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5 〈설렘 주의보>
20.
물을 마실 때조차 함께해야 하는 즐거움을 아는가. 번쩍 손을 들면 같이 딸려오는 분홍 가지에 실없이 웃는다. 나란히 소파에 앉아 목을 축이던 그가 혀로 입술을 적신다. 긴장할 때 나오는 습관이었다. 배고프면 라면 끓여주고. 정적을 참지 못한 그가 부러 말을 건다. 일정한 속도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이 말인즉슨, 나 또한 졸졸 딸려갔다는 뜻이었다.
그는 물을 끓이고 스프와 함께 라면을 넣고 달걀을 깨는 그 순간까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냄비만 바라봤다. 절대 옆을 돌아보는 법이 없다. 거실에 앉아 한입씩 나눠 먹는 순간마저 긴장감이 돌았다. 그는 오른쪽 손목이 묶인 터라 먹을 때마다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 “옷 불편하지 않아?”
- “괜찮아. 어차피 갈아입지도 못하는데.”
- “벗어도 돼.”
- “……뭘 벗어?”
Warning! Warning! 사이렌이 울린다. 그는 자극적인 말을 뱉고도 아무렇지 않게 면발을 흡입했다. 한 손으로 슬그머니 엑스 자를 만드는 내가 무한해질 만큼, 그는 주머니에서 그토록 찾던 콩알만 한 키를 꺼내 구멍을 맞췄다. 워낙 상황 파악이 늦는 성격이라 약간의 버퍼링이 걸린다. 오물거리는 그의 두 볼이 귀엽다 생각했을 때, 일순간 자유가 주어지는 손목에 확장된 동공이 집 나간 어이를 찾았다.
- “……키 잃어버린 거 아니었어?”
- “김민규가 두 개 주던데.”
- “그럼 진작에 풀었어야지!”
- “아니, 네가 묶여 있는 걸 좋아하는 것 같길래.”
아까 들어오면서도 계속 이렇게 있고 싶다며. 그는 소파 위에 수갑을 던진 채 물을 들이켰다. 평생 붙어 있자 말은 한 건 사실이었으나, 없는 척 속이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뻔히 있는 걸 알면서도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 잠깐만. 떠오른다 떠올라.
- “아……. 나랑 같이 있고 싶어서?”
- “…….”
- “그래서 밖에서 풀 수도 있었던 걸 지금 풀었구나.”
이제 열 두시 넘어서 긱사도 못 들어가는데 어쩐담. 승관을 본보기로 어색한 몸짓을 그린다. 아이쿠, 이를 어떡한담. 말아 쥔 주먹이 이마를 콩-, 찍는다. 귓불을 잡고 머뭇거리던 그가 서랍에서 티셔츠를 꺼내 입을 오물거렸다. 이제 옷 갈아입어. 벗어도 되잖아. 이제야 뜻이 척척 맞는다.
- “많이 크다.”
- “어깨만 그렇지 나머지는 다 맞아.”
마주 보고 칫솔질을 하는 것도 꿈만 같다. 내 입가에 잔뜩 묻은 거품을 엄지로 닦아내며 웃는 사람마저 허상 같아 몇 번이고 손을 잡고 현실을 깨웠다. 웅웅웅-, 해야 돼. 입안에 물을 담고 볼을 움직이라는 말이었다. 그는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털어내고 말끔한 얼굴을 확인했다. 스무 해를 넘겨도 솜털이 존재하는 사람이었다.
볼에 뾰짝거리는 솜털을 따라 얼굴선을 훑는다. 지훈아, 너 아직도 애기다 그치. 귓바퀴가 붉어지건 말건 세상에 신기함은 여기 다 모여 있는 듯 오목조목한 얼굴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러다 언뜻 마주친 눈에 시선을 떼지 못한다.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 “되게 가깝다.”
- “…….”
- “사탕 냄새나.”
……진정해야 해. 여기서 무너지면 안 돼. 지난 이십 년간 다부지게 모았던 드래곤 볼로 소원을 빌어 볼 차례였다. 제발 프로 인내심을 갖게 해주세요. 저는 순수합니다. 숨만 쉬어도 귀여운 이지훈을 지켜주세요. 홀로 고독한 싸움을 시작한 나는 현재의 분위기를 타파해야만 했다. 수건으로 내 목덜미를 끌어 거리를 좁히는 소년을 저지해야만 했다. 굴러가는 뇌를 쓸 시간이었다.
- “너는 침대에서 자.”
- “……갑자기 뭐를.”
- “나는 온돌이 좋아서.”
삐걱거리는 관절이 침대 밑에 앉아 이부자리를 깐다. 지훈아, 오늘도 굿나잇. 들어 먹지도 않는 밤인사에, 그는 가까이 다가와 열을 쟀다. 어디 또 아픈 건가. 단순히 열을 재는 손에도 부르르 떠는 눈꺼풀이 밉다. 그는 담요 끝을 잡은 앙증맞은 두 주먹을 콕콕 찌르며 생사 확인을 시도했다.
- “진짜 자?”
- “…….”
- “……뭐 이렇게 빨리 자.”
좁은 탁자 위 조명만이 은은하게 비추는 새벽, 침대 속으로 들어가 잠을 청하는 그의 숨소리를 듣는다. 감겨오는 눈꺼풀에 이불을 뒤척이는 소리도 희미한 배경이 된다. 어느덧 저리는 허리를 두드리며 옆으로 돌아누웠을 때, 하얀 베갯잇에 얼굴을 묻고 곤히 눈을 감은 그가 있었다.
- “지훈아, 자?”
- “……응.”
- “자는데 어떻게 대답해.”
뽀얀 얼굴에 잔잔한 새벽이 온다. 웅얼거리는 음성으로 짧게 답하던 그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천천히 두 눈을 깜빡인다. 잠이 안 와. 뻔한 거짓말과 함께 허리를 감는다. 편한 침대 놔두고 굳이 여기서 잠을 청하는 이유를 묻자, 그가 이번엔 내 베갯잇에 얼굴을 묻는다. 딱 반 뼘이었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 그 거리, 짧은 숨소리마저 가깝다.
- “네가 여기 있는데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 “…….”
- “따뜻하다.”
지그시 눈을 감고 고백하는 입술에 체온을 나눈다. 감쳐 무는 입술 사이 짙은 숨이 퍼진다. 잠결에도 곧게 뻗은 콧대를 피해 얼굴을 들어 입맞춤하는 그가 귀여워 배시시 웃는다. 담요 안으로 들어온 그가 입술과 뺨, 코끝에 가벼운 흔적을 남긴다.
김여주, 유혹하지 마. 역지사지를 모르는 소년은 품속에 안기듯 들어와 고른 숨을 뱉었다. ‘김수한무와 거북이’는 날 위한 노래였을까.
- “너 말고 관심 없어.”
- “…….”
- “이미 알고 있잖아.”
어제 아침 일기 예보는 바람을 조심하라 주의를 뒀다. 아무래도 이지훈 전선에서 불어오는 강풍을 조심하라는 의미였음이라.
느닷없이 불어닥친 설렘 주의보가 내 전선을 흔든다.
지훈이도 사탕 냄새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