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사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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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혹 동 화 ; 왕좌의 게임
w. 영애
Ep. 07
< 연극이 끝나고 난 뒤 >
#1
"일어나셨습니까?"
"......"
"오늘부터 공주님을 모실 린이라고 합니다."
눈을 떴을 때, 뺨이 발그레한 소녀 하나가 수줍게 웃으며 ○○에게 본인을 소개했다.
이 세계에서는 왕족만 성과 이름을 얻을 수 있었기에 하인들은 성을 갖지 못하고, 한 글자로 된 이름만을 가질 수 있었다.
린이라고 자기를 소개한 아이가 커튼을 활짝 열어 방에 햇빛을 들였다.
"..날 누가 이곳으로 옮겼어?"
"아~새벽에 ㅍ...아, 아니 그러니까..."
"아니야, 말 안 해도 돼."
종인이었다. 사실 ○○은 알고 있었다. 간밤에 한숨도 자지 못했다.
종인의 '미안해' 한 마디가 계속해서 귓전을 때렸고, 그의 다정한 손길이 어디선가 맴도는 것 같아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그가 시녀에게 ○○을 부탁하고 나갔을 때도, 아무래도 안 되겠다며 다시 들어와 ○○을 들어 이 침대로 옮겼을 때도,
그녀는 자는 척, 눈을 감고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만 확인하고 싶었다. 그녀가 눈으로는 차마 확인하지 못한 그 상황을.
이제 확실해졌다.
종인이 그가 만든 연극의 중앙에서 엄청난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움직이실 수 있으세요? 폐하께서 아침은 내려와서 드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건 폐하께서 입으라고 보내주신 드레스들이에요!"
"움직일 수 있어. 옷 입는 것 좀 도와줄래?"
린은 공주의 시중은 처음인지 모든게 신기하고 새롭다는듯 눈을 반짝이며 ○○의 시중을 들었다.
때가 타지 않은 순수한 아이였다. ○○은 알 수 있었다.
왜 종인이 린을 그녀의 옆에 붙였는지.
그는 그녀가 버텨나갈 수 있는 환경을 하나씩 만들어주고 있었다.
#2
종인은 평소처럼 넓은 식탁에 앉아 스쿠프를 틀어놓고 게임의 진행상황을 보고 있었다.
아직 제 5국의 움직임은 없었다. 아직 ○○을 국내에서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열심히 머릿 속으로 전략을 짜고 있을 때, ○○이 식탁으로 걸어왔다.
○○은 그가 보낸 드레스를 입고, 그녀의 길고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예쁘게 땋아 올렸다.
"....예쁘네."
종인의 나즈막한 한 마디에 ○○의 심장이 뛰었다. 이상했다.
그의 다정함과 부드러움이 간밤에 그녀를 녹여놓은 것일까.
○○ 스스로도 크게 놀랐다.
그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은 확신했지만 그간의 경험상 그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종인에게 아무런 티를 내지 않고, 성의 분위기를 살펴보기로 했다.
세훈과 준면의 성을 보면서 성의 분위기는 전적으로 그 주인의 것을 따라간다는 것을 느낀 ○○이었다.
진정 종인이 마음 따뜻한 사람이라면 성의 분위기와 사람들에게서 그 온기가 느껴질 것이었다.
"그 지하실에 계속 재워두면 그대 피부가 상할 것 같아서 그대를 방으로 옮겼어. 어때?"
"......"
"나랑 말하기 싫어?"
"......"
"재미없는데 그러면. 난 말 잘하는 것도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서 말이야.
그리고 좀 치사한 말이긴 한데, 그대가 내 성에서 편하게 머무르면 나한테 맞추는 게 여러모로 좋지 않겠어?"
".....방은 감사합니다. 따뜻하게 보낼 수 있었어요."
"말투도 좀 누그러뜨리는 게 어때. 꼭 80먹은 대신들이랑 대작하고 있는 느낌이잖아, 그대 그 말투."
"...고쳐나갈게요."
"훨씬 예쁘네."
아침의 종인은 어제 ○○에게 수면제를 먹이던 그 모습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간밤에 그녀를 녹였던 그 사내와 동일인물이 아닌 것처럼.
"아, 제 5국은 아직 걱정 안 해도 돼. 아직은 그대를 국내에서 찾고 있는 모양이야."
제 5국이라는 단어에 ○○의 손에 자동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종인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대체 지난 시간 어떤 수모를 겪었길래 저리 반응을 하는 것일지 궁금하면서도 ○○이 걱정됐다.
꽤나 큰 트라우마가 생긴 모양이었다.
"아침 잘 먹었어요. 저는 이만."
○○은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입만 적시고 식당에서 벗어났다.
제대로 된 종인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녀 역시 연극의 주인공이 될 필요가 있었다.
종인이 지난 밤 어떤 말을 했는지 새까맣게 모르는 척을 해야했기에 그녀는 여전히 종인에게 화가 나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의 권력에는 복종하지만, '김종인' 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실망을 감추지 않는.
종인은 ○○이 완전히 모습을 감출 때까지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는 다시 스쿠프를 틀어 평소와 같이 아침을 보내려 했다.
"폐하."
"무슨 일이야."
"....저는 걱정됩니다."
"....휼아."
"폐하와 함께 저주에 걸려 70년을 함께 잠에 빠졌다 깨어난 접니다.
폐하의 눈빛 하나만으로도 폐하께서 어떤 감정을 가지셨는지 느낍니다. 그런데 그 공주를 바라보던 폐하의 눈빛..."
"쉿. 네가 걱정하는 그런 일 없을거야. 국경지대에 있는 사람들 다 피신시켰어?"
"예. 새벽에 모두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고, 교전이 있었던 것처럼 마을에 불을 질러 흔적을 없앴습니다."
"잘했네."
"......폐하, 전 폐하께서 더 이상 상처 받는 일이..."
"조용히."
휼은 단호한 종인의 말에 결국 입을 다물었다.
종인의 유년기 그리고 저주를 받았던 그 시기를 지나 지금까지 함께 하고 있는 그는 종인이 걱정되었다.
○○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종인이 애지중지하는 그 액자 속의 여인을 보던 그 때의 눈빛과 너무나도 비슷했다.
아니, 오히려 더 깊었다.
#3
"린아."
"예? 무슨 일이셔요?"
"나랑 잠깐만 옷 좀 바꿔입자."
"예에에에에에? 아,아니되옵니다! 어찌 저같이 천한 사람이 입는 옷을...어,어찌..."
"내 부탁이야. 응? 딱 한 번만. 이 방에서 안 나가면 아무도 모를거야. 잠깐이면 돼."
"아, 아니됩니다. 분명 다 알아 볼 거에요!"
"왜? 성에 사람들 많잖아. 전혀 모를걸?"
"아니에요! 저희 성 사람들끼리 정말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서로를 다 알아서 뒷모습만 보고도 누가 누군지 아는걸요! 절대절대 안 돼요 공주님!"
○○은 종인의 성격이라면, ○○ 앞에서는 모두 차갑게 굴라고 명령을 내려도 이상할 것이 없을 것 같아 직접 성의 사람이 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건넨 말이었는데, 너무 예상 밖의 답이 나와 ○○도 놀랐다.
세훈의 성은 적막 그 자체였다. 모두가 긴장해 있었고, 모두가 맡은 일만 했다.
서로를 향한 살가운 한 마디도 없었고, 눈치 보기에만 급급했다. 서로를 알아볼 리는 만무했다.
그녀가 살던 왕국처럼 규모가 작은 것도 아닌 제 2국의 성 안에서,
성 사람들끼리 서로를 다 알아본다는 건 굉장한 일이었다.
"혹시...답답하셔요?"
"응? 아...응. 조금."
"그럼 이 앞에 정원에 나가보실래요? 이 성의 정원 엄청 유명해요, 공주님!"
○○은 잠시 고민하다 정원이면 나가면서 성의 분위기를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눈에 띄지 않는 흰색 드레스로 갈아입고 정원으로 나섰다.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알고자 하는 건 자연스러운 평소의 분위기였으니까.
#4
성 사람들은 모두 웃고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서 얘기도 많이 했고, 즐거워 보였다.
왕좌의 게임이 돌아가는 상황을 알리는 스쿠프를 보면서 혀를 차기도 하고, 걱정이 많아 보이기도 했지만 그들은 이내 평온을 되찾았다.
문득 생각해보니 제 2국은 단 한 번도 먼저 다른 나라를 친 적이 없었다.
그것이 전략인지 무엇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종인은 세훈처럼 피를 위해 교전을 벌이지는 않는 것 같았다.
"공주님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셔요! 제가 방에 장식할 꽃들 좀 꺾어 올게요!"
"알겠어. 여기 주변 좀 둘러보고 있을게."
"멀리 가시면 안 돼요!"
린을 보내고 ○○은 정원을 둘러보았다. 특이하게도 성 안에 숲이 있었다.
아주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작지도 않았다. 묘한 호기심이 생겨 ○○은 숲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만에 듣는 새소리인지, 얼마만에 맡는 풀 냄새인지,
입구에서부터 느낄 수 있는 자연의 포근함이 ○○의 긴장감을 풀어주었다.
조금 거닐다 너무 깊게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에 뒤를 돌아 나가려는데 어디서 사람의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그녀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이런. 괜찮니?'
남자의 목소리였다. ○○이 있는 곳 근처인 것 같아 두리번거리며 소리의 근원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희미하게 그 형상이 드러났다. ○○은 굵은 나무기둥 뒤에 숨어 그 남자를 바라봤다.
그 실루엣이 묘하게 낯익어 유심히 살펴보니, 종인이었다.
"많이 아프지? 조금만 참아."
종인의 앞에는 다리에 화살을 맞은 사슴 한 마리가 누워 있었다.
그는 사슴을 살살 달래면서 사슴의 다리에 박혀 있는 화살을 뽑아 냈다.
그 아픔에 사슴이 격렬하게 몸을 뒤틀었고, 종인은 그런 사슴을 진정시켰다.
"미안,미안. 조금만 조금만 참자. 응?"
하얀 면으로 된 셔츠와 승마를 할 때 입는 바지를 입고 있던 그는 셔츠의 끝자락을 이로 찢어 사슴의 다리에 묶어 주었다.
"이곳에서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네..성에서 약초를..."
종인이 약초를 가져오기 위해 일어났을 때, 나무기둥 뒤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던 ○○과 눈이 마주쳤다.
종인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잠깐이었다.
그는 금새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는지 생각했다.
그런 그를 보면서 ○○은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가 어젯밤 들은 그 한 마디와, 그의 따뜻한 손길들이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되어서.
혈혈단신으로 끌려와 그 어디에도 의지하지 못한 채 비틀대던 그녀에게 이제 버팀목이 될만한 존재를 찾은 것 같아서.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온거야 지금."
"......."
"말했잖아. 난 예쁜..."
"버티라며."
".....뭐?"
"나한테 버티라고 그랬잖아요. 제발, 제발 끝까지 버텨달라고."
"......."
"나 어제 한 숨도 안 잤어요. 폐하께서 어젯밤에 한 그 얘기들 다 들었어요."
"......."
"이 대륙에 온 이후로 마음이 너무 많이 다쳐서, 그래서 처음에는 믿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나에게 수면제를 먹이던 당신의 모습과 어젯밤 내 눈물을 훔쳐주던 당신의 모습이 너무 달라서."
"......꿈꾼 것 같은데, 이제 깨."
종인은 흔들리는 눈빛을 숨기려고 ○○의 옆을 빠르게 지나쳤다. 그런데 ○○이 그의 손목을 덜컥 잡았다.
"..나 내치지...말아요...내 앞에서까지 숨기지 말아요.."
종인을 잡은 ○○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버텨...달라고 했잖아요...나 지금이 한계에요. 이곳에 온 후에 마음이 너무 다치고 할퀴어져서...너덜너덜해져서...더 이상은...더 이상은 도저히...버텨낼 자신이..."
○○의 손이 너무 떨려 더 이상 종인의 손목을 쥘 수 없게 되었을 때,
종인이 그녀의 팔을 잡아다녀 그녀를 그의 품 속에 안았다.
"....이제 괜찮아."
종인은 ○○을 품에 안고 괜찮다며 그녀의 등을 쓸어주었다.
종인이 그녀를 처음 본 그 순간부터,
뛰는 심장을 애써 부인하면서 그녀는 게임에서 이겨 그의 숨겨진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구가 될 여인일뿐이라며 그녀를 밀어낸 그 때부터,
그의 손으로 죽인 그 여인에 대한 죄책감에 지금까지 숨겨둔 그 감정이 결국 종인의 밖으로 터져나왔다.
그도 더 이상 버틸 자신이 없었다.
사랑하는 ○○을 괴롭혀야 하는 현실과, 그의 진심을 그녀에게 전달할 수 없다는 그의 연극의 한계를 버텨낼 수 없었다.
어마어마하게 우울하네요..
글을 쓰는 일이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저인데
글 쓰는 일까지 무의미하게 느껴질만큼 힘듭니다.
오늘은 사담 줄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