"그러니까 이 새끼가 자꾸! 바꾸자는데 이게 자꾸!"
"일어나. 성규형네 집 가게."
호원이 성열의 머리를 토닥토닥, 쓰다듬은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 여섯시까지 가겠다고 문자 했으니까. 그렇게 호원을 따라 일어선 동우가 분노에 달해있는 성열을 쳐다보다가 호원의 뒷모습을 번갈아보기를 여러 번. 그를 쪼르르 뒤쫓아가다가 심호흡을 하기도 여러번. 자꾸 생각하면 정신 건강에 안 좋겠지. 그러다가는 정신없이 고개를 가로젓다가 하마터면 국물을 흘릴 뻔 해 입을 떠억 벌린 동우가 스스로 침착하자고 다짐하며 나중에는ㅡ 괜히 저의 신발코를 바닥에 툭툭 차보는 것으로 저만의 혼란스러움을 끝냈다.
* * * * *
성규가 저의 손에 들린 작은 화분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뭔지 너도 모른다고? 성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불퉁스러운 목소리를 뱉었다. 꽃을 사 놓고도, 자기가 뭔 꽃을 샀는지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냐. 성규가 한심스럽다는 얼굴을 한 채 우현을 돌아보았다.
처음으로 우현의 집에 발을 들여놓은 날이었다. 난데없이 제 집에 가보지 않겠냐며 제안해오는 우현에 고개를 끄덕였던 성규는 우현의 정신상태가 진지하게 의심스러워져 낯빛을 굳혔다. 이렇게 멀쩡한 집을 놔두고 왜 옥탑방에 살다시피 찾아오는건지. 심지어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온기마저 사라진 우현의 집 안에 들어선 성규가 착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모든 게 멀쩡한 우현의 원룸은 옥탑방에 비교하기도 미안할만큼 좋은 곳이었다. 성규는 가만히 소파에 앉아보며 호들갑스러운 우현의 동선을 눈으로 좇고만 있었다. 이것도 가져가고, 저것도 가져가고. 그저 옥탑방으로 새롭게 가지고 갈 물건들만 챙기기 바쁜 우현은 새삼스러운 성규의 반응 같은 것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우현은 확실히 제 집보다 옥탑방을 좋아하는 듯 했다. 다 챙겼으니 이제 가자는 우현은 조금만 더 있다 가자며 거실에 퍼질러지는 성규의 팔을 끌어다 일으켰다. 바닥 차가우니까 눕지 마. 짐짓 무섭게 인상을 찡그린 우현은 제 멋대로 성규의 몸을 원룸 밖으로 밀어냈다. 어차피 공기도 차가운데 뭐하러 더 있어? 우현은 제 집임에도 불구하고 차가운 현관을 빨리 벗어나고 싶어하는 듯 했으니까.
몇시간 후, 우현의 집을 나서며 성규에 손에 들린 것은 손바닥만한 화분이었다. 지나가다가 사 본 거라며 성규의 품에 안기다시피 화분을 떠민 우현이 질리도록 웃어댔다. 도대체 뭐가 웃겨? 성규가 얼떨결에 화분을 받아들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어느새 밤이 되었음에도 날씨는 많이 시원해져 있었다. 이제는 그렇게 춥지 않음을 느끼며 기지개를 켠 성규가 제 손바닥 안에 들린 화분을 살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 게 이쁘기는 하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언덕 즈음에 다다라서야 앞서 걷던 걸음을 멈춘 성규는 제 옆에서 사라진 인기척에 몸을 돌려 우현을 확인했다. 어쩐지 이것저것 많이 챙긴다 싶더라니 양 손 가득 짐을 든 우현은 한참을 낑낑거리며 성규의 뒤를 따르고 있던 듯 했다. 성규가 안쓰러운 눈썹을 구겨 자리에 서서 우현을 기다렸다. 꽤 무겁기라도 한듯, 오만상을 찌푸리며 언덕을 오르던 우현은 성규의 얼굴을 확인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배시시한 웃음을 흘렸다.
"언제 멈추나 했다. 그래도 기다려주기는 하네?"
"무식하게 챙겨댈 때부터 알아봤다. 그 믹서기는 뭔데?"
"너 맛있는 거 만들어주려고. 아, 김성규."
실실 웃던 표정을 굳힌 우현이 성규의 이름을 부르며 손짓했다. 왜? 무덤덤한 표정을 하고서는, 우현의 손짓에 따라 몸을 비킨 성규가 제 자리에 섰던 몸을 옆으로 두 발자국 즈음 물러났다. 차가 오나 싶어 둘러본 앞 쪽은 차는 커녕 쥐죽은 듯이 고요한 침묵만을 남기고 있었다. 성규가 귀찮은 기색을 띠며 말했다. 이 개새가, 귀찮게 자꾸 명령하고 난리야. 몸을 비켜선 성규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우현이 양 팔 가득한 짐을 끌어올려 다시 웃었다. 잘했어. 김성규.
"뭘 잘해?"
사실은 별로 궁금하지도 않지만, 괜히 물은 성규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에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우현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너 어두운 거 싫어하잖아."
"근데?"
"골목 있으니까 조심하라고."
우현이 턱 끝으로 오른편에 있는 좁다란 골목을 가리켰다. 아까까지만 해도 성규가 서 있었던 곳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골목이었다. 우현이 이번에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혼잣말을 뱉었다. 멀쩡한 가로등을 놔두고 왜 어두운 데로 가. 이렇게 돌아가면 되지. 우현이 제 말에 멀뚱히 선 성규에게 얼굴을 가까이 하고 다시금 물었다. 그치? 어두운 골목길과는 대조적으로, 꽤나 밝은 톤의 목소리를 낸 우현이 오늘따라 붕붕 뜨는 기분에 발걸음을 빨리했다.
이번에는 우현보다 살짝이 뒤쳐진 성규의 걸음이 느려졌다. 우현이 가리킨 골목으로 무심코 시선을 돌리자마자 웃음이 터졌다기보다는 알 수 없는 미묘함이 찾아들었다는 게 사실이었다. 얼마 전까지도 명수에게 독한 말을 뱉었던 골목. 성규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감겼다 떠졌다.
미안하지 않아. 성규가 화분을 든 손에 힘을 주고나서 스스로에게 건 주문이었다. 성규는 제 머리 위를 밝히고 있는 노란 가로등빛을 올려다보다가 걸음을 빨리 했다. 골목의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떨쳐보려 애써 고개를 저은 성규가 들떠 보이는 우현의 뒷모습과 보폭을 좁혔다.
골목은 둘째 치고, 우현의 말을 생각해보자면 사실 조금은 기특한 게 맞다. 따지고보면 세심하게 저를 챙겨 준 것이 맞으니까. 성규가 품에 안은 화분을 고쳐 잡고 입술을 비죽였다. 어두운 거 싫어하는 거 안다는 새끼가 맨날, 화장실 불은 끄고 지랄이긴 하지만. 성규가 제 옆을 나란히 걷고 있는 우현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토닥였다. 기특한 생각 할 줄도 아네. 우현은 그런 성규의 목소리를 듣다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것이 천사의 딴에는 가장 대단한 칭찬임을 이제는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도착한 옥탑방 앞에는 낯익은 손님들이 이미 대기중에 있었다. 세개의 실루엣은 대문 앞에 주루룩 앉아있다가 우현과 성규의 인기척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왜 이제 와! 결국엔 그 중 하나가 벌떡 일어나 둘을 향해 소리쳤다. 그것은 분명 이호원일 것이라고 생각한 우현이 여전히 달갑지 않은 표정을 드러내 불청객들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려보였다. 저 새끼들은 집에 갈 생각도 없나봐. 가볍게 툴툴댄 우현은 고개를 돌려 저와는 반대로 밝아진 성규의 표정을 지켜보았다.
"안녕하세요. 소세지 형아."
어딘가 모르게 삐딱하게 저를 노려보고 있더라니, 소세지를 들먹이며 고개를 까딱한 성열에 픽 웃은 성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기억이 났나보지?
"안녕. 전봇대."
성규가 답지않게 해사하게 웃어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악연 투성이. 성열의 머릿속은 아직까지도 그렇게 불편한 생각으로만 가득차 있었다. 여차 저차 해서 따라오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도 이 집은 달갑지 않기는 마찬가지. 저 소세지의 이름은 분명 김성규라고 했다. 성열은 머릿속에서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그 날 밤의 일들을 생각해보다가 입술을 물었다. 남자의 혼잣말 중에, 스치듯이 귓가에 들렸던 이름은 김성규. 어쩐지 마음속에 걸려오는 그 이름에 불편해진 마음으로 성규와 마주한 성열은 퉁명스럽게 뒤 쪽으로 걸음을 물렀다.
"형, 책임져요."
"내가 뭘?"
"있어요, 그런게. 형 때문에 진짜."
성규를 마주하자마자 불만스러움을 토로한 것은 호원이었다. 물론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뭔가가 미묘하게, 그러니까. 우물쭈물 거리면서도 제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린 호원은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아 발을 동동 굴렀다. 성규가 그런 호원을 쳐다보다가 어깨를 으쓱 했다. 뭔지 설명도 못하면서 다짜고짜 책임을 지라니. 살짝이 웃어보인 성규는 호원과 동우, 성열을 찬찬히 둘러보다가 먼저 계단을 올랐다. 그 다음은 우현이 뒤따랐고, 다음은 혼란스러움에 머리를 쥐어뜯고있는 호원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걸음을 옮긴 동우. 마지막은 저에게 '올라와!'라는 말만을 남긴 채 벌떡 일어선 호원이었다.
호원과 동우는 이 집에 익숙한듯 보였다. 성열은 제법 왁자지껄한 조우를 끝낸 후에 계단을 오르는 네 사람을 쳐다보다가 맨바닥에 발을 굴렀다. 그러니까 지금, 나만 빼고 여기서 잘들 놀고 계셨다 이거지? 어딘가 모르게 울컥 치미는 마음에 아랫입술을 깨문 성열이 쿵쾅거리며 계단을 따라 올랐다.
전깃줄이 유유히 흔들릴 만큼 잔잔한 밤이었다. 성규가 저의 뒤를 따라 줄줄이 계단을 오르고 있는 네 명을 쳐다보다가 살짝이 웃었다. 예전에는 이렇게 기분이 좋은 날이면, 담배라도 한 대 태웠던 습관을 이제는 바꾸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마음 한 켠은 가득차 오는 기분이라는 것을 느끼며.
뜨아 |
세륜 분량조절.. ㅎㅏ..앞은 어두운데 뒤는 밝아^^;;;내가 이럴줄 알았떠..브금 매치가 안되죠? 미안 내가 뵵신이라 그래요 사실 좀 급하게 썼어요 티나요??????^^^..밤새 놀다가 들어와보니 내일부터가 설이네? 바쁜데..업로드 못하면 일주일 넘게 안하는고네?해서 급하게 썼ㅇㅇ어요 오늘따라 문체가 이상해도 봐주세요 잉(--)(__) 은근슬쩍 세배한거 아니에요 는 무슨 다들 메리설!~.~ 삉삉 p.s 그러고보니 15화네요. 15화는 벌써 사인온 마지막화ㅋ.ㅋ 파라디 kb가 꽤 많이 쌓였어요. 엔터 없이 242kb라는게 트루?=.=!? 물론 아직 갈길이 멀지만요 헣하 원고는 안쓰고 연재만 바쁘게 하는 걸 들킨다면 혼나겠지..그래서 사실 좀 이제 연재가 늦어질수도 있어요ㅠ,ㅜ 나는 못났어 ..게으름뱅이ㅇ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